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7일(성녀 모니카 기념일) 그렇게 하는 이유 밥 먹기 전에 ‘식사 전 기도’를 바친다. 바쳐야 해서가 아니라 고마우니까 바친다. 저 음식이 내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수고해 준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알려 주니 감사한다. 다 먹고 나서 ‘식사 후 기도’를 바친다. 바쳐야 해서가 아니라 잘 먹었으니 감사하며 지상 교회 교우들이 기억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연옥 교회 교우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의 운명을 돌이켜 보며 나의 운명도 그와 같다는 것을 기억한다.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내 차례(집회 38,22)’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일미사 참례 의무를 지킨다. 지켜야 해서가 아니라 최소한 일주일 한두 시간 정도는 온전히 내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다고 해도, 내가 바라는 것을 전부 다 이루었다고 해도 내 영혼을 잃어버리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내가 소유했다고 여기는 모든 건 결국 다 남 것이 될 거다. 내가 끝까지 지킬 수 있는 건 내 영혼뿐인데, 그 영혼에게 가장 좋은 음식은 하느님이다. 미사참례가 하느님을 잊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하느님을 먹고 마시는 것보다 그분과 가까워지는 더 쉬운 길을 찾기 어려울 거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크게 비난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25)” 그들은 하느님이 주신 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그 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부정한 벌레가 음식이나 물에 들어갈까 봐 물을 채로 걸러 마셨다(마태 25,24). 일주일에 단식을 두 번씩이나 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다(루카 8,12). 그런데도 그런 비난을 받은 건 겉으로만 열심히 하고 속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 속을 다 아셨다. 겉으로 하는 종교 행위는 내적인 영성을 깊게 하기 위함이다. 몸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니어야 한다.
사람은 속에 있는 걸 말하고 자신의 영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며 살아간다. 내 안에 어디엔가 나의 영이 있고, 그곳에서부터 내가 하는 말과 행동 등 모든 내 생활이 시작된다. 그곳에 돈이 있으면 돈을 말하고 돈을 향해 나아갈 것이고, 하느님이 계시면 하느님이 기뻐하시게 말하고 행동할 거다. 종교적 의무와 계명을 지키는 건 내 영을 키우고 더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 길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종교적 의무를 다한다고 무조건 다 구원되는 게 아니란 걸 이제 다 안다. 아닌 척 모르는 척 할 필요 없다. 코로나 때 성당 문을 닫지 않았던가. 교회 밖에도 구원은 있다. 하지만 스스로 선하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교회의 생명과도 같은 성체성사가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은 남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기적이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며 게다가 여러 상처로 왜곡된 마음을 지녔는데 이 모든 걸 자기 힘만으로 이겨내고 참된 것을 찾는 게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마 그러려면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할 거다.
예수님,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저는 배운 대로, 믿는 대로 잘못하면 그 즉시 용서를 청하고, 진심이 아니더라도 주어진 의무들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의무를 다했다는 만족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하느님과 더 가까워졌다고 기뻐하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 오른손이 가리키는 곳, 아드님 예수님이 계신 곳에 마음을 두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