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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회심
사도행전 9:1~19
지난 주일에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주님께서 사울이라는 청년을 만나 주신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권적 택정하심을 따라 핍박자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주심으로써 이방 세계의 광대한 지경을 넘어서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이제 온 세상에는 복음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 이방 지역으로 급속히 전파되는 강력한 변화의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전환점이 된 그 획기적인 사건인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심으로써 사울이라는 청년이 완고한 유대주의 바리새 신앙인에서 부활의 복음을 믿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바뀌어지는 그 회심의 사건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사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분은 영광의 부활의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1절로부터 5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게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 청년은 여전히 교회를 가혹하게 박해하면서 초대 교회를 완전히 박멸할 기세로 저 멀리 나바테아 왕 아레다 4세가 통치하던 다메섹 성까지 찾아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려고 240km 곧 600리를 여행중이었습니다. 그 거리가 아주 먼 거리이니까 사울은 말을 탄 상태에서 무장한 종교 경찰, 군인들을 데리고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제 다메섹에 거의 가까이 다다를 때니까 사울의 마음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할 강렬한 적대감으로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에 의하면 그 때가 정오 시각이었다고 하니,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쬘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정오의 태양 빛보다 더 강렬한 빛이 사도 바울을 둘러싸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강렬한 빛이 그의 눈에 쏟아져 부어지니 그 30대 초반의 젊은이도 순간적으로 어떻게 몸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러졌으니 걸어가다가 쓰러졌는지, 말을 타고 가다가 쓰러졌는지 모르나, 그는 도저히 그 빛을 감당할 수 없어서 땅바닥에 엎드러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어지럼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강렬한 빛 속에서 소리가 들려오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시고, 이에 반사적으로 사울이 그 정신없는 중에도 대답하기를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했을 때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대답을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이러한 초자연적인 경험은 사울의 개인적인 정신착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매우 이지적인 사울이라는 젊은이는 그 사건 이후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길을 매우 강인하고 일관되게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처음 만난 다메섹 도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많은 핍박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부활의 주님이 주신 그의 소명에 따라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다메섹의 회심 이후 35년 동안 한결같이 주 예수님께 신앙의 충정을 다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다메섹의 경험은 일시적인 심리적인 착란에 의한 인간적인 경험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쓰러져 신비한 대화를 나눈 청년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는 확실한 객관적 체험을 한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이 경험과 그 이후의 그의 35년 동안의 모든 삶의 행적들, 수많은 이적들을 일으키고 수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감옥을 여러 차례 들락거리면서도 총독들과 임금들과 모든 사람들과 만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을 증거한 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정녕 꾸민 이야기도 아니고 일부 나사렛 제자들의 환상적인 흠모 때문에 일어난 집단 착란도 아닌 너무나 확실한 객관적 사실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삶과 그가 모든 교회에 써 보낸 그의 지성적이고 영적이고 너무나 풍부한 인간성이 담겨진 그의 13편의 편지들을 통해서 의심없이 확인할 수 있거니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영광스럽게 살아나셨고, 다메섹 도상에서 성도들을 핍박하려고 야수처럼 분노한 마음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사울에게 부활의 예수님께서 그 길 위에서 그 영광의 모습을 빛 가운데 보여주신 사건은 너무나 확실한 객관적 사실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일말의 의심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읍시다. 우리가 죽은 뒤에 믿는 자에게 장차 부활이 있고 천국이 있음을 굳게 믿읍시다. 할렐루야.
둘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교회를 자기와 동일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4절과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땅 바닥에 엎드러진 사울에게 묻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고 물으신 다음에 누구시냐고 반문하는 사울에게 주님은 대답하기를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고 하였습니다. 분명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지상에서 활동하던 3년 반 동안에 바리새인 사울은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뵌 적이 한번도 없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울은 단지 예수님을 믿는 교회 공동체를 이단으로 알고 성도들만을 무섭게 박해했을 따름입니다. 기독교 성도들만을 잡아 거칠게 때리고 감옥에 쳐넣고 괴롭히고 죽였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사울의 행동은 예수님을 박해한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자기와 한 몸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 공동체를 자기와 동일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박해를 당하면 주님께서 박해당하신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영광을 받으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받들어 섬기면 그것은 곧 주님을 받들어 섬기는 것으로 주님은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제부터 더욱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소중함을 기억하며 더욱 교회를 사랑하며 아끼고 지성으로 섬깁시다. 주님은 교회를 섬기는 수고를 다 자기를 향한 헌신으로 인정하실 것이며 반드시 기억하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시편 128:5,6, 시편 134:3 말씀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라고 하였습니다. 시온 곧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부활의 예수님께서 이 약속대로 복을 주시고 번영과 평강을 주시며 자손의 번성함을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셋째로,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대주재이십니다.
6절로부터 12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그 때에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부활의 주님은 빛 가운데 나타나셔서 사울에게 행할 일을 알려주십니다. 성안으로 들어가라면서 행할 일을 일러줄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행할 일을 알려주실 자로서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경건한 다메섹 성도를 택하시고 그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직가라는 거리의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사울이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을 사울의 환상 중에 이미 보게 해주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며 그의 뜻을 따라 행하시어 주님의 행하실 일들을 하나 하나 이루어가시는 대주재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질서가 없으시고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주관하셔서 순서대로 사람들을 예비하셔서 만나게 하시고 합력하여 주님의 계획을 이루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해도 그 때 그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만큼만 보고, 하라고 명하신 대로만 순종하여 나아가면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간이 흐르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만날 사람을 만나게 해주실 것이요 필요하면 우리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들도 미리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뜻대로, 그의 백성들을 때마다 일마다 평강 가운데 이끌어가실 대주재이신 우리 주님을 믿고 우리의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맡겨드립시다.
다만 여기 사도 바울을 찾아가라는 아나니아에게 주님께서 직가의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하면서,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두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중일 때 우리를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천사를 비롯한 누군가에게 우리가 가리킬 때에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말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사울이 삼일을 금식하며 기도를 계속하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찾아오는 것과 그에게 안수하여 자기의 눈을 열어 다시 보게 하는 것을 환상 중에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에 계속 힘쓸진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주시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해주시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계획하신 바를 착착 이루어가실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서 12:12 말씀에,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항상 기도에 힘쓰며”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대주재자이신 주님의 손길을 굳게 의지하고 우리와 자녀들의 미래를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항상 기도에 힘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주님께서 사울을 교회의 일원으로 삼아주시고 주님의 일꾼으로 택정하셨을 알려주셨습니다.
13절로부터 19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이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아나니아는 환상 중에 주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 사울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그가 알고 있는바 사울의 흉악한 핍박의 사실을 고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핍박의 원흉에게 가라는 것은 즉시 체포당할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면서 그 사울은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하신 주님의 그릇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아나니아로서는 현실적으로는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복음에 대한 반감으로 똘똘 뭉친 흉악한 핍박자가 주님의 포로가 되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바뀐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믿음의 사람이요 순종의 사람이었기에,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한 가지 유머스러운 말씀을 아나니아에게 알려주셨습니다.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그 동안 사울이 얼마나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모독을 많이 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을 체포하여 그 이름을 부인하도록 얼마나 많이 고문도 하고 때렸습니까? 주의 백성들은 그 동안 사울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목숨도 가족도 다 포기하며 믿음을 지켰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그 동안 그토록 핍박하며 모독하던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제부터 얼마나 힘들고 거칠고 흉악한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지를 주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주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무엇인지 “샘통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사울에게 이제 그 동안 가한 핍박을 너도 당해보라고 말씀하신 것 같아 무엇인가 재미있게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은 이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말도 다 할 수 없는 고난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그가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을 모질게 핍박했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하는 핍박에 대하여 원망하거나 푸념할 수 없이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주님은 사울에 대하여 받을 빚이 많은 채권자처럼 복음의 빚을 갚으라고 전도자의 길로 그를 힘차게 내밀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 고난을 받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복된 길이기에 사도 바울은 참으로 지극히 큰 복을 받은 자입니다. 마태복음 5:10 이하에서 주님께서 친히 이르시기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0~12)
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4:13,14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영광을 받아 누리는 것도 행복하지만, 이 땅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아서 주님의 나라에서 더 큰 영광을 받는 것은 더 큰 행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위대한 일로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과 멸시를 받고 세상에서 환난을 겪는다 할지라도 조금도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십자가에 동참하게 됨을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는 자가 됩시다.
사울은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이 다시 떠졌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으며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도 먹고 힘을 얻고 달라진 세상을 보며 부활하신 주님의 위대한 그릇으로서 새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도약을 위하여 달려가기를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들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례를 받고 하나님 백성이 되어 때를 따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으며 사명을 받아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남은 생애도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힘을 다하여 복음을 위하여 달려갑시다. 그래서 우리의 경주를 다 마치고 우리의 싸움을 다 싸우고 우리의 믿음을 잘 지켜 믿음의 완주를 마친 후에 기다리는 주님 앞에 서는 자가 됩시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이 앞서 그 경주를 마치고 의의 면류관을 받았듯이 우리 모두도 주님으로부터 복된 상을 다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