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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의 은밀한 세계 |
Spécial 중국은 제국주의로 가는가 |
<상하이에 산다는 것> 연작 , 2005-후양 |
"일단 18차 당대회부터 끝난 뒤에…." 현재 중국 지도부에 면담 요청을 하면 늘 이같은 답변이 돌아온다. 비공식 회동이라고 달라질 건 없다. 오는 10월 예정된 18차 전국대표대회가 끝난 이후에 보자는 것이다. 일부는 묵시적 합의를 외면한 채 면담에 응해주기도 하나, 자신들의 사무실에서 보기보다는 카페나 식당 같은 곳에서 만나는 걸 선호한다. '금단의 도시' 자금성 인근, 중국공산당사가 위치한 중난하이의 붉은 장벽 내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중국 웨이공춘에는 베이징의 유서 깊은 대학 중 하나인 중국인민대학으로 이어지는 넓은 보도에 시에서 설치한 전자 길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전철역 부근에 설치된 이 전자 표지판은 터치스크린에 대화형 시스템을 장착해 이용자가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표지판 측면에는 붉은색 띠 광고가 보이는데, 거기에는 중국공산당의 선전 문구와 함께 노동자의 상징인 '낫'과 '망치'가 눈에 잘 띄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모범적인 노동자와 귀감이 되는 지도자의 사진도 함께 실려 있다. 이같은 현대적 표지판은 오늘날 공산정권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기술적 발전의 극치인 것일까? 대개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젊은이들 무리가 이런 메시지를 알아챌 리 만무하다. 6월의 여름날, 핫팬츠나 미니스커트 차림의 젊은 여자들, 몸에 딱 붙는 셔츠나 영어 문구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들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는 정부가 내거는 이런 메시지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게 바로 오늘날의 중국이다. 자유분방한 현대적 측면과 고리타분한 구세대의 방식이 공존하는 세계인 것이다.
공식 성명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의 제18차 전국대표대회는 올해 하반기에 열릴 것이다. 이 대회 역시 이같은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중국에 공산정권을 수립한 이후 유일당으로서 중국을 지배해온 중국공산당에는 당 중앙 지도부의 쇄신 구조가 마련돼 있다. 총서기(주석), 총리, 전국 인민대표대회 의장 등 당 조직과 정부의 최고위 책임자는 한 번의 연임으로 만족해야 하고, 10년 이상 통치권을 갖지 못한다. 중앙위원회, 정치사무국, 상임위원회 등 국내 각급 기관 위원들의 최고 연령 역시 68살로 정해져 있다.
올해 하반기 공산주의를 자처하는 이 나라에서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대대적인 지도층 재편이 이뤄질 것이다. 중국의 핵심 권력기관인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소속 위원 9명 가운데 7명이 교체되고,(1) 중앙위원회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정회원 60~65%도 그 자리를 내줘야 한다. 그렇다면 새로 진급해 그 자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발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언급은 철저히 금기에 부치고 있다. '금단의 도시' 자금성의 시대를 연상시키듯,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직위 승계는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된다. 암암리에 권력의 힘이 작용하기도 하고, 권모술수가 이뤄지기도 하며, 충성의 맹세나 비겁한 반칙 행위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로부터 2천km 이상 떨어진 광저우의 위에휘(가명)는 중산층 출신의 여느 젊은이와 다를 바 없었다. 짧은 청반바지 차림에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위에휘는 긴 머리에 화장까지 신경 써서 하고 다녔으며, 삶은 순탄했고 토론에도 익숙했다. 주위 친구들은 정치적 발언을 하기 꺼렸는데, 차후 있을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쓴 위에휘는 잠시 망설이다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교사인 어머니와 공무원 아버지를 둔 위에휘는 중국의 명문 중산대학에서 법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우리가 위에휘를 만나게 된 장소도 바로 중산대학이었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위에휘 역시 공산당원이다. "당은 성공을 위한 일종의 인맥 네트워크다." 위에휘는 단칼에 잘라 말했다. "전문 동호회와 조금 비슷하다." 말하자면 승진이 보장되는 좋은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보험 같은 곳이라는 것이다. 잠시 말을 중단한 위에휘는 이어 "청소년 시절부터 공산당원이 되길 꿈꿨다"고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한다. 다른 중국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위에휘 역시 청년조직의 회원이었다. "우등생으로서 당 지도부에 의해 선발됐을 때는 정말 행복했다." 위에휘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건 일종의 보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땐 정말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그로부터 5년 뒤, 환희와 열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다. 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수많은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여기에 시간이 꽤 드는 편이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관심사도 많다." 평소에는 활동이 별로 없던 기초단위 조직이 최근 몇 달간 일이 상당히 많아졌다. 당내의 분열 상황을 백일하에 드러낸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가 경질된 뒤 사태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이어 위에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당이 제시한 답변만 반복해야 하는 처지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다. 독립적 사고를 하는 나로서는 그게 부담이 된다."
"당원증은 성공으로 가는 필수품"
공식적으로는 당의 상투적인 정치 선전 구호에 대해 반박할 자유가 얼마든지 주어져 있다. 하지만 위에휘가 그랬다가는 이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하고, 이어 위에휘는 그런 자신을 설득할 '동지들'과 마주해야 한다.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당원증을 버리고 원래 생활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 그것 또한 불가능하다. 이는 일종의 정치적 변절에 속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위에휘가 자신이 사는 지역을 떠난다면 당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는 있다. 자신의 생사 여부를 더 이상 알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휘가 공직에 들어서거나 국영기업에 입사할 때는 당의 지침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같은 상황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한 전직 당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회의에 참석해서 눈과 귀를 닫은 뒤 그렇게 계속 지내면 된다."
사실 중국공산당은 들어가는 것보다 나오는 게 더 힘들다. 대개 당원 선발은 학교와 마을, 기업, 촌락의 서기관이 담당한다. 당 가입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을 바로 각급 단위의 서기관이 선출하는 것이다. 만일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고등학교나 대학교 졸업에 실패했을 때 낫과 망치를 들고 노동자·농민으로서 사는 게 자신의 인생에 더 유용하다고 판단한다면 얼마든지 당에 가입 신청서를 낼 수 있다. 당에서 후원을 해주겠다고 하니 자신의 직업 활동과 개인적인 사생활에 관한 몇 가지 조사에만 응해주면 될 일 아닌가?
<상하이에 산다는 것> 연작 , 2005-후양
총당원 수 8천만 명
2007∼2012년 1천만 명 이상이 공산당에 신규 당원으로 가입했다. 상식을 뛰어넘는 이 거대한 조직은 공식적으로 집계된 당원 수가 8060만 명이다. 독일 국민 전체와 맞먹는 규모다. 공식적인 집계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4분의 1가량이 35살 미만이며 절반은 36∼60살이다. 역설적인 건 지금껏 그 어떤 당 지도부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국민의 비판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이 정도로 당원 가입 희망자가 많은 적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당원증이 젊은이들에게 성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유층에 속하지 않는 젊은이들로서는 그렇다. 아울러 중국 사회를 더욱 잘 통제할 수 있기 바라는 당에도 청년들의 당원 가입은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청년 당원들은 당 가입을 통해 지식인이나 젊은 대졸 엘리트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받는다. 참고로 과거 프티부르주아 취급을 받던 대졸자와 지식인들은 오늘날 중국 사회에서 레드카펫 대접을 받는 신분으로 격상했다. 여하튼 그렇게 당원이 된 청년들의 역할은 여기저기서 수없이 들려오는 바와 같이 '최고의 당'을 건설하는 일이다. 당과 정부가 하나로 이루어진 국가에는 훈련된 인력이 필요하다. 엘리트층은 대개 중국이나 외국 대학 출신이 주를 이루는데 최근에는 이런 대졸 엘리트 코스의 인기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당에서 세운 당교 역시 이에 빠지지는 않는다.
지방에서든 중앙에서든 요직을 차지하게 되면 상급 정치학원을 거치는 게 필수 코스다. 이곳에서 신임 고급 관리들은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속속들이 배우게 되고, 현 정치의 미묘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학습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와 동시에 공공행정 측면에서 고급 자질과 폭넓은 능력을 습득한다. 때로는 상하이에서처럼 문화혁명으로 생긴 당교와 1980년대 개혁으로 탄생한 행정학교가 한 지역에 공존하기도 한다.(2) 중국과 해외의 유수한 교수들은 이곳에 초빙돼 강의를 하고 있다. 광저우의 학교는 미국의 유명 경제학자들을 영입했다며 과시한다. 체면을 세우려는 모든 테크노크라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은 여기저기서 넘쳐난다. 인터넷 접속은 자유롭고, 지극히 비판적 시각을 지닌 어떤 해외 서적이라도 전혀 금지되지 않는다. 요컨대 지도층 엘리트를 양성하는 일이 되는 순간, 당은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털어 극진히 대접한다. 수차례 요청했지만, 우리는 중국의 차기 지도자가 될 시진핑 부주석이 교장으로 있는 베이징 중앙당교 문턱은 넘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차이나데일리>의 첸시아 기자와 위안팡 기자가 이 세계를 심층 취재한 적이 있었다.(3) 두 기자의 기록에 따르면, 베이징뿐 아니라 여러 시·도·지방에서 온 고위 관리들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학생들은 세상과 단절된 채 교육을 받으며, 심지어 그 서기관이나 운전기사들도 학교 담장 밖에서 이들을 기다려야 한다. 이들은 입학한 첫 주부터 마르크스 사상에 관한 기본 지식을 포함해 이론적 지식 수준을 평가하기 위한 테스트를 거친다. 이어 그룹별로 나뉘어 당의 역사, 종교, 소수민족 문제, 부패 척결, 에이즈 예방 등 다양한 주제로 수업을 받는다. 전교생이 모여 토론을 벌이기도 하는데, 각자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명할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위계질서는 여전히 존속한다. 도 단위같이 낮은 계급 출신의 학생들은 베이징이나 지방 단위에서 이미 공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할 수도, 같이 밥 먹거나 잠잘 수도 없다.
베이징 중앙당교, 출세의 필수 코스
두 기자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학교 내에는 45∼50살 간부들로 이루어진 특별반이 있는데 이들은 장차 '정부의 요추'가 될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1년간 수업을 받는다. 처음 3개월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엥겔스의 <반뒤링론> 같은 고전 강독을 중심으로 수업을 한다. 이외에 학생들은 법제와 예산 기획, 재무 관리, 외교·정치, 경영, 인력 관리 및 지도, 부패 근절, 갈등 해소 방안 등 정부의 제반 문제에 관한 심화 훈련을 받는다.
이뿐만 아니라 당교는 거름망 기능도 한다. "정부 인사를 임명하고, 당의 모든 일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으며, (선전부와의 공조를 통해) 언론·대학·국영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중앙조직 부서에서는 수시로 밀사를 파견해 수업과 토론에 참여시킨다"고 두 기자가 짚어준다. "학급에서 우수한 학생을 가려내어 차기 임용시 참고하려는 것이다. 어떤 교수는 언젠가 학급에서 불량한 태도로 유급된 한 학생이 그 정치 생애의 끝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상황이 이런 만큼 고위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내비치기에 앞서 충분히 고민한 뒤 입을 열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하이에 산다는 것> 연작 , 2005-후양 |
몇 달 전 베이징에서 인터뷰를 수락한 현직 공산당 간부 한 사람은 "변한 게 없다. 고분고분한 사람에게는 늘 보상이 따른다"고 토로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승진 기준이 정해져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70살 미만 연령,(4) 학업 수준, 근속연수, 책임직에 있는 경우는 투자나 대기오염 개선 등 가시적 성과 획득이 그 기준이다. 물론 사회적 안정에 관한 기준 역시 빠지지 않는다. 자기 관할 구역의 공공질서에 문제가 생겨 국가적 차원으로 영향이 미칠 때는 안 좋은 성적을 받게 되고, 그의 정치 인생에는 제동이 걸린다. 투명성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자의적 판단이 주를 이루고, 깔끔하게 세팅된 엘리트의 복제는 계속 이뤄진다.
<신화통신>의 전 국내부장이던 경제학자 양지성은 "개방과 더불어 1990년대 중반까지 하급 계급에 속했던 사람은 일을 원할 경우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베이징 남부의 제4순환도로 너머에 위치한 어느 허름하고 커다란 카페에서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쓴 책의 출간에 관한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중국의 사회계층 분석>(5)이란 제목으로 홍콩에서 먼저 출간된 이 책은 은밀히 유포되다 이어 대륙에서 정식 출간됐으나, 2011년 실제 출간이 되기 전까지 두 번이나 금지당한 전력이 있다. 여전히 공산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저자는 그렇게 걱정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 중 하나인 세습 계급의 구성에 대해서는 비난했다.
고위 당간부들의 계급 세습화
그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에서는 더 이상 사회이동이 이뤄지지 않는다. 요직은 늘 교육수준이 높은 간부의 자제들에게 배정돼 있다. 개혁 이후 세대들에 대해서는 사회계층의 세습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공직이나 당 간부의 자제가 그대로 간부가 되는 것이다. 부유한 집의 자제는 계속 부유하게 살아가고, 가난한 집 자식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간다. 서구사회에서는 흔한 일이겠지만, 민중의 힘과 사회주의를 앞세우는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당의 원로 지도자 자제들을 일컫는 '태자당'이 기관 내에서 주요 직위를 점하고 있다(현직 정치국 위원의 4분의 1이 이에 해당). 또한 '차이니즈 프린슬링'이라 불리는 이 '왕자'들은 주요 공공기관이나 준(準)공공기관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후진타오 주석이나 원자바오 총리 등 더 소박한 가정 출신으로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퇀파이'에서 경력을 쌓은 지도자들과 경쟁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은 저우언라이의 오른팔이던 시중쉰의 자제로 앞서 언급한 태자당에 속하는 인물이다. 반면 차기 총리를 노리는 리커창은 퇀파이 출신이다.(6)
그렇다면 공산당 내부에서 계급투쟁이라도 일어나려는 걸까? 공식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그런 의견이 떠도는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분열 상황을 이분법적으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공직에서 파면되기 전, 혁명 원로 지도자 중 한 명의 자제로 태어나 충칭시 당서기를 지낸 보시라이는 노동자·농민을 위해 사회적 권리를 예찬한 인물이었고, 누구보다 앞서 고속 승진을 하며 시샘을 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즉결심판의 최고봉으로 인권은 크게 고려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로부터 500km가량 떨어진 광둥성은 수출 중심의 대기업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지역인데, 이곳의 서기인 왕양은 노동자의 피가 흐른다기보다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예찬하는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치적 개방과 공적 자유를 주창한다. 두 사람의 경우는 서양의 정치적 기준에 따라 중국 사회를 분석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보여준다. 중국에 대해 개혁과 보수, 우파와 좌파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마오쩌둥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사람이나 사회적 권리를 내세우는 지식인과 같이 신좌파를 표방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나, 서양의 이중적 잣대로 이 사회를 판단하는 건 위험하다.
"차라리 마오 시절이 나았다?"
보시라이 사건 때와 같이 갈등은 때로 (상징적 의미의) 폭력적 수단을 써서 해결되기도 한다. 부패 척결의 강력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명성을 얻은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는 그 자신이 부패 혐의를 얻어 비난을 사고, 마오쩌둥에 대한 향수로 비판을 받아 베이징 당국에서 완전히 파면됐다. 원자바오 총리는 "문화대혁명의 비극이 되살아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같은 공식적 결과에 대해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이 많다. 기소장을 작성한 게 독립적 사법기관이 아닌 공산당이 되는 순간 사실과 거짓을 구별하기란 어려워진다. 그런데 부패는 중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 보시라이가 하나의 파벌을 다른 파벌로 교체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더욱이 그가 마오쩌둥 시대의 '홍색 가요'를 되살리려 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보시라이가 마오쩌둥 및 홍위병 최악의 시절로 돌아가기 원한다고 결론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광저우 주간지 <남방주말>의 주필인 얀례산도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한다. 1960대의 정년퇴직 인사임에도 아직 활동을 계속하는 그는 참신한 취재 기사로 정평이 난 이 주간지의 현지 사무실에서 우리를 맞이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행동들은 문화대혁명 시대를 연상시킬 수 있지만, 이후 중국 인민들은 가르침을 얻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교육수준이 전보다 더 높아졌고 생각도 더 깨어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상하이에 산다는 것> 연작 , 2005-후양 |
쑨원대학의 건축사학자로 문화대혁명 전문가인 펑위안 교수는 마오쩌둥의 광기가 극에 달하던 시대인 1964년에 태어났다. 그는 단호하게 자기 생각을 피력했다. "나이 든 사람에게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반면 젊은 사람들이 마오쩌둥을 찾는 건 두 가지 현실을 반영한다. 하나는 그래도 옛날이 지금보다 더 평등하고 덜 치열한 사회였다는 인상과 더불어 지금의 현실에 대한 불만을 어떻게 표현하고 해소해야 할지 그 길을 못 찾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시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마오쩌둥과 그의 통치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늘 간략하게 요약된다. 70%는 좋았고 30%는 나빴다는 것이다. 비판적 연구는 늘 그 앞길이 험난하다. 펑 교수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얼마 전 그의 강의 내용을 담은 한 책에서 이 시기에 대한 그의 논문 두 편이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비록 좋은 이유에서일지라도 결코 도구로 이용되지 않는, 그런 공정한 역사적 연구를 그가 왜 요구하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만일 재임 초기 후진타오 주석이 약속한 대로 자유로운 토론이 이뤄지고 사람들의 이런저런 생각이 인정받는 분위기였다면 보시라이 사건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약속은 묻혔고, 당내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급격히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주로 정부(와 당)의 역할 및 사회정치 개혁의 내용을 둘러싸고 논란이 빚어진다.
이 모든 걸 중국식 시장사회주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중국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창시한 사회주의를 창의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중국식 시스템의 기본 개념이 현재 진화 중인 마르크스주의를 입증한다." 이는 '중국공산당에 대해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타이틀의 공식 브로슈어에 실린 내용이다. 물론 이 고리타분한 생각을 곧이곧대로 믿는 공산당원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광저우와 미국 뉴욕 사이를 자주 오가는 기업 노사관계 전문가 허가오차오 교수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중국식 자본주의 사이에는 사실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처우 개선을 위해 힘쓰고 있으며 이는 태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또한 확실치 않으며 어쨌든 이로써 중국식 사회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어쩌면 이는 대안 이데올로기인 유교 선호 사상을 설명해주는 게 아닐까(14면 안청 기사 참조).
현 단계는 국가자본주의, 그다음은?
과거 광저우 부시장으로 재무를 담당하던 리우진샹도 이에 동의한다. "사회주의가 더 평등한 사회를 의미한다면, 스웨덴이 중국보다 더 사회주의 수준이 높은 국가다. 중국에는 구시대의 양상이 많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더 이상 기준점도 없고, 본보기로 삼을 모델도 없는 상황이다. 우리 시스템을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시장경제, 사회주의, 국가자본주의 등 어떤 개념도 지금의 시스템을 정의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지도 방향에 혼선을 빚는 것이다. 우리는 대대적인 이론적 연구를 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자본주의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각자가 더 나은 입지를 굳힐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이용하는 것이다." 훌륭한 목표인 건 확실하다. 그러나 18차 전국대표대회 준비 과정에서는 방향 수정의 기초적인 밑그림조차 보이지 않는다.
글/마르틴 뷜라르 Martine Bulard 언론인.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1) 18차 전국대표대회가 끝나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의 위원 수는 9명이 아니라 11명으로 늘어난다.
(2) Emilie Tran, ‘중국의 당교와 엘리트 지도자 양성’(école du parti et formation des élites dirigeantes en Chine), <Cahiers internationaux de Sociologie> 제122권, PUF, Paris, 2007.
(3) Chen Xia, Yuan Fang, ‘중앙당교의 내부’(Inside the Central Party School), <China Daily>, Beijing, www.china.org.cn, 2011년 5월 5일.
(4) Richard MaGregor, <The Party>, HarperCollins, New York, 2010.
(5) 중국어판으로만 발간.
(6) 2012년 6∼7월 <마니에르 드부아> 제123호 중국 특집 ‘임계상태의 중국’(Chine, état critique)에 수록된 Laurent Ballouhey의 ‘중국의 태자당과 주석’(Fils de prince et président), ‘최연소 고위지도자’(Le plus jeune des hauts dirigeants) 기사 참조.
숫자로 본 중국공산당
- 2011년 당원 수 8060만 명. 1년간 2.9% 증가.
- 35살 미만 25%, 36~60살 50%, 60살 이상 25%. 여성 23.3%.
- 생산직 노동자·농부·어부 45%, 기업 간부·고급 기술자 12%, 상근 직원 22%, 군대 소속 21%(<신화통신> 자료).
- 공산당 중앙위원 204명(여성 12명), 후보위원 167명. 이 중 10%는 외국 유학이나 외국 근무 경험 있음. 5%는 기업 경영자.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지도자의 자녀
-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아들 후하이펑은 출입통제장치, 보안 스캐너 등(공항·전철 등)을 생산하는 누크테크(Nuctech) 사장직을 거쳐, 누크테크 포함 20여 개 회사가 소속된 모기업 청화홀딩스의 당서기직을 하고 있다. 후진타오 주석의 딸 후하이칭은 정보기술(IT) 기업 시나(Sina)의 전 최고경영자(CEO) 마오다오린과 결혼했다.
- 원자바오 총리의 아들 원윈쑹은 중국위성통신그룹(Satcom) 회장이다. 모건스탠리에서 경력을 쌓은 원자바오 총리의 사위 류춘항은 은행감독국 연구국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 우방궈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권력 서열 2위)의 사위 윌슨펑은 홍콩공상은행의 파트너 회사인 한 투자펀드의 사장이다.
자료: 신화통신, <The New York Times> 2012년 5월 17일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인터넷 사이트에 실린 Patrick Boehler의 조사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