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라 (에스겔 24장 1절 – 27절) 24:1 제구년 시월 십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날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날 예루살렘에 핍근하였느니라 3 너는 이 패역한 족속에게 비유를 베풀어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한 가마를 걸라 4-5 건 후에 물을 붓고 양 떼에서 고른 것을 가지고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 모아 넣으며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지어다… 6 피 흘린 성읍,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 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진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일일이 꺼낼지어다… 11 가마가 빈 후에는 숯불 위에 놓아 뜨겁게 하며 그 가마의 놋을 달궈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하게 하라… 13 내가 너를 정하게 하나 네가 정하여지지 아니하니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 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6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17 말라 하신지라 18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20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1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 22 너희가 에스겔의 행한 바와 같이 행하여… 23 슬퍼하지도 아니하며 울지도 아니하되 죄악 중에 쇠패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하리라 24 이와 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25 인자야…27 이와 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개역) 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우월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개인적이든 민족적이든 문화적이든 경제적이든 종교적이든, 이것이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자부심과 자긍심의 근간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이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이러한 우월의식이 자만과 교만이 되거나 자기 자존심의 싸움이 될 때, 그것은 악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경멸하고 짓밟고 무시하며, 심지어는 죽이거나 그 모든 것을 빼앗아도 좋다고 하는 살인과 약탈을 합리화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도 그를 경멸하며 그의 생명을 더 이상 존엄하게 여기지 않는 심판의 자리에 서야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떠들고 심지어 종교지도자라 할지라도,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할 줄 모른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우월의식으로 주변 이방인들을 경멸하며, 심지어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이 가진 직분의 우월의식에 빠질 때 같은 동족의 아픔을 풀어주기보다 오히려 법을 남용하여 죽이고 빼앗은 유대 지도자들과 그에 맹종했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선언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자랑스럽게만 여길 뿐,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남유다 왕국과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최후로 녹슨 끓는 가마의 비유와 에스겔 선지자 부인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한 장례 절차의 비유를 통해서 선언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와 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24:24)고 말씀합니다. 이 “표징”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스겔을 “표징”으로 삼아서 에스겔처럼 살아가라는 당부를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그 환경과 시대 속에는 늘 악한 자의 표상으로서의 “표징”이 있고, 선한 자의 표상으로서의 “표징”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표상으로서의 “표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에서 “표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언합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2-14). 우리는 어떠한 “표징”이 되시겠습니까? 1. 녹슨 가마솥의 비유가 무엇을 뜻합니까? 그동안 이스라엘 민족 곧 남왕국 유다가 받을 멸망의 심판을 반복하여 말씀(4-24장)하셨던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 선언을 어떤 비유의 말씀으로 마무리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비유의 말씀을, “제 구년 시월 십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날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날 예루살렘에 핍근하였느니라.’”(24:1-2)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제 구년 시월 십일”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3차 공격을 받은 날이라는 뜻으로, 바벨론의 2차 침략(주전597년)으로 에스겔이 포로로 끌려온 지 9년 째 되는 해(주전588년)이자, 유다의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의해 세워진지 9년째 되는 해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열왕기 성경에서 “시드기야 구년 시월 십일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사면으로 토성을 쌓으매, 성이 시드기야 왕 십일 년까지 에워싸였더니, 그 사월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진하였고”(왕하25:1-3)라고 했던 사건입니다. “핍근”이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군대가 포위하여 18개월간에 걸쳐 압박함으로써, 성내 사람들이 심히 곤고한 지경에 빠지게 된 상황을 나타냅니다. 결국 에스겔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예루살렘 마지막 심판의 선언은, 남 왕국 유다가 예언대로 주전 586년에 망했다는 점에서, 망하기 18개월 전의 상황임을 나타냅니다. 유다 백성들은 망하기 직전까지 하나님의 계속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직면한 위기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직시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안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비유인 녹슨 끓는 가마솥의 비유가 어떻게 선언됩니까? “너는 이 패역한 족속에게 비유를 베풀어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한 가마를 걸라. 건 후에 물을 붓고, 양 떼에서 고른 것을 가지고 각을 뜨고, 그 넓적다리와 어깨고기의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 모아 넣으며, 고른 뼈를 가득히 담고, 그 뼈를 위하여 가마 밑에 나무를 쌓아 넣고 잘 삶되, 가마 속의 뼈가 무르도록 삶을지어다.”(24:3-5). 유다 백성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 곧 ‘선민’(選民)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패역한 족속”이라고 계속 호칭합니다. 유다 백성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예루살렘을 안전한 “가마”(11:3)에 있는 존재로 비유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모든 좋은 덩이를 그 가운데 모아 넣으며”라는 표현에, 좋은 기대감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끓는 가마”(렘1:13)로 비유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좋은 덩이”와 “고른 뼈”는, 유다의 왕과 귀족 같이 선택받은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부유한 재산가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바벨론 군대의 공격에 우선적으로 국가와 민족과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이들이 저질렀던 무책임한 죄악을 잔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의 비유입니다. 이들이 백성들에게 저지른 정치적 책임을 “그 피가 그 가운데 있음이여! 피를 땅에 쏟아서 티끌이 덮이게 하지 않고, 말간 반석 위에 두었도다. 내가 그 피를 말간 반석 위에 두고 덮이지 않게 함은, 분노를 발하여 보응하려 함이로라.”(24:7-8)고 하나님께서 밝힙니다.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며,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직분자들과 백성과 시민으로서의 합당한 삶은 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예루살렘을 ‘거룩한 도성’이라고 불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피 흘린 성읍, 녹슨 가마”로 호칭합니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피 흘린 성읍,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 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진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일일이 꺼낼지어다.”(24:6). 과거 승전국은 패전국 사람들을 “제비”를 뽑아서 10명에 1명씩만 죽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다 왕국이 당할 비참한 말로를,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일일이 꺼낼지어다.”라고 하심으로써, 몽땅 몰살시켜버리고 일부만 포로로 끌려갈 것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심판의 이유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삶과 생명을 존중하고 섬기기보다 짓밟고 빼앗았던 “피 흘린 성읍”이자, “그 속의 녹을 없이 하지 아니한” 곧 하나님의 회개 권고에도 자신들의 죄악을 돌이키지 아니한 죄악에 찌든 백성인 “녹슨 가마”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죽인 그 사람의 시신과 피를 덮어주는 최소한의 생명의 존엄성조차 무시하고, 죄 없는 사람의 “피를 땅에 쏟아서 티끌이 덮이게 하지 않”(24:7)게 했던 죄악의 책임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보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화 있을진저, 피를 흘린 성읍이여! 내가 또 나무 무더기를 크게 하리라. 나무를 많이 쌓고 불을 피워, 그 고기를 삶아 녹이고 국물을 졸이고 그 뼈를 태우고, 가마가 빈 후에는 숯불 위에 놓아 뜨겁게 하며, 그 가마의 놋을 달궈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하게 하라.”(24:9-11). 2. 에스겔 아내 장례에 대한 상징적 비유는? 끓는 녹슨 가마솥의 비유를 통해 예루살렘의 멸망을 마지막 기정사실화하신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당부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우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24:16-17). 에스겔 선지자에게 들려진 이 말씀은, 당연하게도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라는 것은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믿음을 가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예루살렘 도성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는 아주 당혹스런 충격적인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너무나 기가 막혀 슬퍼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에스겔도 아마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건이 에스겔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24:18).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있던 에스겔이 그곳에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아침에” 자신에게 어떤 슬픈 일을 당할지라도 슬퍼하지 말라고 했던 말씀을 전했는데, 그날 “저녁에” 너무나 갑작스럽게 에스겔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에스겔은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라는 것이,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아니라 자기 “아내”였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더 놀라운 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곧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서, 예루살렘 백성과 에스겔과 함께 포로로 끌려와있는 이들에게 나타내보이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참고 있는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조차 애도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이러한 에스겔의 모습을 포로로 끌려와있는 이들이 왜 이상하게 보지 않았겠습니까? 따라서 어떻게 질문했다고 합니까?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되는지, 너는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24:19). 그들은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 순간까지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예루살렘 곧 남유다 왕국의 몰락에 대한 예언의 경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단지, 하루속히 조국에 돌아갈 날만을 그들은 꿈꾸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저들의 질문 앞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답변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24:21).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로 생각했던 성전을, 저들은 단지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곧 자기 힘의 자랑으로 삼았으며, “너희 눈의 기쁨이요” 곧 그 웅장한 건물이 자기들 보기에 기쁠 뿐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곧 자기들에게 성전이 있다는 것을 단지 위로로 삼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 살아가고자 하는 어떠한 거룩한 마음도 없는 그 성전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방인들에 의해 무너지게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을 “내가 더럽힐 것이며”, 또한 예루살렘에 남겨진 하나님의 백성들인 “너희의 버려둔 자녀를 칼에 엎드러지게 할지라”고 하실 때,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겠습니까? 이러한 엄청난 상황 앞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가 에스겔의 행한 바와 같이 행하여, 입술을 가리우지 아니하며, 사람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채 발에 신을 신은 채로 두고, 슬퍼하지도 아니하며 울지도 아니하되, 죄악 중에 쇠패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하리라.”(24:22-23)고 말씀합니다. “에스겔의 행한 바와 같이”라는 말씀 속에, 사랑하는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그 아픔과 고통, 더구나 애도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찢어지는 마음을 저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하나님은 에스겔이 처한 고통과 그 고통에의 참여를 통해서, 함께 바벨론 포로로 와 있던 이들로 장차 직면할 조국의 멸망이라는 참담한 상황의 슬픔과 고통을 공감하게 하셨습니다. “쇠패”는 내적인 의지와 평강을 상실한 인격적 붕괴로, 예루살렘 도성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라는 참혹한 상황에 대한 멘탈의 붕괴입니다. “죄악 중에 쇠패하여 피차 바라보고 탄식하리라”(24:23)며, 망연자실한 고통의 절규만 있을 뿐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하나님의 탄식이 스며 나옵니다. 믿는다는 이들의 완고한 죄악과 심판을 어떻게 선언합니까? “너의 더러운 중에 음란이 하나이라. 내가 너를 정하게 하나 네가 정하여지지 아니하니,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은즉 그 일이 이룰지라.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며,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 그들이 네 모든 행위대로 너를 심문하리라.”(24:13-14). 3. 왜 에스겔로 표징이 되리라고 말씀합니까? 믿는다는 이들 곧 이스라엘의 죄악이 너무나 커서 죄악에 찌든 “녹슨 가마”로 비유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기에, 이방 민족인 바벨론을 통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몰락시키는 극단적인 심판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하나님의 탄식이 마지막 심판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없는 상황에서도 죄인을 용서하시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돌이키지도 아니하며, 아끼지도 아니하며, 뉘우치지도 아니하고 행하리니”(24:14)라는 선언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실로 안타까운 심정의 표현입니다. 자기 아내의 죽음과 이를 애도하지 못하는 말씀의 순종을 통해, 조국과 민족이 몰락하는 엄청난 재앙의 사건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상징하는 선지자 에스겔의 모습은,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 아닙니까? 한 가족이 당한 죽음의 슬픔도 이만큼 큰데, 한 민족의 존립 근거인 국가가 망하는 슬픔은 어떻겠습니까? 에스겔은 선지자로서 시대의 “표징”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면, 너희가 나를 주 여호와인 줄 알리라.”(24:24). 우리 일상의 삶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건을 통해서, 사회와 신앙 공동체 그리고 민족의 미래와 국가의 장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발견하는 이들이 복됩니다. 흔히들 복 받기만을 갈구할 뿐, 의외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 받을 순종의 행동은 잘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자기 가정의 고통스런 상황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민족을 향한 “표징”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인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도성 사람들의 죽음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주어질 그 충격의 여파가 어떠할지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어떻게 말씀합니까? “인자야! 내가 그 힘과 그 즐거워하는 영광과 그 눈의 기뻐하는 것과, 그 마음의 간절히 생각하는 자녀를 제하는 날, 곧 그 날에 도피한 자가 네게 나아와서 네 귀에 그 일을 들리지 아니하겠느냐?”(24:25-26). 에스겔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대언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예루살렘 도성이 함락되어 훼파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 위용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뻐하던 성전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또 간절히 생각하던 조국에 남아있는 언약의 백성들이 대부분 몰살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누군가 와서 바벨론에 있는 에스겔에게 전해 줄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때 에스겔에게 하셨던 모든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에스겔 선지자가 전할 메시지가, 심판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리라는 것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24:27).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와 남유다 왕국의 패망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선지자로 “그들에게 표징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 단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며, 패망을 통해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확증과, 이스라엘로 오히려 새로운 전환의 시작 자리에 서게 하시는 사건이 되리라는 점에서, 그는 그 시대와 민족의 “표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신 것을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표징”이 되게 하고자 하심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부패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 선언 속에, 단지 파멸의 선언이 아니라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단하여 세우고자 하시는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 어떻게 담겨있습니까? “나무를 많이 쌓고 불을 피워, 그 고기를 삶아 녹이고 국물을 졸이고 그 뼈를 태우고, 가마가 빈 후에는 숯불 위에 놓아 뜨겁게 하며 그 가마의 놋을 달궈서,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하게 하라.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곤비하나, 많은 녹이 그 속에서 벗어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도다.”(24:10-12). “나무를 많이 쌓고 불을 피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엄청난 군대를 동원하여 잔혹한 침략으로 예루살렘을 초토화하실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이 성읍이 수고하므로 스스로 곤비하나”라는 말은, 온갖 인간적 방법과 수단을 강구해도 피곤할 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려고 하지 않는 불신앙과 불순종의 자세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룩한 백성들의 참담한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하게” 곧 죄악을 정결하게 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녹이 그 속에서 벗어지지 아니하며, 불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할 것을 아셨지만, 에스겔 선지자로 “표징”을 삼으신 하나님께서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류 구원의 “표징”을 삼으실 소망을 계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된 우리 역시, 말씀의 “표징”으로서 죄악과 탐욕과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거룩한 자녀된 신앙적 삶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시렵니까?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