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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과, 황윤길은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에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의 정사(황윤길)과 부사(김성일)이다.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말한 황윤길과, 일본을 무시하고 침략이 없다고 한 김성일의 의견 대립은 당시 김성일이 속한 동인이 우세한 조정 상황에서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이 되다.
훗날 임진왜란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오늘날에는 그 일로 인하여 비난을 받은 인물이 김성일이다.
황윤길 -
본관은 장수, 자는 길재, 호는 우송당으로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0년 일본에 가는 통신사 의 정사로서, 부사 김성일과 함께 일본에 갔다 돌아와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하여 의견을 선조에게 올렸으나 이에 반대한 부사 김성일의 의견대로 무시되었으나 2년후인 1502년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임진왜란시의 활동은 나타나 있지 않고 있으며 병조판서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김성일 -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 시호는 문충인 학자로서,
임진왜란 2년전인 일본에 정사 황윤길과 함께 부사로서다녀온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한 인물로, 2년후 일본이 침략하자 정세를 오판하여 잘못 보고한 죄로 파직되었으나, 서애 유성룡의 변호로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의병장 곽재우 등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고 일본에 항전하였다. 그후 경상우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일본에 항전하는 중 1593년 전염병으로 사망한 인물이다. 이로 인하여 임진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훗날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학봉 김성일은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서 퇴계의 학맥을 이은 인물로서, 일본의 침략가능성을 부인하는 보고를 올린 바 있어 훗날 임진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이라는 불명예를 얻었으나,
역사에는 가정이 없는 것이라지만 김성일이 그런 보고를 안했다고 해서 임진왜란이 안일어 났으리라고는 볼 수도 없고, 당시 조정의 상황에서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 도 받아들여지는 않는 상황에서 임진왜란에 충분한 대비를 하였으리라고 볼 수도 없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도 나오듯이 "김성일 자신도 "일본이 침략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없었으나,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극단적으로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인정하고 보고하면 극심한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었고 김성일 또한 이를 염려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김성일이 잘못된 보고를 한 명백한 잘못은 분명 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그의 과오를 인정하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의병을 조직하여 항전하는 등 그 공로도 무시할 수 없다. 그보다도 그의 가치는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서 그의 학맥을 이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 두사람이 있으며, 퇴계의 학맥은 학봉 김성일계, 서애 유성룡계가 대표적인데 그 중 학봉 김성일계는 주로 정치보다는 학문에 치중한 유림이었고 그 수에서도 퇴계 학맥의 중추였다. 학봉 김성일은 퇴계 학맥의 중요한 시조중의 일인으로서
그 중요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서애 유성룡계는 주로 정치 방면에서 능했고,
학봉 김성일계는 주로 정치보다는 학문에 집중하여 영남 유림에서는 학봉 김성일계가 주류였던 것 같고, 후일 퇴계 학맥을 이은 큰 학자들은 학봉 김성일 계열에서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출처] 신숙주, 수양대군, 김성일 그리고 성삼문, 엄흥도, 황윤길|작성자 미래소년
징비록(홍익출판사) p33 중
배가 부산에 정박하자 황윤길은 반드시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일본 정황을 급하게 보고하였다. 얼마 뒤 임금을 만난 자리에서도 황윤길의 대답은 이전과 같았다. 그러나 김성일의 대답은 달랐다.
"신은 그러한 정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을 하였다.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니 옳은 일이 아닙니다."
이에 조정의 사람들은 황윤길을 지지하거나 김성일을 지지하며 의견이 나뉘었다.
내가(유성룡) 김성일에게, "그대의 말이 황윤길의 말과 다르니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어찌할 것이오?"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왜인들이 끝내 움직이지 않는다고 제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은 너무 지나쳐서 안팎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미혹시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려고 하였을 뿐입니다."
[출처]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 / 징비록|작성자 북셰프
임진왜란과 김성일金誠一의 책임
우리 속담에 '자손이 출세하면 붓으로 조상을 키운다'는 말이 있다. 조상 숭배 의식이 남달리 강한 우리나라에서 출세한 자식이 조상의 업적을 현창顯彰하는 문중 사학은 크게 탓할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문중 사학이라 함은 곧 문집에 의한 역사 기술을 의미한다. 문집은 관청에 의해 역사가 편찬되던 시대에 그 나름대로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료의 보고였으며 자료의 인멸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장치였다.
그러나 문집은 그와 같은 긍정적 기능 이외에 많은 폐해를 낳았다. 문집의 집필 동기가 가문을 빛내고 고인의 생애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당초부터 어느 정도의 곡필은 예상된 것이었다. 예컨대 가문의 유업을 기록하고 잇는다는 당초의 의도가 도외시된 채 고인의 일생에 대한 변명, 과대평가, 정적에 대한 왜곡된 비하가 주류를 이루었을 경우 이는 역사학의 해독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요즘과 같이 역사학이 현실 문제에 집착하는 방향으로 추세가 바뀌어 국학은 그 물질적 지원이 어렵게 되자 각 문중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활기를 띄고 있다. 마치 유행처럼 봉분을 석물로 뒤덮고, 족보를 새로 단장하고, 대학의 권위를 빌려 조상의 문집을 새로 간행하고, 그들의 사상과 행적을 기리기 시작했다. 무슨 무슨 학, 무슨 무슨 사상연구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거기에 연구 인력들이 포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럴 경우에 객관적 기록에 입각하여 고인의 행적이나 교우, 사상을 정확히 기술해 놓은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감탄하고 존경하기로 작정을 하고 낯뜨거운 미사여구만 늘어놓은 글이 허다하다.
(한형조, 「동양철학의 글쓰기」,1988, p.2)
김성일도 일본 침략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문중 사학의 폐해가 가장 여실히 드러난 것이 곧 의성 김씨 문중의 학봉 김성일의 경우이다. 사건의 내막인즉,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임진왜란의 전운이 감돌자 조선의 조정은 일본의 정정을 탐색하기 위해 첨지 황윤길을 정사로, 사성 김성일을 부사로 일본에 파견했다. 그런데 이들이 귀국하여 보고하는 자리에서 황윤길은 전운이 임박했다고 말했고, 김성일은 가히 걱정학 일이 못된다고 보고했다. 결국 김성일의 그릇된 보고가 전란의 참화를 불러일으켰으니 김성일은 역적이라는 것이 종래 교과서의 일관된 논조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 이 당시의 정황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선조(수정)실록』(24년 3월 1일 丁酉條)과 『징비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1590년 4월 이었다.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 업무를 마치고 돌아올 즈음에 일본측이 국서로 회신하려 하지 않자 김성일은 그것이 국례에 어긋난다 하여 3일을 기다린 후에 국서를 받아냈으며, 받은 국서가 무례하지 보름을 기다려 다시 고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1591년에 돌아올 때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의 행장은 받은 선물로 가득하였으나 김성일은 그렇지 않았다.
귀국한 후 어전에서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안광이 빛나며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 했고, 김성일은 '히데요시란 인물은 두려워할 인물이 족히 되지 못한다'고 왕에게 아뢰었다.
그 자리를 물러나와 좌의정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가 황윤길과 다르게 말하는데, 만약 병화가 있게 되면 어찌 하려고 그러시오?"하니,
김성일이 대답하기를, "저도 어찌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단정했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 주려고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국가 대사는 조용히 처리해야"
위의 문헌으로 미루어 보건대 일본군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김성일이 어전에서 복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발언은 결코 그의 진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더 깊은 데를 생각하고 있었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김성일이 정직하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으며, 그런 점에서 보는 이에 따라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바랐던 것은 민심의 안정이었으며, 전쟁과 같은 국가 대사는 알 만한 사람끼리 알아서 처리할 일이지 여럿이 모여 크게 떠들 일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사람의 상반된 견해를 최종적으로 판단했어야 할 선조의 무능함에 어쩌면 더 큰 책임이 있다.
그러나 막상 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왜군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보고한 김성일을 괘씸히 생각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그를 옥에 가두도록 명령했다. 그때 그의 진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유성룡이 왕에게 간곡히 아뢰어 김성일은 하옥을 면할 수 있었다.
하옥 명령이 떨어졌을 때 김성일은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경상감사 김수에게 적을 막을 방책을 일러주는 모습을 보여 노리老吏 하자용은 '자기 죽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 일만을 근심하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충신이다'라고 말했다.(『징비록』상)
그후 김성일의 진심을 안 선조는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에게 경상도 초유사(招諭使 : 의병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는 직책)를 제수하여 왜병을 막는 데 힘쓰도록 당부했다. 김성일은 죽산과 함양 등에서 격문을 돌리고 김면, 정인홍, 홍의 장군 곽재우 등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키면서 군정에 노심초사하였으며, 역질에 걸린 백성들을 돌보다가 전염되어 진중에서 죽었다. 그
는 일상 생활에서도 군장을 풀지 않고 지성으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경상도 일대를 보전한 공이 컸으며, 죽을 때까지 사사로운 일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혁이 함께 병중이었으나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훗날 같은 인물, 같은 사안을 놓고 두 사람이 어찌 그리 다른 보고를 했는가에 대하여 의혹을 떨칠 수 없었던 선조는 신임하던 동지사 이항복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이항복의 답변에 따르면, 어전에서 그런 논의가 있은 후에 이항복은 김성일과 함께 대전의 정원을 거닐면서 왜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복명했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변하기를, '남쪽의 인심이 동요되는 것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항복은 이런 연유를 선조에게 아뢰면서
김성일의 진심은 여럿이 모인 자리인지라 불필요하게 불안을 조성할 소지가 있어 사실과 다르게 말씀드린 것이라고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이항복의 말을 듣고 있던 좌중의 대사헌 홍진은 김성일이 살았더라면 진주성이 함락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뢰었고, 임석했던 사관史官은 김성일이야말로 진실로 유직(遺直 : 마음이 곧은 옛 사람의 기풍이 남아 있음)이라고 기록했다.(『선조실록』28년 2월 6일 己酉條)
문중 사학의 희생자
위와 같은 전말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한국사학사에 들어오면서 김성일은 임진왜란이라는 참화를 유발한 전화의 책임자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논지를 최초로 편 학자는 황윤길의 문중 족손族孫이었던 황의돈이었다.
일제시대에 대성학교와 휘문의숙에서 국사를 가르치면서
중등학교 국사교과서를 편찬했고 해방 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국사학을 연구한 한국사의 1세대 학자인 그는 『신편 조선 역사』(以文堂, 1923, 128~129쪽)에서 '유성룡, 이산해 등 당시에 득세한 동인배東人輩가 김성일의 편을 들어(右袒) 군사 시설(武備)을 모두 부수고(盡罷) 조정의 모든 대신들(滿朝)이 마음을 놓아(晏然) 태평한 꿈(昇平夢)에 취하여 드러누웠다(醉臥)'고 기록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책임이 김성일에 있다고 지적했다.
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은 그의 진심과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해야 하며 그의 진심은 그가 마지막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김성일은 신중한 애국자요 충신이었지 결코 의롭지 않게 거짓을 말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문중 사학의 희생자였을 뿐이다.
*추기*
이 글이 나간 후로 나는 황의돈 선생의 유족들로부터 엄중한 추궁을 받았다. 본래 신문에 나갈 때 황의돈 선생에 관한 부분에서 나는 '황의돈은 그의 책인 『신편 조선 역사』에서 황윤길은 정직한 지사였던 반면에 김성일은 죄인이었다고 단정하여 기록했다'고 썼는데 이 구절이 사자死者 명예훼손죄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저명한 법조인 집안에서 법적으로 문제를 삼는다는 것이 나로서는 괴로웠다. 결국 '황윤길의 문중 후손 황의돈이 『신편 조선 역사』를 쓰면서 황윤길은 정직한 지사였던 반면 김성일은 죄인이었다고 단정해 기록했다는 것은 저서 내용과 다릅니다'라고 정정 보도로 사태는 수습되었다.
이러한 물의가 있었던 탓으로 이 책에서는 황의돈 선생의 글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여 실었다. 나의 글이 황의돈 선생의 유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죄송하게 생각하며, 그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었음을 밝혀둔다.
이 글이 나간 후로 인조반정 당시에 처형된 어느 대북파의 후손이라는 분으로부터 자기들의 선조들도 해원解寃할 수 있는 길이 없느냐는 장문의 편지와 함께 많은 자료를 보내 주었다. 펜티엄의 시대에도 문중 사학의 골은 여전히 깊은 것을 실감했다.
[출처] 한국사 새로보기 - 신복룡|작성자 hanamander
김성일과 임진왜란(1)-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전쟁준비 안 했다?
이순신/임진왜란 by 을파소 2010/02/22 18:15 history21.egloos.com/2547459 덧글수 : 63
김성일(金誠一)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를 간단히 요악하면 '선조 때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침략 징후도 파악 못하고 전쟁이없을 거라한 인물'이다. 조금 자세히 말할 때는 '동인 소속으로 서인인 황윤길이 전쟁을 경고하나끼 당파싸움 때문에 거기에 반대한'이라는 말이 더 붙여진다.
한국인들이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는다면 가장 많이 이용할 네이버에서 검색해 두산백과사전을 보면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 발언 때문에 임진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각인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파직되었다. 이러한 발언이 나온 것은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서인과 동인사이에 치열했던 정치싸움 때문이었다. 당시 서인들은 세자건저 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었는데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하여 동인의 공격을 막으려는 목적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던 서인들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정철, 성혼 등 서인의 영수들이 귀양을 갔으며 이들의 처벌 수위를 놓고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설 정도로 치열하였다
여기서 끝이다. 여기까지 본다면 김성일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정치인의 전형이다. 기존 역사책의 왜곡을 질타하신 어느 훌륭한 재미사학자께서는 선조와 함께 김성일을 '임진오적'으로 규정하시었다. 나머지 셋은 논란을 우려하여 밝히지 않으셨다. 이런 훌륭한 분이 역사의 정론직필을 하는 걸 주저하다니 애석한 일이다. (두드러져 보이는 단어가 이글루스 한정 욕으로 느껴진다면 기분탓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그냥 계속 모르고 사는 게 편하다.)
그러나 여당이 하면 무조건 반대하거나, 야당일때 하던 말과 여당이 되서 하는 말이 다른 21세기 동아시아 모국가의 정치인들이 동급으로 나서기에는 김성일은 그렇게 간단한 인물이 아니다. 동인이라서 서인의 말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다는 김성일에 대해 서인들이 주도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김성일 졸기에는 이렇게 평한다.
성일은 성품이 강직 방정하고 재질이 매우 뛰어났는데, 이황(李滉)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젊어서부터 격앙하고 강개하여 기절(氣節)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조정에 있을 때에는 기탄없이 탄핵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자기 당 사람 의견에 당파싸움 때문에 반대하던 사람에 대한 평 치고는 너무 후하다. 왜 김성일은 서인 주도의 실록에섣 후한 평가를 받았는가?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여부에 대해 말한 후 유성룡에게 했다는 말은 일단 논외로 하자. 같은 당 사람의 변명이라 신뢰못할 수 있으니까. 일단 김성일이 어느 사람 말대로 '임진오적' 수준이라고 불린다면, 그건 김성일의 발언으로 황윤길의 말이 씹혀 전쟁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에 기인한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육군이 연전연패를 했으니 전쟁준비도 없었고, 그게 다 김성일과 당파싸움에만 몰두한 조정의 과오라는 것. 그런데 정말로 그게 다 김성일 때문인가?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김성일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전쟁준비를 했다. 먼저 이순신이 파격적인 승진으로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것이 그저 유성룡 빽 때문일거라고만 생각하는가?
뿐만 아니다. 조선 조정은 하삼도를 중심으로 전쟁에 대비하는데 김수를 경상감사에, 이광을 전라감사에, 윤선각을 충청감사에 임명하여 성곽을 정비하고 무기류도 갖추도록 하였다.
특히 경상감사 김수는 더욱 철저한 전쟁준비체제로 들어갔다. 일본은 섬나라니 수전에 강하고 육전에 약할 거라는 판단으로 육지에서 대비를 더 강화하여 성곽은 높이고 참호를 파는 여러 전쟁준비에 돌입 한 것. 영천, 청도,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 등과 좌우병연은 성을 아예 새로 쌓거나 증축하였다.
전쟁이 오랫동안 없으면 안보불감증에 걸리는 건 옛 사람들도 마찬가지라서 이런 작업들을 귀찮아하고, 합천의 이노라는 사람은 동네가 강물로 가로막혔으니 성은 쌓을 필요없다고 유성룡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민간인들이 투철한 안보의식을 가지고 평시에도 철저히 전쟁에 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건 사치고, 적어도 정부는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일선 무관이나 관리 중에도 신경을 쓴 사람들이 있어서 해유령전투에서 이기고도 참수당한 신각은 연안부사로 있던 시절 연안성의 방비를 잘 갖춘다. 그리고 개전 후 의병장 이정암이 이를 바탕으로 승리한다.
전쟁이 나고도 경상도에서도 병사의 동원과 소집도 잘 이루어진 편이다. 그런데도 개전 직후 조선이 지상전엣 연전연패 한 것은 왜 일까? 그건 전쟁대비가 왜구나 여진족을 상대하던 기존의 경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 하고, 몇몇 개념없는 작자들이 지휘를 하는 위치에서 삽질을 한 탓도 크다
전쟁준비로 돌아가면, 오히려 전쟁준비를 한다고 한 게 문제로 지적될 정도였다. 개전 후에 선조가 내린 교서에서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라 하여 백성들이 고달플 정도로 전쟁준비를 했었다. 이 때문에 전시인데도 김수가 백성의 원망을 들어 인심을 잃었으니 잘라야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
새로 쌓은 성도 지형을 이용하기 보다는 수용인원을 늘리는데 집중하여 평지 같은 곳에 지으면서 효율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진주성이 본래 험한 곳에 의지해 지킬만했는데, 평지에 내려와 성을 쌓으면서 적들이 여기로 들어마 끝내 함락되었다고 평했다.
김성일도 바로 백성들의 고역이라는 폐단 때문에 축성작업에 반대하기도 했다. 황윤길의 말에 김성일이 반대하는 것도 당파싸움 때문에 한 반대를 위한 반대라기 보다는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할 일. 더군다나 그의 말만 믿고 전쟁준비에 손을 놓은 것도 아니다. 그게 적절한 준비였는냐가 문제가 했냐 안 했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점을 감안해도 김성일을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그의 판단이 적절했느냐가 문제가 되야지, '당파싸움에 눈이 먼 찌질이'라고만 한다면 초점이 빗나간 비판이다. 전쟁준비도 김성일의 말과는 상관없이 진행됐고. 오히려 김성일도 전쟁이 난다가 강하고 주장하면 적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더 힘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서인이 주도한 실록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개전 이후 그의 행적을 본다면, '임진오적'이라는 소리는 당치도 않은 소리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걸 분류한다면 원모씨가 그 자리에 들어야겠지.
김성일과 임진왜란(2)-김수와 곽재우 사이에서
이순신/임진왜란 by 을파소 2010/02/27 21:02 history21.egloos.com/2551212 덧글수 : 21
주의: 본 포스팅은 쇼트트랙 국가대표 김성일 선수와는 무관합니다(퍽)
1592년이 되고 김성일은 경상우병사에 임명된다. 김성일은 영남 지방에 성을 쌓는 문제도 폐단이 많다고 반대하던 사람인데, 경상감사 김수(金晬)가 ‘성을 쌓는 역사에 대해 도내(道內)의 사대부들이 번거로운 폐단을 싫어한 나머지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바람에 저지되고 있다.’라고 장계를 올리니니까 선조는 '니가 한 번 해봐라.'라는 생각이었는지 김성일을 임명한다.
그리고 얼마 후 전쟁이 일어난다. 정발과 송상현의 분전은 익히 알려진 일이지만, 그 밖의 곳에서는 그렇게 전쟁준비를 한다고 한 경상도지만 좌병사 이각(李珏)은 달아나고 다른 곳들도 대거 함락당한다.
그러나 전쟁이 안 난다고 말했고, 성곽을 정비한다는 거에도 반대했다는 김성일은 밀양부사 박진(朴晉)과 함께 진주에서 적과 맞서 싸운다. 이 과정에서 김성일은 이종인(李宗仁)을 시켜 백마를 탄 적의 두목을 쏘아 죽이게 해서 적군의 진격을 조금 늦춘다.
물론 당장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그보다 김성일이 처음에 전쟁이 나지 않을 거라 얘기한 건 변하지 않는다. 그의 말에도 조선 정부가 전쟁에 대비는 했다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개전 후 조선엔 계속 패배를 하고 있었고, 김성일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으로 국문을 하라는 명이 내려진다.
그래서 김성일은 충청도 직산까지 올라오지만, 거기서 다시 국문은 취소되면서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된다. 나중에 올리는 장계에 적은 말이긴 하지만, 여기에 "신은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한데 특별히 천지같은 재생(再生)의 은혜를 입어 형벌을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초유(招諭)의 책임을 맡겨주시니, 신은 명을 받고 감격하여 하늘을 우러러 눈물을 흘리면서 이 왜적들과 함께 살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라고 한다.
또한 경상감사 김수는 민심을 많이 잃었다고 교체를 해야한다는 말이 많았는데 그 대안 중 한명이 김성일이었다. 윤두수가 여기에 반대의견을 내긴 했는데 그 이유는 김성일이 무능하다거나 전쟁이 나지 않을 거라고 말한 책임이 있어어가 아니라 너무 강직해서 백성들을 너그럽게 어루만져 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두수는 그 전에 병사(兵使)로 김성일나 박진이 적당하다고 말한 바도 있다. 그 역시 서인이리지만 김성일의 능력과 인품은 믿고 있었다는 반증. 결국 김수는 한성판윤으로 밍명되고, 초유사 김성일은 경상좌도 관찰사로 임명된다.
임진왜란 때 보면 그 자리에서 잘려야 마땅하고 대로는 아예 목이 잘려야 할 인간이 고위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김성일도 그렇게 전쟁에 책임이 잇으면서도 자리만 보전하는 거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성일은 자신이 한 말이 불리한 상황으로 변했다고 말을 바꾸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 걸요. 데헷"이라는 단기기억상실증을 보여주거나 "주어 없으니 무효" 같은 국어 문법 재창조를 보여주진 않았다. 그는 그저 행동으로 말할 뿐이었다.
김성일이 직접 전투를 지휘하여 대승을 거둔 일은 없다. 하지만 그는 뒤에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들을 했으니 그 중 하나가 김수가 경상감사로 있을 때 곽재우(郭再祐)와 사이의 문제를 중재한 것이다.
곽재우가 가산을 털아가며 의병을 일으켰을 때, 정대성(鄭大成)라는 자는 사람을 모아 의병이 아니라 도적질을 하였다. 이 때문에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은 곽재우도 도적으로 의심하여 경상감사 김수에게 보고했다. 정대성은 당연히 붙잡혀 참수당햇으나 곽재우가 문제. 그는 도적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이 말해줘도 김수는 믿지 않았다.
하필 곽재우는 개전 후 김수가 싸우지 않고 퇴각하자 이에 분노하여 의병을 일으킬 때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 책망하고, 심지어 베어야 한다고 까지 한 터. 김수도 곽재우를 역적처럼 장계를 올리고 이 때문에 비변사에서도 곽재우를 의심하였다. 그러자 곽재우도 상소를 올려서 김수를 ‘그는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여 불충 불효하며 패전을 기뻐하고 왜적을 맞아들였다.’ 라고 맹비난한다.
곽재우는 김성일에게 찾아와 김수를 비판했지만, 김성일은 곽재우를 잘 타일러서 전투에 나가게 했다. 그리고 올린 장계에 김수와 곽재우의 갈등을 정리하고, 곽재우가 중요한 인재 임을 알리면서 이들의 관계를 수습한다.
곽재우에게도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내 타일렀다.
의병장은 처음 변란이 일어났을 때부터 재산을 있는 대로 다 털어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자신의 몸은 돌아보지 않은 채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여 왜적을 칠 마음만 가졌으니, 비록 옛날의 열사(烈士)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소.
당직(當職)이 경내에 이르러서 즉시 글을 내려 불렀더니,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나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고 단성(丹城)으로 와서 나를 만났는데, 한 번 인사하는 사이에 이미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소. 그 뒤에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횡행하면서 앞장 서서 적을 쳐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왜적들이 함부로 몰아쳐 들어오지 못하여 이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까지 보전되었는바, 아름다운 명성이 사방으로 퍼져 듣는 사람마다 모두 고무되어 원근에서 메아리치듯 호응하였소. 이에 왜적을 쳐 없애는 공을 세우는 것을 날을 세어 가면서 기약할 수 있었는바, 영웅다운 풍도와 의열한 마음은 당대에 빛날 뿐만 아니라 장차 역사에 드리워져 후세에 전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오.
그러나 홀연히 듣건대,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檄文)을 보내어서 감히 패역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였다 하오. 방백(方伯)이 어떠한 관원이고 의병장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일을 한단 말이오. 방백이 실제로 죄가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처치가 있을 것인바, 도민(道民)이 손댈 일은 아닐 것이오.
의병장은 충의로운 집에서 태어났으며, 적을 치는 의병을 일으켜서 큰 공이 장차 이루어지려 하는데, 스스로 몸을 죽이고 일족까지 멸망당하는 지경에 빠지는 짓을 할 줄을 내가 어찌 헤아리기나 하였겠소. 당(唐) 나라의 배반한 졸개가 주수(主帥)를 찬역(簒逆)하여 쫓아내었다가 화를 당한 사람이 무릇 몇 사람이나 되었소. 그런데도 앞서 실패한 일을 다시 되풀이하려 한단 말이오.
돌아오는 길을 잃은 것은 《주역(周易)》에서 경계한 바이며, 화를 돌이켜서 복으로 삼는 것은 지혜 있는 선비가 취할 바이오. 내 말을 따르면 순하게 되어 복이 많을 것이고,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거스르게 되어 화를 받을 것이니, 그 기미가 털끝만한 여유도 없는 만큼 의병장은 잘 생각하길 바라오.
이런 김성일의 노력으로 양쪽의 냉각기류는 원만하게 진정된다. 곽재우와 김수의 갈등은 김성일이 아니었으면 곽재우가 김수를 죽였을 거라 할 정도였는데, 김수난 한 개인이 아니라 나라에서 임명한 관리니 그랬으면 곽재우 역시 죄를 받아 죽었을 거다.
김수도 곽재우와 갈등이 있었다고 그걸 가슴에 담아두고 모함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조정에 올라간 후 곽재우에 대해서는 선조에게 “신이 그 사람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그 사람됨이 보통은 아닙니다. 어려서 무예를 닦고 《장감(將鑑)》을 읽어서 문자를 터득해 일찍이 정시(庭試)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의병을 남보다 제일 먼저 일으켜 4월 20일 사이에 기병(起兵)하였는데 처음 기병할 때 사람들이 의심했었지만 신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적을 사로잡으면 참괵(斬馘)하지 않고 심장을 구워 먹습니다. 의령(宜寧)·삼가(三嘉)가 온전한 것은 곽재우의 공입니다.”라고 후하게 평가했다. 원칙에 따라 한 일이라도 자신에게 해개 되면 그걸 기억하다가 끝내 복수하는 소인배들도 예나 지금이나 많은데, 김수는 그런 작자는 아니었다.
그렇게 김성일은 곽재우와 김수의 사이가 최악으로 가는 파국을 막아서 오늘날까지 홍의장군 곽재우의 이름이 남게 하였다. 사실 홍의장군이라는 말을 조정에 보고한 사람도 김성일이다. 김성일을 임진오적이로 칭하던 분은 곽재우는 대단히 칭송한다. 물론 곽재우는 칭송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하지만 그 재미사학자가 을사오적과 동급으로 보는 김성일이 없엇더라면, 곽재우는 처형당해서 우리는 그를 잘해야 비운의 영웅, 잘못됐으면 그냥 역적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성일과 임진왜란(3)-진주성과 김성일
이순신/임진왜란 by 을파소 2010/05/05 20:23 history21.egloos.com/2597623 덧글수 : 31
개전 후 초유사로 임명된 김성일의 활동은 김수와 곽재우를 중재한 것만이 아니다. 경상도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지원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문인이지만 무인 못지 않은 과감함을 보여주는 일도 있었다.
한 번은 갑자기 적군을 만나자 부하들은 중과부적이니 피하자고 하였는데 김성일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활시위를 당기면서 기다렸다. 그러자 적들은 복병이 있나 보다 하고 그대로 후퇴하였다. 문신이지만 도망가기가 특기인 무신보다 용감하다. 우세한 전력을 두고도 다 말아먹고 튀던 무장도 있는데...
이렇게 김성일이 용감한 면모가 있었다고는 해도 강감찬이나 권율처럼 문신 출신 지휘관으로 큰 승리를 거두거나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런 사람을 뒤에서 도울 사람도 필요한 법. 가끔 둘 다 잘하는 먼치킨도 나오지만 김성일은 김수와 곽재우의 갈등을 중재한 거처럼 의병과 관군이 서로 협조하고 작전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등에서의 공로가 더 크다. 그 뿐 아니라 경상도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도 힘을 기울여서 <선조실록>에서는 '영남의 인심을 수습한 데에는 성일의 공로가 대부분이었다.'라고 기록될 정도였다.
김성일이 눈에 띄는 큰 전투에서 승리하지는 않아도 뒤에서 지원을 해주고 곽재우 같은 의병장들이 그 뒷받침으로 활약하는 동안 바다에서는 설명이 필요 없는 그 분이 일본 입장에서는 대마왕급으로 자리잡아가며 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일본은 바다가 막힌 건 물론, 그 분의 본거지인 전라도에는 육지를 통한 진공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래저래 일본은 전라도를 점령해야 했고, 이를 위한 요충지 중 하나가 진주성이었다.
김성일은 이런 진주의 중요함을 알아보고 문제점까지 파악하여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서도 이 점을 언급한다.
신이 보건대 진주는 남쪽 지방의 거진(巨鎭)으로 양도(兩道)의 요충지에 위치하였으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 일대에 보존된 여러 고을이 토붕 와해되어 조석(朝夕)을 보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반드시 호남을 침범할 것입니다. 호남은 지금 근왕(勤王)으로 인하여 도내(道內)가 텅 비었으니 만약 또 적의 침입을 받는다면 더욱 한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바로 수양(睢陽) 1군(郡)이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된 것과 같으니, 오늘날 꼭 지켜야 할 곳입니다.
중요한 위치지만 상황은 진주성의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진주성의 병사는 부족하여 천여명에 화을 잘 쏘는 자들은 6,70명 수준. 거기에 진주목사는 목에 종기가 나서 오늘 내일 하는 지경이라 전투지휘는 불가능했다. 그나마 진주판관이 능력이 좋았지만판관은 진주성을 총괄하기는 어려운 위치다. 그래서 김성일은 진주에 머물면서 일단 진주목사를 파직하고, 진(鎭)을 버린 수령·변장 등을 수합하여 공을 세워 스스로 충성을 바치도록 명령한다. 그러자 가덕 첨사(加德僉使) 전응린(田應麟), 고성 현령(固城縣令) 김현(金絢), 권관(權管) 주대청(朱大淸) 등이 나타난다. 김성일은 전응린은 군관을 거느리고 곽재우와 함께 정암진(鼎巖津)을 지키게 하고, 김현은 진주의 수성장으로 임명하고, 주재청은 진주판관과 함께 성을 지키게 하였다.
여기저기서 군사들도 끌어모았지만 급히 모아 오합지졸이 많아 성을 나가면 모두 흩어질 것을 우려하여 이렇게 모은 군사들은 전적으로 성을 지키게 한다. 그러면서도 진주성의 방어를 위해서는 단순한 방어만이 아닌 적극적은 공세도 필요하다고 판단, 곤양군수와 사천현감, 그리고 진주판관으로 하여금 군사 3백을 이끌고 함안의 적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비가 내려 전투는 쉽게 벌일 수 없었지만, 일본군은 조선군의 군세를 보고 퇴각하였다. 진주판관은 이외에도 주변 고을의 수복에 큰 공을 세워 비변사의 건의로 진주목사로 승진하니, 그가 바로 김시민이다.
그 후 적군이 다시 고성으로부터 나와 사천에 주둔하면서 진주를 위협하자, 김성일은 군관 중에서 10명을 시켜 쫓으니 적군은 곧 퇴각하였다. 김성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천성 밑까지 군사를 진격시켜 적군이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길을 차단해버리니, 일본군은 결국 사천에서 고성으로 물러난다.
하지만 이건 진주성 전투의 예고편 정도에 불과한 일. 임진년 10월, 김성일의 우려대로 일본은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한다.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향하자 김성일은 곽재우, 최경회 등의 경상도와 전라도의 의병들을 진주성 근처로 보내서 진주의 관군을 지원하였다. 곽재우는 선봉장 심대승(沈大昇)으로 하여금 북산(北山)에 올라가 햇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방포(放砲)하면서 성중에다 대고 크게 외치게 하기를 ‘전라도의 원병(援兵) 1만여 명과 의령(意寧)의 홍의 장군(紅衣將軍)이 합세하여 내일 아침에 와서 적을 죽이기로 하였다.’하ㄷ라고 외치가 하여 진주성 안의 군사들과 백성의 사기를 높였다. 합천 가장(陜川假將) 김준민(金俊民)은결사대 80명을 이끌고 단계현(丹溪縣)에 관사를 불태우던 적들을 퇴각시킨다.
외부에서 이렇게 지원하였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곳은 진주성. 성안의 조선군은 목사 김시민의 지휘로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인다. 전투 중 김시민이 총탄에 맞았지만 곤양군수 이광악이 군사들을 다시 지휘하면서 1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의 승리로 끝난다.
1차 진주성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거창에 머무르던 김성일은 승전 보고를 받고는 진주성으로 가서 적군의 피해에 탄복하고, 탄환에 맞아 누워있던 김시민을 찾아가 위로하고 감탄한다. 김시민은 경상병사 박진의 후임으로 거론될 정도로 많은 공도 세웠고, 그 일을 할 능력도 있었지만 유일한 문제는 부상이 깊어다는 점. 결국 김시민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김성일은 서예원을 임시 진주목사로 삼지만, 사람 능력은 제대로 파악 못했는지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서예원은 완력은 있으나 어리석은 겁장이로 재능이 없는데...'라고 그를 평하고, 김시민의 죽음 이후로는 진주성의 방비가 예전 같지 못 했다고 적는다.
하지만 김성일이 진주성의 중요성을 판단한 건 정확했고, 이를 지키기 위해 멋있는 전공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전공을 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다. 물론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의 역할은 공을 세워 멋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건 틀림없다. 어쩌면 김성일의 도움이 없었어도 그는 전투에서 승리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김성일이 한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그 역시 중요한 위체에서 전투를 도운 공은 누구도 부정못할 사실이니까.
김성일과 임진왜란(4)-최후와 평가
이순신/임진왜란 by 을파소 2010/05/16 13:53 history21.egloos.com/2604480 덧글수 : 21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평양성도 명군의 참전으로 수복하고, 보급로가 막힌 지도 오래라 일본군도 점차 남하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는 바뀌어 1593년 계사년.
전쟁이 전반적으로 소강기에 접어드는 시기라지만, 경상도 남부는 내려온 적군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보니 여전히 위험할 수 박에 없는 곳. 실제로 선산도 공격을 받아 선산부사가 겨우 도망치기도 할 정도였다.
거기에 또다른 무서운 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식량난이다. 곽재우의 군사도 굶주림으로 흩어지고, 수군도 군량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관아에서는 부자들이 가진 곡식을 찾았지만, 처음에는 상을 기대하고 곡식을 바치던 자들도 오래도록 상이 내려지지 않자 백성들이 믿질 않게 되고, 몇번이나 곡식을 바치라는 명을 내려도 따르는 이가 없었다. 김성일은 장계에서 이를 '이것은 비록 재물과 곡식이 바닥난 탓이기도 하지만, 국법이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예나 지금이나 정부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때문에 김성일은 곡식을 바친 사람들에게 바친 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곧바로 영직(影職)이나 실직(實職)을 제수하고, 면천)하는 일 등을 모두 거행하고, 바친 곡식의 숫자가 기준에 미달한 자에 대해서도 햇수를 정하여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여 곡식을 바친 공에 대해 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군졸이라도 공이 없을지라도 해를 넘기도록 복무하면서 고생을 하니 마땅히 보살퍄주고, 공이 있다면 당연히 포상을 할 것을 얘기하며, 아직 공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도 많음을 얘기한다. '신용을 잃고 상 주는 것을 아끼면 비록 태평할 때라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다.'라는 게 김성일의 생각이었다. 이는 지금이라고 다를 게 없는 말이지만. 다만 이 때의 상황은 공을 세운 이에게는 적당한 벼슬을 주는 걸로 치하할 수 는 있어도 식량문제는 그리 간단하게 해결할 게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겠지만. 당시 조선은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 상태에서 명군에게도 보급해야 하는 상황이니 식량난은 심할 수 박에 없었고, 곡창지대 전라도가 무사하다지만 그래서 보급을 하다 보니 전라도는 그 때문에 어려울 지경이었다. 부자들이 곡식을 내놓는다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그 외 별다른 대책을 찾기도 힘들었지만.
식량이 부족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살고 하다보면 전염병이 퍼지기 쉽다. 훨씬 잘 먹고 훨씬 안정된 2009년에도 신종플루 확산방지한다고 각종 행사 취소하거나 축소한 판에 의료기술이 현저히 지금보다 못하고 식량도 부족한 임진왜란 때야 전염병이 안 퍼지면 그게 더 이상할 일. 그리고 전염병이라는 게 사람을 봐가며 걸릴 일도 없는 것이다.
경상도의 의병장 김면도 그 중 한 명. 김면은 가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킨 후 처자식들이 걸식을해도 신경 쓰지 않고 의병활동에만 열중하였고, 고령(高靈), 지례(知禮), 금산(金山), 개령(開寧) 등을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김성일은 김면의 죽음에 대한 장계에서 '형편 없는 소신은 다시 살려 주시는 성상의 은혜를 외람되이 입어 오늘날까지 살아 있습니다. 저의 이 한 목숨이 살아 있는 동안에 병사(兵使)와 더불어 힘을 모아서 나라를 위하여 죽고자 합니다.'라고 적었지만, 그의 생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김성일 역시 병의 마수에서 예외는 아니었던 것. 그 뿐 아니라 아들인 김혁도 함께 걸린 병으로 위독하였다. 그러나 김성일은 아들의 일은 묻지 않고 공무에만 집중하다가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김성일이 죽자 군사들과 백성들은 친척의 상을 당한 거 처럼 슬퍼하였다 한다.
김면과 김성일이 연이어 죽은 타격은 컸다. 안 그래도 기근에 전염병이 퍼지는데 그나마 수습하던 인물도 죽으니 군병들도 많이 흩어졌다. 훗날 김성일이 있었더라면 2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패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도 나오고, 설사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창의 독전(倡義督戰)하기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 빈자리는 크기만 했다.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김성일의 졸기를 보면, '그런데 동행과 서로 불화한 나머지 적정(敵情)을 잘못 주달하였으므로 거의 죄벽(罪辟)에 빠질 뻔하였다.'라는 문장 빼면 좋은 말만 적혀 있다. 실록에서 졸기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졸기에는 죽은 사람이라고 좋은 말만 해주는 거 없다. 좋은 얘기 해주다가도 흠이 있다면 사정없이 혹평을 하는 게 졸기다. 그래서 우리가 위인으로 아는 인물도 졸기에서는 까이는 걸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유성룡만 해도 같은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졸기에서 '그러나 국량(局量)이 협소하고 지론(持論)이 넓지 못하여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또한 감히 대항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여 대신(大臣)다운 풍절(風節)이 없었다.' 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데 김성일이 반대당이라는 서인주도 편찬의 실록에서, 그것도 당쟁에 눈이 멀어 전쟁 안 난다고 말했다는 그 김성일이 그 반대당 사람에게 그 점의 지적은 한 문장으로 끝나고 좋은 평을 듣고 있다. 심지어 여기에는 진주성의 함락도 김성일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뉘앙스로 적혀 있고.
아, 물론 조정에도 그 문제의 전쟁이 안 일어난다는 발언으로 그를 까는 사람이 있었다. “김성일이 수길(秀吉)에게 속임을 받은 것은 많다. 수길이 전립(氈笠)을 쓴 데다 애를 안고 맨발까지 한 자세로 접견하자, 김성일은 장담하기를 ‘수길은 대수롭지 않으니 일본은 염려할 것이 못 된다. 부견(苻堅)의 백만 군사에 대해서도 사안(謝安)은 듣고 움직이지 않았는데, 어찌 이 적을 두려워하랴?’ 하였으니, 이것이 수길에게 속임을 받은 것이 아닌가.” 라거나 전후에도 "예전에 유성룡(柳成龍)이 정승이었을 때 김성일(金誠一) 등과 앞장서서 사설(邪說)을 말하여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싸우고 지킬 대비를 하지 않았다."라던 분이 계셨다. 지금은 큰 상관없지만 조선시대라면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자'의 신분에 계셨던 분이다.
그래도 김성일은 전후 선무원종1등공신이 된다. 조선 후기에도 대체로 절의 있는 원칙주의자로 묘사되면서 명신으로 인정받는다. 서인들도 별 감정은 없이 그 능력을 인정한 거 같은데, 오늘날에는 전쟁이 안 난다는 말만 알려지면서 당쟁만 일삼는 인간이란 인식이 퍼졌다.
물론 그 발언 자체를 비판하지 말라는 건 아니다. 조선이 나름 전쟁준비를 했더라도, 그 발언은 김성일의 판단착오로 충분히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 비판은 그 문제에 대한 비판인 것이지, 김성일이란 인물 평가의 유일한 기준이 될 순 없다. 비록 과오도 있었지만 그것을 뉘우치고 누구보다 앞장 서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봉사하였다. 그래도 임진오적이라는 평가를 내리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당사자인 조선의 서인이나 백성들보다도 감정의 골이 깊은 모양이니 뭐라 더 말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