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드라큘라, 600명의 어린 소녀들을 살해한
"피의 백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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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드라큘라, 600명의 어린 소녀들을 살해한 "피의 백작부인"
오래 전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비범한 여성이
역사가 아닌 전설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바토리 에르제베트로, 헝가리의 귀족 출신이다.
또한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엄청난 수의 소녀들을
연쇄적으로 살인한 여성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가 사망한 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은
바토리 에르제베트라는 이름에서
공포와 사디즘에 대한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여성으로 알려진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기네스북에도 올라있으며, 피에 대한 갈증을 만족시키기 위해
600명이 넘는 어린 소녀들을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역사적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바토리 에르제베트에 대한 이야기도 복잡한 뒷배경이 있다.
과연 그녀는 수많은 소녀들을 고문하고 죽인 냉혈한 살인마였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정치적 목적에 의해 희생당한 음모론의 피해자였을까?
피의 백작부인 바토리 에르제베트에 대한 진실이 궁금하다면 다음 장으로 넘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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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 에르제베트 (Báthory Erzsébet)
영어권에서는 엘리자베스 바토리 (Elizabeth Báthory)라고 불리는
피의 여백작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1560년 8월 7일 니르바토르 (Nyírbátor)에서 태어났다.
헝가리의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귀족인 바토리 가문은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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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에르제베트의 삼촌 바토리 이쉬트반
(Báthory István)은 폴란드의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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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 에르제베트
기네스 세계 기록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여성으로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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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체드 성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15세의 나이로 결혼을 하기 전까지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에체드 성에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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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렌츠 나더즈디 (Ferenc Nádasdy)
1575년 에르제베트는 페렌츠 나더즈디와 결혼한다.
나더즈디 역시 부유한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으나
바토리 가문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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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흐티체 성
결혼 직후 에르제베트는 남편의 본거지인 차흐티체 성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 곳은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영토에 속한 노보 메스토 나드 바홈과
트렌친 인근의 리틀 카르파티아 산맥에 위치한 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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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가 많은 여인
남편 나더즈디가 오스만-헝가리 전쟁에 참전한 까닭에
에르제베트는 집안의 업무와 부동산을 관리했다.
실제로 에르제베트는 이러한 일들을 꽤나 잘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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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과 살인에 대한 기록들
에르제베트의 가학적 성향에 대한 소문이 수년 간 떠돌았으나,
대다수의 피해자들이 농촌 여성이었던 이유로
이러한 소문은 반복적으로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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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
남편 나더즈디가 1604년에 사망하면서 40대였던
에르제베트를 둘러싼 살인의 증거가 수면에 떠올랐다.
복수의 증언에 따르면,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초기 희생양들은 10세에서 14세 사이의 하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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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피해자들
희생자들은 차흐티체 성의 후한 보수에 이끌려 하녀나
가정부로 일하게 된 지역 농민들의 딸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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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피해자들
피의 백작부인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이후 예절을 배우기 위해
차흐티체 성으로 보내진 군소 상류층의 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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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이후 에르제베트에게 제기된 범죄 혐의는 심각한 구타, 화형, 손 절단,
얼굴과 팔, 기타 신체의 다른 부분 물어 뜯기, 얼리기, 굶어 죽게 만들기 등이 있다.
또 다른 목격자들은 에르제베트 백작 부인이 바늘을 가지고
피해자들을 고문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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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어떤 목격자들은 에르제베트 백작 부인이 피해 소녀들을
뜨거운 집게로 고문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넣어 두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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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일부 피해자들은 꿀과 살아있는 개미로
뒤덮혀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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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식인을 했다는 의심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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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대한 갈망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피의 백작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피해자의 피를 마셨다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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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대한 갈망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에르제베트는 어린 피해자의
피로 목욕을 하며 젊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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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2세
1610년 마티아스 2세는 헝가리의 왕권을 보유한
게오르즈 쏘르조 (György Thurzó)를 임명하여 수사를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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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즈 쏘르조
쏘르조는 두 사람의 공증인을 시켜 정보를 모으게 했고, 이들은
1610년부터 1611년 사이에 300명이 넘는 증언을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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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쏘르조는 차흐티체 성에 있던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공범으로 추정되는 네 사람을 잡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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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당시 쏘르조의 부하들은 사망한 소녀 1명, 죽어가는 소녀 1명,
부상을 입은 소녀 1명, 감금되어 있던 소녀들을 발견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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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에르제베트 백작 부인은 자신의 영향력과 사회적 위치로 스스로를 지켰으나,
그녀의 하인들은 범죄의 공범이라는 혐의를 받아 재판에 회부되었다.
수많은 증인들이 바토리 에르제베트 백작 부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쏘르조는 백작 부인이 600명 이상의 소녀들을 고문하고 죽였다고 밝혔지만,
재판 당시 공식 집계에는 80명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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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옥
바토리 에르제베트 백작 부인은 감옥이 아닌
차흐티체 성에 있는 자신의 방에 가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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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에르제베트는 환기와 음식을 위해 열려 있는
아주 작은 구멍 몇 개만이 있는 방에 유폐되어 있었다.
그녀는 1614년 8월 21일 유폐된 지 3년 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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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재판 과정에서 제기된 증거는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혐의를 뒷받침해주지만,
현대의 학자들은 에르제베트의 혐의가 과연
진정성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효과적으로 잘 다스린
여성이자 강력한 권한을 가진 백작부인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녀를 권력 구도에서 제외 시키려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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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또한 마티아스 2세는 바토리 가문에 큰 빚을 지고 있었지만,
에르제베트 스캔들로 빚이 무효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가설에 따르면, 에르제베트에게 제기된
중상모략 덕분에 그녀의 친척들이 에르제베트의 영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