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 사랑
김두성
고향이란 말만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이 사무치게 그리운 곳이다. 오랫동안 문명이 비켜갔던 곳. 맞은편에서 소만 걸어와도 비켜서지 못할 만큼 좁은 동네길, 흙벽돌로 벽을 쌓고 버섯 같은 초가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어깨를 부비고 살던 고향 마을. 천연우물에 사철 물이 넘치고 우물가의 논바닥 얼음 속에서도 파랗게 미나리가 자라고 봄에 산수유가 곱게 피어나던 곳이다.
야트막한 산을 중심으로 60여 호 집들이 어깨와 이마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산다. 우리 집은 까마득한 현조 때부터 내려온 고택으로 처마에 손이 닿을 정도로 나지막한 초가삼간이었으나 가솔이 늘어나자 6.25사변 이후에 새로 사랑채를 증축하여 열세 식구가 함께 살았다. 집 주위는 수수깡울타리로 둘러쳐 있고 중간 중간에 등치가 큰 오래 묵은 아카시아나무가 듬성듬성 세워져서 간 여린 수수깡 울타리를 안고 있었다.
가을에 가지치기를 해서 둥치만 남았던 그 아카시아나무에서 오월이 되면 어른 키의 두 배만큼 가지가 자라서 갈색의 수수깡울타리가 짙은 녹색으로 채색되고 생명이 있는 울타리로 태어난다. 그 아카시아 가지에는 수수이삭 만큼 크고 탐스러운 꽃송이가 주렁주렁 열린다. 이렇게 흐드러지게 핀 아가시아 꽃들이 내뿜은 그 짙은 향기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동네 골목골목까지 배달한다.
안채 뒤에는 고목이 다된 재래종 털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집 그늘에 묻혀 기를 펴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서 있다. 가을에 전지한 옹이의 상처에는 묽은 수액이 흘러 굳어 있다. 또한 낙엽을 떨군 성긴 가지, 낡은 거미줄에는 껍질만 남은 무당벌레의 시체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 왠지 마음이 씁쓸하다.
양육강식의 미물들의 세계에도 봄은 오는가? 이 까칠한 복숭아나무에도 꽃은 핀다. 꽃빛에 뒤안길이 환해지고 벌과 나비 거미 등 온갖 곤충들이 꽃향기를 맡고 모여 든다. 복사꽃 축제(화전놀이)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다. 실바람에 흔들린 화사한 꽃잎들은 비실비실 몸을 꼬다가 보리 고개를 잉태하고 땅으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우리 집은 좌측은 언덕이고 나머지 삼면은 수수깡울타리고 둘러있다. 남쪽으로 나있는 출입구는 있지만 대문이 없다. 외출 시에 출입구는 빨래 줄을 받치던 장대를 걸쳐 놓으면 된다. 도둑도 주인이 없는 집은 들어오지 않는다. 손님이 나타나면 울타리에 집을 지은 까치부부가 까악까악 짖어댄다. 처마 밑에 알을 깐 제비도 덩달아 나래를 푸드득 거리며 소란을 피운다. 그들 모두가 훌륭한 집지킴이다.
고향의 전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그 다랑이 논의 모양은 마치 산비탈에 등고선을 그려놓은 듯하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전부 논두렁만 보이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모두 논바닥처럼 보인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면 국화꽃잎을 따서 한식문짝에 예쁘게 수를 놓고 그 위에 두꺼운 한지로 문을 탱탱하게 바르고 바람막이 문풍지를 넓게 잘라 붙인다. 그리고 겨울을 정중하게 맞이한다. 차갑고 건조한 북풍이 바싹 마른 수수깡 울타리를 찢고 쏴- 하고 들어오는 바람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비감하고 애잔하다. 어머니는 겨울이 두려워 아궁이부터 닥달한다. 겨울철의 아랫목은 장판이 누렇게 익을 정도로 온도를 높여도 새벽이면 싸늘하게 식어서 다시 한 번 아버지가 허리 굽혀 군불 때는 모습이 안쓰럽다. 추운겨울에도 이불 한 채를 공동으로 덮는다. 헐렁한 어깨에 이불깃을 꼭꼭 눌러주시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잊을 수가 없다,
마당의 남쪽 정면담장에는 뽕나무와 늙은 대추나무 한그루 서 있다. 이 대추나무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한 자락이 걸려 있다. 나보다 13년 연장年長이신 큰형님은 어릴 때는 장난꾸러기였다고 한다. 호박에 말뚝 친다는 말이 놀부전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큰형님이 그러했다. 그래서 어느 날 진짜로 이웃집 아주머니가 나무꼬챙이가 박힌 호박을 들고 찾아 왔다고 한다. 너무나 민망스럽고 화가 난 아버지는 형님을 그만 꼴망태에 넣어 반나절을 이 대추나무에 달아 두었다고 한다. 서당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전해 듣게 된 그 아주머니는 경솔한 자신을 후회하고 참외 한 바가지를 들고 와서 오히려 풀어주라고 사정을 했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향토의 인심인가.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가난 속에서도 풍요로운 인심과 두레정신을 배우고 느꼈던 것이 각박하고 치열한 경쟁사회와 대비되어 그립게 다가온다. 그리고 도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자연 속의 낭만적인 농촌생활을 통하여 ‘의사는 병을 고치지만 농부는 생명을 키운다.’라는 자부심과 생명의 귀중함을 배운다. 농사에는 철이 있고 노동공동체 두레정신은 철학이 있다.“자연은 인간사랑, 인간은 자연사랑.” 자연과 인간은 생명공동체임을 깨닫게 한다.
그 후 형님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교육공무원이 되었으며 정직하고 철저한 교육자의 정신으로 재직하다가 65세 정년이 되던 해에 본향으로 황망히 가시었다. 그의 마지막 봉직한 교정 앞에는 참신한 교육자로서 공로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내 고향은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와 고운 인심이 서려있는 영원한 나의 어머니요 꿈이다. 그래서 타향에 살다가도 영혼은 고향에 와서 묻힌다. 대추나무 사랑의 매는 우리 집안의 가훈家訓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