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월요미사에 함께하신 사제 |
주례 : 김종성 신부(인천교구 논현동성당)
강론 : 김일회 신부(인천교구 부평1동성당)
인천교구 : 김일회, 박병훈, 김종성, 장동훈, 박성수 신부
서울교구 : 전종훈, 박동호, 이강서, 나승구, 이영우, 조해붕 신부
원주교구 : 안승길, 박무학 신부
의정부교구 : 상지종 신부
전주교구 : 송년홍 신부
청주교구 : 김인국 신부
안동교구 : 김영식 신부
부산교구 : 고원일 신부
마산교구 : 하춘수 신부
예수회 : 김정대, 김정욱, 최영민 신부
골롬반 : 남승원, 함패트릭 신부
작은형제회 : 유이규 신부
꼰벤뚜알 : 서영섭 신부
순교복자회 : 김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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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월요미사에 함께하신 수도회 |
노트르담 수녀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베네딕도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선한 목자 예수 수녀회
성 바오로딸 수도회
성가소비녀회
성심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예수 수도회
예수의 까리따스 수도회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전교 가르멜 수녀회
한국순교복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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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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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빠진 이를 어루만지는
애절한 마음이 바로 '평화'
강론 김일회 신부(인천교구 부평1동성당)
멘붕이 이런 것이 멘붕입니다.(재향군인회 창립 60주년 기념행사가 서울광장에서 열린 관계로 대한문 앞이 매우 시끄럽습니다.) 저는 길거리 미사를 어느 정도 했지만 이렇게 옆에서 쿵짝쿵짝거리고 마치 노래방에서 혼자서 외로이 떠드는 모습입니다. 귀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하는데 오늘은 귀를 쫑긋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생명평화 기원을 바라면서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4대강, 구럼비를 살려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라는 말을 쉽게 합니다. 우리 문화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라는 문구는 너무 많이 상투적으로 있습니다. 미사를 시작하면서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아무 스스럼없이 이야기 합니다. 또 한편 성찬전례에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하면 무척 쑥스럽지만 평화의 인사를 함께 나누게 됩니다.
평화라는 말은 우리에게 참으로 익숙한 말이기에 참된 평화를 어찌 보면 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사실 평화롭지 못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평화를 이야기 하면서도 이 세상 한구석에서 폭력이 만연됩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서 치열한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쇠퇴하는 도시 곳곳에서 많은 어려움과 분쟁, 그리고 가정폭력, 불건전한 중독 그리고 회사 사회 어찌 보면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서로간의 갈등과 파괴되는 요소를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폭력이라는 말속에서 문명화된 사회의 가장 감추어진 숨어 있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폭력은 거대한 경제적 문화적 제도를 움직이는 탐욕과 거짓과 부정이라는 그 텅 빈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폭력 가운데 가장 무서운 폭력은 공권력의 남용이라는 폭력이라고 생각됩니다. 현 이명박 정권은 새로운 정권을 시작하면서 그해 1월 차디찬 겨울, 힘없고 저항할 수 없는 세입자들을 내 쫓는 일에 앞장서섭니다. 그로인해 세입자 5명과 경찰 1명의 죽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화재로 인한 사고도, 어떠한 우연한 사고도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공권력 남용에 의해 희생된 아픔이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금년, 옆에서 분향소를 차리고 있는 쌍용자동차에서 2,646명의 해고노동자들이 발생해서 77일간의 파업 후 22명의 안타까운 목숨을 끊은 생존권의 문제, 즉 삶의 문제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어 우리는 마음을 더 아파하고 있습니다. 또 아름다운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섬으로써 평화의 섬이 전쟁 위기의 섬으로 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묵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침묵한다면 생명과 평화의 하느님의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소설가 공지영 씨가 쓴 <의자놀이> 라는 책을 보면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가족들의 아픔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람이 스물두 명 죽었다. 만일 60만 명이 산다는 서울 노원구에서 똑같은 원인으로 스물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4,700명이 다니는 학교에서 네 번째 자살자가 생기자 그 학교는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사망자가 발생하지도 않은 신종플루 때문에 전국의 학교들이 휴교를 불사했고 정부는 무료로 약품을 공급했다.
그런데 불과 3년도 안 된 시간 속에서 2,646명 중에서 22명의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희생되었다. 언급되지 않은 주변의 죽음과 다행히 실패한 자살기도를 합친다면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모두 같은 울타리에서 같은 원인으로 쫓겨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쌍용자동차의 죽음은 특히 보수 언론에서는 아예 언급되지도 않는다. 대체 이것이 정상적인 사회인가?
생명의 가치, 평화의 가치를 마음에 새기고자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사회교리를 통해서 인권의 궁극적 원천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 개인에게 주어진 존엄성에 인권의 뿌리가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제주 강정마을을 보면서 공권력을 사용하여 인간의 생명을 유린하고 하느님의 창조물을 파괴하는 정부임을 다시 한 번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평화, 평화는 분명 수동이 아니고 능동입니다. 평화는 단지 폭력을 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꽤 뚫어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과 맺는 영혼의 내적인 평화, 다른 이들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통해서 비폭력의 실현 그리고 의롭고 평화로운 사회의 확립입니다. 평화는 바로 나와 하느님과 내적인 관계가 우선됩니다. 그 다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서로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어찌 보면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러나 제일먼저 내적인 관계에서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사람 누구도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점점 더 평화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 기아와 죽음, 차별과 소외가 심각해지고 평화와 대립하는 왜곡된 힘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땅 한반도 역시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의 민족 안에서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으며 극단적인 양극화로 인해서 인간 존중의 가치는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마치 거리의 사제들을 좌경이다, 아니 빨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또한 자본주의 무한 질주적 경쟁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는 힘을 잃어가고 또 사회는 갈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평화를 잃는 모습이고 갈수록 인간 본연의 모습을 물질에 의해 황폐해 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평화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 천 년 동안 도전과 위협을 받았습니다. 또 한편 그것을 지키고 확장하려는 선의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평화를 지키는 사람은 바로 희망이고, 그 희망은 바로 희망이신 그리스도가 평화 사도로서 우리 삶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희망을 져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점점 추워지는 가을녘 이 자리에서 우리가 평화 지키는 길은 평화의 마중물이 되는 그 마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용산참사로 희생되신 분들, 쌍용자동차 해고로 희생되신 분들이 죽음이 헛되지 않게 우리는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평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세상의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나는 칼을 주러 왔다”는 이 역설적인 메시지는 이천 년 전 그리스도가 로마 제국 아래 끊임없이 잘못된 권위와 소수가 독점하고 누렸던 왜곡된 평화에 대한 질타였습니다. 이런 평화가 성취되려면 먼저 정의가 앞장서야 하며 우리 스스로가 복음적, 즉 기쁜 소식에 그 가슴을 마음에 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전쟁과 분열, 분쟁, 일체의 갈등이 없는 상태입니다.
평화(平和)의 평(平)은 ‘수면이 고르고 평편한 의미’이며 화(和)는 ‘수확한 벼를 여럿이 나눠 먹다’는 뜻입니다. 평화는 바로 나눔이 골고루 이뤄지는 경제적 평등을 말합니다. 평화를 말하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것을 부정적으로 빼앗아 자신의 소유만으로 고집하려는 탐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에 의해 인간을 지배하는 탐욕은 바로 평화를 깨뜨리고 결국 공멸하는 것을 많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공정을 이루는 삶, 그래서 평화를 지키는 삶 그것이 우리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단순한 선언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구체적이고 아주 실천적인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매일매일 삶속에서 가난하고 힘들 상황에 있는 그 모습 속에서 주님께서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구체적 행동입니다. 이웃사랑의 가장 커다란 사랑을 주었기에 고통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애절한 마음이 바로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평화 속에서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느 때 ‘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조금씩 시나브로의 마음으로 평화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힘든 상황에 놓인 이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펼쳐 줍니다. 이웃사랑을 가장 커다란 사랑으로 여겼음으로 고통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남겨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주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더 깊이 생각합시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단순히 상징적 평화가 아니라 나에게 준 주님의 참된 가치, 소중한 힘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원고는 쓸 때는 기분 좋게 썼는데 읽을 때는 굉장히 힘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잘 들렸습니까? 제 생애 이런 노래방 강론은 처음입니다. 감사합니다.(미사가 끝날 때까지 서울광장에서의 행사는 시끄럽게 계속되었습니다.)
“12월에는 우리 손으로 그들을 깨우쳐야겠습니다”
故 장준하 선생님의 장남 장호권 씨
먼저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지금 길거리에 나와 있는 우리 국민, 우리 형제들을 보시는 것 같이 힘든 억눌림, 빼앗김 그리고 목숨까지 잃는 상황에서 제가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이 자리가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그것을 목도하게 되었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노할 사태가 일어나게 된 근본은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제 황군 출신이면서 총칼로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유신의 독재를 창시한 박정희가 바로 근원이라고 말입니다. 이들은 국민들을 교활하게 속이면서 국민을 수탈하고 농락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산업화의 영웅인양 떠받드는 그의 충실한 개들이 온갖 대한민국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어린 영혼들의 희생, 그러한 독재에 항거했던 많은 민주열사들의 정신을 짓밟고 그들은 죄를 감추기 위해서 조작해 만들어낸 인혁당이라는 괴상한 단체를 만들어서 하루아침에 살인한 그런 집단 그리고 결국 저의 아버님이신 장준하까지 죽였습니다.
그들이 이 나라를 농락하고 국민을 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근로자들이 길거리에 나앉아서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그들로부터 상속받은 교활한 권력으로 다시금 국민들을 기만하고 착취하고 수탈하는 수난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입니다.
여러분, 다시는 이 나라에 이와 같이 국민의 권리를 빼앗겨 길거리에 나앉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번 12월에는 우리 손으로 옳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그자들을 깨우치게 만들어야겠습니다.
이 빌어먹을 정부, 이 못된 기득 부패세력들을 이번 12월에는 우리 손으로 그들을 깨우쳐야겠습니다. 이 나라는 그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 나라는 분명히 우리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들이 길거리에 나앉지 않고 국민의 작은 권리마저 우리 손으로 지키고 자유를 한껏 숨 쉬는 그날까지 여러분 힘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