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아라비아에 세헤라제드란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임금의 호출을 받게 됩니다.
이 호출은 죽음의 부르심입니다.
왜냐하면 그 못된 임금은 누구든 하룻밤을 지낸 뒤에는 반드시 죽이기 때문입니다.
세헤라제드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첫날 밤 임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고는 끝을 맺지 않습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임금은 세헤라제드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천 일을 넘겼습니다.
그렇게 ‘천일야화’ 혹은 ‘아라비안나이트’가 탄생한 것입니다.
세헤라제드의 이야기는 천 하루 만에 끝났지만 임금은 그녀를 여전히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임금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임금은 더 이상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처음부터 그녀 머릿속에 천 일 동안 할 이야기가 다 담겨있었을까?’
아닐 것입니다.
하루 이야기하고 나면 그 다음 날 것을 또 생각해내야 했을 것입니다.
줄거리는 있었을 지언 정 자세한 내용은 그때그때 생각해내야 했을 것입니다.
며칠 만에 천일동안 할 이야기를 자세하게 지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할 때도 그렇게 말하셨습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그녀에게는 별거 아닌 날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들이 모여 마데 데레사 성녀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에 대해 말씀하시며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님께 모든 마음을 다 쓰고 항상 주님생각만을 하지는 못합니다.
또한 나의 힘도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쓰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참 행복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연옥에 가지 않기 위해 ‘비르짓다의 7기도’를 매일 바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에게도 하루의 15분만 할애하여 이 기도를 바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그런 식으로 연옥에 안 가려고 하는 것은 너무 비겁한 거 같아요.”라고 말하고, 어떤 분은 “그거 바친다고 연옥에 안 가겠어요?”라고 말하며, 또 어떤 분은 “저는 의지가 약해서요.”라고 말합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이 기도를 바치기 전에는 이런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작을 해보니 ‘끝까지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년 넘게 매일 바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연옥에 가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약속, 혹은 치명자의 지위에 올려주신다는 약속등은 바치면서 더 믿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도 좋지만 주님은 이 기도를 바칠 수 있는 나의 의지를 보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걸음부터 매일 하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좀 그렇기는 합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자랑스럽게 꾸준히 하는 것 중의 하나는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매일 읽는다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 항상 이 책을 조금이라도 읽고 잡니다.
거의 30년을 그렇게 해 왔습니다.
10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이었고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책을 제일 싫어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펴 놓고 잠들기 전에 한 줄이라도 읽으려고 하였습니다.
처음 책들은 본래 두께보다 두 배는 두꺼워졌습니다.
한 줄 읽고 얼굴을 책에 파묻고 잔 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침 때문에 책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하다 보니 5년이 걸려 10권을 달 읽게 되었고 그 사이에 사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정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단거리도 뛰어보지 않은 사람이 마라톤을 생각하면 숨이 막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만 1초라도 매일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을 한다면 이미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하게 되는 완전함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먼 거리도 한 걸음부터 시작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완전하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며 망설이고만 있다면 영원히 시작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운동도 처음부터 너무 무리해서 하면 며칠 버티지 못합니다.
누워서 식은 죽 먹기만큼만 시작해야합니다.
팔 굽혀펴기도 두 개를 목표로, 달리기도 5분을 목표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매일 해도 1년 후면 상당히 달라져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출발점입니다.
시작도 하지 않았다면 관심도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매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양 만큼만 정하여 무엇이든 오늘부터 시작해봅시다.
그 별거 아닌 것이 매일 되풀이되면 내가 바뀌고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함께 가야할 사랑과 율법>
613조항이나 되는 율법을 훑어보면서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저도 모르게 ‘꺅!’하는 비명이 제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어찌 그리도 인간의 삶 전반을 세세하게 규정해놓았는지...
뿐만 아니라 613조항이 항목 별로 새끼를 쳐서 또 다른 수많은 부차적인 규정들이 생겨나고...
읽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수많은 규정들을 보면서 또 다시 드는 생각 한 가지!
‘율법학자들, 참 시간도 많았나 보다!’
어떤 항목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웃겼습니다.
어떤 조항은 너무나 세부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웃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께서도 강조하셨듯이 원래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운 것입니다.
사실 율법은 한 인간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영적 안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폐지하러 오지 않으시고 완성하러 오셨다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율법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중요성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 율법은 유효할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 5장 17~19절)
율법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교회법 자체를 무시해서도 안되겠습니다.
다양한 규정들을 외면해서도 안되겠습니다. 관건은 ‘정도껏’입니다.
너무 율법만 강조한 나머지 ‘율법지상주의’에 빠져서는 안되겠습니다.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 어쩔 수 없는 나약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눈을 잔뜩 부라리며 엄격한 기준과 잣대만 들이대지 말아야겠습니다.
정의와 자비가 함께 가듯이 율법과 사랑도 함께 가야 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율법을 만든 목적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인간의 삶을 더욱 품위 있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 율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달라도 너무나 다른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인간 공동체 안의 공동선을 위해 율법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율법이 마련되었습니다.
이토록 좋은 취지로 만들어진 율법이 나중에 점점 가지를 치고 늘어났습니다.
율법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점점 백성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기로 율법이 변화되어갔습니다.
생각만 해도 짜증나고 부담스러운 계륵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율법의 폐해를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단칼에 율법과 관련된 문제들을 명확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단순화 명료화의 달인답게 예수님께서는 확실한 선을 그어주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복음 12장 29~31절)
한없이 부족한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대단한 것, 특별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한 요구를 하십니다.
좀 더 자주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 이름 부르는 것, 그리고 ‘주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매일 접하는 사람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를 좀 더 인내하고 그를 위해 조금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2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12,28-34 :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하라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하신다.이 사랑의 계명은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이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 모든 계명들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신명6,4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29절) 라고 대답해 주신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며 인간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고 하신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고, 돈을 자기 몸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만물의 주님께서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비롭게 행한 것을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으로 여기심을 알고 있다. 그리고는 열심히 그 선행을 실천한다.
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함께가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확증은 바로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꾸준히 일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주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친밀한 사랑을 알고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처럼 진실해야 한다고 고백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한 율법학자의 대답은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도 자비를 가로막는 판단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않아야 한다. 자비는 모든 번제물괴 희생제물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이 말씀은 율법학자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아직도 떨어져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율법학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말씀을, 그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아직 멀리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상대를 닮아간다고 한다. 부부의 모습이 닮은 것도 서로간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