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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빅토르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Hernani>
대본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
초연 1844년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
배경 1519년 피레네 산맥 등 스페인의 여러 곳
<2014 몬테-카를로 극장 / 130분 / 한글자막>
몬테-카를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합창단 연주 / 다니엘레 칼레가리 지휘 / 장 루이 그린다 연출
에르나니........................산적두목으로, 원래는 아라곤의 백작 돈 조반니.....라몬 바르가스(테너)
돈 카를로.......................스페인 국왕....................................................루도빅 테지에(바리톤)
돈 루이 고메스 데 실바.....스페인 대공....................................................알렉산데르 비노그라도프(베이스)
돈나 엘비라....................실바의 조카이자 그의 약혼녀.............................스베틀라 바실레바(소프라노)
돈 리카르도....................카를로 국왕의 시종..........................................마우리치오 파체(테너)
이아고...........................실바 대공의 시종.............................................가브리엘레 리비스(베이스)
조반나...........................엘비라의 유모.................................................카리네 오한얀(소프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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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베르디도 반할 법한 테너(바르가스)와 바리톤(테치어)의 존재감
모나코의 몬테 카를로 오페라 극장의 2014년 실황으로, <에르나니>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 희곡을 개작한 4막의 비극 오페라이다. 에르나니와 돈 루이 실바는 돈 카를로에게 복수하기로 맹세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자결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설정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압박 하에 있었던 이탈리아 국민감정에 부합되어 작품 성공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2015년 국립오페라단이 선보인 비제 <진주조개잡이>의 연출가 장 루이 그린다가 연출을 맡았다. 중형 사이즈의 무대에 조각과 소품, 문양 등을 활용하여 고증에 충실한다. 영상감독 스테판 아뷔의 카메라는 무대 아래에서, 혹은 공중에서 출연진의 정수리를 비추는 독특한 장면도 연출한다. 라몬 바르가스의 존재감이 이 영상물을 택하게 하지만, 바리톤을 좋아하는 마니아라면 극중 돈 카를로 역의 바리톤 루도비크 테치어에 주목할 것. 해설지(19쪽 구성/영어·프랑스·독일)에는 작품 해설과 캐스팅 소개가 담겨 있다.
베르디가 작곡한 <에르나니>는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의 동명 희곡을 개작한 4막의 비극 오페라이다. 베르디의 <롬바르디아인>에 이은 그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 이탈리아의 독립정신을 추구하고 있다. 작곡 당시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의 압박 하에 있었다. 물론 이탈리아 내에 독립운동의 외침도 점차 높아졌다. 베르디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오페라에 녹여 넣어 이탈리아인들의 입장을 대변하곤 했다.
에르나니와 돈 루이 실바는 돈 카를로에게 복수하기로 맹세한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자결한다. 작품의 내용은 스페인을 배경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돈 카를로에 저항하는 이야기지만 이러한 내용은 당시의 이탈리아 국민 감정에 부합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공연은 모나코의 몬테 카를로 오페라극장에 오른 2014년 실황이다. 2015년 국립오페라단이 선보인 비제 <진주조개잡이>의 연출가 장 루이 그린다가 연출을 맡았다. 그의 무대는 고증에 충실하고 있으며, 대형무대보다 조각과 소품, 문양 등을 활용하여 역사적 감각을 잘 살리고 있다. 영상감독 스테판 아뷔의 카메라는 전체적인 장면보다 적극적인 클로즈업을 통하여 인물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꼼꼼히 담아낸다. 때로는 무대 아래에서 출연진을 비추거나, 공중에서 그들의 정수리를 비추는 숏도 독특하다.
라몬 바르가스의 존재감이 이 영상물을 택하게 하지만, 설령 바리톤을 좋아하는 마니아라면 극중 돈 카를로 역의 바리톤 루도비크 테치어에 주목할 것. 다니엘레 칼레가리의 지휘는 두 남성 성악가의 소리를 진중히 받쳐주며 오페라의 레이어를 진지하고, 무게 있게 가져간다.
해설지(19쪽 구성/영어·프랑스·독일)에는 작품 해설과 캐스팅 소개가 담겨 있다.
=== 작품 해설 === <다음 클래식 백과 / 이진경 글>
에르나니
주세페 베르디
라 스칼라 극장과 계약을 맺은 베르디가 다음으로 선택한 극장 라 페니체에서 처음 올린 오페라로 빅토르 위고의 《에르나니》를 원작으로 하였다. 위고 특유의 심리적 갈등 묘사를 베르디의 손을 거쳐 라 페니체 극장에 올린 이 오페라는 밀라노에 이어 베네치아에까지 베르디가 오페라 거장의 위치가 되도록 해준 대작이다.
새로운 극장과의 만남
베르디에게 있어 〈에르나니〉는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것은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을 떠나 새로운 극장과 계약을 맺은 첫 작품이라는 점이다. 베르디가 선택한 극장은 라 페니체로 이 극장은 라 스칼라 극장과는 많은 면에서 달라 새로운 시도를 가능하게 하였다. 〈나부코〉와 〈제1차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으로 베르디를 성공의 반열에 올리는 데 큰 도움을 준 라 스칼라 극장은 장대한 규모와 화려함으로 베르디가 무대 위에서 펼칠 수 있는 바를 가능하게 하였다. 반면 라 페니체는 그에 비해 작은 규모로 아담하여 장대함보다는 각 등장인물의 세밀한 표정을 살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렇게 베르디는 이 작은 규모의 극장에서 올릴 첫 작품으로 빅토르 위고의 《에르나니》를 선택하였다. 그렇게 올린 〈에르나니〉는 각 인물들이 직면한 갈등과 이를 표현하기 위한 행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왔다.
사랑을 사이에 둔 세 남자의 갈등
오페라는 한 여인을 두고 벌이는 세 남자의 대결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작품은 여주인공인 엘비라에 대한 사랑보다는 세 남자의 심리적 갈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아라곤의 백작이었던 산적 두목 에르나니, 스페인 국왕 돈 카를로와 실바 대공 세 남자는 엘비라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작품 전체에는 돈 카를로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아버지를 잃고 산적으로 살아가는 에르나니와 돈 카를로의 갈등과, 돈 카를로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실바, 카를로가 에르나니를 사면하자 자신의 복수가 끝나지 않았다고 외치며 에르나니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미는 실바와 같이 세 남자간의 알력다툼과 미묘한 감정 선이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그래서 오페라에서 엘비라가 등장하지 않고 이름만 등장해도 진행에 무리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행복의 절정에서 죽음을 맞이하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산적 두목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에르나니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 엘비라가 실바 대공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엘비라 역시도 원치 않는 결혼에 괴로워하는데, 그때 스페인 국왕 카를로가 은밀히 엘비라를 찾아와 그녀를 사모하는 심정을 고백한다. 이를 보게 된 에르나니는 국왕을 막아서며 엘비라를 보호한다. 방이 소란스러워지자 실바가 나타나 두 남자와 함께 있는 엘비라에게 분노한다. 실바의 기사가 두 사람에게 칼을 들이대자 국왕의 시종이 나타나 카를로의 신분을 밝힌다. 카를로는 에르나니를 보내주며 대공의 성에 머무른다.
다음날, 실바와 엘비라의 결혼 피로연에 한 명의 순례자가 나타난다. 그는 두건을 벗고 자신의 목을 가져가라고 한다. 순례자는 바로 에르나니이다. 엘비라의 방에 온 에르나니는 자신을 두고 실바와 결혼한 엘비라를 나무라고 그런 에르나니에게 엘비라는 그의 죽음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두 사람은 포옹을 하는데, 실바가 들어와 이를 보고 분노한다. 이때 카를로가 등장하고, 실바는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기 위해 에르나니를 피신시킨다. 카를로는 이에 엘비라를 데리고 간다. 실바는 에르나니를 비밀 문에서 나오게 한 후 결투를 신청하지만, 에르나니는 카를로에게 복수하는 것이 먼저임을 말하며 실바를 진정시키고 실바에게 뿔피리를 건네주며, 이 뿔피리 소리가 들리면 자신은 죽겠다고 맹세를 한다. 카를로가 황제가 되기 직전, 반역자들이 모여 자신들의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미 반역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던 카를로에게 잡힌다. 엘비라는 카를로에게 황제가 되었으니 미천한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청한다. 이에 카를로는 모두를 용서하고 엘비라에 대한 사욕도 버려 에르나니가 엘비라를 신부로 맞게 한다. 하지만, 실바는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카를로와 에르나니에게 복수의 칼날을 다진다. 한편 에르나니의 궁에서 에르나니와 엘비라의 결혼 피로연이 열린다. 이때 뿔피리 소리가 들리고 에르나니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엘비라에게 잠시 자리를 피하게 한다. 실바가 나타나 독과 칼을 건네자, 엘비라도 달려와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소용이 없고 에르나니는 칼을 집어 들어 심장에 찌른다. 이를 본 엘비라도 칼로 심장을 찌르며 그를 따른다. 이렇게 에르나니에게 가장 행복한 날,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까다로운 주인공이 된 에르나니
에르나니의 역할은 원래 콘트랄토로 생각되었다. 그렇게 〈에르나니〉는 베르디의 여러 오페라 중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남자 주인공을 부르는 작품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여장 남자 역할을 오페라에서는 ‘바지 역할’이라 불렀는데, 베르디가 작곡활동을 하는 19세기에는 바지 역할 풍습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바지 역할을 요구한 것은 페니체 극장이었으나, 베르디는 고민 끝에 에르나니를 테너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초기 콘트랄토를 고려했기 때문에 에르나니의 곳곳에는 콘트랄토의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에르나니 역은 테너에게는 다소 맡기 까다로운 역할이 되었다.
1막 2장, 엘비라의 아리아 ‘에르나니, 나를 데리고 도망가주오(Ernani, Ernani involami)’
실바와의 결혼식 전날 밤, 실바의 성에서 그녀가 사랑하는 에르나니를 기다리며 부르는 카바티나이다. 그녀는 전체 장면에서 에르나니의 더블 아리아 형식을 반복하며 음악적으로 발전시킨다. 이 아리아는 확장되었지만 베르디의 초기 작품에서 흔한 도식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프라노의 장식적인 제스처가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는 것을 보여준다. 쾌활한 스페인풍의 템포가 엘비라의 수행단이 그녀가 결혼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하는 동안에 나온다. 이어 카발레타 ‘에르나니가 아닌 것은 다 필요없어(Tutto sprezzo che d’Ernani)’가 이어 나온다.
1막 2장, 실바의 카발레타 ‘늙은이에게 남은 것은 복수의 칼뿐이다(Infin che un brando vindice)’
엘비라의 방을 찾은 실바는 신부의 방에 두 명의 남자, 에르나니와 카를로가 있는 것을 보고 슬퍼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카바티나 ‘불행한 사나이여(Infelice)’를 부른다. 실바의 호위병들과 기사들의 칼을 뽑은 실바는 두 사람에게 칼을 겨누며 복수를 결심한다. 카발레타 ‘늙은이에게 남은 것은 복수의 칼뿐이다’는 이때 부르는 격정적인 베이스 아리아이다.
3막 합창 ‘음모의 합창(Si ridestiil Leon di Castiglia)’
카를로는 조상의 무덤 앞에서 황제로 등급되었음을 기뻐하다 반역자들이 묘지 근처로 오는 것을 보고 몸을 숨긴다. 실바와 에르나니와 함께하는 반역자들은 국왕을 시해할 계획을 합창으로 노래한다. 이 합창은 〈나부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과 〈제1차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의 ‘당신은 우리를 고향에서 불러’와 리듬적 특징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지만 ‘음모의 합창’이 리듬의 활력과 행동에 직접적인 박차를 가한다는 점에서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압제에서 해방되겠다는 내용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이탈리아 국민들을 고무시켰다는 점에서 〈나부코〉와 〈제1차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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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2013년 2월 27일 네이버캐스트 / 이용숙 글>
클래식 명곡 명연주
베르디, 에르나니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지난해와 올해 전 세계 오페라극장에서는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오페라가 더욱 풍성하게 공연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무대에 새롭게 오른 베르디 초기작 [에르나니]에서는 테너 마르첼로 조르다니가 타이틀 롤을 맡고 메트의 신예 소프라노 안젤라 미드가 여주인공 엘비라 역을 맡아 폭발적인 가창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탄탄한 원작에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가 베르디의 다른 걸작에 비해 드물게 공연되는 이유는 세 남자가 한 여자를 두고 싸운다는 보기 드문 설정, 주인공 남자들이 사랑보다는 명예와 약속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 네 주인공 모두가 고난도의 노래들을 소화해야 한다는 어려움 등입니다. 공연이 쉽지 않은 만큼 영상물도 많지 않아, 이제까지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필라시도 도밍고가 각각 타이틀 롤을 부른 80년대 영상물 이후로 긴 공백이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파르마 왕립극장의 2005년 공연 영상이 최근 거기에 더해졌죠.
오페라 [에르나니]의 대본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가 썼고 1844년 3월 9일,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이 오페라의 토대가 된 위고의 원작 희곡은 [에르나니 또는 카스틸리아 인의 명예(Hernani, ou l'Honneur castellan)]라는 제목으로 1830년 2월 25일에 프랑스의 코메디 프랑세즈 무대에 첫선을 보였습니다.
한 여주인공을 둘러싼 세 구혼자의 경쟁
이야기의 배경은 1519년 스페인입니다. 테너 주인공 에르나니는 원래 아라곤의 백작 돈 조반니이지만 현재는 산적 두목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막 1장은 피레네 산맥 속 산적들의 거처에서 시작하는데요, 국왕에 반대하는 모반자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산적 생활을 하며 실바 대공의 군대와 싸우는 중입니다. 이들이 잠시 전투가 없어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는데, 이들을 이끄는 에르나니가 나타나 자신의 연인 엘비라가 삼촌인 실바 공작(베이스)에게 강제결혼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소연합니다. 산적들은 에르나니를 도와 엘비라를 납치하기로 하죠.
다음 장면은 실바 공작의 성 안, 여주인공 엘비라의 거처입니다. 엘비라는 원치 않는 결혼에 고민하며, 에르나니가 와서 자신을 데리고 도망가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가 이 장면에 나오는데요, '에르나니, 날 데리고 도망쳐요(Ernani, involami)'라는 노래입니다. 시녀들이 공작의 선물을 들고 와서 결혼을 축하하지만 엘비라는 전혀 기뻐하지 않죠.
밤에 유모와 단둘이 있는 엘비라에게 변장을 한 국왕 카를로(바리톤)가 찾아와 엘비라를 처음 본 날부터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연인이 되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때 에르나니가 나타나 국왕에게 결투를 신청하지만 왕은 거부하죠. 그 순간 실바가 방에 들어와 두 남자를 보고 경악합니다. 실바는 칼을 뽑아 두 남자와 싸우려 하지만, 국왕의 시종이 나타나자 변장한 사내가 국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왕은 에르나니를 살려 보내고, 실바의 성에 묵겠다고 말합니다.
2막에서 엘비라는 에르나니가 전사한 줄 알고 실바와의 결혼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전투에서 목숨을 건진 에르나니는 순례자 차림으로 신분을 숨기고 실바의 성에 들어옵니다. 오해가 풀린 엘비라와 에르나니는 사랑의 이중창을 노래합니다. 실바는 그가 에르나니임을 알고 나서도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지요. 국왕이 찾아와 에르나니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지만 실바는 손님에 대한 예의를 주장하며 거부합니다. 그러자 국왕 돈 카를로는 엘비라를 인질로 데려갑니다. 에르나니가 은신처에서 나오자 실바는 결투를 청하지만 에르나니는 국왕에 대한 복수가 먼저라며 그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실바에게 뿔피리를 주며, 언제든지 실바가 이 뿔피리를 불면, 그때 목숨을 내놓겠다고 약속하죠.
3막은 카를 대제(샤를 마뉴)의 묘지에서 시작됩니다. 모반자들의 음모를 알고 있는 국왕 카를로가 묘지에 나타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 결과를 기다립니다. 한편 반란을 꾀하는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여 국왕을 시해할 사람을 뽑는데, 에르나니가 그 일을 맡게 됩니다. 실바는 그 권리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지만 에르나니는 거절하죠. 예포가 울려 카를로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음을 알립니다. 그는 묘지에서 나와 자신의 군사를 시켜 모반자들을 체포하게 합니다. 귀족은 사형, 평민은 감옥으로 보내라고 황제가 명령하자 에르나니는 자신도 원래 세고비아와 카르도나의 군주인 백작이라며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엘비라가 자비를 간청하자 황제는 반역자들을 모두 사면하고 엘비라와 에르나니를 맺어줍니다.
마지막 4막 무대는 사라고사의 에르나니 궁전입니다. 엘비라와 에르나니의 결혼 피로연으로 화려한 가면무도회가 벌어집니다. 무도회장에서 밖으로 나온 에르나니와 엘비라는 행복에 겨워 사랑의 이중창을 노래하지만, 그때 실바의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자 에르나니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서 엘비라를 궁 안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러자 무도회 가면을 쓴 실바가 나타나 에르나니의 목숨을 요구하죠. 약을 가지고 돌아온 엘비라는 경악합니다. 세 사람은 피날레 3중창을 시작합니다. 실바는 단검과 독약 중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라고 말하죠. 엘비라가 실바에게 눈물로 애원하지만 실바는 냉정하게 거절하고, 에르나니는 절망 속에서 칼로 자기 가슴을 찌르고 쓰러집니다. ‘3중창 - 외롭고 비참하게(Solingo, errante e misero)’.
낭만주의 연극의 초석이 된 위고의 원작
[에르나니]는 초연과 함께 대단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위고의 대표 희곡으로, 낭만주의 연극의 초석이 된 작품이죠. 논쟁의 이유는 이 작품 속에 고상함과 기괴함(그로테스크)이 공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총 5막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각 막에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1막: 국왕, 2막: 산적, 3막: 노인, 4막: 묘지, 5막: 결혼식). 위고는 이 작품의 서문에서 “고전주의 극의 규범은 이제 깨져야 하며, 새로운 세대인 낭만주의 세대의 새로운 미학을 추구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작품을 불멸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관객이라고 말하며, 공연에서 관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했죠.
원작과 오페라의 차이를 살펴보면, 남성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같지만, 위고 원작의 여주인공 도냐 솔(Dona Sol)은 베르디 오페라에서 엘비라로 바뀌었습니다. 연극의 1막은 베르디 오페라의 1막 2장이고, 연극의 3막은 오페라의 2막입니다.[에르나니]는 베르디의 다섯 번째 오페라로, 첫 활동 무대였던 라 스칼라 극장을 떠나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 무대에 올린 첫 작품이었습니다. 베네치아 오페라극장이 베르디의 작품을 공연하기로 결정한 것은 라 스칼라에서 초연한 베르디의 [나부코]가 베네치아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었습니다.1843년 베네치아 극장과 계약했을 때는 베르디의 작곡료가 인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수들을 캐스팅할 권리도 베르디에게 주어졌습니다. [에르나니]의 초연은 [나부코]를 능가하는 엄청난 성공이었고, 초연된 해에 라 스칼라 극장을 비롯해 이미 이탈리아 15개 극장 무대에 올랐답니다. 그해 6월에 빈에서도 공연이 성사되었고, 19세기 말에는 국제적인 오페라 레퍼토리로 정착했습니다.
베르디는 이미 초기 작품부터 오페라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 [에르나니]에서도 여전히 벨칸토 오페라 시대의 고난도 성악적 기교가 가수들에게 요구됩니다. 그러나 독창 아리아(solo number)의 연속을 벗어나 인물 간의 대화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이미 베르디는 다른 작곡가들보다 한걸음 앞서가고 있습니다. [에르나니] 이전에는 장엄한 합창의 효과에 의존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마치 1850년대 베르디 최고의 인기작들의 특징을 미리 보여주듯 주인공들의 갈등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스타일의 전환을 이룬 셈이죠. 그에 따라 오케스트라 음악에서도 새로운 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추천음반 및 DVD
[음반] 미렐라 프레니/플라시도 도밍고/레나토 브루손/니콜라이 기아우로프, 리카르도 무티 지휘,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1982년 실황 녹음
[DVD] 미렐라 프레니/플라시도 도밍고/레나토 브루손/니콜라이 기아우로프, 리카르도 무티 지휘,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루카 론코니 연출, 1982년 실황
[DVD] 레오나 미첼/루치아노 파바로티/셰릴 밀른즈/루제로 라이몬디, 제임스 레바인 지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피에르 루이지 사마리타니 연출, 1983년 실황
[DVD] 수잔 네베스/마르코 베르티/카를로 구엘피/자코모 프레스티아, 안토넬로 알레만디 지휘, 파르마 왕립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피에르 알리 연출, 2005년 실황(한글자막)
[네이버 지식백과] 베르디, 에르나니 [G. Verdi, Ernani] (클래식 명곡 명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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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해설 === <2015년 10월 28일 네이버캐스트 /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문학과 클래식
프랑스 낭만주의 연극이 탄생하던 날
빅토르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와 베르디의 오페라 <에르나니>
1830년 2월 25일 프랑스 파리의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에는 아침부터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당시 28세의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85)는 자신의 연극 『에르나니』의 초연을 앞두고 고전주의자들을 비판한 뒤 새로운 낭만주의 희곡의 탄생을 선언한 참이었다. 일격을 당한 반대 진영에서는 검열 위원회를 통해 희곡 내용을 미리 입수해서 언론에 유출하는가 하면, 연일 적의에 찬 반응을 쏟아냈다. 개막 이전부터 작품은 논란이 된 것이다.
초연 당일의 난리법석
초연 당일 위고의 지지자와 반대파들이 극장을 가득 메우자, 무대에 올라야 하는 배우들도 걱정에 휩싸였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로 예술지상주의를 천명했던 시인이자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는 붉은색 조끼 차림으로, 『삼총사』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는 덥수룩한 머리로 극장 객석에 앉았다. 이들뿐 아니라 작곡가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소설가 발자크(Honoré de Balzac) 등 위고의 지지자를 자처한 예술가들이 총출동했다.
뒤마와 고티에, 위고의 딸 아델의 회고를 종합하면, 위고의 지지자들은 대략 공연 4시간 전부터 극장에 진을 치고 앉아서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심지어 극장 4층 박스석에는 오줌을 지려 놓았다. 뒤늦게 도착한 반대자들은 아수라장에 가까운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당초 우려됐던 충돌 없이 무사히 공연은 막이 올랐고, 초연은 기립 박수로 끝났다. 위고의 어릴 적 우상이었던 샤토브리앙은 초연 당일 작품을 관람한 뒤 “내가 가고, 당신이 오는구려”라는 편지를 보냈다. 훗날 프랑스 문학사에 ‘에르나니 전투(bataille d'Hernani)’로 불리는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 초연 당일의 풍경이었다. 이렇게 떠들썩한 난리법석이 일어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스페인 역사로 잠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16세기 스페인, 코무네로스의 열기에 휩싸이다
『에르나니』의 시대적 배경은 16세기 스페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1500~58)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기 직전인 1519년이다. 그의 친가 쪽으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가 친조부였다. 외가 쪽으로는 스페인 통일 왕국의 시초를 다진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이 외조부모였다. 유럽을 대표하는 왕가의 핏줄을 양쪽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그는 스페인 국왕일 때는 카를로스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이후에는 카를 5세로 불렸다.
그가 스페인 국왕이 된 건 불과 16세 때,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취임한 건 그로부터 3년 뒤인 19세 때였다. 남미와 아시아 일대의 스페인 식민지까지 카를로스 1세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였다. 당시 유럽 최고의 ‘엄친아’였던 셈이다. 벨기에 겐트에서 나고 자란 그는 독어와 프랑스어, 플랑드르어를 구사했고, 스페인 왕좌에 오른 뒤에는 스페인어도 익혔다. 여러 언어에 능통한 그를 두고 “신과 대화할 때는 스페인어를, 남성과는 프랑스어를, 여성과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하고, 말과 이야기할 때는 독어를 쓴다”는 농담도 나왔다.
하지만 방대한 영토는 그의 스페인 왕국에는 축복인 동시에 치명적인 불안 요소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패권을 놓고 다퉜던 프랑스와의 전쟁, 신교를 옹호하는 독일 제후들과의 전투,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유럽 진출을 막기 위한 공방전까지 스페인은 상시적인 전시 체제에 들어갔다.
스페인 국왕이 오스트리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하는 상황은 자칫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자국 왕위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넘겨준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었다. 실제 카를로스 1세가 152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독일 아헨으로 떠나자, 스페인은 반란의 불길에 휩싸였다.
세비야와 바야돌리드, 톨레도 등 스페인 일대에서 2년간 번져나갔던 봉기를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이라고 부른다. 코무네로스는 마을이나 공동체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코뮤니티(comminity)’와 어원이 같다. 반란의 명칭이 일러주듯이 왕실의 무분별한 증세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한 당시 봉기는 민란(民亂)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세고비야에서는 입법관을 살해한 뒤 진상 파악을 위해 파견된 왕실 조사관의 입성마저 거부했다. 왕실 군대가 도시 봉쇄에 나서자 세고비야는 인근 도시에 도움을 요청했고, 왕실과 반란군은 전면 충돌로 치달았다.
하지만 반란이 극렬하고 폭력적인 양상으로 치닫자, 이 지역 귀족들은 반란에 등을 돌렸다. 토지 소유주였던 귀족들은 봉건적 질서가 뿌리째 흔들리는 것까지 달가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1521년 비얄라르 전투에서 반란군이 대패하자, 주모자들은 체포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카를로스 1세는 끝까지 저항한 사모라의 주교를 교수형에 처한 뒤, 시체를 성탑 꼭대기에 매달도록 했다. 반란 가담자들에 대한 응징이자 경고의 의미였다.
“사랑 앞에서는 국왕과 산적이 동등하다”
당시 스페인 일대의 반란은 『에르나니』의 배경이 됐다. 하지만 프랑스의 문호 위고가 이 작품에서 부각시킨 건, 국왕 카를로스 1세가 아니라 그에게 맞섰던 산적 에르나니였다. 작품에서 에르나니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자 산적 두목이 된 것으로 설정된다. 희곡 1막에서 에르나니는 “내 증오심은 나날이 새로워진다. 이미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원수를 그의 아들에게 갚겠노라고 맹세했다”라고 외친다. 그의 맹세에는 코무네로스 반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둘은 명문 귀족의 조카딸인 도냐 솔을 다 같이 사랑하고 있다. 왕과 산적은 정치적 숙적인 동시에 연적인 것이다. ‘사랑 앞에서는 국왕과 산적이 동등하다’라는 위고의 발상은 다분히 낭만적이면서도 혁명적이었다. 평등과 사랑을 한데 녹여서 작품의 열기를 한껏 끌어올리는 작법은 『레 미제라블』과 『노트르담의 꼽추』까지 위고의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이었다. 하지만 국왕과 산적 사이의 대를 이은 원한이라는 작품 설정에는 작위적인 구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주요 등장인물 4명 가운데 3명이 자살을 선택하는 결말도 오늘날의 막장 드라마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형식의 파격, 젊음의 작품
하지만 이 희곡의 문학적 성취는 줄거리나 내용보다는 오히려 형식의 파격에 있었다. 위고는 1827년 전작인 희곡 『크롬웰』을 쓸 때부터 서문을 통해 고전 희곡의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미학이 필요하다고 주창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금과옥조로 떠받들던 ‘시간·장소·사건의 일치’라는 삼일치의 법칙, 정치적 검열이나 주제의 제한 등이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됐다. 훗날 테오필 고티에는 위고의 서문에 대해 “우리 세대의 눈에는 시나이 산의 십계명처럼 빛났고 그의 주장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위고는 14세 때부터 “샤토브리앙이 아니라면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라고 일기에 적었지만, 이미 그는 ‘위고 자신’이 되어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했다.
『에르나니』를 둘러싼 찬반(贊反) 갈등은 예술적인 논쟁인 동시에 세대적인 논쟁이기도 했다. 한편에 고전주의 예술을 옹호하는 구세대가 있었다면, 다른 편에는 낭만주의를 주창한 신세대 예술가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희곡은 무엇보다 ‘젊음의 작품’이었다. 작가와 등장인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지지자들까지도 좀처럼 서른을 넘는 법이 없었다.
위고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했던 고티에는 “이탈리아 군대와 마찬가지로 ‘낭만주의 군단’ 역시 모두 젊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성년에 이르지도 않았고, 이 무리의 수장도 28세에 불과했다”라고 썼다. 위고는 ‘낭만주의 예술의 나폴레옹’에 비유되기에 이르렀다. 위고 자신도 “「에르나니」에 대한 전투는 사상과 진보의 전투이며, 공동의 투쟁이다. 우리는 속박 당하고 흠집이 나 있는 구닥다리 문학과 투쟁하려는 것이며, 이 공격은 구세계와 신세계의 투쟁”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초연 이후 공연이 계속될수록, 객석에는 지지자보다는 반대자의 비율이 늘어났다. 반대파 언론에서는 “’에르나니’처럼 멍청한”, “’에르나니’처럼 괴상망측한” 같은 원색적 비난을 쏟아냈다. 배우들도 끊임없는 야유와 고함소리, 웃음과 방해 공작에 지쳐갔다. 심한 경우에는 공연 도중에 150차례나 흐름이 끊긴 날도 있었다.
역설적으로 작품을 둘러싼 ‘노이즈 마케팅’은 흥행에는 플러스 요인이 됐다. 첫날에만 5,134프랑을 벌어들였고, 첫해에는 49만 프랑의 수익을 올렸다. 마침내 1830년 2월 25일은 프랑스 낭만주의 희곡의 탄생일로 남았다.
베르디를 만난 『에르나니』
작곡가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가 위고의 『에르나니』를 다섯 번째 오페라로 작곡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1843년이었다. 당초 [크롬웰]을 차기 작으로 염두에 뒀지만, 그 해 8월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감독인 모체니고 백작이 이 희곡을 권유하자 작곡가는 “아! 우리가 『에르나니』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라며 주저 없이 작품을 교체했다. 이 작품이 베르디에게 의미 있는 건, 대본 작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1810~76)와 호흡을 맞춘 첫 오페라였기 때문이다. [에르나니]를 시작으로 둘은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 등 10편의 오페라를 쏟아냈다. 당시까지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작가 피아베는 일일이 베르디의 지시를 받아가며 대본을 썼다. 음악학자 가브리엘레 발디니는 “작곡가는 대본 작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노예처럼 부렸다. 피아베는 베르디가 손에 쥔 악기와도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피아베의 대본은 베르디의 음악에 최적화됐다”라고 평했다.
평등과 사랑, 낭만을 버무린 위고의 원작과 달리, 이 작품에서 베르디가 주목한 건 정치적 압제의 문제였다. 카를로스 1세 당시의 스페인 역사에 이탈리아의 상황을 대입하면, 곧바로 베르디 당대의 현실적 문제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신음하고 통일 왕조를 이루지 못했던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은 이 오페라의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로 환골탈태 하다
당초 위고의 원작에서는 카를로스 1세를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게 약관의 청춘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작곡가는 카를로스 1세를 젊은 날을 회상하며 향수에 젖는 장년으로 그렸다. 그렇기에 왕의 음역도 낭랑한 테너가 아니라 무거운 바리톤이다. 자연스럽게 테너가 부르는 에르나니는 오스트리아에 항거하는 애국적 영웅으로 해석될 소지가 커졌다. 음악적으로도 오페라의 진정한 주인공은 황제가 아니라 반란자들이었다. 이들이 부르는 3막의 합창 [일어나라 카스티야의 사자여]는 베르디가 이탈리아인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애국의 메시지였다.
“약속! 맹세! 카스티야의 사자여, 일어나 압제자에 맞서 이베리아의 산과 전역에 성난 포효를 울려라. 우리는 모두 한 가족으로 무기와 마음으로 투쟁하리라. 우리의 가슴에 생명이 뛰는 한, 복수도 하지 못한 채 무시 받는 노예로 남아 있지 않으리라.”
오페라 [에르나니] 가운데 [반란자들의 합창]
베르디의 오페라는 1844년 초연 직후 1845년 영국 런던과 1847년 미국 뉴욕에서도 상연되며 큰 인기를 얻었다. 극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영국에서 이 오페라를 관람한 뒤 “고전적인 낭만주의의 산물이며, 화려한 영웅상 속에 진정한 예술이 녹아 있는 이탈리아 오페라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인 자극에서 드라마가 빚어진다”라고 격찬했다. 물론 그는 “극작가로서 위고의 가장 큰 공적은 베르디에게 대본을 제공한 것”이라는 특유의 비아냥도 빼놓지 않았다.
베르디는 위고뿐 아니라 셰익스피어와 실러, 월터 스코트의 고전을 원작으로 즐겨 오페라를 작곡했다. 심지어 위고의 경우엔 베르디의 오페라가 원작 희곡보다 더욱 유명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에르나니] 역시 프랑스 낭만주의 희곡의 탄생을 알렸던 위고의 원작이 베르디의 애국적인 이탈리아 오페라로 멋지게 환골탈태한 경우였다. 모든 예술은 재해석이며, 재해석을 통해 작품은 생명력을 계속 이어간다. [에르나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김성현 조선일보 기자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며, 지휘자 사이먼 래틀과 다니엘 바렌보임의 전기를 번역했다. 또한 저서로는 『클래식 수첩』과 『스마트 클래식 100』, 현대음악 작곡가 40인의 삶과 음악을 다룬 『오늘의 클래식』, 『365일 유럽 클래식 기행』, 『시네마 클래식』등이 있다. 블로그 ‘클래식 네버랜드’(blog.naver.com/classicandme)를 통해 책과 음악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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