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함성」 작품은 일제 강점기때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임용우 선생님에 대한 역사동화이다.
고현숙 작가님은 44년째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남다르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은 자신을 희생하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애국열사와 애국지사 덕분이다. 그 분들께 진심으로 존경하며 작품을 읽었다. 나는 지금 우리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작품 뒤에 <김포 3.1 만세운동 전개>와 <덕적도 만세운동 지역>, <김포 포구와 나루터> 지도와 <덕적도 3.1만세운동> 이야기, 애국열사와 애국지사를 일일히 열거하였고, <덕적도 만세운동 관련 사진>도 수록되어 상세하게 역사공부를 할 수 있어 좋았다.
이 작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임용우 선생님은 1912년 27세 나이에 덕적도 사립 명덕학교에 초빙되었다. 35세 나이에 1919년 2월 경성으로 올라가 3월 1일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지금 35세 나이 생각하면 한창 젊은 청년인데, 이렇게 큰 일을 할 수 있나 새삼 존경스럽다.
임용우 선생님은 일제의 탄합에도 굴하지 않고 고향에서 알리기로 하여 조남윤 애국청년 집에 방문했다. 그 집에 당인표 청년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 뜻을 같이 하기로 했다.
임용우 선생님은 부모님이 사는 집에 들렀는데, 부모 입장에서는 곧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며 뜻을 접으려고 한다. 예비 아버지라서 마음이 흔들릴 법 할 것 같다. 그러나 임용우 선생님은 내 가정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아이와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오히려 만세운동의 의지를 불태웠다.
3월 29일 임용우 선생님과 애국청년들은 통진 읍내에 모여 군하리 장터로 행진했다. 그러던 중에 일본 헌병한테 조남윤이 붙잡히는 위기를 겪었다. 선생님은 이러한 위기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오후 2시에 모이자고 사람들한테 귀뜸했다. 오후 2시에 향교로 모인 어른들과 아이들은 만세를 불렀다. 애국청년 동지들은 덕적도에서도 만세운동을 하도록 임용우 선생님을 밀어주었다.
선생님은 덕적도에 도착해서 일제 어민들이 우리나라 어민들에게 횡포를 부리고 죄없는 천둥이 아버지를 옥살이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일제 순사 앞에서 당당하게 따졌다. 선생님 덕분에 천둥이 아버지는 심하게 고문받은 흔적을 남기며 풀려나왔다.
3월 29일 학교로 돌아온 선생님은 제자인 이재관과 차경창 등과 명덕학교에 모였다. 선생님은 치밀하게 만세운동을 펼치기 위해 봄 대운동회를 개최하여 사람들을 모이게 하려고 하였다.
4월 9일 오전 10시 덕적도 진리 해변에서 김현호 교장이 인사말을 하고 운동회를 시작했다. 달리기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청백 계주까지 여느 평범한 운동회처럼 보였다. 운동회가 끝나 일본 순사가 자리를 뜨자 임용우 선생님은 독립운동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 어른 모두 만세를 불렀다. 선생님은 맨 앞에서 지휘를 했다.
덕적도 마을과 울도에 돌아간 이인응은 만세를 부르던 중 순사에게 붙잡아갔다. 결국 임용우 선생님과 제자들은 인천경찰서 헌병에게 붙잡히고, 선생님은 혼자 책임을 떠맡으며 당당하게 “남의 나라에 함부로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하는 도적들”이라며 말한다. 결국 잔혹한 고문으로 선생님은 의식을 잃었다.
5월 9일 임용우 선생님은 경성지방법원 재판장에서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당당하게 쏟아냈다. 결국 선생님은 감옥에 다시 갇혀 5월 10일 35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스승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자들 대사를 보면 임용우 선생님이 평소에 자주 했던 말씀을 알 수 있다. “교육이 곧 나라의 힘이라고 하셨지요. 아이들이 미래이고 희망이니 귀히 여기라는 말씀도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늘 먼저 나서서 어려운 이들을 돕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생님의 깊은 뜻을 널리 전하겠습니다.”
임용우 선생님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솔선수범하며 나라를 위해 희생했던 넋은 영원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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