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가 중요해?
아! 수직 미끄럼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전기공사를 하면서 먹고 살았다. 전기공사는 크게 내선공사(內線工事)와 외선공사(外線工事)로 나뉜다. 말 그대로 내선공사는 주로 건물 내의 전기시설을 말하고, 외선공사는 전봇대를 세우고 선로와 변압기 등을 설치하는 것을 뜻한다. 위험도와 노동 강도상 내선공사보다는 외선공사하는 사람의 임금이 더 높다. 난 내선공사를 주로 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외선공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일이 전봇대를 오르는 기술이었다. 과거엔 나무로 만든 전봇대(목주)의 경우는 발목에다 이른바 승족기(昇足機)를 차고 오르고 내렸지만, 콘크리트로 만든 전봇대(콘크리트주)가 나오면서부터는 그야말로 오르고 내리는데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했다. 허리쯤에 안전벨트와 동아줄(일명 도지나)을 두르고 전봇대를 포옹하듯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발동작을 교묘하게 하여 오르내리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전봇대 오르내리는 것도 기술이라고 쉽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순전히 스스로 요령을 터득해야만 했다. 하지만 근무시간엔 주야장천 주어진 일에 매진하느라 이런 기술(?)을 배울 시간이 허용되지 않았다. 사실 지금이야 뭔가 배우고자 하면 일정한 창피함을 피하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사람들 많은데서 전봇대 오르내리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전봇대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새벽에 연무동으로 가서 배우기로 했다. 지금이야 연무동이 완전 번화가이지만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에 전봇대들만 줄줄이 사탕처럼 많았다. 특히 전업사가 있는 남수동에서 10여 분이면 당도할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혔다. 어느 날 새벽, 장비(?)를 챙겨 연무동으로 향했다. 완전 초보인 만큼, 키 작은 8미터짜리 전봇대를 선택했다. 벨트를 차고 동아줄을 전봇대에 두르고 오르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몸은 끔쩍도 안했다.
기술자 아저씨들의 자연스런 모습과는 달리 팔이 당겨지지도 않고 허리도 굽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저렇게 한참을 지랄발광해도 1미터도 채 오르지 못하고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망연자실이 따로 없었다. 앉아서 골몰했다. 왜 오르지 못하는 것일까? 불현듯 아저씨들의 움직임이 아른거렸다. 그대로 따라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곧 바로 시도했다. 뭔가 가능성이 보였다. 2미터, 3미터 정도까지 오르자 자신감이 붙었다.
내친김에 꼭대기인 8미터까지 올랐다. 광명(光明)이 따로 없었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내가 전봇대를 오를 수 있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를 중얼거리며 기뻐했다. 멀리서라도 사람들이 봐주기를 기대할 정도로 뿌듯했다. 이젠 외선공사도 척척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한없이 흡족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내려갈 일 때문이었다. 오르는 데만 혈안하다 정작 내려가는 요령은 몰랐던 것이다. 큰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지금이야 발판 볼트를 모두 끼워 놓지만 당시만 해도 상부 양쪽에만 끼워 놓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끼워놓지 않는 이른바 민전봇대가 대다수였다. 때문에 기술자들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좌우간 내려갈 일을 생각하니 큰일이었다. 고민해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냥 전봇대 상부에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구조요청도 할 수 없는 처지여서 답답하기만 했다. 한참을 생각해도 대책이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장고 끝에 악수라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미끄러져 내려가기로 했다. 전봇대를 꼭 붙들고 수직미끄럼틀을 타듯 내려갔다. 볼때기를 비롯해 팔과 다리 안쪽이 다 까졌다. 짧은 시간이지만 여기저기서 불이 나듯 고통이 컸다. 조금 전, 전봇대 상부에서 의기양양하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고, 완전 패장(敗將)의 모습으로 다신 전봇대를 오르지 말자는 생각으로 장구를 챙겨 전업사로 복귀했다. 며칠 지나자 상처가 아물었다.
맛볼 걸 맛봐야하는데, 무엇에 중독된 것처럼 전봇대 오르는 모습이 자주 떠올랐다. 또 다시 파도치기 시작했다. 전봇대 앞으로 향했다. 이번엔 어떻게 내려올 것인가를 고민했다. 오르는 방법은 찾아냈는데, 내려올 때는 어떤 방책이 있을까를 한참 고민하다 역발상을 생각해냈다. 오르는 방법을 역(逆)으로 하면 어떨까를 생각한 것이다. 바로 시연했다. 대성공이었다. 전봇대 상부까지 오르기도 전에 희열(喜悅)을 느꼈다.
두려움이 일순간 다 사라졌다. 이제 올라볼까 하고 몸을 몇 번 움직이면 금방 전봇대 상부에 도달했고, 내려가 볼까 하면 어느새 바닥에 당도했다. 8미터는 물론 12미터짜리, 16미터짜리를 차례로 익혔다. 며칠 전, 수직 미끄럼틀을 생각하니 어리석었던 생각이 났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내선공사 뿐 아니라 어지간한 외선공사에 대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자신감이 붙으니 몸값도 따라 오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 맨홀뚜껑의 반격?
마누라가 2달 전부터 상수도사업소에서 검침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정해진 지역에서 수도 계량기를 찾아 기록 보고하는 동시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검침한 세대를 찾아 고지서를 배부하는 비교적 단순한 일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맞듯 이런 단순한 일도 애환은 존재한다. 지역이 광범위해 각 세대를 찾아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계량기가 일정한 위치에 설치되지 않아 마치 보물찾기 수준이란다.
더욱 어려운 것은 각 세대의 계량기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설치된 ‘맨홀뚜껑’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놈의 맨홀뚜껑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어떤 것은 두 사람이 들어야 할 만큼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며칠 전, 마누라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큰 맨홀뚜껑을 만났단다. 하지만 자신에게 부여 된 직무인 만큼, 스스로 해결해 보겠노라 생각하고 맨홀뚜껑 열기를 시도했다나.
끔쩍도 안하자, 과거 내가 전봇대를 오르기 위해 시도하다 실패하여 망연자실한 모습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생각했단다. 궁하면 변화를 도모한다고 했던가? 두 달간 일하면서 선배들의 맨홀뚜껑 여는 요령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런데 미련하면 약이 없다고 한 것처럼, 내가 전봇대에 오르기만 했다가 내려가는 요령을 몰라 크게 고통 받은 것처럼, 마누라도 맨홀뚜껑 여는 요령만 알았지, 옮기는 방법은 모른 것이다.
열린 맨홀뚜껑 옮기는 요령을 몰라 우왕좌왕하다 힘이 빠지자, 그만 발목에 부상을 당한 것이다.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의 일이란 이처럼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더욱 요령이 강고해져 주어진 업무를 척척 수행할 사람이긴 하지만, 당장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보자니 안쓰러울 따름이다. 물론 “못난 남편을 만나 이렇게 된 것이다.”라는 위로 외에 달리 해줄 말이 없다는 데서 자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