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8월 14일
말씀: 창1:26-28
제목: 창조세계관 속에서 일터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보십니다. 우리의 삶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헌신과 충성, 그리고 예배와 기도 또한 몇 명을 전도했느냐 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볼 것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의 삶속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묵도 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은 기쁨과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을 하고 활동하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일터의 삶을 생각할 때 ‘일’은 노동으로 생각해서 어려움이고 고통이고 평안을 빼앗아가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지만 ‘일’은 그 일터의 삶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창조론적으로 볼 때 명확합니다. 하나님도 일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아담도 에덴에서 경작하도록 일거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타락 후에는 땀 흘리며 수고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많은 부분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 속에서 성취감과 기쁨과 보람과 가치를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다면 어디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주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요, 이 주일의 관심은 일주일 동안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하는 삶을 살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삶을 살았는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감사가 있고 간증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그래서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 이 창조가 어떻게 해석되어 집니까? 일하시는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창세기 2장만 보더라도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특징이 무엇일까를 알아보고 이 특징이 우리의 일터에서 적용되어야 하느냐하는 부분을 좀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물질적 세계에서 일하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관계에서 일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자기 일에 범위를 두십니다. 한계점을 설정해 놓으십니다. 네 번째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다섯 번째, 열매를 맺는 일을 하십니다. 여섯 번째, 공급하는 일을 하십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물질의 세계에서 일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하라’이 말씀을 보더라도 하나님은 영의 세계를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요한 것을 하나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선을 드러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물질의 세계에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 이원론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악하고 어렵고 추한 곳이며 영적인 세계는 선하고 충만한 곳이며 신령한 곳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직업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교제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잘 못된 부분입니다.
계속해서 강조하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물질세계는 쉬 사라질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땅의 것으로 쌓아놓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기서 말씀은 세상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터전을 부인하지 말아야할 뿐만 아니라 이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을 보이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삶의 터전에서 성실히 일함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일터의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정직히 행하며 타협하지 않으며 부정하지 않으며, 악을 도모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으면 누명을 씌우지 않으며 상대방을 존중하며 귀하게 여기며 섬기며 삶의 터전에서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하며 성실히 수업에 임해야하며 학칙을 준수해야합니다. 그리고 학생으로서의 직업에 소홀함이 없이 열심히 공부해야합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임을 아셔야합니다. 주부들도 이웃과 사귐에 있어서 아름다운 사귐이 있어야합니다. 서로 모여서 흉을 보거나 비판을 하거나 불평을 늘어놓거나 하는 일이 바로 세속의 삶입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장을 열어야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관계를 통해 일하십니다.
창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을 보더라도 하나님은 관계 속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계의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하나님이 관계 속에서 일하신 것처럼 우리도 관계 속에서 일합니다. 누구와 관계 속에서 일해야 합니까?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 분과 교통가운데서 짐승들의 이름도 지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터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사귐 가운데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불어서 우리가 세상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운데 거하는 것이고 하나는 사람과의 친밀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하면 사람과도 친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야하고 그 친밀함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흘러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관계를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성자하나님, 즉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으로 이 부분을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인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인간관계의 모든 해답은 사랑이라는 것은 의심할 의지가 없고 목회를 하다보면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목회를 감당할 수 없음을 계속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적용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사랑의 관계로, 하나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로,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자기 몸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이처럼 그리스도가 우리와 연합되어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훈련하고 사랑을 무기로 삼아야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사랑가운데 연합은 함께 일한다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함께 지체로서, 성도로서, 교회에서, 삶의 터전에서 일한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화와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먼저 아담을 만드시고 하나님과 사역을 함께할 동참자를 세운사람이 바로 화와입니다. 물론 이 둘의 가정에 관한 이야기일수 있지만, 부부와의 관계성에서 이야기입니다마는 더 넓게 본다면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사역의 위임 권을 받아 일하는 동역자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도 같이 멍에를 매는 자를 원하시는 이유가, 가정을 아름답게 세우는 일을 위해, 또한 가정에서 사랑으로 가정을 복되게 하는 것을 위해 부부가 함께 하나님이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언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느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사랑으로 연합되어 인간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목적으로 관계가 형성될 때 평안과 안식이 있도록 우리가 지음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어놓으시고 그리고 매뉴얼을 만들어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왜 율법을 주셨습니까? 왜 대강령의 첫째 되는 계명을 주셨습니까? 왜 입니까?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편안과 안식과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론적인 관점은 바로 이런 관점입니다.
일터의 삶은 중요한 관계의 장이됩니다. 이것 또한 창조론적으로 이해하셔야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함께 동역하며 일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62:6-7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여기서 보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동역하시기를 원하시는데 기도로 동역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파수꾼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하나님과 지금 우리교회가 동역하고 있는 것임을 아셔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된 삶으로 삶의 터전에서 일을 할 때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요?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부부, 우체부, 공무원, 청소원, 백화점, 세탁소, 미용실, 등등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아름답게 조화되어 협력하며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세상 구조를 창조론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해서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세상에 보내신 것을 우리가 알고 세상에서 일터의 관계가 사랑을 공급하는 삶으로 엮어 나가는 일들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교회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엮여 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자기 일에 범위를 두십니다. 한계점을 설정해 놓으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에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즉, 일의 범위를 정하신 것입니다. 창2:1-2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안식은 창조주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그 분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쉼이라는 것은 전혀 무관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쉼을 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스스로 범위를 정하시고 한계점을 설정하신 것입니다. 이 쉼은 하나님을 위한 한계점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한계점 이라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마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범위를 정하셨습니다. 즉 한계 점을 두신 것은 우리의 삶에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이며, 반드시 안식일을 지키게 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언어의 한계, 공간의 한계, 시간의 한계를 두시고 사역하셨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모든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 정하신 규칙을 지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자율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존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은 오만함과 간사함과 더러움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만이 확인될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설정한 공간 안에서 일하라는 뜻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동성애의 삶을 살수 없음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생태계를 마음대로 변형하지 말라는 것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정하신 규율과 법도와 율례의 한계를 뛰어 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윤리적 범위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습니다. 더불어서 자연파괴 또한 하나님의 정하신 범위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쓰레기를 마음대로 버리지 말아야합니다. 구체적으로 적용한다면, 의사는 차량접촉사고로 가짜 환자가 입원을 요청하면 거절해야합니다. 변호사는 이기지 못할 사건을 이길 수 있다고 현혹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들어가 있는 곳곳에서 정하신 범주를 지켜야합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즉 인간과 함께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인간 속에 조각해 놓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인간 속에 내재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달리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제되어 있는 인격적 존재로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대로 인간이 일하는 존재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의 구체적인 것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즉, 다스리는 일을 주셨습니다. 이 다스리는 권세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되, 우리에게 이 다스림을 위임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일이 하나님과 동역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땅의 대리자로 왕처럼 다스리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이신 일의 사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을 비췬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일이 누구를 반영하느냐하면 하나님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가 하나님을 모본으로 삼고 일터에서 하나님의 왕 같은 권력을 가지고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터에서 삶은 그래서 우리의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통치위임 권을 잘 못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청소부로 일을 하던, 말단 공무원으로 일을 하든, 직장인으로 일을 하던, 기업인으로 일을 하던, 학생이던, 교사든 간에 모든 일은 하나님을 (반영)드러내는 삶입니다. 우리가 직업을 통해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느냐 하는 질문을 하나님 관점에서 생각해야합니다. 왜입니까? 그 분이 우리에게 통치권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열매를 맺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매의 삶이지요. 열매를 맺는 것이 창조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반드시 모든 만물에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심각한 일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꿀벌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농작물 중에 꽃가루받이를 80%를 감당합니다. 만일 꿀벌이 사라지면 아비규환 식량대란이 발생 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러니까 자연세계는 자기 역할이 있는데 그 역할을 하지 못하면 재앙이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 역할을 감당하여 열매를 맺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 모든 자연을 다스리는 권세로 파괴하게면 얼마나 심각한 일이 발생하는지를 창조적 세계관으로 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또한 열매를 맺는 삶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지 못하면 얼마나 심각한 일들이 발생할지를 창조론적으로 접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충만하게 하실 분, 하나님 혼자 충분히 충만하게 하실 분이시지만, 우리와 함께 동역하여 일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맡은 일터에서 하나님의 충만함을 드러내는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합니다. 청소를 할 때도 내가 깨끗케 함으로 인해 주변이 깨끗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하나님의 충만함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아름다움을 드러내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아름다움을 드러내도록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삶의 터전에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교회를 통해 출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충만함이 교회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에덴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경작하다’가 히브리어로 ‘아바드’, 즉 ‘섬기다’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아바드’의 동일한 단어가‘예배하다’는 말씀입니다. 섬기는 것이 ‘일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세속적이라고 해서 ‘일’을 관두고 주의 일만 한다고 교회에서만 머물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임을 아셔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속에서 예배가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된다는 것은 삶속에서 성실하며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배는 삶속에서 나타나는 예배가 되어야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속에서 열매를 맺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열매를 보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창4:4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으나’ 5절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아벨과 그 제물이란 아벨의 삶과 그 제물입니다. 가인의 그 삶과 제물입니다.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를 하나님이 보신다는 뜻입니다.
여섯 번째, 공급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은 인간 중심으로 창조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만물도 하나님의 피조세계에서 창조하신 목적이 인간에게 공급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공급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자기능력으로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고 불평만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공급이 차단되면 절대로 인간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태양이 뜨지 않으면 곡식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창조적세계관 속에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좋은 시간이 되시를 원합니다. 오늘 강조한 여섯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첫째 하나님은 물질적 세계에서 일하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관계에서 일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자기 일에 범위를 두십니다. 한계점을 설 정해 놓으십니다. 네 번째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다섯 번째, 열매를 맺는 일을 하십니다. 여섯 번째, 공급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세상과 장벽을 쌓고 단절된 삶을 사라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것 인가를 고민하고 기도하는 복된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