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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29일(금)
* 시작 기도
주님...
주의 긍휼하심은 과연 크도소이다.
(겔 16:63)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긍휼과 자비를 베푸사 날 용서하시고 다시는 그 죄의 자리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나로 하여금 나의 비참함을 기억하고 부끄러워서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또다시 번복하는 나는 짐승과 같나이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먹고, 돼지가 자기 똥 위에 드러눕는 것과 같은 자임을 고백하나이다.
이런 나는 짐승이오나 주의 신실함이 나를 살리오니 오늘도 주의 보혈로 나를 덮으사 정결케 하옵소서.
주 보혈과 신실함에 힙입어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믿음의 집을 세우는 자 되게 하소서.
잘 지어 주님과 함께 거하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마 8:1-13
제목 : 왜 주님은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침묵명령을 하셨나?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 나의 묵상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몽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왜 이 사람에게 침묵을 명하셨을까?
이 침묵명령은 마가복음에서 주로 나타난다.
(막1: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3: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이 침묵명령은 언제까지 하라는 말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마가복음에 나타난다.
(막 9: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침묵명령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실 때, 즉 부활 때까지 명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 때까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배고픈 자들에게 먹이시는 이런 기적 행하신 것을 침묵하라고 하셨을까?
그것의 단초는 바로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막 14:27-2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침묵명령을 하신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후에 너희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하셨다.
따라서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안식 후 첫 날,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예수님께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무덤에 갔을 때 무덤 문이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천사가 말하기를 “너희가 찾는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하면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고 전하라고 한다.
(막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이처럼 천사들도 예수님이 갈릴리에 먼저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왜 갈릴리에서 다시 보기를 원하셨을까?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지상사역의 대부분을 감당하셨던 지역이다.
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하셨던 예수님은 이곳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으며, 배고픈 자들을 먹이기도 하셨다.
이런 사역의 모습을 3년 동안 보았던 제자들의 왜곡된 시각을 바르게 교정해 주시기 원하셨다.
마가복음 14:27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누구보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생각을 뚫어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을 그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능력자 예수를 유대의 왕으로 세우고 자기들은 한 자리씩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는 모습을 그들이 보면서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예수였기에 버린 것이다.
이처럼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그들의 육신의 눈으로 본 대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과 함께 그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는 생각으로만 가득차 있었다.
이런 제자들의 생각을 바꿔주시고 바르게 교정하시고자 주님은 그들을 갈릴리로 부르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갈릴리로 부르셨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곳은 남쪽 예루살렘인데 말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갈릴리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만나야만 자기들이 알던 예수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시며 또한 그와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상에서 기적을 베풀며 사역하신 예수님과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분이 동일한 자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야 비로소 침묵명령이 해제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증거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예수님을 땅에서 기적을 베푸는 초능력자나 마술사와 같은 존재로 오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갈릴리에서 기적을 베푸시던 예수님과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이 벗겨지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참 복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제자들은 사도행전을 써내려가는 주인공들이 된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두렵고 무서운 마음에 다 도망갔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갈릴리에서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목숨바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다.
그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주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과 주님께서 승천 하신 이후에 제자들이 전한 십자가와 부활 복음은 하나로 통합된다.
곧 십자가와 부활복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눈을 덮고 있는 비늘을 벗기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사울이라 불리는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이 특심인 자였다.
그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써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이지 메시야가 될 수 없었기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이려고 다메섹에까지 가는 열심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 날 다메섹에 이르렀을 때에 해보다 더 밝은 빛이 자신을 비추면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 순간 소경이 되었고, 다메섹 시내에 가서 3일간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로 지냈다.
그 때 아나니아가 와서 그를 안수하므로 보게 되었는데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 것이다.
바로 그 비늘이 예수를 바르게 보지 못하게 만들고, 진리를 왜곡시키는 장애물이었다.
나는 철저히 내가 믿는 예수를 오해하였다.
그를 믿으면 이 땅에서 잘 되는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대학입시를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좋은 대학에 꼭 합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교회의 자녀들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기도했었다.
또한 취직을 위해서도 기도하였다.
취직이 힘든 시기인 만큼 예수 믿는 주님의 백성들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병이 걸려 고통 받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무조건 아픈 자들은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회복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한 것이다.
때로는 기도로 낫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낫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10여년 전,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아픈 사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참 많았다.
그래서 어찌 하나님은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 도와주시지 않느냐고 하소연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나의 눈은 철저하게 땅의 것에 매여서 만물 위를 볼 줄 몰랐다.
내가 믿는 주님은 위, 즉 하늘로부터 오신 분인데 나는 그 분을 땅에 오셔서 땅의 일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만 오해하였던 것이다.
물론 기도하면 들어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위로부터 오신 주님은 우리 역시 위로부터 생명을 얻어 위로 올라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나는 이 진리를 전혀 몰랐다.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였고, 위로 올라가는 것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나는 목사가 되어서도 하나님을 너무 많이 오해하였다.
목사로써 내가 오해한 것을 그대로 성도들에게 가르쳤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도 부자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렇게 설교를 하면 성도들은 백이면 백 모두 다 ‘아멘’ 하고 외친다.
나는 더욱 신이 나서 그런 류의 말로 설교를 하고 은혜를 끼쳤다고 내심 뿌듯해 하곤 했었다.
이런 나는 성도들을 넘어지게 만드는 장본인이며 거짓 교사요 거짓 선지자였다.
그렇기에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물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고 했는데, 나는 과연 얼마나 많은 영혼을 실족하게 만들었던가?
주님은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셔서 내 눈에 덮인 비늘을 벗겨 주셨다.
만물 안에 갇혀 있던 나의 신앙의 눈이 비상(飛上)하여 하늘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땅의 것만을 추구하며 킁킁대던 내가 이제는 하늘 위를 바라보며 인공위성을 실은 로켓처럼 땅을 박차고 올라가 대기권을 뚫고 우주로 비상하여 하늘 위에 계신 카이로스의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며 사귐과 교제를 이어가고 있다.
내가 나를 생각하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은 한이 없으시다.
땅의 사람에서 이제 하늘의 사람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아담의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으로 생명의 본질이 바뀐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나를 아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으로 난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땅의 것에 치심하며 살았던 것은 나의 생명이 땅에 속한 생명, 즉 옛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하늘에 속하여 살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며 그것은 곧 아들의 생명이다.
이제 내 안에는 누가 뭐래도 아들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영생이 있다.
그 영생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빼앗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만이 오늘 지금 여기에서 더 원할 것이 없는 자로, 예수로만 자족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영생은 완전한 영생의 나라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기쁨을 맛보게 하며, 나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주님을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일을 하는 분으로만 오해하였나이다.
위로부터 오신 분,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이신데, 그런 주님이 나를 위하여 오셔서 이 땅에서 내가 잘 살 수 있도록 육적, 물질적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오해했었나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만 같았던 나를, 주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복음을 전해 주시고 깨닫게 하셨나이다.
그 복음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그 복음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이제는 더 원할 것이 없는 자로 사나이다.
나는 오늘도 주님이 보았던 아버지의 영광, 곧 주님의 얼굴에 비쳐진 영광의 빛을 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여,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말씀으로 교제하고 사귀는 은혜가 너무나 크도소이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놀랍습니다.
내 영혼이 기뻐 춤을 추고 뛰어 놉니다.
주님을 기뻐하며 사랑합니다.
주님, 이 기쁨과 사랑을 받으소서.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