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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體)와 용(用)의 논리 〔3〕
박성배/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교 비교학과 불교학 교수
체용의 논리가 어럽게 느껴지는 것은 체용을 다루고 있는 문헌들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체용의 논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체용의 논리는 마치 <엉크러져 있는 실다발>처럼 잡다한 것들이 복잡하게 엉크러져 혼선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체용의 논리가 동양문화의 핵심적인 논리로서 몇천년동안을 우리들과 함께 숨쉬면서 동고동락 해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정말 한낱 엉크러진 실꾸러미 같은 것에 불과하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전통의 핵노릇을 해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잡다하고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덩어리인 것 같지만 그러나 삶은 생명이 시작한 날로부터 오늘날까지 연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이 그저 잡다하고 복잡하고 모순에 찬 것 만은 아니라는 말도 될 줄 압니다.
생명이 무엇인줄 알고 우리의 삶이 무엇인줄 아는 사람에게는 삶이란 태양처럼 밝은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마침내 어둠을 몰아내고 잘못된 것은 끝끝내 바로 잡고야 마는 정의와 진리의 대명사같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동양의 체용사상속에 우리의 삶 자체와 아주 흡사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체용의 논리는 삶의 논리>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장합니다: "삶을 진지하게 문제삼는 사람만이 동양의 체용논리를 문제 삼을 수 있다. 꾹 참고 버티는 인내심과 정진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체용논리의 참 모습을 바로 볼 수 없다"고. 불행히도 현대의 교욱기관에서는 인생자체를 몸으로 부딪치면서 진지하게 문제삼는 그
런 훈련을 시키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체용의 연구가 활발해지지 않는 것도 알고 보면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엉크러져 있는 실다발>같은 체용의 논리에 한 가닥 빛을 집어 넣는 첫째의 작업은 체용을 두가지로 분류하는 작업입니다. 두가지란 종교적인 체용과 세속적인 체용입니다. 종교적인 체용이란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와 여럿(多)의 관계를 다루는 체용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의 체험과 그런 깨침이라는 체험속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과의 관계랄지, 유교에서 말하는 이치와 기운의 관계랄지 또는 유일신사상에서 말하는 창조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만물과의 관계를 다루는 것들이 종교적인 체용에 속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체용이란 이미 있는 여럿(多) 가운데의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들과의 관계를 다루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어느 쪽이 먼저 생겨났는가를 가리기는 매우 힘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속적인 체용이 먼저 생겨나고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마침내 종교적인 체용으로 까지 발전해 나갔다고 말할수도 있고 어떤 눈 밝은 성자에 의해서 종교적인 체용이 먼저 밝혀지고 그 다음에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에까지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소위 세속적인 체용이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것입니다. 오늘 날 불교를 중심으로 체계화된 체용의 이론에 입각하여 말하자면 세속적인 체용이란 종교적인 체용의 한 변형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체용을 이해함이 없이 세속적인 체용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잘못된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체용에서의 체는 실지는 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간 순간 변하는 무상한 용을 체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투철하게 깨치지 못한 미한 중생의 세계에서는 무엇인가를 오해하여 무한한 번뇌를 일으키는 일이 허다함으로 실지의 상식화된 동양의 체용논리란 대개 세속적인 체용을 두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종교적인 체용과 세속적인 체용의 차이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양자의 구별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양자가 서로 다른 여러가지의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나 흔히 하는 구별로는 종교적인 체용을 '진제(paramarthasatya)적인체용"이라 하고, 세속적인 체용을 "속제(samvrti satya)적인 체용"이라 합니다. 전자가 사람의 업을 초월(non-karmic)한 경지를 문제삼는데 반하여 후자는 사람의 업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전자가 무위와 무루를 다룬다면 후자는 유위와 유루를 다룹니다. 전자가 不二의 論理를 곧잘 휘두르는데 반하여 후자는 철저히 따지고 구별하여 얼핏 보면 이원론적인 가치구조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전자는 공이니 연기니 원융이니 무애니하는 불교의 궁극적인 깨침의 경지를 체용논리의 핵심으로 삼고 따라서 말보다는 체험을 강조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후자는 근본과 지엽의 관계처럼 역사나 사회속에 가치의 우열이 분명한 윤리적인 잇슈를 항상 중요하게 다루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사에서 당나라의 화엄종 또는 선종계에 속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체용을 즐겨 이야기하며 체와 용이 둘이 아니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는데 반하여 그 다음에 나타난 송나라의 성리학자들처럼 윤리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체와 용을 엄격히 구별하여 가치의 혼란을 막고 사회의 질서를 되찾으려 애씁니다.
그러나 용이 있는 이상 반드시 체가 있고 체가 있는 이상 반드시 용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 체용논리의 기본공식이라면 종교적인 체용이건 세속적인 체용이건 그것들의 차이 여하를 막론하고 그 근본정신은 모두 <생명의 실상을 바로 보자〉 또는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을 함께 다볼 줄 알자>는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구태여 구별하는 것은 전자가 그 체를 거의 무제한으로 확대해 버리는 반면 후자는 그 체를 사람이 이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내의 어떤 구체적인 것에다가 제한한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체용의 논리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항상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체용을 세속적인 차원에 국한하는 사람들의 체란 실상 체가 아니고 한낱 용을 체로 잘못 짚은 경우로 보일 것입니다.용을 체로 잘못 짚었다는 말은 무상하고 덧없는 용을 마치 무슨 불변의 것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한문으로는 <用의 體化>라고 부릅니다. 이와는 반대로 후자처럼 그 체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내에 국한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전자가 말하는 체는 너무 광범위하여 결국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함부로 확대하고 과장하는데서 나온 결과라고말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후자는 전자를 신비주의로 몰아 부치고 자기들은 전자의 그러한 막연한 체를 체라고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전자가 후자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아직 서 있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에 대한 맞공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재 체용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의 두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종래의 동양문화는 분명히 체중심의 문화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용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선 체용관계의 문헌들만 보아도 세속적인 체용을 다루는 대목이 상당히 많습니다. 세속적인 체용이란 한마디로 용문화를 다룬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오직 종교적인 체용만이 체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러므로 만일 체문화만 있고 용문화가 없다면 그것은 죽은 용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체용관계의 모든 문헌들을 아까 말씀드린 두가지의 범주로 분류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양사상의 체용논리는 그저 <엉크러져 있는 실다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체와 용의 관계를 설명할 때마다 흔히 인용되는 가장 고전적인 비유는 육조 스님의 단경에 나오는 불과 불빛의 비유입니다.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과 불빛의 관계처럼 체와 용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단경의 사상적인 멧세이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수행자들이 참선하면서, 선정이 먼저냐 지혜가 먼저냐 하고 시비할 때 양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선후를 따질 수 없다. 선정이 있으면 거기엔 지혜가 있기 마련이고 지혜가 있으면 거기엔 선정이 있기 마련이다. 선정은 체요 지혜는 용이다. 체와 용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대강 이러한 것이 체용의 논리를 동원하고 있는 단경의 사상적인 구조입니다. 얼핏 보면 체용관계를 순환으로 보는 시마타 교수의 말이 그럴 법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마타식 관찰에는 커다란 허점이 있습니다.
육조스님의 단경사상에는 이미 체를 중요시하는 사상이 그 밑바닥에 쫙 깔려져 있습니다. 이 점을 바로 보지 못하면 단경을 헛읽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이다. 근래에 성취한 문헌학적인 연구결과에 근거하여 생각해 볼 때, 단경과 거의 동시대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조스님의 祖師 禪思想도 단경사상과 일맥상통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마타식 관찰은 체용관계의 논리적 형식이라는 면만을 관찰하고 있을 뿐, 체용논리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신앙과 수행이라는 경험적인 면을 보지 아니한 흠이 없지 않습니다. 철저한 수행과 투철한 경험을 근거로 해서 논리를 전개하는 동양의 논리를 내용을 모두 빼내버린 기호적인 형식만을 가지고 따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장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체용의 논리를 진지하게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체용의 논리를 가지고 살아보기를 권합니다. 다시 말하면 체용의 논리가 책속의 논리에 그쳐서는 안되고 학생 자신의 삶의 논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옛날엔 포교 경험을 해 보는 믿음을 가지고 실천한다든가 또는 좀더 엄숙하게 표현해서 신앙을 가지고 수행한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학생들 가운데는 신앙이니 수행이니 하면 무조건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信仰과 修行〉이라는 재래식 표현이 정 싫다면 〈理論과 實踐〉이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식은 경험이 따를 때 생기가 돈다는 것을 깨닫자는 것입니다. 체용에 관한 지식을 갖는 것으로서 만족하지 말고 체용의 논리가 실지 인간생활에서 어떻게 일하는지를 실험을 통해서 한번 맛보라는 것입니다.
가령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이 날마다 경험하는 인간관계를 두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 믿고 존경할 때 좋아지고 믿음과 존경이 없어지면 위험해집니다. 그러면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을 체와 용의 논리로 한번 풀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 두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체를 믿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용을 믿는 경우입니다. 사람의 체를 믿는 경우에는 두사람은 겉으로 볼 때 둘일 뿐, 사실을 항상 하나로 되어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의 용을 믿는 경우에는 상대방의 재주나 능력이나 말을 믿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소위 종교적인 관계에서 잘 나타납니다. 후자는 세속적인 경우입니다. 종교적인 경우는 항상 체를 믿는 것이지 용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경우의 체란 둘이 한덩어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둘은 다 같이 텅 비어있다는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空>이 체가 되는 것입니다. 구태여 종교적인 관계가 아니라도 두 사람의 마음이 모두 텅비어 한 덩어리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인 관계에서의 믿음에는 두가지의 믿음이 혼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용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상대방의 체도 믿는다는 말입니다. 체를 믿지 않고 용만을 믿을 때 실망 또는 배반 등의 감정이 뒤따르기 쉽습니다. 보통의 관계에서도 만일 용을 믿는다면 상대방에게서 기대했던 용이 안 나올 때 그냥 불신해 버리거나 배반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건 상대방의 체를 믿는 경우엔 설사 자기가 기대하던 그 용이 안나온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습니다. 가령 자기에게 평생을 희생적으로 봉사한 부모나 배우자나 자식이 엉뚱한 실수를 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이제까지 지녔던 존경이나 사랑이나 믿음을 즉시 거두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어떤 손해나는 언행을 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무슨 뜻이 있는가 또는 자기가 알지 못하고 있는 어떤 원인이 있는가를 살피게 됩니다. 그 원인이 병적일 때에는 그 병을 고쳐 주려고 노력합니다. 미쳐 알지 못했던 뜻을 발견하면 자기의 단견을 뉘우치고 자기를 개선하려고 노력합니다.
믿으면 자기하고 달라도 그것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소중히 여깁니다. 아주 민주적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서 체용의 논리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동양의 체문화란 이러한 훈련을 끊임없이 계속 하는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체를 존중하는 문화적인 전통이 없이 사람을 믿는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용적인 훈련만을 받은 사람은 그 인간관계가 이용관계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사람도 불필요하면 헌 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일쑤입니다. 그렇다면 체문화권에서는 상대방에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는 일이 망가지고 소속된 단체의 기능이 마비되어도 체만을 강조한다면 이것도 용을 체로 잘못 아는 오류에 속합니다. 소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 능력으로 감당할수 있는 적절한 소임을 맡겨야 합니다. 적재적소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사랑이요 보살핌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체용의 논리를 가지고 실험하는 예를 한 가지만 더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남이 인신공격을 해오거나 또는 중상모략을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즉각 맞서 공격할 것인가? 아니면 묵묵히 그대로 얻어 맞고 있을것인가? 가령 친자식처럼 이끼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참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즉시 반격을 하면 일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처럼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관계에서는 충돌은 금물입니다.
그러므로 양보한다든가 또는 참는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용엔 용으로>라는 말은 주먹엔 주먹으로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상대방은 나를 용으로 대해도 나는 체로 대해야 합니다. 체로 대한다는 말은 즉시 체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체로 돌아간다는 말은 자기를 空化한다는 말입니다. 歸源이니 歸–心이니 또는 歸依佛이니 歸依三寶니 하는 말들이 모두 다 똑같은 말입니다. 상대방의 증오는 용이지만 나의 용서는 체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이란 내가 체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증오엔 증오> 즉 <용엔 용으로>라는 방식을 가지고서는 윤회만이 계속될 뿐 해결이 안난다는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내가 체로 돌아간다는 것이요, 맑스주의같으면 인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요, 노자같으면 자연으로 돌아감일 것이요, 장자같으면 무위자연일 것이요, 화두선에서는 이뭐꼬로 돌아 가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顔子의 不遠復공부, 마조의 평상심 공부, 지눌의 반조공부, 중용의 미발공부, 퇴계의 지경공부가 모두 다 똑같이 체로 돌아가는 공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동양의 체용사상은 마지막에 <정진>이라는 한 마디로 결론이 맺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중생수순원]의 후렴구로 이 글을 끝맺겠습니다.
나는
이처럼 중생을 따르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고
나의 중생을 따르는 일은 다함이 없어
생각생각 상속하여 끊임이 없고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으리.
1993년 7월 미주현대불교제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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