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란 비극적인 것이다
베냐민에게 대도시는 일종의 폐허(ruine)이다. 하지만 그러한 폐허는 단순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침몰한 해적선의 폐허가 종말과 비극이 아닌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하듯이 과거의 유산을 파편화한 대도시는 그 흔적을 통하여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한다. 상상력이란 단편적인 것들을 나름대로 결합하여 그림을 그리는 데서 나오는 것이지 이미 총체적으로 갖추어진 대상을 인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거나 탄생하고 다시 사멸하여 흔적을 남기는 이러한 덧없는 과정과 그 폐허의 흔적이야말로 진리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베냐민은 진리를 ‘알레고리(allegory)’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흔히 베냐민의 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담고 있는 책으로 알려진 초기 저서 《독일 비애극의 원천》(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 1925)에서 그는 알레고리 개념을 상징(symbol) 개념과 대비하여 설명한다. 상징이란 뚜렷한 의미를 지닌 대상화이다. 가령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며 한복은 한국의 상징이다. 이에 반해서 알레고리는 상징과 달리 애초에 대상화할 수 없는 것을 대상화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역설적이다. 베냐민이 보기에 진리란 상징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역설적인 방식으로 알레고리화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황당한 말을 쉽게 풀어보자. 어떤 한 영웅이 저 너머 높은 얼음 산 동굴에 절세미인이 갇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무수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자신의 절친한 동료마저도 희생하여 이윽고 절세미인이 갇힌 동굴에 도달했다. 그런데 절세미인을 본 순간 그는 졸도할 지경에 이른다. 그녀는 자신이 본 최고의 추녀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비극일까 혹은 희극일까? 비극이기도하고 희극이기도 하다.
결과로 보자면 허무하지만 과정으로 보자면 숭고하기까지 하다. 삶과 죽음, 그리고 창조와 폐허가 이 이야기 속에 공존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이 이야기는 피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모순 자체를 이 이야기는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삶과 죽음의 알레고리이며 진리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베냐민은 이러한 알레고리의 구조를 독일의 바로크 비극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이 독일 바로크 비극의 특징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리스 비극(Tragödie)과 구별하기 위해서 ‘비애극(Trauerspiel, sad play)’이라고 부른다. 그가 비극과 비애극을 구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극은 그리스 비극에서 정형화된 것처럼 어떤 윤리적 교훈을 전제한다. 가령 근친상간이나 가족 간의 패륜을 저지를 경우 비극이 발생하는데, 여기에는 인간의 나쁜 마음을 견제하려는 계몽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말하자면 비극은 도덕의 상징인 것이다. 이에 반해서 독일 바로크 비애극은 매우 복잡한 특징을 보인다. 등장인물들의 일관성도 없으며 주인공은 우유부단하고 항상 혼란스럽다. 악과 선이 공존하며 때로는 악이 승리하기도 한다. 어쩌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햄릿》(Hamlet, 1601년경)도 비극이 아닌 비애극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독일의 바로크 비애극은 오늘날의 막장 드라마와도 비슷하다. 음모와 배신, 끊임없는 갈등, 등장인물의 양면성, 선과 악의 혼란스러움 등이 공존한다. 이런 점에서 독일 바로크 비애극은 통속적이거나 비윤리적인 것으로 무시되었다. 그러나 베냐민은 이러한 독일의 비애극 속에서 삶의 진정한 비(애)극을 발견한다. 삶에서 비극이란 방금 전 예를 든 절세미인을 향한 영웅의 이야기처럼 비극이자 동시에 희극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알레고리이다. 진리란 상징으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알레고리로서 파편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베냐민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파편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통하여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퍼즐 조각을 모으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리란 비극적인 것이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