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허창수(헤르베르트 보타바/독일명) 신부 선종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소장을 맡고 계신 허창수 헤르베르트 신부님께서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선종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경제윤리 세미나 참석차 독일에 가셨고, 거기에 머무는 중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8월 27일 밤에 연락이 왔습니다.
신부님은 오틸리엔 수도원 근처에 있는 깁나지움(중고등학교) 주변을 산책 하던 중에 심장 마비로 26일 오후 6시경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허창수, 헤르베르트 보타바 신부는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역사 속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1968년 9월 1일 신품성사를 받고 독일을 떠나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은 유신헌법이 공포되기 하루 전인 1972년 10월 16일이었습니다. 거리의 탱크 모습 등 한국의 첫인상에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의 군사독재를 겪으면서 성직자가 교회만 가르쳐선 안되며 인권과 민주화도 종교인의 사명임을 피부로 느끼시고 1975년 국제엠네스티에 가입하여 서슬퍼런 유신정권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당시 신부님이 계시던 대구가톨릭신학원은 전투경찰들이 철통같이 에워싸 신학원과 같이 있던 대명성당이 '데모성당'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 였습니다. 90년대 초까지 관계당국의 감시를 받아온 신부님은 "외국인 신부라서 인권문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었고, 인권운동을 하는데 유리한 점도 많았다"고 회고하시고, "아직 국가보안법 등에 독소조항이 많이 남아 있지만 한국의 인권은 엄청나게 개선됐다"고 평가하십니다.
신부님은 노동자의 인권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1985년 가톨릭근로자센타 2대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구미공단에 노동조합을 태어나게 한 것도 신부님이십니다.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이론을 소개하고 노동조합 간부들을 대상으로 경제윤리세미나를 여시는 등 현재까지도 노동자의 인권에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외국인 신부가 한국의 노동조합 간부 앞에서 이론적인 교육을 하는 경우가 흔치 않으나 신부님은 대단한 이론가이기도 합니다. 로마대학 철학과 석사, 민헨대학 철학박사 학위를 가졌으며 76년부터 지금까지 가톨릭신학원에서 사회윤리를 강의하고 계십니다. 또 실업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될 쯤 실업문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독일의 폭스바겐자동차회사 관계자들을 초청, 실업극복모델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교수와 노동조합 간부 중심으로 독일연수단을 10여회 조직했으며 금년 9월에도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추진 할 예정입니다.
1990년대 이후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구미에서도 증가하면서 외국인노동자들이 인권침해가 심각하다는 것을 직시하면서 1996년 '외국인노동자상담소'를 설립, 외국인노동자들의 인권보호지원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도움과 법과 제도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단어인 '이산가족'이기도 합니다. 아버님은 어릴 때, 어머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형님께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베네딕트수도원 원장신부로 계시고 당신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참고- 형님인 게르노트 아빠스는 2007년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별세하셨다.) 성직자로서 활동은 성주본당 보좌신부와 인동천주교회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으며 85-91년까지 대구가톨릭신학원 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지금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건물도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도움과 신부님께서 외국으로부터 받은 후원금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신부님은 10여년 전부터 파킨스병을 앓고 있어 예전만큼 활발하게 활동을 하시기 쉽지 않지만 "이 병은 운동을 많이 해야 좋아진다"며 더욱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신부님께서 살아온 인생의 절반이 그랬듯이 남은 여생도 노동과 인권을 위해 활동 할 것이라 말씀하시곤 하십니다.(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제공)
[1998년] 최종현 SK그룹 회장 별세
← 최종현
1952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3년을 수료한 후 1956년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고, 1959년 미국 시카고대학교 대학원 경제과를 졸업했다. 1962년 선경직물(주) 이사, 1970년 사장, 1973~78년 수원상공회의소 회장, 1975년 특허협회 부회장, 1978년 한국-브라질 경제 협력위원회 회장, 1979년 주한 콜롬비아 명예총영사, 1980~84년 (주)유공 사장, 1981년 석유협회장 및 경영자총협회 부회장, 1983~9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1988년 민주화합추진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도 선경그룹 회장(지금의 SK 그룹), (주)유공 회장,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한일경제협력위원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금탑·은탑 산업훈장, 콜롬비아 산업훈장 등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96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 선고
1995년 10월 19일 당시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박계동이 국회에서 전대통령 노태우가 재임 중 각계로부터 받은 거액의 비자금을 퇴임 후에도 은닉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이에 검찰은 그 진상조사에 착수, 11월 1일 노태우를 소환하여 대기업 총수 등 40여 명에게서 41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을 밝혀내고 16일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하였다.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부패정권을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던 12·12 쿠데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강경탄압의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졌으며, 대통령 김영삼도 1995년 11월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역사 바로세우기"를 선언하였다.
5·18사건의 진상규명은 1988년 국회청문회를 통하여 처음 시도되다가 무산되고, 그 후에도 5·18 피해자와 단체들이 수차례에 걸쳐 고소, 고발했으나 검찰은 기소유예와 공소권 없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대통령의 특별법 제정 지시로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하고 헌법재판소가 특별법의 합헌결정을 내림으로써 수사가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검찰은 12월 3일 군형법상의 반란수괴죄를 적용하여 전두환을 위시한 1980년 당시의 신군부측 핵심인사 11명을 구속 기소하였다. 동시에 5공화국의 비리수사도 함께 진행되었다.
1996년 3월부터 시작된 공판은 1심 28회, 항소심 12회 등 모두 40회에 걸쳐 진행되어 두 전직 대통령에게 반란죄, 내란죄, 수뢰죄를 적용하여 전두환에게 사형(구형대로), 노태우에게는 징역 22년 6개월(구형 무기징역)을 각각 선고하였다. 4월 17일의 대법원 상고심에서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 12년의 항소심 형량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후인 1997년 12월 22일 대통령 김영삼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관련자를 모두 특별사면하여 석방함으로써 두 전직 대통령은 구속 2년여 만에 출옥하였다.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선출
1978년 오늘 바티칸시국 시스티나성당의 굴뚝에서 새 교황이 선출됐음을 알리는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교황 바오로 6세의 후임을 뽑기 위한 추기경 회의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대교구장인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이 제263대 교황으로 뽑혔다.
요한 바오로 1세는 전 세계 의 평화, 협력을 통한 새 질서 구현에 헌신하겠다고 밝힌다. 그는 즉위와 함께 온화한 이미지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사로잡은 반면에 교황 대관식을 치르지 않는 파격도 보여 줬다.
그러나 바오로 1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지 33일 만인 9월 29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사망 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곧바로 방부처리됐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서두른 방부처리와 관련해 독살설 등 많은 음모론이 떠돌았지만 규명되지 못했다. 교황의 사인은 심장발작이나 폐색전인 것으로 추정됐다.
[1976년] 독일 소프라노 가수 레만(Lotte Lehmann, 1888~1976) 사망
독일 페를레베르크 출생. 베를린음악학교를 나온 뒤, 바그너 가수인 마틸데 마링거에게 사사하였다. 1910년 함부르크극장에서 데뷔하고 1913년 그 극장에서 쿨렘페러의 지휘로 《로엔그린》의 엘자를 불러 성공을 거두었으며, 1914년 빈국립극장에 출연, 바그너 가수로서 인정을 받았다. R.슈트라우스는 그녀를 위하여 《아라베라》를 작곡하였다 하며, 인테르메초의 크리스티네 외에도 많은 그의 작품을 초연하였다.
1938년 미국에 이주, 1945년 이후는 오페라를 그만두고 가곡가수로서 뉴욕을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1951년 가곡 고별 리사이틀을 열고 은퇴하였다. 극적인 표현과 풍부한 성량을 가진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소프라노 가수로 알려졌다.
[1974년] 세계최초로 대서양횡단비행에 성공한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 1902~1974) 사망
1927년 5월 사상 처음으로 대서양을 무착륙 횡단비행하는 데 성공하면서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라 백만장자의 딸과 결혼했던 찰스 린드버그. 하와이에서 만년을 보내다 1974년 오늘 향년 72살을 일기로 타계한다.
린드버그는 항공사에 금자탑을 세운 사실 외에도 1957년부터 죽기 전까지 17년 동안 24살 연하의 여인과 몰래 사귀어 3명의 자녀를 둔 얘기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YTN
[1972년] 제20회 뮌헨올림픽 개막
← 육상 100m 우승 소련의 발레리 보르조프
사상 최대인 122개국 7,156명의 선수가 참여한 제20회 올림픽경기가 1972년 8월 26일 서독 뮌헨에서 개막됐다.
경기초반의 영웅은 미국의 수영선수 마크 스피츠였다. 개인 4종목, 릴레이 3종목에 출전해 모두 금메달을 획득, 올림픽경기사상 가장 많은 7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의 꽃은 소련 여자 체조선수 올가 코부트였다. 갸날픈 몸으로 고난도의 기술을 보여준 올가는 '뮌헨의 요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뮌헨올림픽은 가장 불행했던 대회로 기록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의 숙소를 습격해 이스라엘 선수 2명을 살해하고 11명을 인질로 삼아 이스라엘에 억류중인 팔레스타인 게릴라 200명의 석방을 요구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 인해 대회가 24시간 동안 중단되고, 구출작전 도중 인질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지는 등 올림픽 사상 최악의 사태가 빚어졌다. /조선
[1955년] 한국 IMF와 IBRD 가입
1955년 8월 26일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가입한 58번째 국가가 됐다. 미국무성에서 거행된 이날 행사에서 주미한국대사는 한국대표로 이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하는 협정문서에 조인했다. 대사는 "부흥과 개발이란 단어가 한국보다 잘 어울리는 지역은 없다"며 가입의 의의를 강조했다. 또 "한국은 양기구의 회원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국제통화기금에 출자해야 할 한국의 부담금은 1천2백50만달러였다. 한국의 가입으로 국제통화기금 회원국의 전체출자해당금은 87억5천5십만달러에 이르렀다. IMF는 세계무역 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한 국제금융기구로 1944년 체결된 브레튼우즈협정에 따라 1946년에 설립됐다. 1947년 3월부터 IBRD와 함께 업무를 개시했다. /조선
[1948년] 노동운동가 전태일 (全泰壹) 출생
1948. 8. 26 경북 대구 ~ 1970. 11. 13 서울.
1970년 11월 13일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거, 분신자살한 평화시장 재단사 출신의 노동자이다. 1964년 17세의 나이로 평화시장 피복공장 미싱사보조로 취직했다. 1969년 재단사들의 친목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는 한편, 근로기준법을 탐독하면서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철저히 조사, 그 개선방안을 노동청(지금의 노동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으로 해고를 당했지만 1970년 9월 다시 재단사로 취직해 '삼동친목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곧바로 설문지를 돌렸으며, 그 결과를 분석해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 선처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시정을 약속한 기한인 11월 7일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는 동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자"고 제의하여 13일을 시위날짜로 잡았다. 1970년 11월 13일 피켓 시위를 벌이기 직전에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하게 되자 전태일은 분신을 감행, 화염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하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브리태니커
[1926년] 나도향 사망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羅慶孫)이다.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이 싫어 박종화에게 부탁해 호와 필명을 각각 도향(稻香)과 빈(彬)으로 지었지만 가족들은 ‘나락의 향기’라는 뜻의 도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향기란 곧 사라지는 것이라는 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도향은 우리나라 작가 중 가장 젊은 나이인 24세에 요절했다.
1922년 ‘백조(白鳥)’ 동인에 참여할 때까지도 도향의 삶은 반항과 방랑이었다. 경성의전을 나오고도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갈등, 그리고 그의 문학적 열정에 대한 할아버지의 몰이해가 그를 바깥으로 돌게한 것이다. 열일곱에 돈을 훔쳐 일본으로 도망쳤다가 고생만 하고 돌아온 뒤부터 도향은 더욱 고독과 번민에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초기 작품들은 눈물과 비애로 가득찬 감상적 낭만주의 경향을 띤다.
이와 달리 1925년에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 등에서는 리얼리즘의 경향을 보이며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선보였으나, 1925년 말 돈 한 푼 없이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이 잘못이었다. 도쿄에서 걸린 폐결핵으로 귀국 몇 개월 만인 1926년 8월26일에 숨을 거둔 것이다.
[1920년] 미국, 여성선거권 인정
1920년 8월 26일 미국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은 건국초부터 여성들에게는 선거권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초 노예제폐지운동이 일어나면서 여성선거권 쟁취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흑인 노예의 권리뿐만 아니라 여성의 권리도 구제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선거권 인정운동이 차츰 지지를 얻게 되면서 여러 곳에서 여성선거권 인정운동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연방헌법의 개정을 통한 여성선거권 확보투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함으로써 여성선거권에 대해 계속되던 반대는 사라졌으나, 1878년과 1914년에 연방의회에 제출된 여성선거권에 관한 연방헌법개정안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1918년 제출된 헌법개정안이 1918년 1월 하원에서, 1919년 6월 상원에서 통과되어 헌법개정이 이루어졌다. 1920년 8월 26일 국무장관이 수정헌법 제19조를 연방헌법 조항으로 공표함에 따라 마침내 미국 여성들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다. 미국 여성이 선거권을 획득하는 데 크게 기여한 여성운동가로 수잔 B. 앤소니,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캐리 채프먼 캣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17년] 임학자 심종섭(沈鍾燮) 출생
1917. 8. 26 전북 김제~.
1945년 일본 규슈대학[九州大學] 농학부를 거쳐 1951년 미국 예일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5년 서울대학교에서 농학박사학위, 1982년 타이완 중싱국립대학[中興國立大學]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6~75년 서울대 교수, 1961년 농림부 산림국장, 1974년 서울대 농대학장, 1976년 전북대학교 총장, 1983~88년 학술원 회장, 1983년 국어연구회운영위원장, 태평양과학협회 임학분과회장, 1987년 FAO 포플러위원회 한국회장, 1988년 문교부중앙교육 심의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92년 현재 임업연구원 고문 및 학술원 회원(임학분야)으로 있다. 황조소성훈장·학술원장·국민훈장무궁화장·국민훈장동백장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임학개론〉·〈목재방부학〉·〈임산제조〉·〈농업대사전〉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14년] 타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annenberg)
← 독일군에 항복하는 러시아군
1차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차르는 독일 공격을 명령한다. 렌넨캄프의 1군과 삼소노프의 2군이 선봉에 섰다. 둘은 역전의 노장이면서도 오랜 라이벌이었다.
렌넨캄프가 먼저 영광을 차지하기위해 독일로 전진했다. 농민들로 급조된 군대에 행군로도 엉망이었지만 워낙 많은 병력 덕분에 독일의 굼비넨 마을을 점령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후퇴하자 렌넨캄프는 추격을 멈춘다. 그의 눈에 독일군은 이미 오합지졸의 군대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퇴각한 게 아니라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뒤늦게 삼소노프의 2군도 독일로 향했다. 보급철도가 갖춰있지 않아 습지를 걷고 헤쳐가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때 독일군은 다소 무모한 결단을 내린다. 서부전선의 병력과 렌넨캄프와 대치하고 있던 군대를 최소만 남겨둔 채 삼소노프 쪽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1914년 8월26일, 삼소노프가 타넨베르크에 도착해 탈진해 있을 때 독일군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이날부터 5일간의 전투는 차라리 학살이었다. 3만명의 독일군에 포위돼 25만명의 군사 중 13만명이 죽거나 다쳤고 6만명이 포로가 됐다. 삼소노프는 자살했다./조선
[1910년] 동양사학자 김준엽(金俊燁) 출생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재학중이던 1943년 일제의 조선인학생 강제징병에 따라 학병으로 끌려갔다.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서 탈출하여(학병탈출 제1호), 장준하 등과 함께 린취안[臨泉]을 거쳐 중칭[重慶]으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총사령관:이청천)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1945년 광복군이 미국전략정보기관(Office of Strategic Service/OSS)과의 합작으로 계획한 국내진공 유격훈련을 받던 중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광복군의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총사령관 이범석의 부관으로 선발대가 되어 1945년 8월 18일 여의도에 도착했으나 미극동군사령부의 종전처리 지연으로 뜻대로 임무수행이 어렵게 되자 하루만에 다시 출국하게 되었다. 이후, 교육에 뜻을 두어 중국에 남아 1946년 중국국립 동방어문 전문학교의 한국어강사를 시작으로 교육계에 발을 디뎠다. 1949년 난징(南京)의 국립중앙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고, 1955년 국립타이완대학교 역사연구원을 수료했다. 1971년에 건국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 1984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부터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월간 〈사상계〉의 편집위원·주간 등을 역임하며 수많은 집필활동을 했다. 1969~82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장, 1982~85년 고려대학교 총장 재임중 정부의 학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해 강제사임당했으며, 1987년 이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1958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교, 1968년에는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교환교수를 역임했고, 같은 해 한국중국학 회장도 맡았다. 1961, 1962, 1974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약했고, 1972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1979년 이후 공산권연구협의회 회장을 맡아오다가, 1982년 명예회장에 취임했다. 1989년 사회과학원 이사장과 아주대학교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국민훈장 동백장·모란장, 건국훈장 애국장, 평북문화상(학술부문), 독립운동유공표창, 건국포장,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중근최근세사〉(1971)·〈중국공산당사〉·〈중공권의 장래〉(편저)·〈한국공산주의운동사〉(공저, 5권, 1967~76)·〈중공과 아시아〉, 회고록으로 〈장정〉(4권, 1990)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10년] 기업가 최태섭(崔泰涉) 출생
1910. 8. 26 평북 정주~1998. 5. 31 서울.
1927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53년 동화산업(주) 사장에 취임한 이래 1954~78년 대한화재해상보험(주) 회장, 1955~70년 충남제사(주) 사장, 1957~77년 한국유리공업(주) 사장, 1962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 1964년 (주)미도파백화점 사장 및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67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이사장 및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위원장, 1971~86년 한국어린이재단 이사장, 1971년 동화산업(주) 회장, 1974년 (주)코리아제록스 회장, 1976년 대한 기독교청년회연맹(YMCA) 부이사장, 1977~89년 한국유리 그룹 회장, 1978년 기독실업인회 회장 등을 지냈고, 1987년 숭실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이사장을 맡았고 1996년 한글라스(전 한국유리공업)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대통령 표창, 한국의 경영자상, 인촌상, 제9회 월남(月南)상, 타이완 대수경성훈장 등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873년] 디 포리스트(Lee De Forest,) 출생
← 디 포리스트(1907)
1873. 8.26~1961. 6.30
"아주 자연스럽게 매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아이디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매력적인 음악들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방송함으로써 그것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로부터 무선장비에 대한 수요를 자극해 이윤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 리 디 포리스트
디 포리스트는 오디온 진공관(진공관 검파기)을 발명한 미국의 발명가이다. 어린시절부터 기계에 심취했으며, 13세에 소형 용광로, 기관차, 실용적인 은도금 장비 등을 발명했다. 1893년 예일대학교 셰필드 과학학교에 입학했으며, 1899년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평행 전선의 선단에서 발생하는 헤르츠 파의 반사>는 후에 무선통신이라고 알려진 주제를 다룬 최초의 논문이었다. 졸업 후 헤르츠 파의 전해질 검출기를 발명했으며, 1902년 디포리스트무선전신회사를 설립했다. 1906년 오디온 진공관을 발명해 음성과 음악을 실험방송했다. 미약한 신호를 고배율로 증폭시킬 수 있는 3극진공관은 장거리 유·무선 통신을 가능하게 한 필수적인 개발이었다. 1912년에는 3극진공관의 출력의 일부를 다시 자체의 그리드로 재입력시켜 회로 내에서 발진현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로써 무선 신호의 송신·수신·증폭이 모두 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밖에 음성기록필름식 광학기록 시스템인 포노필름(phono-film), 의료용 오디온-다이아서미(Audion-diathermy)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여러 번 노벨 물리학상에 추천되었으며, '라디오의 아버지', '텔레비전의 할아버지'로 널리 존경받았다./브리태니커
[1885년] 프랑스의 작가 로맹(Jules Romains, 1885~1972) 출생
본명 루이 파리굴(Louis Farigoule). 베레 출생. 고향은 작은 마을이었으나, 주로 파리에서 살았다. 에콜 노르말(고등사범학교)을 졸업하여 철학 교수의 자격을 얻고, 한동안 교단에 섰다. 1906년 아베이파(派) 젊은 시인들의 운동에 협력하여 ‘위나니미슴(unanimisme:一體主義)’을 제창하고, 시집 《일체의 삶 La Vie unanime》(1908)을 발표, 개인과는 다른 집단의 혼과 생명을 노래했다.
그 밖에 시집 《오드[抒情短詩]와 기도 Odes et Pri res》(1913), 풍자극의 걸작 《크노크 또는 의학의 승리 Knock, ou le triomphe de la m decine》(1923), 《프시케 Psyche》 3부작 등이 있으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는 소설 《선의(善意)의 사람들 Les Hommes de bonne volont 》(27권, 1932∼1946)이 꼽힌다. 이 대작은 1908∼1933년 프랑스의 모든 사회계층의 생활과 문제를 그린 것으로 지극히 명석한 지성과 인간의 상호이해에 대한 깊은 신뢰가 전편에 넘친다. 그는 또 국제 펜클럽 회장(1936∼1940)도 지냈으며, 폭넓은 활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었다.
[1882년] 독일 태생 미국의 물리학자 프랑크(James Franck, 1882~1964) 출생
1882년 8월 26일 함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화학, 베를린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1911년 베를린대학교 강사가 된 후에 조교수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물리부 주임이 되었고, 1920년 괴팅겐대학으로 옮겨 M.보른과 협력해서 원자물리학의 연구를 추진하였다.
초기 연구는 기체의 전기전도에 관한 것이었는데, 여기에서 전자·원자·분자 운동의 분석으로 나아가, 얼마 후 G.헤르츠와 함께 전자의 비탄성충돌을 실험하였다.
1920년 수은증기(水銀蒸氣)의 공명퍼텐셜을 보여주었고(프랑크헤르츠의 실험), 그 때의 스펙트럼선에 양자조건(量子條件)이 성립한다는 것을 확인, 보어의 원자구조론을 뒷받침하였다. 1925년 이 공적으로 헤르츠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들뜬원자[勵起原子]의 에너지 교환, 기본과정(基本過程)에 관한 광학적 여러 문제 검토 등이 있으며, 괴팅겐대학교로 옮긴 후에는 기체의 형광(螢光) 연구를 추진, 1925년 요오드의 광화학분해에 관련하여 그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하였다(프랑크콘던의 원리).
1933년 나치스에 대한 항의로 괴팅겐대학교를 사임, 미국의 볼티모어로 이주하였다. 존스홉킨스대학교 등을 거쳐서, 1938년 시카고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시카고대학교 야금연구소(冶金硏究所)의 화학부장으로 맨해튼계획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으나 원자폭탄이 완성되자 1945년 《프랑크보고》를 제출,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에 반대하였다.
[1880년] 프랑스의 작가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출생
본명 Wilhelm Apollinaris de Kostrowitzki. 로마 출생.
아버지는 시칠리아 왕국의 퇴역 장교이고,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 출신이었다. 로마에서 출생한 그는 19세 때 파리로 나와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초기 작품인 시편이나 단편소설에는 당시 여행에서 얻은 인상과 이국의 전설 ·민화를 주제로 한 것이 많으며, 첫사랑의 영국 여성과의 실연을 감상적으로 노래한 장편의 시도 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M.자코브, A.살몽 등의 시인과 피카소, 브라크 등의 화가와 함께 새로운 예술운동을 시작하여, 입체파 ·야수파 화가들과 친교를 맺고 여러 잡지에 시 ·평론 ·소설을 기고하였다.
소설 《썩어가는 요술사(妖術師) L’Enchanteur pourrissant》(1909) 《이교(異敎)의 교조(敎祖)와 그의 일파》(1910) 《학살당한 시인》(1916) 등에서 그의 중세취미 ·괴기(怪奇)취미와 공상이나 시상(詩想)을 애호하는 특이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시집으로는 《동물시집 Le Bestiaire》(1911) 외에 《알콜 Alcools》(1913) 《칼리그람 Calligrammes》(1918)의 두 대표 시집이 있다. 새로운 예술과 정신의 고취자이며 실행자인 그의 시에서는 중세 이래 19세기까지의 서정적인 시에서 볼 수 있는 애정 ·별리 ·회한 등을 다룬 내용을 많이 볼 수 있으나, 그는 확실히 20세기의 새로운 예술창조자의 한 사람이며, 평론 《입체파 화가 Les Peintres cubistes》(1913) 《신정신(新精神) L’Esprit nouveau》(1918)은 모더니즘 예술을 발족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Le Pont Mirabeau 미라보 다리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Et nos amours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Faut-il qu'il m'en souvienne 그러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La joie venait toujours apres la peine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Les mains dans les mains restons face a face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Tandis que sous 우리들의 팔 밑으로
Le pont de nos bras passe 매끄러운 물결의
Des eternels regards l'onde si lasse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L'amour s'en va comme cette eau courante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L'amour s'en va 사랑은 흘러간다
Comme la vie est lente 삶이 느리듯이
Et comme l'Esperance est violente 희망이 강렬하듯이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Passent les jours et passent les semaines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Ni temps passe 가버린 시간도
Ni les amours reviennent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Vienne la nuit sonne l'heure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 G. Apollinaire - 기욤 아폴리네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폴리네르'는 입대하여(1914) 보병 소위가 되었고, 1916년에 머리를 다쳤다. 1918년 그는 전쟁에서 입은 상처와 스페인 독감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3일 앞두고 38세의 나이로 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 발표
← ‘프랑스 혁명- 인권선언’(카르나발레 미술관 소장)
1789년 8월 26일 프랑스 입법의회는 프랑스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정식명칭은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으로 전문과 17조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혁명의 기본정신을 밝히고 자유와 평등, 국민주권, 재산권 등에 대해 규정하고 있으며 미국의 독립선언과 함께 민주와 자유주의 원리를 표현했다.
제1조는 "인간의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한다"라고 규정해 인간의 자유와 권리의 평등에 대한 중요성을 나타냈고, 제6조에서는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대한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라고 규정해 법 앞의 평등이 봉건적 신분 체계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 외에도 제2조에서는 압제에 대한 저항권, 제3조에서는 주권재민, 제11조에서는 사상과 의사의 자유로운 교환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유럽에서 형성된 민주주의 사상의 총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선언의 근본사상이 자연법 사상과 계몽사상을 통해 자라난 인간해방으로 루소의 일반의지론, 국민주권론, 몽테스키외의 권력 분립론, 존 로크의 자연권론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이 인권선언은 1891년에 만들어진 프랑스 헌법에 영향을 끼쳤고, 훗날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조선
[1768년] 제임스 쿡, 엔데버호 선장으로 1차 탐험 출항
‘캡틴 쿡(Captain Cook)’이라고도 한다. 요크셔의 빈농에서 출생하여, 1755년에 일개 수병으로 해군에 입대, 프랑스와의 7년전쟁 때에는 캐나다로 출동하였고, 퀘벡 공략에도 종군하였다. 그 후에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해역의 측량, 일식 관측 등으로 명성을 얻어 해군대위로 승진하였다. 이 일식 관측의 보고는 학사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1768년 태평양에서 실시한 금성의 태양면 통과 관측의 관측대장에 선임, 엔데버호(號)를 인솔하여 많은 학자들과 동행, 타히티섬에서 그 관측에 성공하였다. 그 후 소시에테제도(諸島)를 발견하고, 뉴질랜드를 주항(周航) 중에 쿡해협을 발견하여 뉴질랜드가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혔다. 다시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을 탐험하여, 이것을 영국 영토로 선언, 1771년에 귀국하였다.
[1743년] 프랑스 화학자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Lavoisier, 1743~1794) 출생
←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c/Antoine_lavoisier_color.jpg
파리 출생. 처음에는 변호사를 지망하여 마자랭학원에 이어 법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최초의 논문은 석고(石膏)에 관한 실험적 연구였다. 1768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아카데미 부회원(副會員)이 되고, 그해 겨울에 시도한 ‘페리칸의 실험’에서는 물이 흙으로 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원소변환설을 완전히 뒤엎었다(페리칸은 당시의 증류기로서, 반복하여 증류가 가능하였다). 그의 화학적 업적의 핵심은 새로운 연소이론의 확립이다. 이 연구는 1772년 다이아몬드의 연소실험 보고로 시작되었는데, 이어 인 ·황 ·금속의 연소실험을 밀폐기 속에서 실시하여, 공기가 흡수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해는 이산화탄소를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기체연구가 도입된 시기였으며, 그는 연소의 연구를 기체연구와 결부시킴으로써 ‘화학혁명’을 수행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시 널리 보급되어 있던 플로지스톤설(說) 및 보일의 ‘불의 입자설’을 극복해야만 했다. 1774년 1월 출판한 《물리학적 ·화학적 논문집》은 이와 같은 연구를 정리한 것으로, 기체연구의 역사와, 특히 납[鉛]을 밀폐기 속에서 연소시켜 연단(鉛丹)으로 변화시키면 공기가 흡수되며, 반대로 연단을 숯과 함께 연소시키면 공기(사실은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는 유명한 실험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연소할 때 정체불명의 플로지스톤(phlogiston)이 발생한다는 설(說)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플로지스톤의 덩어리라고도 할 수 있는 숯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 아직도 완전한 이론이 되기에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같은 해 4월에는 금속이 연소된 다음에 중량증가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보일이 말한 것처럼 불의 입자가 부착되기 때문이 아니고, 공기의 일부가 흡수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같은 해 10월에 있었던 J.프리스틀리의 파리 방문을 기다려야만 했다. 프리스틀리는 적색 수은의 연소로 발생하는 새로운 기체(사실은 산소기체)를 암시하였는데, 동시에 이것은 숯과 플로지스톤의 도움 없이 일어나는 연소현상이라는 점에서 라부아지에를 고무시켰다.
계속되는 3년 동안에 그는 공기가 두 종류의 기체로 되어 있으며, 하나는 연소와 호흡에 쓰이고, 다른 하나는 유독기체(질소가스)라는 점을, 수은 → 적색 수은 및 그 반대의 반응실험 등을 통해 정량적(定量的)으로 밝혀냈다(1777). 또한 H.캐번디시에게 뒤지기는 했지만, 물의 생성과 분해실험을 하여, 오랜 세월 통용했던 물원소설[水元素說]을 비판했다(1783). 이와 같이 물과 이산화탄소의 분석을 근거로 하여 처음으로 유기물의 원소분석을 하였다(1784). 한편, 이 연소이론은 호흡현상의 해명을 부차적으로 가능케 했다. 즉, 산소를 마셔 이산화탄소를 토해내는 것을 동물과 사람으로 실험했고, 라플라스와 함께 빙열량계(氷熱量計)를 고안하여 호흡이 연소와 동일한 것이라는 점을 밝혀, 열화학(熱化學)의 기초를 닦았다(1782∼1783).
이같은 새로운 화학이론을 발표하기 위해 베르톨레, L.B.기통 드 모르보, A.F.푸르크루아 등과 협력하여 낡은 화학술어를 버리고 새로운 《화학명명법》을 만들어 출판했으며(1787), 이것은 현재 사용되는 화학술어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화학의 체계적인 저술인 《화학교과서》(1789)를 출판하였는데, 이 속에는 질량불변의 법칙과 원소개념의 정의가 있고 광소(光素) ·열소(熱素)를 포함한 33개의 원소표가 기재되었으며, 원소를 ‘화학 분석이 도달한 현실적 한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라부아지에는 징세청부인으로 고발되어, 1794년 5윌 8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수학자 J.L.라그랑주는 “이 머리를 베어버리기에는 일순간으로 족하지만, 같은 두뇌를 만들려면 100년도 더 걸릴 것이다.”라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고 한다.
[1740년] 프랑스 기구 제작자 J.M 몽골피에(Joseph-Michel Montgolfier, 1740~1810) 출생
← J.M. 몽골피에, 상아에 새긴 초상화(18세기 후반)
아노네 출생. 아노네 근처의 비달롱에서 제지업을 경영하였으며, 영국의 프리스틀리가 쓴 기체(氣體)의 연구 서적에 자극을 받아 건축가인 동생 자크(Jacques tienne: 1745~1799)와 함께 경기구(輕氣球)의 실험을 시작, 그해 11월 가열한 공기에 의한 모형기구를 띄우는 데 성공하였다.
이듬해 1783년 6월 주의회(州議會)가 아노네에서 열렸을 때 공개실험에 성공하였고, 9월 19일 베르사유의 광장에서 황제 부처의 임석 아래 양(羊) ·닭 ·오리를 실어 띄워서 3km 정도의 자유항행을 하였다. 이 해부터 사람을 태운 최초의 수소(水素)기구가 J.A.C.샤를에 의하여 시도되어 기구는 크게 유행하였다. 1784년 1월 7명의 승객 중 몽골피에도 처음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발발과 동생의 죽음 등으로 기구의 연구를 단념하였다./naver
[1728년] 독일 물리학자·철학자 람베르트(Lambert, Johann Heinrich) 출생
← 람베르트, Pierre-Roch Vigneron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Gottfried Englemann이 제작한 석판화
1728. 8. 26 스위스 알자스 뮐하우젠~1777. 9. 25 독일 베를린.
π(파이:지름에 대한 원주율)는 두 정수의 몫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무리수임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증명했다.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고, 어려서부터 자신이 직접 설계·제작한 기구로 기하학과 천문학적 연구를 했다. 잠시 동안 그는 부기(簿記)·비서·편집 등의 일을 했다. 1748년 개인교사로 있을 때 좋은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켰으며, 1759년에는 개인교사를 그만두고 아우크스부르크로 옮겼다. 1764년 베를린으로 가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1768년 'π는 무리수이다'라는 증명이 있는 논문을 출판했다. 1774년 베를린에서 천문역서인 〈천체 연감 혹은 천체력표 Astronomisches Jahrbuch oder Ephemeriden〉를 편집하는 일을 했다.
그는 처음으로 쌍곡선함수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켰고, 열과 빛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도 혁신적이었다. 빛의 세기의 단위인 람베르트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광도측정법 Photometria〉(1760)·〈평행선이론 Die Theorie der Parallellinien〉(1766)·〈고온측정법 Pyrometrie〉(1779) 등이 있다. 〈신 논리학 Neues Organon〉(1764)에는 형식논리학·확률·과학원리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분석했다./브리태니커
[1597년] 백두산 화산 폭발
휴화산으로 고생대부터 신생대까지 여러 시대의 지층들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생대와 신생대의 구조운동에 의해 형성된 단열구조, 파열구조 단층이 발달하였다. 화산분출은 쥐라기(약 6억 년 전)에서 신생대 제4기까지 지속되었는데 특히 신생대 제3기부터 활발히 진행된 화산활동으로 현무암질 용암이 대량 유출되어 약 5,350㎢의 넓은 백두용암대지가 만들어졌다.
약 200만 년 전부터 화산활동이 약화되어 지금의 산세를 형성하였다. 화산활동 후기에는 대연지봉, 소연지봉, 대각봉, 무두봉, 베개봉, 청봉 등 부속화산들이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적갈색 다공질현무암용암의 분출로 생겼다.
최근의 분출은 1597년·1668년·1702년에 있었다고 문헌에 전하고 현재는 백두산 주변 50km 내외에 진도 2∼3의 약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화산폭발시 용암이 잘게 부서져 쌓인 부석층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천지 부근의 부석층은 두께가 20m 가량 된다. 화산재, 화산탄, 화산모래 등의 층도 남아 있다.
[1398년] 정도전 피살
← 삼봉 정도전
조선초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삼봉 정도전이 1398년 8월 26일 피살됐다. 정치적으로 후일 태종이 된 이방원의 반대편에 섰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삼봉은 어릴 때부터 총기가 남달라 10대에 예악· 제도· 음양· 병력· 의학 등 각 분야의 고전을 섭렵,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삼봉은 20세 되던 해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부모상으로 벼슬길에는 5년 뒤에 나갔다. 국운이 기울던 고려말 성균박사에 임명된 그는 영주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종사했다.
조선개국 후 그가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를 배척한 토대가 이때 쌓였다. 1390년 획기적인 전제개혁인 과전법을 도입, 구세력을 축출한 삼봉은 2년 뒤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을 개국했다. 그의 재능은 이때부터 빛을 발했다.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궁궐과 종묘의 위치를 정했으며, 경복궁 등 궁전과 궁문의 이름을 지었다. 또 관제 등 제도를 정비하면서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신왕조의 법적 기틀을 잡았다./조선
[1346년] 잉글랜드, 백년전쟁에서 첫 승리
← 에드워드 3세, 수채화(15세기)
1346년 8월 26일 잉글랜드가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중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백년전쟁은 14~15세기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프랑스 왕위계승의 정통성 등을 문제 삼아 벌인 전쟁으로, 약 100년 간에 걸쳐 간헐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1328년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죽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의 발루아 백작은 서로 자신이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임을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의회는 발루아 백작(후의 필리프 6세)의 왕위계승을 결정했다. 에드워드 3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필리프 6세가 1337년 기옌 영지를 몰수하자 다시 왕위를 요구하게 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졌으나 잉글랜드군이 서서히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1346년 7월 중순 코탕탱 반도에 상륙한 잉글랜드군은 센 강 서쪽의 노르망디 저지대를 약탈하고 남쪽으로 파리 외곽까지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크레시앙퐁티외에서 잉글랜드군과 맞붙었다. 전투는 알랑송의 샤를 2세와 보헤미아의 얀 왕,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를 비롯한 1,500여 명의 병사를 잃은 프랑스군의 참패로 돌아갔다. 이후 에드워드 3세는 북쪽으로 진격해 칼레를 포위공격하고 이듬해 점령했다./브리태니커
그 밖에
2009년 남북 적십자 회담
2009년 미국 LA 산불 확산
2005년 한일회담 문서 전면 공개
2005년 남한 관광객 개성시범관광
2005년 제1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평양)
2004년 수전 헉필드, 미국 MIT대 첫 여성 총장에 선임
2002년 탈북자 7명, 베이징의 중국 외교부 입구에서 난민지위 인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체포
2002년 세계정상회의, 남아공에서 개막
1999년 대우 채권금융기관, 대우그룹 12개 핵심계열사 워크아웃 결정
1991년 홍콩스타TV 위성방송 시작
1985년 한적대표단, 제9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참석위해 평양 도착
1981년 북괴, 미국 SR71기에 미사일 공격
1965년 서울지구에 위수령(衛戍令) 발동
1957년 주한영국군 철수
1957년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성공
1957년 명보극장 개관
1953년 비상계엄령 전면 해제
1948년 노동 운동가 전태일 출생
1948년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 체결
1947년 라베트 미국 국무차관, 소련 외상에게 한국문제 절충안 제시
1931년 경상도를 제외한 전국에 폭우(~8.27)
1916년 이탈리아 대(對)독일 선전포고
1910년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 사망
1907년 황제, 황태자 단발
1897년 제4대 대통령 윤보선 출생
1894년 한국-일본 공수(攻守)동맹 조인
1886년 육영공원 개원
1884년 스페인의 극작가 가르시아 구티에레스 사망
1723년 세균과 원생동물을 최초로 관찰한 미생물학자 레벤후크 사망
1610년 유정(惟政)대사 입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