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물과 인간의 두뇌 성숙도의 차이
이런 의문 가져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아요. 소가 태어나면 바로 서거든요. 웬만한 동물들은 태어나면, 매달릴 동물은 매달리고, 설 동물은 서고 그러죠.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나면 몸이 약할 뿐이지 두뇌가 거의 다 발달해 있어요. 원래 그 동물이 가져야 될 평균 지능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은 묘하게 상당한 시간 동안 인간이 가진 표준 지능을 못 갖춰요. 7, 8살이 돼도 안 갖춰져요. 지구상에서 뇌의 기능으로 비교하면 인간이 가장 늦게 익는 만숙형(晩熟型) 뇌를 가지고 있는 거죠. 동물들은 상당히 조숙하게 빨리 성숙이 되죠. 왜 그럴까? 의심해 본 적이 있으실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할까? 오히려 크는 거 보면, 태어난 지 생후 두 달 된 원숭이보다도 7살이나 8살 된 아이들 뇌와 비슷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보면 인간이 떨어지거든요. 그 이유가 뭘까? 어떤 동물은 사실상 껍질의 성장을 빼고 나면 완성돼서 나오고 인간은 왜 그렇게 완성이 느릴까?
인간의 완성이 느린 이유! 그 이유가 어쩌면 인간의 뇌가 다른 동물과 다른 어떤 이유일 것 같아요. 흔히 우리가 조소(彫塑)라는 말 들어보셨죠? 조소할 때 소(塑)가 원래 옆에 거꾸로 역(逆)할 때 쓰는데 그게 원래 사람이 거꾸로 해놓은 거예요. 사람이 밑으로 머리가 있고 팔다리가 있고 발이 위로 있는 사람 모양이에요. 그 옆에 있는 달 월(月)은 달이 아니라 그냥 물질을 가리키는 거죠. 그 밑에 있는 토는 말 그대로 흙무더기예요. 흙무더기를 갖고 사람이나 물건을 빚는 것을 소(塑)라고 하죠.
인간의 뇌는 가소형(可塑型)
그래서 인간의 뇌는 그 소자를 써서 가소형(可塑型)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인간의 뇌가 처음부터 유전자적으로 갖추어진 지도를 갖고, 그 지도대로 태어나서 껍질만 완성되면서 사는 동물이 아니라, 뇌가 진흙처럼 언제 어떤 모양으로도 빚을 수 있는 형태로 태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소형인 거예요.
어떤 동물을 가두어 놓고 다른 사물 및 사람과 일체 접촉을 못하게 6~7년을 가두어 놓아요. 똑같은 조건 하에서 인간도 그렇게 해요. 그러면 6~7년 가두어져 있던 개 또는 소 등 이런 동물들은 풀어놓는 즉시 자기 속에 갖추어진 유전자 때문에 바로, 소는 소로서의 모습과 역할, 개는 개로서의 모습과 역할을 해요. 개들이 다른 개들과 소통하는 데도 문제가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6~7년 정도 그런 식으로 가둬놓으면 완전 백지가 돼버려요. 아무것도 못해요. 말도 못 배우고 끝나버려요.
왜냐하면 가소형으로 (모양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요) 진흙처럼 주어진 뇌에서 진흙이 굳어버린 거예요. 기능을 안 하면 굳어버린 거죠. 그래서 더욱더 가소형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이런 것들이 언젠가 뇌과학 등 이런 데서 발전되어 이론화되겠지만, 제가 아는 한 인간의 뇌는 어떤 조건에 따라서 자기 자신이 뇌를 재조직해요.
계속 A라는 사물을 바라보거나, A라는 사물의 소리를 듣거나 A라는 사물의 빛깔을 보게 되거나 이렇게 되면 거기에 따라서 뇌가 조직된다는 거예요. 고정되어 있는 기능으로서의 뇌가 아니라 언제든지 조건 반사형으로 조직이 된다는 거죠.
뇌 용량은 몇cc라고 따지듯이 뇌의 용량은 사람마다 다르긴 하죠. 뒤집어 말하면 가소형이지만 주어진 흙의 양은 정해져 있다는 거죠. 정해진 양 속에서 무엇으로 조직되었느냐에 따라서 그 인간의 의식 작용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거죠. 너무너무 다를 수 있다는 거죠.
어디까지가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진흙이 양이냐? 그 양 가운데 어떤 뇌과학자들은 10% 쓰니 1% 쓰니 이런 얘기하지만 100% 쓰는 거예요. 도자기를 구울 때 도자기를 굽는 분들이 갖다 놓은 니료를 100% 쓰는 게 아니듯이, 이만큼 있다고 해서 이만큼 쓸 수 있는 게 원래 아니라는 거예요. 지구상에 있는 모든 흙이 있고 광물질이 있어도 다 써서는 안 되듯이.
우리가 지금 지구상에 있는 화석연료를 쓴다고 그러지만 몇 %를 쓰고 있을까요? 전체 지구의 양으로 보면 1%가 될까 말까 하거든요. 그런데 지구는 그 1%를 캐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잖아요. 인간의 뇌 용량이 1,500cc, 2,000cc 한다고 해서 그걸 다 쓸 수 있는 건 원래 아닌 거죠. <루시> 같은 영화에서는 100% 가정을 하지만, 100%가 아니라 15%를 넘는 순간 인간은 죽는다는 거죠. 죽지 않고 버틴다는 전제하에서 나올 수 있겠지만다 쓸 수 있는 건 원래 아니라는 거고요.
어쨌든 그렇게 뇌 용량의 정도를 떠나서 쓸 수 있는 전체 함량은 적지만 주어져 있다고 쳤을 때, 그 뇌가 가소형이면 미리 DNA대로 완성돼 있는 게 아니라 일정 정도 상황에 반응해서 자기가 자기 뇌를 조정해 간다는 거죠. 그렇다면 예를 들어서 어떤 분의 두 다리가 멀쩡하셨는데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어버리셨어요. 그러면 뇌는 바로 거기에 맞춰서 조직돼요. 뇌는 원래부터 한 다리였던 것처럼 어느 순간 조직돼 있어요. 그리고 손가락 한 두세 개만 이렇게 함께 묶어놓잖아요. 하룻밤만 자고 나면 이 원래 손가락이 하나였던 것처럼 조직돼 있어요.
그렇게 빠르게 가소형을 가져요. 용량은 제한돼 있지만 인간의 뇌는 가소형이다 보니까, 빚어내는 대로 완성돼 가다 보니까 성장이 늦는 거죠. 조숙형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천천히 익는다는 의미의) 완숙형 혹은 만숙형 의식 구조를 가지게 되는 거죠.
인간의 뇌가 가소형이면서 만숙형(晩熟型)인 이유
왜 그럴까? 왜 그렇게 만숙형 구조를 갖고 있을까? 어쩌면 거기에서 영혼의 문제가 나올 수도 있어요. 또 다른 주인의 문제가 나올 수도 있어요. 아무튼 거기까지 얘기하자는 게 아니고요. 지난번에 마음씨 얘기를 했잖아요. 마음에서 씨줄과 날줄이 그리고 씨줄과 날줄의 올이 진정으로 자신의 중요한 지도일 수 있다 했는데 그것까지 딱 다루고 나서 좀 보는 겁니다.
예전에 제 얘기 들어보신 분들은 가끔 기억나시는 분도 있으실 거예요. 연세 드신 분들이나 어떤 사람을 향해서 웃으라고 할 때 그렇게 얘기하시죠.“ 속에서부터 웃음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웃으라고요?” 속에서부터 웃음이 나오는 사람은 없어요. 지금 웃고 있는 사람은 한 번 웃으려고 노력했던 경험이 가소형으로 쌓인 거예요. 그래서 거짓일지라도 자기의 마음속에서는 위선으로 느껴질지라도, 거울 보고 웃는 연습을 하라는 거죠. 하다가 보면은 진짜 웃게 되는 마음이 가소되어 있는 거죠.
다른 동물 같으면 어떤 경우에는 기쁜 반응을 보이고 어떤 경우는 슬픈 반응을 보이는 것이 (교육에 의한 것도 있겠지만) 야생에 주어져 있는 동물로서는 애초에 미리 DNA로 주어져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 이렇게 대응하고 저런 상황에 저렇게 대응하고 준(準)기계적이죠. 그래서 조숙형으로 뇌가 구성되죠. 그런 동물들은 웃는 연습을 한다고 해서 마음에 웃는 마음이 생기지는 않죠. 사람은 그게 위선으로 느껴질지라도 그걸 하는 순간 진짜 그렇게 된다는 거죠.
제가 차를 처음 시작한 이유 중에 하나도 그거예요. 차 속에는 차선일미(茶禪一味) 이런 얘기도 있고 그러잖아요. 차 마신다고 뭐 참선에 가까워지나요? 안 그렇죠? 그런데 마시다 보면 그 무드(mood)에 접어들어요. 그 무드에 의해서 자신의 의식이 그렇게 조소가 돼요. 만들어져 가요. 마치 나도 그렇게 고귀한 영혼을 가진 것처럼 느껴져 가요. 그런 무드가 돼 가요. 그게 인간이 가진 의식 구조의 어떤 특징일 수 있어요.
만숙형에서 무드의 중요성
그런 걸 이제 우리가 흔히 이제 무드라고 그러죠. 홍콩 가서 보면은 동양의 여러 나라 사람들의 옷 입는 것, 중국 분들, 일본 분들, 한국분들을 딱 보면 구분이 돼요. 화려하게 아니 요란스럽게 입었는데 어디가 잘 안 맞고 있으면 중국 분들이에요. 그리고 힘은 적당히 넘치면서 화려하게 입었는데 활기차게 보이면 한국 사람들이에요. 특별한 옷 없이 차분하게 입고 에너지가 절제돼 있는 모습을 보이면 일본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경제적으로 보면 한국이 절정기에 가고 있구나! 일본은 너무 안정기에 들어갔구나! 중국은 아직도 개발 도상 상태에 있구나, 하는 게 짐작이 돼요.
그런데 중국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에요. 조금 전에도 차를 타고 오다가 어떤 남자분이 걸어가시는데 뒷머리를 보고는 여자분인 줄 알았어요. 그분께서 뒤에서 보기에 오해를 일으킬 만큼 키도 그렇게 안 크셨어요. 그래서 남자인가 여자인가 하면서 옷을 보는데 옷이 다 어딘가 안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분은 이런 옷이 트렌드라고 하니까 그런 옷을 찾아 입으신 거예요. 그런 옷에 담겨 있는 무드가 아직 형성이 안 된 거예요. 가소가 언젠가 되겠지마는 가소형이 안 된 상태로 걸치고만 계신 거죠. 그러면 그냥 평소에 입는 거 원래 입는 거, 그게 더 자연스러울 텐데 하는 느낌을 주셨죠.
어쨌든 용기에요. 용기에요. 맨날 입던 것만 입으면 자기 속에서 그렇게 돼요. 그러니까좀 달라질 필요가 있어요. 너무 차분해가지고 먹는 것도 그렇고 입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것도 그렇고 보는 것도 그렇고 다 그래요.
(앞에 계시는 우리 선생님) 참 차분하시거든요. 그런데 어떤 때 저는 선생님한테 이런 도전을 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화사하게 입어보시라!”, 그러면 “(선생님의) 마음의 무드를 바꿀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서도 환하게 꽃이 필 것이다!”
그러니까 사소한 것이지만 내 무드를 바꾼다는 거죠. 무드라는 게 우연찮게도 우리 말로는 ‘멋’이에요. 멋이라는 말이, 우리가 ‘멋스럽다’고 쓰는 말이 사실은 무드라는 뜻이에요. 그냥 어떤 정감적 형태, 측정할 수 있는 표준 뭐 이런 의미예요.
어근이 왜 비슷한지는 모르겠는데요. 그걸 제가 아무리 찾아봐도 그냥 우연의 일치 이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요. 우리 말의 멋과 모드 또는 무드라는 말은 같은 말이에요. 아마 영어의 무드라는 말이 14세기에 스며드는 걸로 봐서는 라틴어에는 무드라는 말의 어원을 찾을 길이 없어요. 그러니까 어디 중앙아시아 쪽에서 왔을 가능성은 있어요. 그러나 증거가 없으니까 그렇게 말씀 못 드리고요.
사람들의 색향미 감각의 작용
우리가 차를 한번 마실 때를 생각해 볼게요. 차를 마시면 색깔을 먼저 보게 되죠. 어떤 경우에는 냄새를 먼저 맡게 되지만. 색을 먼저 볼 수도 있죠. 색을 보는 순간 욕망이 발생해요. 우리가 처음에 태어나면서 가소형적인 의식 구조에 제일 먼저 빛이 들어왔잖아요. 눈을 뜨게 되면서 그 순간 욕망이 시작돼요. 차도 색을 보는 순간 마시고 싶은 욕망이 생기거나 안 생기거나, 자기가 시각적으로 훈련된 가소된 형태에 따라서 다르게 반응을 해요. ‘아, 색 곱다’ 하기도 하고 ‘얘는 색이 왜 이래’ 하기도 하죠.
또 냄새를 맡아요. 냄새를 맡으면 또 거기에 따라서 생각 작용이 일어나요. 어떻게 일어나느냐? 뭔가 그리움이 생겨요. 냄새를 맡는 순간 어딘가에서 그리움이 생겨요. 어릴 때부터 냄새는 그렇게 다가와서 우리를 가소시켰던 거예요.
뇌 구조에 의해서 아예 단순하게 배열된 게 아니라, 조소처럼 이렇게 성장해 왔던 거예요. 근데 이제 혀로 뭔가 맛을 봐요. 맛을 보면 편안함을 느껴요. 물론 역으로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죠. 어쨌든 긍정적일 때 편안함을 느껴요. 약간의 집착도 느껴요. 기준이 어머니 젖 빨면서부터 생긴 걸 수도 있어요.
아무튼 동물들은 어머니의 젖을 빤다고 해서 또는 냄새를 맡는다고 해서 색을 봤다고 해서 거기에 의해서 자신의 두뇌가 가소되기보다는, 원래 그들의 두뇌 작용에 의해서 설계됐던 대로 반응한다는 거예요.아닐 수도 있어요. 제가 동물도 아니고, 움직이니까 사람도 동물이라고 하지만요. 사람은 빼고요.
가소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로 꿈
아무튼 그렇게 인간은 하나하나의 조건을 자기가 만들면서 달라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하고 사람의 영혼의 관계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한 가지만 이해가 되면 된다고 봐요. 그렇게 가소되고 있는데도, 만들어지는 거에 의해서 계속 의식과 형상이 바뀌고 있는데도 어느 곳을 향해서 가고 있는 지향점이 있는가? 가소되는 대로 한없이 나아가는가? 그 차이점은 있을 수 있어요.
그냥 있는 대로 그냥 뭐든지 주어지면 주어진 대로 반응할 수 있지만요. 동물이 만약에 마약을 먹고 좋아가지고 빠진다면 그 동물은 설계된 뇌 구조에 의해서 반응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가소해서 중독돼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질적 반응으로서의 대마초 같은 것은 신체적으로 주어진 것에서 원숭이와 사람이 같이 중독될 수 있어요. 근데 만약에 필로폰을 맞는다면 제가 맞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하냐 그러면 할 말이 없는데요.
향정신성 의약품이라는 것은 자신이 자신에게 뇌에 가소시켰다는 뜻이에요. 동물의 경우에는 한 번 맞고 나면 그것에 대한 기억이 남을지는 모르나, 대마초에 중독될 수 있을지 모르나, 히로뽕에는 중독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어쨌든 간에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길을 굳혀가야 돼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모습에 의해서 그 모습을 지키려는 욕구가 발동해요. 그 순간 굳어가는 거죠. 굳어가는 건데 그 순간 어떻게 되느냐, 꿈이 없어져요. 꿈이 잡꿈이 돼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진 꿈이 아니라 상당히 잡스러운 꿈으로 바뀌어요. 무슨 얘기냐?
사람이 자잖아요. 자는 사이에 눈을 감잖아요. 못 보잖아요. 그러면 못 보는데 이 못 보는 사이에 뇌는 재조직돼버려요. 안 보고 사는 동물로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보는 유사 기능을 계속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 기능에 무엇이 얹히느냐에 따라서, 어떤 근본적인 꿈이냐 아니면 그냥 얹혀 있는 잡스러운 그냥 그림일 뿐이냐가 나오는 거예요. 소위 개꿈이냐 참꿈이냐가 나오는 거예요.
개꿈은 시력을 가지고 있는 뇌 구조의 가소성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에요. 쉽게 말하면 지구가 자전하니까 꿈꾸는 거예요. 낮과 밤이 있으니까 꿈꾸는 거예요. 낮과 밤이 없으면 꿈을 안 꾼다는 얘기죠. 계속 눈을 뜨고 있는데 눈을 감고 있으면 1시간도 안 돼 가지고 거기에 맞춰 내가 조정돼 버리거든요. 그걸 방어하기 위해서 계속 유사하게 눈이 작용하는 것 같은 의식 구조를 가지는 거예요. 그게 개 꿈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다수 분석의 대상인 꿈이 개꿈을 대상으로 한다면, 꿈은 그와 같은 신체 작용 반영에 불과할 수 있어요. 꿈이 과연 그게 다일까?
그런 가소형의 얘기를 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자리를 하고 뵙는 것도 하나의 무드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이렇게 무드를 만들면 이 무드가 언젠가는 자신을 다시 가소시킨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사람들과 얼굴을 보게 되면 내가 바뀐다는 거예요.
가소(可塑)의 동력이 되는 무드 작용
(저에게) 일본의 젊은이들이 무서운 이유가 하나 있어요.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많은 군인들이 일상 사회로 돌아오죠.그때 그들이 돌아오면서 생긴 변화의 하나가 저나 여러분들이 지금 신고 있는 신발 같은 게 대중적으로 일상화가 돼요.가령, 우리 한국의 경우 문익점 선생이 목화를 들여오지만 그 목화로 옷을 해 입는 것이 대중화되는 것은 17세기 이후거든요.
신발도 마찬가지인데요. 양쪽 발이 서로 다른 신발로 개발된 것은 19세기 초반이지만, 그때는 잠시 개발되었다가 욕을 엄청 먹고 폐기됐어요. 신발을 어떻게 그렇게 만드냐고? 신발은 좌우가 다 똑같아야지! 지금 상상하면 웃기죠. 이렇게 웃기는 경우가 역사에 많아요.
1920년에 담배가 두뇌 개발에 좋다고 학교에서 초등학생과 초등학교 교사가 같이 맞담배질을 했던 적도 2년 있어요. 지금 보면 웃기죠. 또 20년 지나면 이게 웃길지도 몰라요. 그게 맞다고 할지도 몰라요.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만.
아무튼 이(군인)들이 이제 사회로 나오면서 양쪽이 다른 신발이 대중화가 돼요. 여러분들 혹시 영국에서 나오는 유명한 구두 브랜드인 처치스(CHURCH`S)라는 구두를 아십니까? 모르실 수도 있어요. 처치스라는 구두에 상하이라는 라인이 있어요. 그 당시 상하이에서 신발을 참 잘 만들었는데, 상하이에서 신는 신사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만든 신발인데요.그 상하이라는 라인의 원 모습은 양쪽이 같아요. 그게 바꿔 신어도 돼요. 지금은 계량돼서 상하이 라인도 어느 정도는 양쪽이 다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양쪽이 상당한 상당히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아무튼 신발은 1930년대 4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양쪽이 다른 신발이 아닌 같은 신발을 신고 살았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양쪽이 다르니까 효과가 있다고 해서 가장 많이 적용돼서 보급된 것이 군화예요. 군인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군화와 함께 양쪽에 다른 신발이 일반화가 돼요. 그렇게 되면서 그 군화들이 사회로 흘러나왔는데 신어보니까 너무 좋거든요. 편하거든요. 그걸 신어요. 편하니까.
그 다음 군인들이 전투에도 쓰였던 가장 튼튼한 바지를 입고 나와요. 그 바지는 헐렁하죠. 여러분이 대탈주에서 보셨던 스티브 맥퀸이 입고 있는 그 카키색 흙먼지색 바지가 바로 그런 바지죠. 사실 그 바지는 좀 슬림한 거예요. 스티브 맥퀸이 고쳐서 입었어요. 미군 장교들의 바지 헐렁하죠? 그 바지들이 입어보니까 너무 편한 거예요. 그래서 미국을 중심으로 군복에서 대중화된 옷들이 많이 생겨나는 거예요.
이 옷들을 경기가 어려워진 이후에 일본의 젊은이들이 그 옷을 베이스로 삼아서 자기들한테 맞춰가지고 만드는 거예요. 더 일본식으로 말이죠. 그게 이른바 아메카지 (amekaji)스타일이에요. 아메리칸의 밀러트리 룩(Military look)과 캐주얼 룩(Casual look)을 클래식화 시켜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클래식과 캐주얼은 반대 말 같잖아요. 아니죠. 캐주얼(casual)의 반대는 포말(formal)이죠. 클래식(classic)의 반대는 트렌드(trend)죠. 그죠?
어쨌든 간에 캐주얼의 클래식화된 모습을 일본 젊은 친구들이 만든 게 아메카지 룩이에요. 이 룩에 이들은 만족했고 지금도 그렇게 입어요. 그렇게 한 이상, 그들에게는 그 육군 밀러터리 룩에 담겼던 그 무드가 분명 유전자제로 섞여 있을 거예요. 그들은 고요하지만 언젠가 불평과 불만이 극도에 이르렀을 때는 들고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을 거예요.
한때 트렌드했던 캐주얼에서 그 캐주얼을 클래식으로 바꿔버렸을 때, 그게 그들이 포말한 것을 거부하고 (들고 일어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의식 구조, 집단의식 구조에 가소시켜놨던 하나의 문화 인자일 거예요. 그런 인자를 한국의 젊은이들이 받아들이죠. 안 되죠. 옷은 그렇게 입었는데 그 무드가 안 따라오죠.
한국 친구들이 아메카지 스타일을 입으면 전부 노숙자 스타일이에요. 그들의 스트리트 스타일은 아무리 봐도 거리를 걷는 스타일이 아니라 거리에서 노숙하는 스타일이에요. 여러분들 제가 이렇게 입고 있는 이것을 자켓이라고 치면, 보통은 초어 자켓 (Chore Jacket)이라고 그러잖아요. 아니에요. 제가 입고 있는 건 초어 자켓이 아니라 릴로이 자켓이에요. 여기 매듭이 있죠. 제가 물론 팔이 짧아가지고 걷어놨지만요. 걷어가지고 내려올까 봐 제 마음대로 조작해가지고 이렇게 똑딱이 붙여놨지만 이건 릴로이 자켓이에요. 무슨 얘기냐?
담긴 무드가 다른 옷이란 얘기예요. 이거는 과거에 영국 식민지 지배 세력이 인도 북부의 식민지권에 들어오지 않았던, 그곳 인도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영국 왕실의 옷을 해체해가지고 재구성한 옷이에요. 그래서 그런 옷을 왕실 자켓이라고 불러요. 비슷해 보이는데, 하나는 릴로이 자켓이고 하나는 초어 자켓이에요.
워크 자켓은 풀면 안 돼요. 워크를 못하잖아요. 이 단추를 풀면 일을 못하잖아요. 당장 공구 같은 걸 여기 집어넣어야 되는데요. 저는 공구를 집어넣지 않고 포켓스케어를 집어넣어요. 꼭 여기(위 포켓에)만 집어넣는 법 없어요. 인도의 분들은 여기(아래 왼쪽 포켓)에 집어넣어요. 왜? 그분들은 왼손을 언제나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왼손이 닿는 데 수건을 집어넣어요. (오늘) 일부러 이렇게 입고 온 거예요.
아무튼 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어떤 무드를 만들어주는가는 굉장히 중요해요. 그 무드에 의해서 계속 선택의 선택이 꼬리를 물어버려요. 근데 뇌는 용량이 제한돼 있어요. 일부분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다시 가소화할 수 없다는 거예요. 가소했지만 왜 그걸 태울 소(消)자를 쓰지 않고 그냥 조소할 때 소자만 쓰느냐? 굳지 않는다는 거예요. 다시 치대서 다시 만들 수 있어요. 인간의 뇌는 죽는 날까지 재조직될 수 있어요.
사물에 반응해서 훈련적으로 반응했던 뇌의 구조를 가진 동물들은 그걸 바꿀 수가 없어요. 후회라는 개념도 있어봐야 그건 실패에 대한 아쉬움일 뿐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자신을 재조직하기 위한 후회는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그나마 많은 동물 가운데서는 특이할지도 몰라요. 영장류라고 해서 영장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습니다만, 영장에 가까운 것이 뇌를 통해서 자기를 그렇게 조직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조직하는 실체도 또 뇌 안에 있는 그것 아니냐 결국 그놈이 돌고 도는 거 아니냐 이런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저는 드리고 싶고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어느 순간 느껴지게끔 마지막 이야기로 남겨둡니다.
가소성의 표준으로 반다이
이제 한번 가볼게요. 그러면 이런 전제 하에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뇌라는 진흙은 굳이 비유컨대, 진흙은 어떤 방향을 향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지어냈다 허물었다 지어냈다 고쳤다 하는 것일까? 그 표준에 대해서 주어진 것도 이야기로는 있어요.
그렇게 표준으로 지어져 있는 가장 바람직하게 조소되어서 작용해야 되는 바를 옛말로는 ‘반다이’라고 했어요. ‘반다이’ 또는 그렇게 된 모습을 ‘반진’이라고 불렀어요. 반진! 우리 말 ‘반드시’도 거기서 와요. 우리가 ‘반드시’라는 것은 그 ‘꼭’이라는 의미하고 달라요. ‘꼭’이라는 것은 깡패들끼리 서로 약속을 해서 어떤 경우에도 어김없이 지키겠다면 그건 ‘꼭’이에요. 이 약속은 꼭 지킨다! 깡패들끼리는 할 수 있는 약속이에요.
반드시 지킨다는 것은 그 약속에 담긴 원칙을 지키겠다는 거에요. 그 표준을 지키겠다는 거에요. 그거는 어쩌면 제가 말하는 뜻의 선비 (조선시대 선비가 아니라) 밝은 곳으로 자신과 타인을 이끌어가는 존재로서의 기준일 거예요. 그런 선비로서의 기준일 거예요.
아무튼 그것을‘반진’이라 그래요. 심지어 앉을 때도 그렇게 앉아야만 반드시 앉았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 ‘반듯하다’와 ‘반드시’는 사실 같은 말이에요. 모드와 무드가 원래 같은 어원에서 나와서 조금 달라지듯이. 모드가 나중에 e가 없어지고 e가 앞으로 옮겨와도 어근이 되는데, 그렇게 하면 ‘측정 가능하다’의 measure, medium 등 이런 게 되요.
아무튼 그렇게 앉는 걸 ‘팽댕이’라고 불렀어요. ‘반다이’라고 불렀어요. ’팽댕이’라는 말은 지금 사라져버린 말이에요. 유감스럽게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팽댕이’라는 말은 어쨌든 우리가 ‘책상다리’하고 앉는 모습을 말이에요. 책상이 생기고 나서 그렇게 앉았겠어요? 그럼 책상이 없었을 때는 그렇게 앉는 걸 뭐라 불렀을까요? ‘팽댕이’라고 불렀어요. 팽댕이 치고 앉는다고 불렀어요. 팽댕이 하고 앉는다!
그렇게 않는 자신을 무언가 재조직해 가는 데 있어서, 원래 그 진흙 안에 마치 뇌라는 진흙 안에 담겨 있는 뭔가의 씨앗이 있는 것처럼 얘기해 오는 그런 언어 구조가 있었어요. 이런 언어 구조가 있는데 요즘 들어서 그런 언어 구조가 잘 안 쓰이고 있죠. 심지어 언어 자체가 모호하게 쓰이고 있죠.
자신의 무드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저는 딴 얘기로 정치 혐오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정치라는 것 자체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정치를 너무 혐오합니다. 왜? 가장 큰 이유는 언어가 모호해요. 뭔 말인지 들어도 모르겠어요. 젊은 정치인일수록 더 모호해져 가요.
저는 이준석 씨 얘기를 들으면 뭔 말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좋아합니다. 왜? 젊다는 하나만으로 엄청 좋아합니다. 기성세대와 오직 이준석만 대선에 출마한다면 저는 이준석을 찍어줄 거예요. 그 모호함에도, 마음에 안 듦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직 40이 안 됐다는 그거 하나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가 싸가지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 제가 그걸 싫어하느냐? 뭐든지 말을 분명하게 하라는 거예요. 애매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애매한 것은 자기 안에 무드가 없다는 뜻이에요. 어떤 무드도 없다는 뜻도 돼요. 자신의 중심이 되고 있는 무드가 없다는 뜻이에요. 자신의 중심이 되고 있는 무드가 있는 사람은 말을 그렇게 모호하게는 못해요. ‘모호하게’가 아니라 핑계는 댈 수 있어요. 핑계대는 말도 분명하게 핑계를 대고 이건 이걸 하겠다는 것인지 저걸 하겠다는 것인지 이게 옳다는 것인지 저게 옳다는 것인지 자기 안에 무드가 없으면 그렇게 돼버려요.
우리의 시대가 점점 무드를 무시하는, 따라서 무드 없음이죠. 무드라는 건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뭔가의 흐름이에요. ‘머후리’이에요. 멋과 흐름이에요. 이른바 풍류(風流)예요. 류라는 건 놀자는 뜻이 아니라 나를 움직이고 있는 나의 주된 정서, 감정, 이성, 이상 등을 총괄해서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틀 아닌 틀이에요. 굳어 있지 않는 몰랑몰랑한 하나의 틀이에요.
언제나 거기에 따라 재조직 될 수 있는, 그래서 재조직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다른 거예요. 다른 동물은 학습을 통해서 오늘보다 내일 더 배워가고 모레 더 배워 갈 수는 있어도, 오늘보다 내일이 새롭고 내일보다 다음 날이 새로운 일일신 우일신(日日新又日新)을 할 수가 없어요. 일일신 우일신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 자체가 인간의 의식이 가소성 의식이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삶이 가소성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얘기하죠. “냅둬. 나 이렇게 살게!” 이건 뭐죠? “나 짐승으로 살게.”제가 지금까지 그렇게까지는 얘기 안 했었어요. 지금까지 어떻게 얘기했느냐 “그냥 빙의 돼서 살게, 과거에 주어진 어떤 의식에 내가 빙의돼서 살게!” 그렇게 표현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오늘의 얘기로 표현하면 “나는 하나하나 더 배울 뿐, 있는 그대로 살 거야”라는 것은, 주어진 DNA 구조대로 살아버릴 거야! 아니면 지금까지 가소해 온 대로 살아버릴 거야! 난 지금부터 동물이니까 건드리지 마!
동물이 아니라면 내가 오늘도 가소형 상태로 존재한다는 거에 대한 믿음과 확신과 희망이 필요해요. 그래야만 나는 일일신 우일신 할 수 있어요. 또 일일신 우일신하기 때문에 가소형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내가 가소형을 증명하는 것이 일일신 우일신이니까요. 그걸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하게 자신을 얘기하라는 거예요.
요즘 유튜브를 보다 보면 수많은 정보를 보면서 뭔 말인지 모를 때가 너무 많아요. 이건 포멀해요! 드레스해요! 이건 맛이 뭐 밀키해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근데 그분들과 비슷한 무드를 갖고 있으면 이해가 될 수 있겠죠.
그러나 어떤 무대에 있어서도 모호한 말을 생산하지는 않아요. 확실한 맛을 얘기를 하죠. 맛이 밀키하다고 말하지 않죠. “우유를 먹는 듯 부드럽고 그러면서 살가운 느낌이 있어요.”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게 얘기하라는 거예요. 드레시는 뭐가 드레시예요? 그럼 캐주얼은 드레스가 아니고 그러면 이거 포말만 드레스예요? 아니잖아요. 드레시가 뭔 뜻인지 포말이 뭔 뜻인지 모르겠어요.
근데 이준석씨 얘기를 했지만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님의 이야기도 모호해요. 심지어 지금은 비교적 분명했던 정의당 분들의 이야기도 모호해요. 정치하는 분들의 얘기가 다 모호해요. 어떤 경우에는 아직도 우리 사회는 두 갈래 열사가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쫓겨나는 걸 싫어했던 분들은 그날 네 분 돌아가셨다고 그분을 열사라고 그러잖아요. 또 어떤 분들은 여전히 사회에 어려운 곳에서 목숨을 잃은 분도 열사라고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근데 그런 분들을 추모하는 자리에 나오는 용어들도 모호해요.
알투스 인디
이 사회가 전체적으로 무드를 잃고 있다는 건데요. 무드가 있는 개개인을 라틴어로 뭐라 부르느냐 알투스 인디(altus indi)라고 부릅니다. 알투스는 고귀하다는 뜻입니다. 고귀한 이유는 자기가 자신을 가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신분이 높아서 고귀한 것이 아니라, 돈이 많아서 고귀한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있어서 고귀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의 삶을 가소형 형태로 늘 바꿔가고 새롭게할 수 있기 때문에 고귀한 것”입니다.그 래서 알투스입니다.
그런 개인들이 그런 알투스의 무드를 가지고 있을 때 ‘알투스 인디’라고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사회적인 운동은 알투스 인디 운동입니다. 개개인의 인디비주얼(individual)이, 개개인의 인디가 알투스 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사회 자체로서 사회 문화를 갖기가 어려워요.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어떤 사회든 이건 많이 가소시켜야 된다는 것이 많은 사람에 의해서 지적될지라도, 하나의 무드가 있는 사회는 쉽게 재난을 맞이하지 않아요. 재난을 맞이해도 극복을 해요. 근데 그런 무드가 없는 사회는 한번의 재앙이 오면 바로 무너져요.
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이 온다면, 적어도 다른 경제적인 조건에서의 성숙함 등을 다 없애고 개인적인 무드의 충만한 상태로 본다면, 지금은 감당 안 될 거예요. 지금은 금융 구조도 그때보다 너무 안전하고 다른 요소들이 많아서 극복이 되겠지만요. 개인적인 알투스 인디 정도로 본다면 안 될 거예요.
아무튼 그렇게 가는데 어느 정도 선에서 가소를 해놓고 그대로 살아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요. 그런 노인을 뭐라 그러죠? 말씀드렸죠. 삯다리라고! 그냥 삯기만 한 거예요. 안에 있는 가소형 의식 구조는 그대로 굳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몸만 삯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분들은 삯다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대충 사회 평균만큼 가소가 된 거예요. 재가소가 된 거예요. 그러면 늙은이라고 하죠. 자신의 껍질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적극적으로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가소시켜 나가면 그 경우를 ‘어른’이라고 불러요.
현재 대한민국의 어른은 1%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삯다리가 98% 노인이 1% 정도 그리고 많이 잡아서 어른이 1%정도. 노인과 어른을 함께 잡아도 겨우 2% 정도로 보여집니다. 아무리 멋있게 입고 다니고 멋있는 말을 하고 교양이 있어도, 자신을 재창조할 줄 모르는 분은 더 이상 고귀하지 않아요.
어른이라는 것은 고귀한 늙음에 대해서 붙이는 이름이죠. 그래서 그렇게 될 텐데요. 어떤 분들이 이렇게 말하면 자기 욕이에요. “내가 몸이 늙었지 마음이 늙었냐?” 마음은 더 늙어야 돼요. 많이 가소화할수록 많이 늙는 거잖아요. 그렇죠?
마음은 훨씬 더 빨리 늙어야 돼요. 몸보다도. 몸이 40되면 마음은 벌써 60대나 70대에 가 있어야 어른의 가능성이 있어요. 물론 재창조하면서 가야 하고요. 굳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60이면 이미 저승 문턱에 가 있을 만큼의 자기 가소성이 돼 있어야 돼요. 의식에서 아름다운 노을이 지고 있어야 돼요.
스스로 다시 가소(可塑)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런 내일을 위해 이런 언어도 이야기하고 몸 이야기도 하고 합니다. 지난번에 제가 못 온 거는 사실 아파서 못 왔는데요. 10년 만에 다시 살이 내리는 흐름이 있어요. 제가 살을 못 내렸던 이유가 오랫동안 계속 장출혈이 있어서 못 내렸는데, 그게 좀 완치가 돼 가는지 살이 내리는지 그날 기름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날 아침에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그 기름기가 그냥 속을 뒤집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어지럽고 막 구역질이 계속 나고 그래서 오늘 움직이면 2주일은 앓겠구나!해서 결례를 무릅쓰고 오늘 그냥 쉬자 그러고 지난주에 못 뵀습니다. 그러다가 오후 3시쯤 돼가지고 끝날 무렵에 가라앉았는데 대변을 보니까 건더기는 없고 완전히 그냥 식용유 한 통 풀어놓은 것 같은 전부 기름만 나왔어요. 그래서 몸이 이렇게 좀 변하는구나 싶어 못 나왔는데요.
그때 든 생각이, ‘이야기 틀을 조금 바꿔가면서도 해보자!’ 괜히 몸에 관한 거 쭉쭉 해봐야 기억 못하실 테니, 기억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다른 이야기도 곁들여가면서, 더 길게 하면 더 길게 하고 너무 길어서 못 오시면 할 수 없고요. 저는 세 분 남을 때까지는 할 겁니다.
아무튼 자신을 재가소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고귀하다! 그래서 영적이고 영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자기 가소성을 가지지 못한 아이는 3천CC, 5천CC의 용량을 가져다 해도 제 판단으로는 고귀하지 않아요. 그렇게 따지면 AI는요? 뇌 용량으로 대비하면 몇CC나 될까요? 인간 정도의 역할을 하는 정도의 뇌질이라면, AI 중에서 구체적으로 알파고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뇌 용량을 가져야 비슷할까요? 인간 뇌로 환치한다면요. 아마 파워팰리스만은 해야 되겠죠. 몇 천 CC 이런 급이 아니라 아예 단위를 엄청 다르게 해야만 되겠죠.
그런데 그는 가소하지 않아요. 학습할 뿐이에요. 학습만 하면 동물이에요. 그러니까 동물만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요. 돈 버는 데는 오히려 학습이 더 필요할 수 있고, 권력을 획득하는 데도 학습이 더 필요할 수 있어요. 정치를 오래 하던 사람들은 거의 인간성을 상실해요. 왜? 학습을 잘해야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자기 가소를 잘하는 사람은 혁명가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을 바꾸는 자기 탐험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영혼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는 여행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엄청 돈 잘 벌고 엄청 권력을 잘 잡는 사람은 되기가 어려워요. 왜? 끊임없이 가소화하기보다는 일정한 가소화 형태에서 학습을 해서 덧붙이는 게 나아요. 그래서 정치하는 분들을 가엾게 생각해요. 영혼으로 보면 너무너무 가여운 분들이에요.
그런데 그분들에게는 그걸 멀게 해줄 수 있는, 눈 멀게 해줄 수 있는 게 존재하죠. 아까 그랬죠. 보면 보는 것에 의해서 욕망이 자라고, 냄새 맡는 것에 의해서 그것이 그리워지고, 맛보는 순간 편안해지고 집착하는데, 그들에게는 더 많은 맛볼 것과 냄새 맡을 것과 보는 것들이 이제 주어져요. 그걸로 대신하는 거죠. 이런 거래가 좋은 거래는 아니라고 봐요. 저는 여기에 여러분들이 더 좋은 거래를 위해서 더 좋은 거래를 생각하기 위해서 모였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산 허리와 사람 허리
이제 다시 몸 얘기로 좀 넘어가 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앞에 서면 늘 여유가 없어요. 여유가 있어 보일지 몰라도... 중간에 물 한 잔 제대로 못 마셔요. 오늘은 여유를 갖고 저는 더우면 벗어도 되는 릴로이 자켓이에요. 릴로이 자켓은 그 사람들이 웬만하면 마로 만들어요. 일하는 사람들의 자켓과, 코튼 자켓과 구분하려고 한겨울에 많은 춥지만요.
몸이 이제 아까 했을 때 반다이를 얘기했고, 반진을 얘기했습니다. 이 반진을 처음에 산의 형태로 일단 그린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산에 허리가 있듯이. 원래 우리 인간에게 허리가 있어서 산 허리가 있는 게 아니죠. 산 밑의 원래 이름이 허리예요. 그걸 우리 사람한테 갖다 붙인 거예요. 원래 허리는 산의 허리인 거고, 사람은 사람 허리라고 해야 돼요. 그런데 그렇게 바뀌는 게 비일비재해요.
여러분들 추풍령 아시죠? 추풍령 원래 이름도 아시죠? 가을바람재가 아니고 그건 일본이 한 건 아니지만 거의 일본식 엉터리 이름 붙이기예요. 초바재의 음차죠. 초바는 뭐냐? 일본말로 하면 소바예요. 현대어로 치면 ‘메밀재’였어요. 메밀이 많이 나던 곳이라는 얘기죠. 가을바람이 추풍령에만 불겠습니까? 지금 추풍령을 가을 바람으로 해석하니까 스산하고 그러죠. 거기 계시는 우리 까만사과라는 분은 늘 그러면 가을 바람만 맞고 사실 텐데요.
아무튼 초바재예요. 그러면 초바재의 초바의 일본식 이름이 소바고 우리 이름은 메밀이에요. 그러면 메밀이라 해서 메는 뭐죠? 산밀은 무엇일까요? 그건 임진전쟁 이후에 수입된 곡물이에요. 우리 말 같지만 사실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어근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곡물의 이름이 밀이에요.
그 밀이 들어와 국수를 해먹으니까 너무 좋아요. 그냥 뭉치면 돼요. 우리 메밀 가지고 국수 하니까 자꾸 부서지고, 전분도 넣고 해서 겨우겨우 먹는데요. 오죽하면 조선시대에 그런 얘기가 나왔겠어요. 그때 메밀이 아니지만 “메밀로 국수해 먹느니 차라리 녹용으로 국수해 먹지” 라고... 얼마나 잘 반죽이 안 되면 그랬을까요?
이제 밀이 들어오고 나니까 반죽성 좋아서 콩가루랑 섞어도 되고 온갖 가루랑 섞어도 물만 부으면 반죽이 되는 거예요. 곡물 세계에서 지금까지 국수 같은 걸 해먹던 것을 밀이 다 덮어버린 거예요. 적어도 평지는 원래 있던 국수 해먹던 재료인 지금의 이런 메밀은 산으로 다 밀려난 거죠. 그리고 이름마저 뺏겨버렸어요. 없어져 버렸어요. 초바는 사라지고 평지에 있던 밀에다가 산자를 붙여 메밀이 돼버린 거예요.
사람 몸도 그래요. 사람 몸에 원래 허리가 있던 게 아니고 산에 있던 게 허리고, 산에 있던 게 등이고, 산에 있던 게 마루예요. 산을 칭하던 이름이 인간에게 와서 등이 되고 마루가 되고 머리가 됐죠. 등이 되고 허리가 됐는데 그 다음부터는 산이 원래가 아니었던 것처럼 2차적으로 가서 산허리, 산등성이, 산마루가 돼버린 거예요. 사람이 바꿔 치기 하면 어쩔 수가 없는 거죠. 그저 그 정도 바꿔 치면 고마운 거죠.
여러분들 옷 입을 때 일요일이어서 옷을 턴업(turn-up)해서 접는 거 있죠. 그건 뭐죠? 카브라라고 그러죠. 일본 말이죠. 일본 말 카브라죠. 그러면 일본 말 카보라는 뭐죠? 순무죠. 강화도에 나는 순무죠. 순무의 영어가 뭐죠? 터닙( turnip)이죠. 터닙과 발음이 비슷한 게 턴업이죠. 턴업이 일본어로 들어오니까 터닙으로 착각해가지고, 터닙을 갖다가 사전에 찾아보니까 순무예요. 순무의 일본식 발음이 카브라(カーブ)예요. 카브 또는 카브라예요. 그래서 그냥 턴업이 어느 날 카브라가 돼버린 것이 이름은 그렇게도 바뀌어요. 그러니까 이름에 굳이 집착하실 필요 없고요.
이름과 거부 그리고 초로
우리가 집착할 것은 초로죠. 그런 껍데기에 붙은 이름을 지금은 우리가 일러줌에서 이름이 왔죠. 이름이라는 말, 이 이롬 하는 것은 조선 초기에 나오는 말이에요. 이름은 훈민정음 시대 때 나오는 말이고, 그 이전까지는 이름을 삼국사기 지리지 등을 통해서 보면 이름의 이름이 ‘거부’예요.
사람에게 붙여진 약속의 이름이 거부예요. 사람 이름을 그렇게 불렀어요. 근데 거부라는 것이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이름은 약속이에요. 예를 들어서 엘리자베스 2세 심지어 2세면 그 2세가 약속이에요. 엘리자베스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혈통의 이름인 것이고요.
그렇게 약속으로서 껍질에 붙여진 이름이 거부예요. 그런 거부 외에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에서, 그 목적을 희망해서, 너는 이런 무드로 살아줬으면 좋겠어! 이런 인생을 살아줬으면 좋겠어! 하는 또 다른 사람의 소망이 있겠죠. 그 소망 또는 자기도 소망이 있겠죠. 그래서 붙이는 이름을 한자로는 자(字)라고 불러요.
자를 우리 말로 초로라고 불러요. 초로는 뭐냐? 우리 말로 철이라는 뜻이에요. 철 들었다 할 때 철이 스틸(steel)이 아니고요. 철 들었다 해도 초로 값을 한다! 내게 붙여진 이름값을 할 정도가 되었다! 철 잘 들었다!현재는 거부도 초로도 아닌 이름들이 문화가 엉망이 되면 존재하죠.
초로라는 것이 있는 문화권이 아닌 거부만 있는 문화권과 닮아갈 때, 초로를 붙여주는 문화권이 거부만 붙이는 문화권을 닮아갈 때 생기는 모호한 이름들이 인디언들의 이름이에요. “주먹쥐고 일어나”와 같은 것은 사실 거기에 특별한 소망이 크게 담겨 있지 않아요.그렇다고 순수한 약속만은 아니에요. 약간의 의탁과 약속 50%, 소망 50%. 그런 것이 엄밀하게 보면 초로의 쇠락이죠.
그래서 아무튼 서양의 이름들은 대개 약속으로서 주어져요. 카이사르의 뜻이 무언가가 중요하지 않아요. 아우구스투스의 뜻이 뭔가가 중요하지 않아요 약속이에요. 그에게 붙여진. 근데 우리의 이름은 초로라는 걸 갖고 있어요. 개념 지향적으로 무언가 무드가 지향성을 가져야 된다는 거에 대한 강박 관념이랄까, 사회 문화랄까 이런 게 작용했던거죠.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기 스스로가 자기에게도 붙여요. 그걸 자호(字號)라고 불러요. 스스로 자라고 부르지는 못하고 자는 타인이 내가 아직 그런 의식을 못 가졌을 때 이렇게 부여해 준 이름이고. 자신이 스스로 붙이는걸 자호라고 불러요. 나 이렇게 살고 싶어! 나는 이런 사람이고 싶어! 나는 이런 사람으로 지금 산다고 스스로 생각해! 이런 거죠. 그걸 자호라고 부르죠.
그래서 퇴계(退溪)라 그러면, (자기가 붙였다면) “거기 시냇가로 물러나 살겠소.” 그런데 퇴계는 자호는 아닙니다. 보통 이제 자호가 아닌 택호(宅號)가 있어요. 당호(堂號)와 택호가 있는데, 이것은 거의 ‘거부’에 가까워요. 살아온 결과물을 보고 저분은 저기 율곡 출신이니까 율곡이나 율곡당 혹은 율곡헌이나 율곡댁 이렇게 되는 거죠. 그걸 택호 혹은 당호라고 불러요.
그렇게 택호와 당호가 있었고, 이렇게 자호가 있고, 字가 있다면, 사람들이 字와 字號를 중심으로 살고 있으면서 그런 것이 하나의 사회 문화로 되고, 사회 문화의 형태로서 뭔가를 함께 누리고, 의무로 삼는 것도 있다면 의무로 여기는 것! 그것을 뭐라고 부르냐 하면, 우리가 제사(祭祀) 지낼 때 ‘제(祭)’라고 불러요.
제사(祭祀)와 지사(祗祀)
우리가 집에서 지내는 제사는 제사라고 부르면 안 돼요. 그것은 지사(祗祀)라고 불러야 돼요.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분들이 있죠. ‘지사 지내려고 한다’고. 그게 맞는 말이에요. 보일 시(示)자 옆에 낮을 저(低) 자가 결합된 그 지(祗)라는 글자를 쓰는 거예요. 신기라고도 발음하기도 하는 그 글자는 이제 개별적인 어떤 조상 혈통 계통의 ‘거부’를 모시는 행위예요.
‘거부’를 신격화시켜 놓으면 과거화된 돌아가신 분이죠. 과거화된 거부를 신격화시켜 놓은 것이 ‘지’에요. 그 분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지사예요. 시골에 조상을 모시러 가는 것은 지사 지내러 가는 것이지, 제사 지내러 가는 것은 아니에요.
제사는 사회적으로만 지내는 것이에요. 공동체가 함께하는 행위예요. 축제에나 쓸 수 있어요. 축지(祝祗)라고 하진 않아요.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는 지(祗)가 축(祝)이 안 되죠. 축하할 만한 거대한 게 안 되죠. 우리는 지금 지사를 제사라고 하고 있는데, 왜 그런 말이 나왔느냐?
고려시대 때까지 공동체에서 했던 제사, 즉 개별적 무드들을 가진 사람들의 총합으로써 공동체의 사회적 무드, 그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행사였던 제사를 조선시대 때 가정으로 갖고 들어오면서 이름도 안 바꿔버린 거예요.
특히 작은 집안이 아니라 큰 문중일 경우에는 그걸 제사로 그냥 삼아버린 거예요. 엄밀하게 말하면 제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이제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 없어요. 고려시대 때 팔관회 연등회 등 이런 것도 하나의 제사예요.
제사는 귀신을 모시고 그런 행위가 아니라, 사라진 조상신을 모시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사회의 여러 무드들이 함께 공존하는, 하나의 거대한 행사 놀이 그런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축제가 필요해요. 제사가 필요해요. 그런데 제사가 없어요. 지사(祗祀)를 제사(祭祀)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런 거죠.
우리 이혼이라는 말도 지난번에 말씀 드렸나요? 원래는 해혼(解魂)이고, 이혼은 소박이라는 뜻을 가진 건데요. 지금은 약속이 그렇게 되니까 괜찮다고 하지만 아무튼 그런 지향성이 많이 남아 있어요. 그런 지향점을 빼버리면 어느 순간 어떤 집단의 이야기는 없어져버려요. 어느 집단이 그런 언어로 그런 이야기를 갖고 있을 때, 그 언어는 사라지지 않아요. 그 집단의 정통성도 사라지지 않아요.
성인식이 필요한 이유
그래서 저는 성인식 꼭 하자는 거예요. 20살쯤 되면 성인식 할 때, 아이를 불러서 친구들 다 오라 하고, 친척들도 다 모여라 하고, 또 알릴 만한 지인도 웬만큼 모여라 해서, 모일 만큼 모이게 하고요. 아이에게는 일주일 전부터 “네가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반성하는 A4지 3페이지 이상,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다를 설계하는 3 페이지 이상 써서 그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읽고 약속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부터 부모 또는 누군가로부터, 요즘 말하는 멘토로부터 자(字)를 받으라는 거예요. 자를 받고 그렇게 살겠다고 약속하라는 거예요. 약속하고 그 약속과 함께 모였던 사람들이 다 금일봉 내서 그에게 자립의 기회를 주자는 거예요.
그렇게 안 되면 이제 이 사회에서는 못 버텨요. 그렇게라도 무드를 만들 수 있는, 무드를 만들어서 자기를 재생산할 수 있는 인간들을 만들어 나가야지, 그냥 인구만 늘리면 뭘 해요. 우리가 본능이 있어 인구를 줄이고 있는 건데요. 그런 건 형식이 아니라는 거죠.
원래 성인식이 그런 거였어요. 근데 성인식이 어영부영 ‘거부’의 문화로 다가가고 쇠락하면서, 그냥 애들에게 고통이나 주는 그런 문화로 돼버린 거죠. 원래 성인식은 적어도 사라진 어느 집단의 문화에서는 그랬어요.
그리고 사라진 어느 집단에도 정치는 있고 지도자는 있었겠죠. 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되고 있었던 것은 퇴임식이에요. 저는 대통령 취임식 하자고 할 필요 없다고 봐요. 뭐 알아서 혼자 선서하라 그래요. 국가를 잘 지키겠다 선서하면 돼요. 국민들이 보이는 앞에서 선서했다고 해서 지키나요? 안 한 대통령이 있나요? 지킨 대통령이 있나요? 조금씩 덜 지켰다 더 지켰다 갖고 서로 그냥 다투는 것도 웃기는 세상인데.
퇴임식을 할 때 반드시 한국으로 치면 광화문 꼭대기에 올라가서, 누각보다 낮은 그곳에 맨발로 올라가서, 모자 쓰지 말고 파자마 비슷하게 제일 이지웨어를 입고 나와서, 국민들로부터 심판 받으라는 거예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자기는 이러한 목표를 갖고 대통령이 돼서 이런 일을 하려고 했고, 이런 일 중에서 얼마나 이루었고 얼마나 이루지 못했다! 내가 못했다고 생각하면 돌로 쳐죽여라! 그렇게 하는 퇴임식이 필요하지 취임식에서 뭐 해요. 돈만 들어요. 퇴임식 그렇게 하면 돈 안 들어요. 축제에요.
그때 만약에 돌 안 맞는 대통령이 나오잖아요. 퇴임하는데 그날 광화문 앞에서부터 시청까지 잔치해요. 그런 일을 한 번만 한 나라는 어느 나라도 지구상에서 제1의 나라가 됩니다. 그 나라가 이끌어갈 시대가 온 겁니다.
그런 것이 알투스 인디의 사회적인 모습이고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스쿠트(scout) 운동이에요. 모든 잡된 것으로부터 수많은 ‘거부’가 준 그 뇌 의식으로부터 방패로 삼아서 나가자! 방패가 되려면 알투스 인지가 먼저 돼야 되고, 알투스가 된다면 나는 늘 새로워진다! 나는 나를 조직하고 있다!
나는 나를 조직하고 있다고 하지만 애매한 게 있어요. 실제 학습하고 있는 걸 놓고 조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반응하라는 거예요. 낯선 것에도 반응하고 그냥 물러서지 마라는 거예요.
남자들이 왜 필요한 얘기만 하고 사는지 압니까? 여자들은 쓸데없는 얘기도 막 한다고 핀잔 받잖아요. 진짜 쓸데 있는 이야기죠.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남자들은 왜 필요한 얘기만 하면서 삽니까?
사실은 겁이 많아서 그래요. 겁이 많으면 합리적인 이야기밖에 못해요. 겁이 많으면 기타 이야기를 못해요. 기타 잡 얘기를 못해요.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 비교적 밥도 같이 여러 번 먹고 같이 일도 하면서 친해도 잡기 얘기를 잘 못하는 것은 그 대상에게 겁이 많아서 그런 거예요. 겁이 없으면 얘기를 해요.
어릴 적 친구들하고 만나면 그런 얘기 막 할 수도 있죠. 예를 들어 요즘은 다 커서 다시 만나면 어려울지도 몰라도 자매들끼리가 편한 거죠. 그것도 아닐 수도 있죠, 뉴스 보니까 자매들도 싸우더라구요. 자매들도 칼부림하는데, 왜 칼부림하죠? 집에 칼이 있으니까!
아무튼 자기를 조직한다고 할 수 있는 착각은 겁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겁이 있으면 그렇게 착각하면서 자기를 재조직한다고 생각해요. 이 길에서 확 벗어나도, 탁 던지고 나와도 걱정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자기가 재조직 돼야 돼요. 맨손으로 빈손으로 왔지 않냐고 말하는 것은 언제든지 너를 재조직할 수 있는 상태로 있지 않냐는 뜻이에요.
자기를 재조직하는 것이 뭐가 두려우냐! 내 의식구조는 어차피 가소성인데 내가 나를 굳히고 있어서 내가 굳어지는 거지요. 다리를 하나 잘라도 뇌에서는 이미 그 다리를 감각하던 감각이 다 사라졌어요. 가소돼버린 거예요. 근데 나이가 들어 잘리잖아요. 다리가 있는 것처럼 계속 착각을 해요. 굳은 거예요.
어릴 때 애초부터 없었잖아요. 그런 생각 없어요. 그리고 그 기능이 딴 데 가요. 눈이 멀잖아요. 눈이 없어지면 거기를 관장하고 있던 가소된 의식이 싹 바뀌어 딴 데로 가 딱 결합돼요. 그래서 보는 것에 유사한 그 기능이 냄새 맡는 것이 생긴다든가, 맛보는 데 생긴다든가 해요. 듣는 데 생긴다든가.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내가 지금 눈이 없다 생각하고 걸어가 보면 굉장히 어려울 텐데 한 1시간 가보니까 좀 나아지죠. 학습이 돼서 나아진 것 같죠? 학습돼서 나아진 것보다 뇌가 이미 가소된 거예요.
그러니까 없으면 없는 대로 다른 거로 가가지고 벌써 길을 찾아갈 수 있고 더 오래 가속화되잖아요. 옛날 영화에 나오는 그 맹인들, 일본 영화 <자토이치>에 나오는 맹인 안마사를 보면 지팡이 없이도 찾아가요. 그냥 걸어요. 심지어 침을 탁 뱉어놓고, 탁! 소리가 주변 사물에 울려 나오는 것을 보면서 방향을 알아서 가요.
이미 다른 식으로 뇌는 가소돼버려요. 뇌가 그렇게 가소되는 것은 뇌를 가소시켜도 되게끔 뇌가 애초에 디자인됐기 때문이에요. 그 디자인 너머에 그 디자인의 주인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주인을 만나려면 용감해야 돼요. 어떤 식의 가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앞에 계신) 선생님은 빨간 옷도 분홍색도 화사하게 한번 입어보시면 제가 막 즐거울 것 같아요. 한번 즐겁게 해주세요.
몸 얘기를 하다가 어디까지 했는지도 까먹어버렸는데요. 천천히 하죠. 뭐 그냥 이것저것 주시면 주고받는 시간을 더 가지겠습니다. 좀 앉겠습니다(문답 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