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의해서 요나단의 삶으로
나의 삶의 주어는 무엇인가?
최근 신앙 생활을 하고 신앙에 대한 여러 생각이 든다. 사실 신앙에 대한 생각은 내 기억이 남아 있는 한 계속해서 하고 있지만 무언가 최근 신앙에 대한 생각은 뭔가 다른 느낌이다. 겉도는 느낌이 들며 신앙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그 답은 잘 내릴 수 있지만 그 결론이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 느낌이다. 전보다는 고급적인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 수는 있지만 전에 단순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들이 훨씬 마음에 든다.
고백록과 팡세를 읽고 글을 쓰며, 교리공부를 하며 조금씩 기독교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답을 내려야 하는지 감이 잡히는 것 같다. 기독교 자체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적인 부분 뿐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을 때,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을 때에 느꼈던 말씀의 감동과 그 사랑의 놀라움을 느끼기가 힘이 든다. 되려 신의 말씀을 나의 지식 안에 넣어 제안하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차라리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고 신을 믿었던 과거가 더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때에는 지식이 그다지 없어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았고 그럼으로 신을 더욱 전지전능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헌데 있으나 없으나 똑 같은 지식이 늘자 마음이 교만해지고 신의 전지전능함을 죄인의 지식으로 이해하고 좁히려 하니 예배의 감동은 아는 것을 말한다는 따분함으로 대체되고, 성령의 놀라운 은혜는 당연한 것이라는 교만으로 대체된다. 파스칼의 말처럼 영적인 굶주림이 나의 지식으로 대체된다 생각하니 이제는 영적인 것에 싫증을 느낀다(26편725).
“주께서 이르시되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이사야29장13절).”
예수를 향한 최고의 예언 수단이었던 이스라엘 백성, 그를 부정함으로 표징이 된 이스라엘 백성, 모든 말씀을 정욕과 육으로 받아 민족의 평생을 기다린 메시아를 자신들의 손으로 죽인 백성, 그로 인하여 현대까지 어질러져 붕괴와 전쟁이 끝나지 않은 백성. 내가 그들임을 보고 그들이 나임을 본다.
이스라엘 백성은 통곡한다, 나도 눈물을 흘린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뻐한다, 나도 기뻐 웃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배한다, 나도 예배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찬양한다, 나도 찬양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들과 싸운다, 나도 원수들과 싸우려 애쓴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에 대해 생각한다, 나도 신에 대해 생각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승리한다, 나도 승리하는 부분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신을 전한다, 나도 같은 마음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주어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나의 주어는 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행동은 능동적이다. 나의 행동 또한 능동적이다.
저기 다윗을 보아라 그는 통곡하며, 기뻐 춤을 추며 자신의 주인을 예배하고 찬양한다. 그는 원수들과 싸우고 승리하며, 신에 대해 생각하며 그 신을 시를 통해 선포한다. 하지만 그의 주어는 여호와이며, 그의 행동은 수동적이다.
내가 예배를 드리고 그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려도 그 주어는 나이며 행동은 능동적이다. 이것은 크리스천이 아니라 크리스천을 기만하는 자신이라는 우상에 빠진 이교도일 뿐이다.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감동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예배하고 자신의 지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였다는 것에 감동받는다.
이스라엘이여 왜 눈물을 흘리고 기뻐하는가? 둘 중 하나이다. 그들이 패배하였거나 승리하였거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락하신 승리와 패배가 아닌 그들이 이루어 낸 승리와 패배이다. 나는 왜 섬기려 하는가? 그것은 그저 내가 하고 싶으며, 나의 양심이 시켜 한 일이다. 결국 내가 이루어 낸 승리는 몸 중에 지체가 이루어 낸 승리이다. 그 승리의 정도는 발의 근육을 움직인 정도이다. 내가 이루어 낸 패배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 발 근육의 경련이 온 것이 패배라 한다면 발은 그 경련을 고칠 도리가 없다. 내 의로 하는 일은 결국 나의 대적자를 죽이고 온 자들에게 상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이여 왜 눈물을 흘리고 기뻐하는가? 오직 하나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승리한적도 패배한적도 없다. 그저 승리와 패배를 신에게 받은 것이다. 곧 신이 주신 승리가 다윗의 승리이며, 신이 주신 패배가 다윗의 패배이다. 다윗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패배를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죄를 통곡한다. 그가 왕이 되어 국민을 섬기는 것은 신에 의해 하는 것이다. 그는 본인의 힘으로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는 수동적으로 자신의 주인에게 예속되어 한 몸의 지체로 그 일을 수행해간다. 그의 승리는 온 몸의 일부가 되어 좋은 집을 짇는 것이며 패배하여 발 근육의 경련이 온다 하여도 몸의 일부인 손에게 도움을 받아 발을 주물러 근육을 풀어주면 그만이다.
그렇다 나와 이스라엘 백성은 나를 위해, 나의 의해 예배하며, 생각하며, 행동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의해 예배하며, 생각하며, 행동한다. 그럼으로 주어와 능동과 수동의 차이에서 나는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체 머물러 있고 다윗은 자신의 몸을 바쳐 주를 즐기는 데에 도달해 있다.
그렇게 나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주어가 바뀌고 나의 능동이 그분 안에서 수동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에 있고 나는 그렇게 그분을 알고 싶게 되며 점점 사랑하게 된다. 결국 나는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의 의해 살게 된다. 그렇게 나는 다윗과 같이 되고, 그렇게 나는 다시 기복신앙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나의 결론이다. 나의 결론은 결국 왕인 다윗이 되려 한다. 내가 하나님안에서 주어를 바꾸려는 이유는, 나의 능동이 수동으로 바뀌었으면 생각하는 이유는 결국 왕이 되려 함이다. 그렇게 다시 나는 내 안에서 왕이 되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애초에 왕이 되려고 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따라가기 위해 신을 따라 살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나의 기복신앙이다. 하지만 세상을 따라 살아가기에 가장 쉬운 조건들이 신을 따라 살기에는 가장 어려운 조건이기에(26편705) 나는 그저 신에 대한 지식만 길러지고 그 마음은 세상의 것에 속해 있다. 항상 그래왔다.
그때 하나님은 나의 고개를 옆으로 돌려 다윗 옆에 아무도 모르게 그 손을 잡고 죽어 있는 남자를 보이신다. 난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처럼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그가 행한 일을 보게 하신다. 그의 이름은 요나단이며 그는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나님의 힘으로 해낸 사람이다.
그는 사울의 아들로 왕위를 이어 받을 이이며, 다윗보다는 20살이 많고 왕족 출신으로 양치기와는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다윗을 위하여 일하며 동시에 노망난 아비를 위해 싸우다 죽는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왕위의 상속자가 자신 외에 머리에 기름 부은 사람을 어찌 도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가 머리가 되려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몸의 한 지체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머리에 두어 수동적으로, 머리의 생각이 몸의 행동이 되는 것처럼 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결과는 미련한 전투에서의 죽음이다. 찬란한 왕국의 왕도, 그의 왕의 조력자도, 평범한 시민도 아닌 타락한 왕가의 최후이다.
어찌 나에게 그의 일생을 보이시는지. 참 그대로 살기 싫으면서도 너무나 그처럼 살고 싶다. 하나는 여전히 세상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며, 하나는 조금이나마 길러진 신에 대한 지식이 말하는 것이다. 이때를 위하여 그 지식을 기르게 하신 것일까?
모든 질문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 안에서만 결론 내려지며, 나의 모든 승리와 패배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완전 해진다. 그러니 나의 삶 또한 완전해지기 위하여 다윗보다는 요나단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의 인생에서 주연의 자리에서 내려와 조연의 자리에 앉기를 바란다. 이제 나의 다윗은 예수가 되어 나의 인생의 유일한 소망과 목적이 되기를 바라며 그의 조연으로 그 안에서 그를 위하여, 그의 의하여 살 때, 그를 머리에 두고 몸의 지체가 되어 파스칼이 말한 기독교의 도덕을 행할 때 비로소 바빌론의 흐르는 강 위에 앉아 예수의 의해서 겸손해진 채 시온의 영광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나는 예수의 의해서 요나단의 삶을 살기를 나의 삶의 유일한 소망과 목적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