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훈문학관을 찾아서
아침 8시에 부산 사상에서 출발하여 양산, 경주, 영덕을 지나 영양군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영덕 대게를 싸게 살 수 있다는 김정철 화백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영덕 대게시장을 구경하였다. 시기를 잘 못 잡아 영덕에서 잡은 게는 살이 없는 것만 조금 있었고 연해주에서 잡은 러시아 산 대게만 가게에 쌓여 있었다.
영양군으로 가는 도로변 사과 밭에는 사과들이 곱게 달려 있고 감나무에는 감들이 꽃인 양 달려 있었다.
빈 밭과 개울을 건너며, 영양군 주봉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과 청계천(동천)이 합류하는 남이포南怡浦, 남이정, 선바위(신선바위, 立巖, 仙巖)에서 풍경 사진을 찍고, 서석지瑞石池(경북중요민속자료 제108호), 영양고추홍보전시관, 토종물고기생태전시관,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오일도 생가를 거쳐 조지훈문학관을 둘러보니 주마간산격으로 서둘러도 오후 다섯 시를 훨씬 지났다.
하루 일정으로는 조지훈문학관에 가는 도중의 볼만한 곳을 여유 있게 볼 수 없어서 잠깐 머무는 곳마다 진행자가 일정표를 보이며 떠나자고 독촉하였다.
서석지는 돌 바닥에 물을 가둔 독특한 양식이었다. 서석지는 작은 정원이지만 담장 너머 들과 산과 하늘을 정원인 듯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었다. 중국, 서양 정원이 정원 자체는 크지만 산과 들을 정원과 분리하여 결국 좁은 정원이 되고 일본은 지나치게 다듬어 정원이 자연과 차단되는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한국 정원은 자연을 정복하여 정원과 바깥을 구분하려 하지 않고 정원이 자연에 순응하므로, 화려함을 고의로 피하여 수수한 정원 경관을 담 밖의 경관과 일치시켜 우주 전체를 정원으로 만든다.
정용장 시인님이 지훈문학관을 문학기행지로 선택할 때까지는 조지훈 선생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편은 아니었는데 문학기행지로 결정했다는 통보를 받고 옛날에 공부한 것을 돌이켜 복습을 하고 내가 이해하는 지식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지금부터는 지훈 선생과 관련되는 이야기만 하고 존칭은 생략하기로 한다.
1. 조지훈 태실이 있는 호은종택
지훈문학관이 있는 주실 마을은 첩첩산중이라는 오지, 작은 분지에 있었다.
마을은 조그마한 들 한쪽 낮은 산자락에 누운 듯이 있고 마을 앞에는 들이 펼쳐지고, 들 가운데를 마을과 나란히 개천이 흐르고 들에는 아직 거두지 않은 벼가 누렇게 덮었다.
지훈문학관은 조지훈 선생 생가와 같은 동네에 있고, 주차장에서 조지훈 생가를 지나서 문학관에 가기 때문에 조지훈 생가부터 둘러보았다.
조지훈 생가는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201번지에 있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호은종택壺隱宗宅인데, 본채는 口 자형에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이고 정면 7칸, 측면 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丁字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쪽 1칸에는 지훈 조동탁, 증조부 조승기, 조부 조인석 선생이 태어난 태실胎室이 있다고 한다. 관리사管理舍는 ‘한 일一자형’ 목조 기와집 4칸으로 되어 있고 그 중앙에 솟을대문이 있어서 우리 일행도 그 솟을대문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집은 1629년(인조 7년) 호은 조전趙佺 선생의 둘째 아들 조정형 선생이 건축한 것을 6,25때 인민군이 불태워서 1963년 복구한 것이라 한다.
‘壺隱’은 ‘호리병을 가지고 은둔한 자’라는 뜻이라는데, 1519년 훈구파 남곤, 심정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이상정치를 꾀하던 사림파 조광조 선생을 제거할 때, 조광조 일족이 멸문을 피해 각지로 흩어진 한양 조씨 가문의 한 사람인 호은 공이 경북 영양으로 숨어들어 거처를 정한 이유라고도 하나, 산세가 호리병 모양이라 하니 분지의 모양도 염두에 둔 것 같다.
주실 마을이란 뜻은 마을 모양이 배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바닥에 구멍을 내면 배가 가라앉는 이치라서 마을에 우물을 파면 인재가 나지 않기 때문에 마을 가운데에 우물을 파지 않아, 60여 호 된다는 마을에 옥천종택에만 우물이 하나 있다고 한다. 전라남도 낙안읍성도 성곽이 배 모양이라 마을에 함부로 우물을 파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집터는 호은 공이 1629년 매를 날려 터를 잡은 습지였다고 하지만, 산자락의 발치에 집터가 있고 앞에는 제법 넓은 논밭을 건너 개울이 있어서, 보기에는 습지 같지가 않았다. 예부터 백제 미륵사, 김제 금산사 미륵전, 치악산 구룡사, 광양 옥룡사, 선운사 대웅전이 습지에 세워졌고, 고려 보조국사가 오리를 날려 암자 터를 잡았다는 송광사, 조선 시대 진묵대사가 나무로 만든 오리를 날려 절터를 잡았다는 등 습지에 터를 잡는다는 이야기가 불교에서는 많았으나 집터로는 드문 일이라고 하며 집터가 습지였다면 바닥에 습기를 빨아들일 숯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주실 마을 앞에는 학자가 배출된다고 믿는 문필봉이 4개나 있고(문필봉과 연적봉을 비롯한 삼봉三峰), 한 개의 동네에 14명의 당당한 박사가 태어난 곳은 여기뿐이라고 한다. 어떤 통계에는 이 동네에 박사가 100여 명이라는데 그것은 유명한 학자 외에 근래까지 박사학위를 받은 모든 숫자인 듯하다.
호은종택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문필봉이 종택 앞에 있어서 그런지. 조지훈의 백부 조은영은 국립도서관장, 부친 조헌영은 영문학을 전공한 한의학자, 숙부 조준영은 경북도지사, 고모 조애영은 여류시조시인이다. 요절한 조지훈의 형 세림 조동진도 세림시집을 냈고 여동생 조동민도 문인이다.
이 터에서 태어난 근세의 인물만 해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의병대장으로 활동을 하다가 경술국치 후 단식으로 굶어 죽은 증조부 조승기(趙承基, 1836-1913), 6.25. 당시 인민군에 항거하다가 장렬히 자결한 조부 조인석(趙寅錫 1879-1950), 한민당 정치부장을 지냈고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입안한 한의학 학자이며 초대 및 2대 국회의원으로 6.25때 납북되어 북에서 1988년 5월에 작고한 부친 조헌영(趙憲泳, 1899-1988), 공산당에 대적하고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던 지훈은 삼불차三不借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주실 마을에 370여 년간 이어져 온 유명한 삼불차는,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재물을 빌리지 않는 것,
둘째는 인불차人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는 것(양자를 들이지 않는다),
셋째는 문불차文不借, 글을 빌리지 않는 것이다.
호은종택은 본채와 관리사 외에 동쪽 담에 헛간인 듯한 집이 있었는데 이 집은 하인들이 거주하지 않았나 생각되었고, 서쪽에 작은 농기구 창고 같은 집이 있어 창고로는 작은 듯하여 옛날 농기구가 있나 싶어 들여다 보니 옛날 변소였다.
본채에는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2. 지훈문학관
호은종택에서 불과 100여 미터 거리인 듯한 곳에 있는 지훈문학관에는 생가를 보고 난 사람들이 걸어서 간다고 하는데 우리는 시간이 넉넉하지 못하여 차를 타고 갔다. 지훈 생가 앞처럼 지훈문학관 앞에도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길에 차를 세우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난 길을 따라 들어간 문학관은 대지규모 2,792㎡(846평), 건축면적 538㎡(163평)으로 관리사, 시청각실, 전시실로 꾸며져 있으며, 170여 평 규모에 단층으로 지어진 'ㅁ'자 모양의 목조 기와집이다.
문학관 현판은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썼다고 한다. 들어가면 좌측 옆으로 관리 사무실이 있고 그 옆에 화장실이 있는데 화장실의 창이 한옥의 전통 창살문으로 되어 있어 사랑방에 들어간 기분이라 소변 보기가 머뭇거려졌다.
단층 160여 평 전시실에 전시된 유물은 300여 점으로 조지훈 선생의 삶과 그 정신을 살펴볼 수 있게 꾸몄다고 하는데 동선은 직선으로 배치하였고 전시하는 수법과 전시품 종류는 다른 문학관과 비슷하였다. 전시품은 유리 상자(show window) 안에 전시하고 은은한 조명으로 전시품의 격을 높였으며 유리 상자 안의 조명뿐 아니라 천장의 조명까지 어울리게 한 것은 다른 문학관과 비슷하다.
사진 촬영하기 좋은 위치에 지훈 선생 흉상이 있고 벽에는 대형 사진들이 있었다.
전시품으로는 사방탁자, 문갑, 만년필, 육필원고, 뿔테 안경, 청록시집, 잡지, 개인 시집, 여권, 가죽 장갑, 모자, 넥타이, 초상화, 부채 등이 있고, 지훈상 수상식 초대장, 지훈 선생 추모학술대회 초대장, 조지훈 선생 비문제막식 초대장, 지훈시비 제막식 초대장, 문화의 날 기념식 팸플렛, ‘1996 문학의 해’ 문인모습이나 육필 전시회 팸플렛, 편지, 신라국호연구논고, 신문스크랩, 릴 테이프, 육성녹음 테이프, 시 낭송 테이프, 금관문화훈장 등 평소 지훈 선생이 쓰거나 보관했거나 그와 연관이 있는 것을 신비스런 조명과 음악을 깔고 전시해 놓았다.
지훈 선생의 이름은 동탁東卓이고 지훈은 호이다. 지훈(1920~68) 선생은 주실 마을에 태어나서 월록서당에서 한글, 한학, 역사 등을 배우고, 1960년대 내가 자란 시골에서도 볼 수 없었던 ‘피터 팬’, ‘파랑새’, ‘행복한 왕자’와 같은 동화를 1920년대 오지에서 읽으면서 유교적 전통 속에서 서구의 문화를 경험하였다고 한다.
1939년 ‘문장’ 지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로 등단하였고, 정지용 선생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하여 등단한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세 시인이 을유문화사로부터 합동 시집의 간행 요청을 받아 1946년 공동 시집 ‘청록집’을 내고 이를 계기로 세 시인을 '청록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두진 선생은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읊었으며, 목월 선생은 향토적 서정으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식을 민요풍으로 노래한 데 비하여 지훈 선생은 고전미와 선미禪味를 드러내고 있으며, ‘청록집’은 현대 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자연을 노래한 시집이라는 데 의의가 있는데. 청록파의 시풍은 당시 유행하던 도시적 서정이나 정치적 목적성과는 달리, 자연으로 돌아가는 고전 정신의 부활과 순수 서정시 세계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지훈 선생이 목월을 만나러 경주에 다녀간 뒤 ‘완화삼’을 목월 선생에게 주고 후에 목월 선생에게서 ‘나그네’를 받았다고 하여, 시인들에게 회자되는 이 시를 다시 읊어보았다.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목월에게’라는 헌사가 붙은 지훈의 <완화삼玩花衫> 전문
‘완화삼’은 꽃(花)을 완상(玩)하는 선비의 도포(衫), 즉 시 ‘완화삼’의 한 행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를 한자로 바꾼 것으로 이해하고 있듯이. '꽃에 익는 적삼'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목월 선생은 이 시를 받고 ‘나그네’로 화답했다고 한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지훈에게’를 붙인 목월의 <나그네> 전문
지훈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가 불교 경전에 심취하였고,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할 것을 강요받고는 문인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일본에 협조하지 않고 붓을 꺾었으며, 해방 후에는 공산당 계열인 좌익 성향의 카프 문학에 대항하여 순수문학을 이끌고,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문우들과 함께 대구에서 ‘문총구국대’를 조직하여 전선을 찾아 종군 작가로 활동했다고 한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만해 선생이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삼우장에 참례한 것이 열일곱(1937년) 때라고 한다. 특히 지훈 선생이 매천 황현梅泉 黃玹 선생과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선생에게 사숙私淑한 것은 두 분의 탁월한 재질보다도 강직한 성격과 대쪽 같은 절개를 존경한 것이었으며,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도 날카로운 비판을 한 시인이 된 것은 위로는 조광조의 민생을 위한 개혁정신, 아래로는 증조부, 조부, 부친에 이르는 정의수호 정신이 이어진 것이고, 그의 유명한 지조론도 주실 마을 삼불차 정신이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주실 마을에는 호은종택과 지훈문학관 외에 지훈 시공원, 시인의 숲, 옥천종택, 월록서당이 있는데 호은종택과 지훈문학관을 보고 나니 귀로에 오를 시간이 되어 지훈 시공원, 시인의 숲, 옥천종택, 월록서당은 보지 못하였다. ‘시공원’이나 ‘시의 숲’ 월록서당도 한 번 봐두어야 하겠는데 다음 날 출근할 배숙자 시인은 오후 여섯 시가 가까운 시간에 경북 북쪽 오지에서 남쪽 바다 통영까지 천 리에 가까운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떠나야 했다.
이제 신경림 시인이 극찬한 지훈 선생의 시 ‘고사古寺 1’을 읊어보고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로 한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西域萬里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고사古寺 1’ 전문,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년
-----------小路文學 2010 봄호
|
첫댓글 하세요 솔숲님 잘계시죠 ,귀한 자료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