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팀 켈러는 <기도>에서 기도를 두 가지로 정의 한다. 첫째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conversation으로 또 하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영광을 만나는 encounter 이다. 하나님과의 대화하는 방법은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하고 아뢰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Encounter 는 글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좀 애매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설교시간에 자주 듣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라"는 메시지도 어떻게 영광을 보고 경험하는지를 묻는 사람들도 많다. 듣는 사람들이 애매한 이유는 어떤 인간의 행위적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찾아오듯이 마음에 감동으로 경험되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
사도바울이 에베소교인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엡 1:18) 라고 기도했을 때 바울이 기도하는 대상은 모두 에베소 교인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마음의 눈이 밝아지기를'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알기를 구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거룩한 초자연적인 빛'이라고 불렀다. 꿀을 설명한다고 할 때 꿀에 대해 책으로 묘사를 아무리 들어도 애매할 뿐이다. 정말 꿀을 맛볼 때 비로소 꿀의 맛이 어떤지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3.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기 위해 두 가지를 행하셨는데 첫째는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 아래 나게 하시고, 우리 죄를 속량해주셔서 양자 삼아주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법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역만으로 우리가 그것을 주관적으로 체험할 수 없다. 양자로 집에 들어오긴 했는데 서먹서먹한 관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또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그 아들의 영인 성령님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리스도의 일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주관적으로 체험시켜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로마서에서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다"고 표현한다.
4.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하나님을 Encounter 한다는 말은 단순히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통해 성령님께서 깊은 사랑과 확신과 뜨거움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의 얼굴을 구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알아간다는 말과 동일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기 때문이며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실 때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맛보아 아는 깊은 체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경험하는 것은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늘 애매한 영역이다.
5.
이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라는 방법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별로 유익하지 않다. 방법보다 마음의 문제이다. 간절히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단순한 감정적 체험이 아니라 이해를 동반한 감동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노트에 쓸 수 있는 감사의 목록들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는 것은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이 그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느끼고 맛보고 경탄하는 것이다.
6.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누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묵상하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을 향한 사랑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모든 삶에 매료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기 전에는 청교도들의 글들 중에서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할 수 있습니다." 라던지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십니다" 라는 고백들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면서는 그것이 내 삶의 고백임을 동일하게 느끼게 된다.
존 오웬은 이것을 "철저한 성경적 신비주의"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이 깊이 마음에 스며드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누리는 것이 가장 건강한 영적 경험이다. 단순히 감정적 체험만을 중시하면 신비주의로 흐를 위험도 있다.
7.
딱딱한 교리들만으로 머리를 채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할 때 누군가를 비판하는 정죄로 교리가 사용될 뿐이다. 또한 교리 없이 단순히 감정적 체험만을 추구하면 기독교가 저급한 미신과 비슷하게 된다. 철저한 말씀위에 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이 경험했던 "주께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외치는 그 뜨거움을 경험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세상에 있는 어떤 빛과 소리보다. 어떤 사람을 안는 포옹보다. 향기와 음식보다, 더 깊은 만족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있다고 고백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은 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반영이며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맛본 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것은 사랑의 경험이다.
8.
"어떤 바람도 실어다 주지 못할 향기를 거기서 맡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진미를 맛봅니다. 아무리 끌어안아도 끝이 없는 포만감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말입니다." (10.6.8.)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 그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한 깊은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싶다면,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고, 기도할 때마다 그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 기도 속에서 깊은 영적 진액이 흘러나오는 것 같은 아름다움 그 자체에 매료되는 순간이 온다.
9.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대화로 그분의 말씀과 은혜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이런 대화가 진전되고 무르익으면 마침내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고도 충만한 만남으로 발전한다." 기도는 대화이며 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