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4일자 조선일보 <박해현의 문학산책> 칼럼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고 깊어가는 이 가을, <객주>를 읽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전 10권짜리 대하소설로 199년대 중반에 밤을 도와 완독했던 시절이 어제같군요.
당시 서민의 생활상과. 또 순수한 우리의 토속언어를 만나는 행운은 비할 데 없는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객주의 고향 청송을 밟는 기회라서 권유하는 바입니다.
박해현의 문학산책 / 靑松에 가면 客主문학관이 있다
궁핍과 함께 자란 김주영에게 인생과 문학을 깨치게 한 장터 ; 조선, 2014.10.14
비애·해학이 싱싱한 土俗語에 버무려져 大作으로 태어난 곳
水墨畵 같은 울창한 산길이 달콤한 文香마저 얻었으니…
소설가 김주영의 어린 시절 추억은 궁핍과 허기로 가득 차 있다. 1939년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서 태어난 김주영은 주린 배를 움켜쥐며 자랐다고 한다. "소낙비 뒤에 여울가로 떠내려오는 과일 껍질에서부터 개구리와 메뚜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이 먹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김주영의 어린 시절은 닷새에 한 번 시골 장터의 활기 덕분에 신바람이 났다고 한다. 김주영 소설의 곰삭은 토속어는 바로 그 장터에서 배운 언어였다. 김주영은 장터 회상을 통해 민초(民草)의 비루한 일상을 종종 해학적으로 그리곤 했다. 민초의 건강한 웃음을 반영하기도 했지만, 때때로 민초의 비애(悲哀)가 섞인 삶의 쓴웃음이기도 했다.
"키꼴이 성큼한 수탉이 속살까지 비에 젖어 측은한 몰골로 벼슬을 늘어뜨리고 망연히 서 있는데, 비를 피해 남의 집 추녀 아래로 멀찌감치 비켜선 수탉 주인 역시 비에 흠뻑 젖어있다. 비에 젖은 꼴이 측은해 보이는 닭이나 닭 주인의 형용이 조금도 짝이 지지 않았다. 그때 베잠방이 속으로 닭 주인의 측은한 몰골의 남근이 들여다보이기도 하였다."('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비에 젖은 수탉 벼슬과 사내의 양근(陽根)이 묘하게 대비돼 웃음 짓게 한다. 그런데 사내와 수탉의 애처로운 몰골에서 삶의 신산(辛酸)이 잔뜩 풍겨온다. 그 추레한 수탉 장수는 비에 젖어 춥기도 했으리라.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저잣거리에서 온갖 수난과 치욕을 감내하는 보통 아버지들의 초상이 아닐까.
김주영 문학은 민중을 찬양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민중의 다양성을 그리려고 했다. 그것은 시골 장터에서 삶과 문학을 스스로 배우고 익혔기 때문이다. 결국 김주영은 시장을 통한 역사의 형상화에 도전했다. 그는 보부상(褓負商)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를 그린 대하소설 '객주(客主)'(전10권)를 완성해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청송군은 '객주'를 낳은 고향의 작가 김주영을 기리기 위해 '객주문학관'을 지어 지난 6월 개관했다. 폐교 건물을 리모델링한 객주문학관은 부지 2만4700여㎡에 연면적 4600여㎡에 이르는 3층짜리 건물이다.
2014년 동인문학상 최종심이 지난 10일 객주문학관에서 열렸다. 김주영이 속한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김화영 오정희 이문열 정과리 신경숙 김미현 강동호)가 모처럼 청송 나들이를 해서 문학관을 둘러봤다. 김주영이 '객주'를 쓰면서 작성한 창작 수첩과 육필(肉筆) 원고가 눈길을 끌었다. 철필로 깨알 같은 글씨를 써서 수첩 가득히 채운 기록이었다. "어쩜 이리 작은 글씨로 적었는가"라고 모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주영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며 취재를 하고 소설도 써야 했다. 소설 연재가 길어지면서 나도 앞에 쓴 이야기를 다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원고를 몽땅 들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수첩에 소설 내용을 최대한 작은 글씨로 기록해서 지니고 다녔다."
소설 '객주'의 매력은 서정과 서사가 조화를 이루면서 군데군데 판소리 가락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민중의 생활 언어가 속담과 관용어, 격언과 요설을 통해 쉼 없이 흘러넘친다. '샛바람 사이를 긋던 빗방울이 멎자 금방 교교한 달빛이 계곡의 억새밭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서정성 짙은 문장으로 시작한 소설은 거침없는 서사의 물결을 따라 유장하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