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안식일 논쟁은 계속되는 주제였습니다. 1절부터 6절의 말씀도 안식일 논쟁이 일어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마침 그곳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1절). 손 마른 사람이란 한쪽 팔이 마비가 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느냐, 안 고치느냐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이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에 대해 안식일 논쟁이 있었고, 그 논쟁에서 예수님의 답변에 반박할 수 없었던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규례를 어기는 일을 트집 잡아 고발하려고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거나 도우려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았습니다. 2절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예수님이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였습니다. 그들의 초점은 예수님을 고발하고 비난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십니다(4절).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파서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안식일 규례를 어기는 것을 트집 잡아 고발하려는 그들의 생각을 아예 막아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5절).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을 접하시면서 트집을 잡으려는 그들의 완악함을 탄식하시며 노하셨습니다(5절). 그들은 본질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들의 틀에 매여 진정한 필요를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행해야 할 일들이 앞에 놓여 있는데, 온갖 규칙과 규례에 얽매여 정작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행하지 못하는 관행(慣行, custom)은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초점은 손 마른 사람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인간에게 쉼을 주는 날이라면, 이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진정한 쉼을 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회당을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논의했습니다(6절). 사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있었고, 헤롯당은 헤롯 왕가(王家)를 추종하면서 로마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율법과 관습, 전통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리새인들의 적이 되었고, 로마를 그대로 따르려는 헤롯당에게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아로서의 행보(行步)를 보이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기에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공동목표를 통해 함께하는 정치적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정치적인 이득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셨습니다(7절). 주님은 사역의 현장에 머물러 있지만 않으시고 때로 물러가셔서 한적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시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7절, 8절). 심지어 유대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먼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온 것을 볼 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이스라엘 전역에 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밀고 당기면서 혼잡해지자 예수님은 배를 띄워 사람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신 채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9절).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고침을 받았고(10절), 귀신 들린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외쳤습니다(11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점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주님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습니다(12절). 왜냐하면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시간을 조절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전지전능하심이 점차 드러나고 있음에도 바리새인들과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눈에 드러나고 있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영적으로 둔감함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참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에 열두 명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13절, 14절). 열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부르신 자들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이 열두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13절, 14절). 그리고 이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에 대해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어 전도도 하게 하시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4절, 15절). 예수님의 제자라면 먼저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과 사역의 스타일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도 하고, 악한 영들을 내어쫓는 영적 권세를 가지고 사역에 임하는 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에 이들이 주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이름은 16절부터 19절에 나오는데, 매우 다양한 성격과 다양한 직업적 배경, 다양한 출신 성분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다양성을 가졌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하나가 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를 판 자더라”(19절)라는 수치스러운 설명이 붙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 중에도 가룟 유다와 같은 자들이 나왔다는 것은 목양과 양육을 하는 목사들이나 지도자들에게도 시사(示唆)해 주는 바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목적이나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 있고, 본질을 찾아 그 본질이 이뤄지는 것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본질이 아닌 것에 우리의 초점을 두기보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본질을 찾아 그 본질을 이루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득, 야망을 이루기 위해 살아갈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마음을 두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신 주님의 뜻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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