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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강석굴사원대불, 수려한 얼굴을 가졌던 선비족 탁발씨의 북위제국 황제 얼굴이 모델,
2018년 신라문화동인회 산서성 답사
태산 당 현종 태산봉선기념비,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 중원 답사
두보의 시 망악을 쓴 청나라 서예가의 초서를 확대하여 호텔 장식.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 중원답사
신라 김생, 고운 최치원 고려 포은 정몽주 글씨
지리산 실상사 약사전
안중근 장군 유묵
재작년 세모에 통도사 홍매-자장노매慈藏老梅
통도사 자장 노매를 보고와서
윈난성 나시족의 본거지 차마고도의 출발지, 리장고성(麗江古城) 만고루(萬古樓)로 가는 길에
궁궐 뒷 골목의 어느 집 춘첩
등석여의 대련, 추사의 글씨로 유명
중국 장안성에 사는 나의 중국인 벗인 결재가 써준 우리집 편액
결재는 서예와 전각 예술가로 작품이 시안의 비림박물관, 섬서성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헌(枾軒-감나무가 있는 집)
결재로부터 선물받은 홍일대사 화엄경 대련, 전국시대 중산왕릉 금석문체
결재가 선물해준 내 인장
한나라 관인법으로 수정같이 보오얀색 곱돌인 청해석(靑海石)에 새김
결재가 청말 서화 및 전각 예술가 부로 오창석의 전각법으로 새긴 기린 조각 손잡이 수산석
해월루주海月樓主(촛불을 켜고 손님을 맞는 사람이 주인이므로 主자는 촛대를 상형한 것이나 전각에서 촛대의 불꽃모양만으로 간략하게 새기기도 한다.)
운다상즉雲茶相卽(화엄연기를 표현)-내가 간직하고 있는 틱낫한스님의 휘호를 새김
명말 장호(張灝)가 환관의 발호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전에서 뽑아낸 말을 당대의 대표적 전각가들에게
새기게 하고 엮은 학산당인보(學山堂印譜). 장호는 전각으로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남겼다.
실학자 청장관 이덕무가 인보의 글귀에 매력을 느껴 소책자로 엮어서
친구인 초정 박제가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나의 벗 이덕무가 풀이글을 직접 베껴써서 내게 서문을 청하였다.
아! 압록강 동쪽에서 무덤덤하지 않게 책을 보는 자가 몇이나 되랴.
결국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
-박제가, 학산당인보 풀이글에 붙인 서문
정민 교수가 추사의 선배들인 북학파 실학자들 연구를 하며 알게 된 문헌이다. 1998년 타이완에 교환교수로 가서
정경륭(鄭景隆) 선생에게 전각을 배웠고 결과물이 2000년에 이 책 초판이다.
2012년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옌칭도서관)에 방문학자로 갔다가 희귀본
서가에서 학산당인보의 원본과 마주했다. 그래서 전 권의 모든 인장을 정성껏 촬영하고, 초판에 수십 방의 인장을 보태어
2017년 가을에 이 책을 출판하였다.
전각은 서예와 조각, 회화와 구성을 포괄하는 종합예술이다.
결재가 전국시대 진나라 와당(막새기와) 탁본에 표제와 발문을 써서 나에게 선물해준 것.
전국시대 진(秦)나라 와당(막새 기와)은 주로 동물 문양이다.
2,000년 전 고조선 시대의 문양이 오늘에도 이어진다. 중국문명의 지속성은 놀랍다.
고졸하고 웅혼한 서체의 전각 인장과 진시황 이전 시대의 이 와당 탁본 선물을 받고
나는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군자표변-역경의 혁괘 효사,
표범이 털을 갈듯이 혁신한다는 좋은 의미이지만 오늘 우리말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임
쌍환-한 쌍의 오소리-부부 간의 금슬과 지조, 기쁨을 상징.
기쁠 환(歡)자와 오소리 환(獾)자가 음이 같아서 의미가 통한다.
정민 교수가 중국의 와당 도록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선별하였다.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던 실학자 초정 박제가도 보았던 와당들이다.
추사의 서체도 한나라시대의 와당 예서(8분예서)에 연원이 닿는다.
금석문이 다 나오자 와당이 뒤이으니
인간 세상 아득하여 이 또한 옛것일세.
아아! 역산(嶧山-진시황 때 이사가 새긴 소전체 태산각석) 빗돌은 들불에 타고 없어
서경의 온갖 서체 한갓 어지럽구나.
-박제가, 진한와당가秦漢瓦當歌
반야-쁘라즈냐-해탈을 이루게 하는 지혜의 완성
무애-걸림이 없음 화엄경의 이사무애, 사사무애, 반야심경의 심무가애
몇 년 전, 김천 황악산 아래에 손수 벽돌을 찍어 황토집을 지은 친구에게
서각 직무연수 중에 만든 서각 작품을 집들이 선물로 주마하고 약속한 지
4년 만에 올여름에 남원 지리산 아래에서 만나 서각 대신 써준 글씨
추사 이후 최고의 서예가라는 찬사를 받은 검여(劍如) 류희강(柳熙綱)의 2째 서집을 감상하고
포항 흥해 서림지 연꽃
파주 출판도시 지혜의 숲에 다녀오며 어느 연꽃 카페에 들렀다가
서울사는 처형이 선물해준 민화
목은선생의 상련(賞蓮) 시-처형에게 연꽃그림에 답례로 드림
퇴계선생의 숙부인 송재선생이 사위들과 조카들을
청량산에 과거공부 보내며 격려하는 연작 시 10수 중 첫 수
송재 선생은 장인어른의 선조되신다.
보물로 지정된 추사 최후의 절필 대련
티벹 제2의 도시 시가쩨의 따시룬뽀 승원 마당에서, 2007년 여름.
영국에서 온 답장 사진, 어서 셰익스피어를 다 읽고서 요오크셔의 노신사 부부를 만나러 가야겠다
티베트에서 만난 손자 다섯의 영국인 노부부에게 새해 선물로 부쳤다.
서예 입문 열 달 만에 쓴 장모님 84세 생신 선물로 쓴 졸필
장인어른 구순 생신 선물로 서예 입문 두 달 만에 억지로 쓴 졸필
인도네시아 보로부드르 대불탑 답사를 앞두고
중국혁명에 헌신한 중산 쑨원의 대련을 연습하고 남은 먹으로 써봄.
9월 20일에 열리는 학교 축제에 출품한 퇴계선생 가서(家書)
전지 사이즈의 대형 족자는 전시 공간이 맞지 않아서 세필로 억지로 쓴 작품
수필
서예입문기
김희준
아침에 내리는 비를 마주하니 흥취가 담박하여, 朝來對雨興悠然
남쪽 연못에 가서 홀로 연꽃을 감상하고 싶네. 欲向南池獨賞蓮
다만 두려운 것은 천태의 절이 가까워, 只恐天台精舍近
휘파람 소리에 놀라 지관(止觀)의 참선을 깨트림이네. 簫聲驚破止觀禪
사월에 서예대회에 내 생애 처음으로 출품하며 썼던 시이다. 미국 몬타나에서 우리 학교에 원어민 영어 교사로 왔던 푸른 눈의 청년과 비 내리는 아침에 경주 남산 옥룡암(玉龍庵)에서 참선을 하고 가까이에 있는 서출지(書出池)의 연꽃을 우산을 받쳐 들고 감상할 때 고려 말의 유종(儒宗)인 목은(牧隱) 선생의 이 시가 내 마음에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왔다.
지난여름, 경주의 보문(普門) 호수 가에서 열린 처부모님의 회혼례(回婚禮)에 참석하고 우리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간 서울 사는 처형에게 목은 선생의 상련(賞蓮) 시를 쓴 이 작품을 드렸다. 몇 해 앞에 민화를 배우고 전시회에 내었던 첫 작품들 가운데서 내가 좋아한다고 처형이 풍염(豊艶)한 연꽃 그림을 골라서 선물해준 것이 고마워 답례를 한 것이다. 연꽃 그림과 시를 거실에 나란히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음미하니 남모를 기쁨이 여울진다.
내가 태어나서 서예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수업이 끝나고 빈 교실에 남아 우리 반 담임 선생님께 몇 명의 동무들과 함께 붓글씨 쓰는 법을 조금 배웠다. 글자들이 내 마음의 눈밭에 곱게 쓰였다. 한글의 모음과 자음, 동그라미와 네모, 가로선과 세로선이 내 몸에 발자국을 찍었다.
집에서는 사랑방 선반에 누른색 표지의 족보 책과 아버지의 벼루함과 함께 얹혀 있던 천자문 책을 들고 외웠다. 겨울 방학에 뒷집 서당 영감님 슬하에서 천자문을 소리 내어 읽으며 배우던 형을 따라 한 것이었다. 백 년 전에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일곱 살 선친을 위하여 이틀 동안 손수 쓰신 천자문 붓글씨가 내 눈에도 아름다워 보였다. 오랜 세월에 견디지 못하고 찢겨져 나간 부분은 뒷집 서당의 훈장 영감님이 채워 넣었다. 조부님과 훈장님 글씨가 어린 형제의 눈에도 비교가 되었다. 당나라 황제들이 선호하였던 구양순체(歐陽詢體)의 조부님 글씨를 볼 때마다 형과 나는 그 조형의 미감에 감탄하였다. 한정된 좁은 공간을 자획이 지나가며 구획을 짓고 의미를 지닌 글자를 구성해 놓은 오묘함이 내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웅장하면서도 날렵하고, 세련되고도 소박하였다. 날카로운가 하면 뭉근하고 굵었다. 글씨의 한 획 한 글자에 배어 있는 할아버지의 다사로운 기운이 어린 손자의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른이 된 지금도 천자문 책을 펼치면 조부님의 체온을 느끼고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대학에 입학하여 서예 동아리에 입회만 하고 나가지 못한 나는 풋내기 교사 시절, 다재다능한 선배 교사에게 붓글씨를 배우려 하다가 시작을 못했다. 결혼하고 형님의 권유도 있어서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를 배우러 중심가에 자리한 학원을 찾아갔다. 가로세로 획 긋기부터 배웠다. 서예를 구도의 수행처럼 여기던 나에게 선생님은 서예 하는 것을 너무 어렵게 여긴다고 하였다.
어느 날 서실 회원들이 한학의 스승을 모시고 갖는 저녁모임에 따라 갔다. 학구열과 활기가 넘치던 청년 시절의 나는 줄긋기도 못다 마치고 서예는 잊고서 그 길로 한문을 배우러 서당에 나갔다. 온고(溫古) 선생님은 문묘에 배향된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사람인 회재(晦齋) 선생의 아우 되는 농재(聾齋) 선생의 후예이셨다. 젊은 날 갓을 쓰고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머물며 글을 읽었다고 하셨다. 한문 문장의 해석이야 쉽고 내용은 다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이 낭랑한 음성으로 곡조를 넣어서 글을 읽으시는 소리에 매료되어 자전거를 타고 꼬박 두 해 동안 서당에 출석하여 소학부터 논어까지 읽었다. 어린 날 겨울방학이면 어머니 곁에 누워 있는 내 귀에 형과 친구들이 뒷집 서당 영감님 슬하에서 천자문을 외던 소리가 담장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련한 기억이 어른이 된 나를 서당으로 호출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조선 왕조의 서당 문화를 체험한 마지막 세대가 되었다. 하지만 또다시 서예 입문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슬프게도 학원에 걸린 붓은 다시 나를 만나지 못하고 영영 잊히어지고 말았다.
흑단(黑檀)처럼 윤기 나는 머리카락의 청년이 머리에 서리가 치고 이마에 주름살이 깊어진 지천명의 나그네가 된 이제야 서예 입문에 성공하였다. 윈강(雲岡) 석굴 사원을 조성한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북위(北魏)시대의 북방 민족 특유의 호방하고 강건한 맛의 서체로 쓰인 장맹룡비(張猛龍碑)와 천자문을 선생님의 체본을 받아 임서(臨書)하고 날마다 점검을 받은 지 일 년이 지나서 책거리도 하고, 서예대회에도 도전하였다. 만상이 깨어나지 않은 새벽에도 쓰고, 별과 달을 등불 삼아 깊은 밤에도 붓을 잡았다. 장안성(長安城)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 곁에 사는 나의 중국인 벗인 결재(缺齋)가 새겨서 보내준 고졸하고 웅혼한 서체의 짙붉은 전각(篆刻) 인장 두 방을 내 첫 작품 관지(款識) 밑 하얀 종이 위에 선생님이 찍어 주시던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그 감격적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지난 한 해는 문방사우(文房四友)와 벗이 되고, 중학시절 한문 시간에 배운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하는 말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양털로 만든 붓은 처음에는 필봉이 굵고 짧은 것을 쓰다가 나중에는 가늘고 긴 것도 썼다. 손가락 사이에 붓대를 수직으로 잡고 손과 팔과 어깨까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중봉(中鋒)을 견지하여야 점획에 골기와 근육이 붙으며 생기가 생겼다. 붓을 꺾고 눕히고 세우며 속도와 누르는 힘 조절에 민감하게 운필(運筆)을 해야 굵고 가늘고, 길고 짧으며, 굽고 곧은 자획을 한정된 공간에 구현할 수가 있었다. 붓을 놓고 글자와 글자, 줄과 줄 사이에 생동하는 기운(氣韻)이 물 흐르듯이 하는 글씨를 얻으면 기쁨이 샘솟아 났다. 무궁무진한 묘미가 그 속에 숨어 있었다.
서예의 성패는 실로 먹에 달려 있었다. 먹물이 묽으면 퍼지고, 뻑뻑하면 붓에 스며들지 못하여 글자를 쓸 수가 없었다. 접착제가 섞인 싸구려 먹물은 벼루에 먹물이 엉겨 붙고 색도 탁해서 싫었다. 석유 그을음으로 만든 먹은 냄새가 눈을 따갑게 하여 갈아놓은 먹물을 쓰지도 않고 바로 쏟아버렸다. 입자가 굵은 먹은 거칠어서 마치 모래가 섞인 밥을 먹는 것 같아서 버렸다. 끝내는 선물로 받아 아껴두었던 먹물을 벼루에 부었다. 일본의 고매원(古梅園)에서 정성을 다하여 제조한 정밀한 먹물이었다. 전통을 잇는 장인이 송진이나 식물을 태워 얻은 그을음과 자연물에서 추출한 아교와 사향을 섞어서 만든 것이었다. 은은한 향기가 나고 먹이 번지지 않으면서 빛깔이 곱게 나왔다. 오색을 머금은 검푸른 먹의 오묘한 색감도 눈을 편안하게 하여서 좋았다. 비로소 내가 원하는 대로 붓끝에서 누에가 실을 뱉어내듯이 점획이 뽑아져 나왔다. 노자가 말하는 ‘玄之又玄(가믈고 또 가믈다)’의 신세계가 먹빛 속에 깃들어 있었다.
서예에 입문한 지 석 달이 지나서 중국 산서성을 여행하였다. 험준한 태항(太行)산맥의 서쪽 지방인 그곳은 내가 처음 익힌 장맹룡비 서체를 탄생시킨 수려한 얼굴의 선비족이 세운 북위왕조의 터전이었다. 침류수석(枕流漱石)의 고사를 남긴 진(晉)나라 손초(孫楚)의 고향이고 거상(巨商)의 본거지였던 평요고성(平遙古城)의 옛 관아에 작은 벼루 가게가 있었다. 신라 자장(慈藏) 스님과 혜초(惠超) 스님의 숨결이 서린 문수보살의 상주처인 우타이산(五臺山)의 불탑과 한시가 뚜껑에 새겨진 작은 벼루를 기념품으로 샀다. 주인이 손짓하는 안내문을 읽어보니 알갱이가 고운 흙으로 빚어서 구워 낸 징니연(澄泥硯)이었다. 당나라 시대 이래로 중국의 4대 명품 벼루의 하나이고 산서성의 특산품이었다. 어느 음식점에서 ‘端硯竹爐詩屋(단계석 벼루와 대나무 화로와 시가 있는 집)’이라고 하는 완당(阮堂) 선생의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넘치는 서예를 보고 단계석 벼루 밖에 모르던 내가 서예를 배우며 생겨난 관심과 애정이 발견한 새로운 벼루이었다. 여행 내내 상점마다 명승고적마다 걸린 능숙한 서법(書法)의 웅장한 글씨들을 볼 수가 있었다. 문득, 한자문화권 사람들이 창조하고 이룩한 문명은 붓과 먹과 벼루의 자식들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大烹豆腐瓜薑菜 좋은 요리는 두부 오이 생강 나물
高會夫妻子女孫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
지난겨울에 서울에 가서 한 송이 연꽃을 닮은 처형과 우리 부부가 삼일 독립 만세 투쟁 일백주년을 기념하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특별전을 관람하였다. 그때 고려청자 연적과 함께 본 추사 선생 최후의 절필 대련(對聯) 작품의 시이다. 제주도에 귀양 가서 가시나무 울타리 집에 갇힌 몸으로 아내와 자식의 부음을 듣고 눈물을 짓고,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간난신고를 겪은 추사(秋史) 선생이 쓸쓸한 노년에 이웃의 다정한 부부를 위하여 써준다는 방서(傍書)의 사연이 인상 깊었다. 가헌(嘉軒) 선생은 늙은 솔가지처럼 고졸담박(古拙淡泊)한 느낌을 주는 편안한 예서체 글씨로 추사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서예를 배운지 열 달이 지날 무렵에 이 대련을 선생님께 체본을 받아와서 여러 장을 임서한 끝에 두 장을 얻었다. 졸필이지만 족자를 만들어서 한 장은 장인어른 구순, 장모님 팔십사 세 경수연(慶壽宴)을 하례(賀禮) 드리며 올리고, 또 한 장은 티베트에서 만난 손자가 다섯인 영국인 노부부에게 새해 선물로 부쳤다. 서예가 내 삶에서 겉돌거나 화석화 될 수가 없고,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두세 시간 동안 글씨 연습에 몰입하고 나면 거실 바닥과 베란다에 먹물 자국이 생기고 손톱 밑에까지 까맣게 물든다. 현묘(玄妙)한 문자예술의 세계에 노니노라면 세사에 찌든 마음의 때는 어느덧 씻겨나가고 몸과 마음은 청정해지고 희열이 밀려온다.
삼백년 앞, 동해바닷가 월포(月浦) 오두촌(鰲頭村)의 유가(儒家)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보경사(寶鏡寺)로 출가하여 영남좌도(嶺南左道)의 종장(宗丈)이 되신 오암당(鰲巖堂) 의민(毅旻) 스님이 내연산(內延山) 삼용추(三龍湫) 폭포와 운주봉(雲住峰)이라고도 부르던 선열대(禪悅臺) 곁의 대비암(大悲庵)에 머무시며 당신의 내면 풍경을 읊었던 시가 이즈음의 나를 공명시킨다.
운주봉을 붓으로 삼고 雲住峰爲筆
용추를 벼루로 만들어서 龍湫作硯池
일만 폭으로 열린 바위 병풍에 巖幅開萬疊
뜻 가는대로 나의 시를 쓰리라 隨意寫吾詩
처서(處暑)의 절후가 돌아온 오늘, 여름비에 발랄한 생기를 뿜어내는 청청한 빛깔의 대숲을 시헌(枾軒)의 유리창 너머로 바라본다. 음반을 전축에 올리고 스위치를 누르자 침향무(沈香舞) 청아한 곡이 가야금 명주실 현에서 튕겨 나와 오동나무 몸통을 울리고 공기에 파동을 일으킨다. 내 숨결이 차분해지고 맥박이 잔잔해진다. 새로 얻은 단계석 벼루에 연적을 들어 청수(淸水)를 따르고 천천히 먹을 간다. 묵향 삼매에 젖어든다. 그리고 붓을 닥종이 설원(雪原)에 던진다. 한 획을 태허(太虛)에 그으니 우주가 열린다.
-문장(2019년 가을호)
***<<포항문학>>(1997)•<<수필시대>>(2014) 등단, 대구일보 수필공모전(2011•2012) 수상, 수필집 <<눈 내리던 밤>>(북랜드,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