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지역 "임진난사 학술대회"를 경청하고
~~~청도"자계서원"과 임난에 관계된 "녹동서원"을 들러보다~~~
언 제 ;2017년 10월 19일
갔는곳 = 자계서원-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
녹동서원-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585
소영회원 여덟명은 임진난사학술대회를 경청 하고
시간이 허락되여 청도의 유명한 서원 탁영(김일손)선생이 배향된
자계서원과, 임금으로부터 사성받은 김충선장군의 서원 녹동서원을 들러 여러가지
모습들을 관찰하여 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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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 입구 "영부루"부터~~
===김일손(金馹孫)은===
연산군이 즉위하고 사림파의 중앙진출이 활발했을 때 언론 활동의 중심
역할을 했으나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그는 주로 언관으로
있으면서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
을 사초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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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 설명문도~~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권지부정자에 올랐다.
1491년 사가독서를 하고 주서·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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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즉위하고 사림파의 중앙진출이 활발했을 때 언론(言論) 활동의 중심 역할을 했으나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본관은 김해. 아버지는 집의를 지낸 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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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 본당 "보인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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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 현판 글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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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 17세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에게서
〈소학〉·〈통감강목〉·사서(四書) 등을 배웠으며, 뒤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갔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강혼 등과 사귀었다.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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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년되었다는 은행나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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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년 사가독서를 하고 주서(注書)·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질정관(質正官)으로 있을 때 명에 가서 정유(鄭愈) 등의 학자와 교유하고,
정유가 지은 〈소학집설 小學集說〉을 가지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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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世祖纂位)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때
권오복·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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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 김일손선생 문학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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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언행 가운데 훈구파에서 문제로 삼았던 것은 소훈윤씨(昭訓尹氏)에게
지나치게 많은 전민(田民)과 가사를 내렸다고 세조의 실정을 비판했고,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하고, 숙의권씨(淑儀權氏)의
노비와 토지를 권람이 가로챘다고 비판한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세조와 계유정난 공신인
훈구파를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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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 내력의 비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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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은 안동(사촌)인 김창회씨가 근찬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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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계서원 앞에서 기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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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석도~~
김일손은 김종직의 문하 중에서 김굉필·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를 중시하는
계열보다는 사장을 중시하면서 '치인'을 지향하는 계열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그의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중종반정 후에 신원되어 중종 때
홍문관직제학,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목천 도동서원, 청도
자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과 〈회로당기 會老堂記〉·〈속두류록 續頭流錄〉 등
26편이 수록된 〈속동문선 續東文選〉이 있다. 시호는 문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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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김해)김씨 삼현파 추향제 축하 화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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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앞에 개인소유집에 청도 반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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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서원을 찾아서~~
===김충선(金忠善)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투항해온 왜인, ‘항왜(降倭)’는 존재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 대에 항왜에게 벼슬을 내렸고, 세종 조에는
항왜를 동원하여 왜구를 토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에 본격적으로 항왜가 등장하는
시기는 역시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경 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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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이정표랄까~?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일본의 통일을 완성했지만
심정적으로 굴복하지 않은 다이묘들이 많았다. 때문에 그가 조선 침공을 결정한 이유에는
잔존하고 있던 반대세력의 해체도 포함되어 있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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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본당 건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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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정문 "향양문"(고향을 기리는 뜻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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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사무라이들은
바다를 건너오자마자 조선에 항복한 다음 어제의 전우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 전역이 합병되긴 했지만 그 직전까지 일본의 각 번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독립된 통치체제를 갖추고 서로 피 흘리며 싸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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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왜는 임진왜란 당시 뛰어난 무예 실력과 화포 기술을 전수하여 조선군의
역량을 배가시켜 주었다. 하지만 조선의 위정자들은 기질이 드센 항왜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중국으로 보내거나 변방 수비에 동원하는 등 소모적인 자원으로 활용했다.
김충선은 그런 각박한 환경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아 자랑스러운 조선인으로 자리매김했던
아주 특별한 항왜였다. 그는 1592년 귀화한 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삼난공신(三亂功臣)’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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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의 생애는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조선연구회에서 간행한
《모하당문집》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때 일본인들은 그를 배신자이자
매국노로 폄하하고 존재조차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일본의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기행문을 통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현재에는 한일 양국의 우호를
상징하는 역사문화 콘텐츠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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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호관 앞 조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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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물이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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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들이 구비된 우호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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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관람하는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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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유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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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예를 중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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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게 꾸며진 교육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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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자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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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장군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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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장군으로 변한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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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우는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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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도 살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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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람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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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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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면서 조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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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의 표식으로 사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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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쟈계서원은 팔조령에서 청도가는길 디리 건너기전 우측 마을에 자리하고있는데 자주지나가는 길목인데
처음 참관해 보았습니다,
탁영 김일손에 대한 업적을 기리는 비석들 대단하게 활성화 시켜서 후손들의 조상에 대한 정성들이 보입니다,
삼강할배 영상준비에 감사합니다.
공부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라 언제나 자신의
노력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되면 대만족이라고 생각한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