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속까지 만드신 분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 교우들 대부분은 선교는 선교사들의 몫이라고 여기는 거 같다. 선교보다는 신앙을 통해서 얻는 자신의 웰빙(well being)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건강, 외적 내적 문제 해결, 사업, 평화로운 가정생활 등 현실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괜찮은 사람이 되기를 바람이 훨씬 더 큰 거 같다.
이런 바람을 기복적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이 거칠고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선하고 평화롭게 그리고 고난과 역경을 신앙으로 잘 견디며 사는 것만으로도 사랑 자체인 하느님을 세상에 전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봉사를 더 많이 하지 못하고 어려운 이웃을 많이 도와주지 못한다는 거룩한 죄책감을 고백하니 자신의 번영만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세상에서 작은 빛과 소금이 되기에 충분하다.
실천 없는 믿음, 마음 없는 계명 준수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리 없고 그를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고발하셨다. 율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열심히 철저히 지켜서 겉으로는 아주 깨끗해 보이지만 그 속은 시체가 썩어가는 거처럼 더럽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마태 23,27). 그들 마음이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여주기식 신앙생활이었다(마태 23,5). 그들은 하느님이 속도 만드셨음을 잊어버렸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카 11,40)”
하느님 앞에 사람은 언제나 알몸이다. 그가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그분 앞에서는 아무것도 가릴 수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알몸으로 모든 걸 다 드러내 보여주셨고 그게 사랑이라고 프란치스코 교종은 말한다. 우리도 주님 앞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복잡한 교리와 난해한 교회 문서들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해도, 내 속내가 하느님 앞에 다 드러나 있어서 부끄럽지만 바로 이런 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음을 알고 믿는다면, 그리고 특별한 노력할 필요 없이 주님이 지금 나와 동행하심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긴다면, 나는 웰빙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잘 사는 거 아닐까? 이 어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름 잘 살아내고 있는 거 아닐까?
예수님, 믿음은 선물이고 은총입니다. 그 선물을 더 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모르는 제 속내까지 주님은 다 아신다는 믿음이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와 기쁨이 되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처럼 참 좋은 하느님을 무한히 신뢰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