IMF때 부도로 귀농, 23년간 전국 누비며 농업경영인회 활동
[달성을 지킨 사람들] 전 농업경영인 대구시연합회 정성종 회장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태어난 약 730만 명의 출생자들을 우리는 ‘베이비붐 세대’라고 부른다. 6·25전쟁 직후 물자도 귀했고, 서로 경쟁이 치열해 삶 자체가 전쟁이었던 그런 세대였다.
이 들은 생애 기간인 1970~80년대 한국의 고속성장을 이끌었고, 이런 흘린 땀에 대한 보상으로 자가용, 아파트, 해외여행 등 문화를 누리기도 했다.
이번에 소개할 정성종 전(前) 한국농업경영인 대구시연합회장은 1960년에 태어나 베이비붐 세대의 풍파를 온몸으로 겪었다. 실업계고를 나와 일찍 회사 생활, 개인사업을 반복하고 한때 송전 철탑에서 고압선 정비·수리를 하기도 했다. 1997년에 찾아온 IMF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밤잠 안자며 일궈 놓았던 사업체가 부도를 맞았던 것이다.
삶의 맨 밑바닥에서 그가 선택한 건 귀농이었다. 달성군 하빈이 고향인 그는 참외농사로 인생 2모작을 시작했다. 젊은 나이에 귀농해 이런저런 농업·농민단체에서 일하다 보니 현장에서 많은 불합리한 일들과 부딪치게 되었다. 직선적인 성격인 그는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맨 앞에 섰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지역 농업·농민단체 리더가 되었다.
경리사원, 자영업자, 철탑 고압선 노동자에서 다시 농업·농민운동 지도자로 변신한 그의 이력(履歷)속으로 들어가 보자.
#. 지역의 한 상고를 졸업한 정 회장의 첫 직장은 중소기업의 경리직이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내딛은 첫발 이었다. 굴곡 많은 인생 시작을 알리는 전조였을까, 이 회사는 얼마안가 도산을 하고 말았다.
첫 매듭에서 꼬여버린 정 회장이 두 번째 직장으로 찾아간 곳은 고압선 철탑 설비회사였다. 이름하여 ‘송전(送電) 전기원’. 그는 80~160m 상공, 강풍과 뙤약볕 속에서 전선을 수리, 청소하고 애자를 연결하는 일을 했다.
전선엔 345kv의 특고압이 흐르기 때문에 모든 복장은 도전복(導電服)이 기본이고 한여름에도 안전화, 안전모, 허리띠부터 추락방지 로프까지 중무장을 해야 했다. 20cm 발판볼트를 딛고 매일 100여m 상공에서 곡예하 듯 5년여를 일하던 사이 그는 어느덧 결혼적령기를 맞았다.
보수도 괜찮았고 약간의 스릴도 있어 적성에 맞았지만 평생 직업은 아니라는 생각에 전기원을 그만두었다. 마침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도 꾸렸다.
결혼 후 다시 재기에 나선 정 회장은 화장품 대리점을 시작했다. 올림픽 특수와 3저(저금리, 저유가, 저달러) 호황을 맞아 사업은 잘 풀렸다.
‘이제 나도 내 집 마련, 자가용 시대를 맞으려나’ 기대에 들떠 있던 정 회장의 소박한 꿈을 다시 한 번 좌절되고 말았다. 이번엔 1997년 IMF 사태였다. 받을 돈을 떼이고, 당좌수표, 가계수표로 돌려막기를 하다 결국은 큰 빛을 지고 말았다.
#. 빚더미에 몰려 좌절하고 있을 때 그를 말없이 받아 준 건 고향이었다. 1998년도 달성군 하빈에 정착한 정 회장은 부모님의 전답을 일구며 참외 농사를 시작했다.
귀농 초기 무척 애를 먹었다. 농사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알려 주는 사람도 없으니 매사가 서투르고 주먹구구였다. 더욱이 첫 해 임대로 시작한 참외 하우스가 그해 폭설이 내려 주저앉고 말았다. 또 한 번 큰 손실을 봤지만 호된 신고식 한번 치른 셈 치자며 대범하게 넘겼다.
서투르게 내딛은 귀농 첫걸음, 날씨도 작황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거기에 영농대출, 농자재·농기구 도입에 신 농법 교육에 귀농 초보자를 위한 각종 제도는 까다롭고 번거로웠다.
영농에 필요한 많은 제도, 법들이 있었고 정 회장은 이 과정에서 지자체, 농협 등 농민단체들과 관계를 맺어야했다. 모두 농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었지만, 한편으로 이들의 관료주의나 현실을 외면한 탁상행정 때문에 마찰을 빚었다.
비판적인 그의 성격은 이런 부조리 해결을 위해 나서게 되었는데 ‘이 일’은 향후 그가 농업·농민단체 지도자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1999년도 후계농업경영인에 선정된 그는 이듬해에 달성군농업경영인회 사업부회장에 선출되었다. 무보수에 잡무, 고역만 따르는 자리였지만 어쨌든 이일로 그는 본격 농업·농민운동의 첫 발을 내딛었다.
농업경인인회는 각종 영농 예산 확보와 판로 확대를 위해 각종 사업을 벌이는데 사업 부회장은 이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였다.
필자는 당시 달성군에서 기획감사실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정 회장과 인연이 되어 몇 년 동안 업무적으로 만났다. 정 회장은 당시 수시로 달성군을 찾아와 농업인 예산지원사업과 경영인들의 애로 해결을 위해 많은 협조를 요청해왔다.
당시 정 회장은 ‘조합원 자격’을 놓고 지자체, 농업단체와 크게 마찰을 빚었다. 1990년대 조합원 중 상당수가 직접 경작을 하지 않으면서 조합원으로 등재돼 면세유, 대출 등에서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정 회장은 이들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경작자, 현지 농민 위주로 조합원 제도가 운영되는 시스템을 강조했다. 농업예산을 많이 끌어와 관정(管井), 수리시설을 대폭 확충했고 벌 수정 등 새로운 사업도 많이 도입했다.
#. 달성군 농민단체에서 벌였던 사업들이 많은 성과로 이어지고 지역 농민단체에서 그의 존재감이 부각되며 정 회장은 드디어 대구시로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2007년 정 회장은 대구시영농인회 정책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정책부회장은 영농인회에서 가장 강성 목소리를 내는 자리여서 한편으로 부담스러웠지만, 지역에서 자신에게 거는 기대도 있었기에 기꺼이 이 직책을 맡았다.
활동 반경이 광역시 단위로 넓어지면서 정 회장이 대구시, 중앙회, 농협 쪽에 내는 농민·농업정책의 목소리도 커지고, 주장에 힘이 실렸다.
농업·농민단체에서 주목을 받다보니 정 회장은 지역에서 대구시연합회장 출마 권유를 받게 되었다. 이 자리 역시 ‘권리’는 없고 ‘의무’만 강요되는 자리였지만 기꺼이 이 짐을 지기로 했다.
후계농업경영인으로 시작한 그의 농민단체 활동은 2015년 농업경영인 대구시연합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정점을 찍게 되었다. 그 자리는 그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시대가, 사회가 그를 그 자리로 불러낸 것이기에 남다른 소명의식으로 매사에 임했다.
농업·농민단체 광역 수장(首長)이 되면서 그의 행동반경은 이제 전국 단위로 넓어졌다. 매월 서울 농업경영인 중앙회에서 열리는 이사회에 참가하며 정부의 농업정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정책 결정에도 참여했다.
정 회장 체제 후 정부비판, 개혁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중앙회와 연대해 정부의 농정 공약 비판, 수매가 인상 등 농민 이익과 직결된 목소리를 높이고, 대북 쌀지원 확대 같은 정치적인 목소리도 적극적으로 냈다. 가톨릭농민회나 전국농민회처럼 정치적 구호를 외치지는 않더라도 농촌·농민들의 당면한 고통에 대해서는 실상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 2015~2019년 재임기간동안 정 회장은 대구시, 달성군의 농업 유통 발전을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부임 초기 그는 지역 유통센터 개혁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지역의 유통센터들이 산지의 농민들이 땀 흘려 가꾼 농작물을 제값을 받게 하는 일에 너무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유통업자와 농민들 사이에 있는 유통센터가 당연히 농민들의 입장에 서야 함에도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못마땅했다.
수차례 관계기관에 건의, 진정을 하고 필요에 따라 집회의 및 실력 행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재임 중 정치권에도 광폭행보를 보였다. 광역단체장 선거 땐 시장 후보들을 불러 농민들의 고충을 알리고 농업 정책을 공약에 포함시켰다.
당시 대구시연합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과 수시로 정책토론회를 벌였는데 그 당시 권영진 대구시장, 김부겸 총리, 홍희락 부시장 등을 수시로 내빈으로 초대해 이들에게 지역 농업단체 현안을 소개하고 동의를 이끌어냈다.
#. 기초단체, 광역단체에서 중앙무대까지 넘나들던 정 회장의 농업·농민단체 활동은 2019년 5대회장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지방과 서울 무대를 넘나들며 많은 농정, 농업발전에 적잖은 업적을 남겼다.
이제 자연인으로 돌아온 정 회장은 이제 부인과 하빈에서 다시 참외 농사에 전념하고 있다. 그동안 자신이 농업·농민단체 활동을 하느라 농사일을 도맡아온 부인에게 진 빚을 갚고 있는 중이다.
지금도 잘못된 정부의 농업 정책이나 지역 농업 기관의 불합리한 처사를 보면 불끈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이제 평범한 ‘을’ 로 돌아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함 한번 치고 멋쩍게 사무실을 빠져 나오는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