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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갈림길에서
출 13: 17-22
우리 모두는 살면서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가 있게 됩니다.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할 때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 대학 병원의 원목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가은교회로 부임하여 일반 목회를 할 것이냐?를 두고 갈림길에서 한동안 방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원목으로 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 CPE과정(임상목회학)에 등록해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리고 150 배드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는 익산의 한 준종합 병원에서 공식적인 원목은 아니었지만 병원 선교부 목사로서 병상의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2년 동안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17살 때 허리를 다치는 병을 얻어서 오랫동안 투병을 한 경험이 있었고 그때 저는 병중에 하나님께 헌신하여서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환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착과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정이나 병원으로 심방 가서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자꾸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마음에 감동이 됩니다. 환자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고 꼭 이 병석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깨달아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병중에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환자를 돌보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일반 목회를 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갈 때에 결심하기를 꼭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졸업을 한 후에 오직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교직 과목을 처음부터 이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회에 대한 철이 들면서 목회가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가를 알고 부터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정말로 제가 이 길을 걸어갈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까?]하고 하나님께 많이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근에 저에게 깨우쳐 주시기를 [목회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시고 앞서신다. 너는 하나님의 뒤를 따라 가는 목회를 해라]하는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제 힘으로만 하려고 할 때 힘들고 지치는 것을 느꼈는데 성령의 도움으로 목회를 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한결 목회의 짐이 가벼워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제가 가은교회로 올 당시에는 두 가지의 갈림길에서 저는 오랜 시간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쪽 길은 편한 길이고 또 한 쪽 길은 좀더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병원의 원목은 일단 편하고 보수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남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특히 환자들은 저에게 남다른 의미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일반 목회의 길은 험하고 두려운 곳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뚜렷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교회현실을 감안할 때 그렇지를 못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저에게 참고가 되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거창 고등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직업을 선택할 때 가르쳐 주는 [직업10 계명]이었습니다. 직업 10계명은 거창고등학교 출신에게 직업 선택의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월급은 적은 쪽을 택하라. 둘째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셋째 승진의 기회가 없는 곳으로 가라.
넷째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은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째 앞다투어 모이는 곳은 피하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째, 장래성이 전혀 없는 곳, 그러나 기쁨으로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라. 일곱째 사회적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말고 존경의 대상이 되라. 여덟째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째, 주위사람들, 가족이나 배우자가 반대하면 틀림없다. 열째,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가라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갈림길에서 갈 길이 보이지 않아 방황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쪽의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이 매우 달라지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또 다시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평생을 두고 직장에 몸바쳐 일해왔는데 구조 조정에 밀려서 직장을 떠나면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방황하게 됩니다.
결혼생활을 해오면서 이제까지는 잘 참아왔는데 더 이상은 같이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워서 이혼을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기도 합니다.
입시가 다가 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이러한 계통인데 가정 형편도 그렇고, 실력도 그렇고 4년제 대학을 가고 싶지만 부모님은 전문학교라도 가라고 하는 강요 속에서 나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내 주위에는 남자들은 많이 있는 것 같은데 막상 결혼을 하려고 보니까 내 입맛에 꼭 맞는 남자가 없습니다. 돈이 있고 얼굴이 괜찮다 하면 신앙이 없거나 인간성이 엉망이고, 교회를 잘 다니고 착실하다가 싶으면 너무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것 같아서 결혼의 길목에서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잘못된 습관 때문에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끊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냥 신앙생활도 적당히 하고 세상 재미도 적당히 보면서 살아갈까 하는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두 가지의 길 가운데 쉽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손해보지 않는 길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기준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두 가지의 갈림길에서 무엇보다도 신앙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두 가지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영국정부와 국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영국 왕실과 윈스턴 처칠 수상은 전국 교회에 어느 날 12시를 기해 교회당 종소리를 울려 주도록 요청했습니다. 이 종소리는 '희망의 종소리'라고 명명되었습니다. 이 종이 울려 퍼질 때 온 영국 국민들이 존경하는 윌리엄 탬플 주교가 방송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입니다. 대영 제국의 국민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 보십시다] 이 방송을 들은 전국의 영국 국민들은 2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전쟁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인도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갈림길에 서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향해 갈 때에 많은 갈림길을 만났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 땅에 이르는 길은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도 있었고, 아주 멀리 돌아서 가는 광야 길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운 길은 블레셋을 통과하는 길이었는데 블레셋을 통과하려면 불레셋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스라엘이 전쟁을 경험하게 되면 모두 아우성을 치면서 애굽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멀고 험한 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광야의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입니다. 광야 길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광야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광야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광야가 없으니 광야를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광야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낮에는 광야가 펄펄 끓게됩니다. 양철 판에다가 계란을 깨서 올려놓으면 계란이 익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 찌는 듯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을 보낸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평소에는 [목회가 늘 힘들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했답니다. 그런데 성지순례를 가서 광야 길을 걸어 보고 나서 하나님께 회개했답니다. 모세는 이 고통스러운 땅을 40년 동안이나 걸어갔는데 나는 목회를 하면서 [왜 이렇게 하나님께 불평으로 가득차 있을까?] 하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햇빛이 내리쬐는 광야는 죽음의 장소인 것입니다.
밤에는 또 어떻습니까?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집니다. 밤이 되면 광야는 갑자기 너무나 추운 곳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겉옷을 돌려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해가 떨어지면 광야가 추운 곳으로 변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빚을 졌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겉옷을 돌려주라고 율법으로 정한 것입니다. 밤이 되면 광야는 아주 추운 곳으로 변하기 때문에 만약에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게 되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라도 한 마리의 양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만약에 해가 지기 전에 그 양을 찾지 못하면 그 양은 얼어죽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야. 무서운 갈림길입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갈림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등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이 되어 주셔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광야의 불볕 더위를 막아주셨습니다. 한여름 불볕 더위에 구름이 햇볕을 가려주면 얼마나 시원합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광야 한복판을 지나갈 때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의 가는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햇빛이 내려 쪼일 때에는 양산으로 햇빛을 가려도 시원함을 느끼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 빛을 구름 기둥으로 가려주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 길에서 타죽지 않도록 그들의 길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밤이 되면 광야의 기온이 떨어져서 온통 세상이 얼어붙는 추위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 ! 믿습니까? 저는 어릴 때 개울에서 놀다가 물에 빠지면 아이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거기에 둘러앉아 불을 쪼일 때의 따뜻함을 기억합니다. 얼마나 따뜻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 밤이 되면 찾아오는 추위를 하나님의 불기둥으로 지켜주신 것입니다. 따뜻한 모닥불처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의 추위를 녹여주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찌는 듯한 인생의 더위에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어죽을 것 같은 인생의 추위 속에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갈 길을 몰라 방황하며 사막의 한 복판을 헤메고 있는나그네처럼 목적 없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마치 우주의 공간 속을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미아처럼 홀 로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갔는데 천국 문 앞에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접을 받고 기뻐하면서 뒤를 돌아다보니 자기가 걸어온 길이 쭉 보였습니다. 그런데 혼자 걸어왔던 인생인줄 알았는데 혼자 고독 속에서 매일 살아왔는 줄 알았는데 자기 인생 길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나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내 곁에 나와 함께 걸어왔던 저 발자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
[사랑하는 아들아 네 인생을 너 혼자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너무나도 기뻐하고 행복할 때에 나는 언제나 네 곁에서 너와 함께 기뻐했단다. 너와 함께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왔단다. 너 혼자 울며 고독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너 혼자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한 번도 네 곁을 떠난 적이 없단다. 네가 인생의 문제로 울며 갈곳을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너를 떠난 적이 없단다. 네가 울 때 나도 같이 울었고 네가 힘들어 할 때 나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그런데요 주님! 제가 지나온 길을 보니까 정말로 처절하고 외롭고 고독하고 힘들었던 순간에는 발자국이 하나뿐이잖아요. 저것 보세요. 주님! 주님이 내 곁에 계실 때는 승리할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너무나 힘들었던 그 순간. 정말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뛰어내리고 싶었던 그 순간. 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하고 싶었던 그 순간. 울며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알지 못했던 그 순간. 헝클어진 머리채를 부여잡고 방바닥을 치면서 통곡을 하던 그 순간. 너무나 외로워서 고독해서 몸부림했던 그 순간.
주님께서 나를 혼자 내버려두시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저기 지나온 자국을 보니 발자국이 하나 뿐이 없지 않습니까? 주님! ]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그것은 네 발자국이 아니란다. 나의 발자국이란다. 너 혼자 걸을 수 없기에, 너 혼자 가야할 방향을 찾지 못하였기에, 너 혼자 일어서서 걸어갈 힘도 없었기에, 그때 내가 너를 나의 등에 업고 걸었노라. 나는 너를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느니라]
우리는 언제나 내 혼자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생각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잊고 살아왔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당신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을 선택하여 갈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셨습니다. 당신이 인생의 문제로 목놓아 운 적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소리 없는 통곡으로 목놓아 함께 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고통을 당하는 암흑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시편 137편에서는 그 슬픔을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바벨론 포로시기는 눈물과 통곡의 세월이었습니다. 눈물과 고통으로 가득찬 통한의 세월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힘입어 새 희망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민족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라는 예언자를 보냈습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나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하리라. 불 속을 지나갈 때에도 네가 타지 않토록 너를 지켜줄 것이니라] (사 43: 1-2)
여러분 무엇 때문에 방황하십니까? 어떤 문제 때문에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까? 어떤 문제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까?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늘 방황하십니까? 그 원인을 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의 신앙적인 문제와 죄의 문제로부터 시작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하나씩 풀려나가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적인 논리로 풀어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방황하는 것입니다. 신앙 가운데 우뚝 바로 서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인은 신앙의 문제로 경제적인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관계의 문제로 갈림길에 서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 원인은 늘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한 당신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갈림길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죄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죄의 문제를 올바로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 완전히 회개하고 돌아오면 인생의 방황은 멈추게 됩니다. 왜 다른 곳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까? 왜 하나님의 힘으로 문제의 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까? 그렇게 하는 한 우리는 갈림길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까?
결혼의 문제로 고민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입시의 문제 때문에 인생의 갈림길에 서서 방황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입니다. 잘못된 습관 때문에 방황은 멈추지를 않고 계속 마음에 갈등을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며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인생의 문제로 방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도 당신 편이 되어 주십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과감하게 세상적인 것들을 버리고, 정욕적인 것들을 거부하고, 물질적인 유혹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을 중심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쉬운 길을 버리고 지금은 당장 십자가를 지는 일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당장 눈앞에 이익이 되는 길을 선택하지 말고 먼 훗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신앙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보면 신앙 가운데 바로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늘 축복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갈림길에서 세상을 선택할 것이냐? 하나님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셔서 여러분을 인생의 갈림길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앞서가시는 하나님
출 13: 17-22
우리는 종종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이 진행이 되어져 나갈 때에 그 일에 인하여 투정을 부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생각과 나의 판단과 다르다는 것 때문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났습니다. 때로는 이런 일이 있습니다. 교회나 학교를 가는 길이 좀더 빠른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늘 그 길로 다니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나의 생각에는 그 길로 간다면 참으로 빠를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나을것도 같은데 아버지는 꼭 다른 길을 내어 주면서 길로는 다니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길은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그 길은 엄청난 힘을 받아서인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그 길은 폐쇄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리, 즉 하나님의 간섭함으로 인도되어지는 하나님의 영역 안에 살고 있다는 특권을 누리고 있음에도 때때로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투정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금은 이해 할 수 없어도, 지금은 인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어진다고 할지라도 남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을 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때때로 넘어질 때마다 결국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줄을 믿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고전10:13절을 보면 성령님은 바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고를 하고 계십니다. "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숙곳을 출발하여 가나안땅으로 가기를 시작을 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길로 가야하는 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야 할 길을 선택하셔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의 신앙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향하는 그 길을 어떻게 인도를 하셨을까?
그 길의 인도하심은 인간의 생각을 뒤엎는 제시였던 것입니다. 물론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를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가장 선택하기 쉬운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 길은 [반달길]이라고도 하고 [왕의 길]이라고도 하는 길입니다. 옛날에는 대상들이 다녔던 길이라고 하여서 [카라반 길]이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이 길을 당연히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직통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 길을 가면 1주일이면 넉넉히 가나안을 향하여 갈 수 있는 아주 쉽고 빠른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 길을 선택을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17절을 함께 봅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불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 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으니"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인식 속에 있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왕에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당연히 그 길, 그 빠르고 속히 갈수 잇는 그 길을 선택을 하셨을텐데 하나님은 전혀 다른 길을 선택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이렇게 말을 하곤 합니다.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은 왜 그리도 복잡한 길을 만들어 놓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꼭 예수의 피를 의지하여야 구원을 이룰 수 있는가? 하나님은 말씀 하나로 세상을 만드신 분이신데 십자가의 길을 제시하신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하여는 믿음의 길- 넓은 길이 아니라 그 좁은 길-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부인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을 걸을 때에야 가나안이 나옵니다. 구원의 도성에 도착합니다.
만약에 구원이 그리 쉽게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값이 없는 길일 것입니다. 값진 것은 댓가를 지불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얻어진 것과 땀을 흘려서 얻어진 것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저는 우리교인들이 교회의 역사를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람들을 칭찬을 마음껏 해주자는 의도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교회를 세우기 위한 과거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겪었는가를 보면서 오늘의 성도들이 가야 할 길을 불평하지 말고 걷자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나간 20년 동안 교회를 위하여 수고와 눈물을 아끼지 않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는 이 교회를 위하여 눈물과 아픔과 염려와 걱정을 다 동원하여 가면서 이 교회를 세워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인정을 하지 않으면 그냥 쉽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애정을 갖고 수고한 이들을 위하여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서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는 묻지 말아요, 과거를 왜 묻습니까? 오늘에 충실하면 돼지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값을 평범하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수고와 눈물을 볼 수 있을 때에 이 교회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사랑합니까? 교회를 사랑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지불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날의 지구상의 여러 교회에게 각각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부여를 하셨습니다. 그 교회의 나름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교회는 특별히 하나님은 장애인을 위하여 조금은 열린 교회를 만들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애인을 위하여 교회가 힘을 쓸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다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교회에 맡겨주셨다고 하는 일이라고 인정이 되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인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교회의 교인으로 등록이 되셨으면 장애우 사역을 위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고 함께 기도하여 후원하자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주신 의무금을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신앙의 확인입니다.
장애우를 위하여 후원헌금을 내는 것은 내가 이 교회의 교우임을 확인하는 증거입니다. 이 부분에 늘 멀리에만 있으면 애정이 멀어집니다. 신앙이 그렇게 곤고하여 보입니다.
모든 일에 기쁨으로 참여를 하십시오. 내 물질과 내 사랑이 들어 있는 사역이기에 감사와 감격으로 이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힘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을 안 드리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 일을 감사함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해가 안되어도 순종을 하면서 참여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사역입니다.
우리교회의 등록을 하는 많은 교우들은 이 장애우 사역에 감사를 하여서 그리고 기쁨으로 참여를 하기 위하여 때로는, 나의 남은 삶은 장애우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등록을 하는 성도가 있다는 사실도 인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웃들에게도 소망을 전하고 있는 교회가 되는 줄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일전에 교회 가까이 사는 이웃이 저에게 이런 항의성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의 성도들의 차량 때문에 교회 주변의 사람들이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상회에서 그들이 이야기를 하기를 [교회에 정식으로 항의를 하자 이것이 해결되어지는 것이다] 라고 분분히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답니다. '이 교회는 좋은 일을 하는 교회이니 우리가 참자'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감사하여서 그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주일에 이런 불편을 드려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가 교회의 아래에 교회를 위하여 주차장을 크지는 않지만 준비를 하였습니다. 주일과 수요일에는 우리가 사용을 합니다. 그리고 평일에는 마을 사람들이 사용을 하였으면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보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조차도 교회의 이런 장애우 사역을 귀하게 여기는 데 우리교회의 성도들은 얼마나 관심과 애정을 갖고 참여를 하고 있을까?
물론 교회의 이런 장애우 사역이 교회존재의 다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은 이 사역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한 신앙의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해가 안되어도 감사를 하십시오. 해석이 안되어도 기도 중에 해석을 하시기 바랍니다. 인정이 안되어도 내가 교회에 등록을 한 이상은 함께 참여하려는 신앙적인 의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일에는 참으로 힘든 사역인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것 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쉽고 편한 길로 인도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길의 미래를 하나님은 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편한 길인 대신에 그 길에는 항상 무서운 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편한 길을 선택을 한다면 아마도 적과 싸워야하는 곤란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하나님의 간섭을 배제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 길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그 길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이 난무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여나 하나님의 도움이 그리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인간적인 탁상공론이 난무 할 것입니다. 기도보다는 인간적인 경험의 소리가 더 클 것입니다. 아마도 말씀에 입각한 이야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상식에 의한 판단이 하나님의 계획보다 앞설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양을 이미 그려주고 잇습니다.
17절하반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염려는 이곳에 있습니다. 구원이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이 될까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다가 혹여나 불레셋 사람들이 진치고 있다가 그들의 가는 길에 공격을 하여와서 변변치 않은 노예들의 소유물이라도 빼앗아 간다던지 아니면 죽음이라도 보는 경우에는 그들의 이구동성으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 것이기에 하나님은 그 편한 길을 선택을 하시지 않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체질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이나 노예로 있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한번도 전쟁을 하여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들이 한번도 싸움을 하여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항오를 지어서 공격을 하여오는 원주민들의 전쟁을 그들이 만난다면 그들은 아마도 혼비백산하여 애굽으로 다 도망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좋은 길, 편한 길, 아는 길로 이끄시지 않고 그들을 전혀 모르는 길로 인도를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깊은 의미를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체질을 이미 아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뻔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만나면 어떤 행동이 나올지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처 할 수 있는 힘, 지혜, 역량이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어려움이 오면 견디어 나가보자는 욕심이나 모양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찾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은 원망이나 불평 일 것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어떤 모양을 들러날지를 이미 알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을 하고 있는 그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 어떤 모양을 나타낼지를 알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 자신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다 알고 있잖아요. 누가 의롭습니까? 누가 완전합니까? 누가 죄가 없습니까? 우리의 체질을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가는 길에 종종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을 때마다 주님을 붙잡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주님의 탁월하신 뜻과 섭리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레셋 백성과 싸울만한 능력도 지혜도 없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은 고도로 훈련을 받은 군대를 소유한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진군을 하면서 가장 많이 고난을 당한 백성이 불레셋 입니다. 그들은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을 받은 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손이 그들을 내어쫓기까지는 그들을 한번도 이긴 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모양을 이미 아시고 계시기에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광야 길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히12:9-10에 보면 "우리의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이해 할 수 없는 고난은 징계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참으로 우리가 해석 할 수 없는 주님의 계획이 있음을 인정을 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하고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감싸고 계십니다. 이해 할 수 없습니까? 기도의 자리로 만들어 가십시오. 거기에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섭리가 들려 질 것입니다.
둘째는 이 계획들은 철저한 주님의 관여하심을 증거하는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 길을 걸어 갈 때에 하나님은 어떤 모양을 가지고 계실까? 처음으로 다니는 길이기에 아마도 하나님은 얼마나 관여하실까? 상상이나 해 보십니까?
그 광야를 걷는 하나님의 걸음의 속도를 재신 분이 계십니다. 최효섭 목사님은 하나님의 걸음걸이를 3마일이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 속도는 사람의 걸음속도라는 것입니다. 시속4.8Km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산을 하면서 하나님은 정확히 그들과 함께 걷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걸으시면서 하나님은 얼마나 노심초사하였을까?
우리가 이미 출애굽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관여하신 사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위기와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은 거기 계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홍해에도, 물 없는 사막에도, 흑암이 있는 깊은 골짜기에도, 먹을 것 없는 황량한 들판에도 하나님은 거기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저와 여러분 곁에 참으로 가까이 계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장성한 반열에 설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인도를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오늘의 구약성경에는 밝혀주고 있습니다. 20-22까지 함께 읽어보도록 합니다.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을 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들 앞에 행하사" 라는 단어와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전적인 참여를 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를 하시는 불기둥이 어떻게 생겼고 구름기둥이 어떻게 생겼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기 위하여 그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라도 백성들을 위하여는 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광야 길로 접어드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인도를 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우리는 기억을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기가 막힐 정도의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를 하시는 줄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광야라고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라고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가 아는 길로 가겠다고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관여 하셔서 우리를 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그분의 지시나 그분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면 그들은 광야에 엎드려 졌을 것입니다.
이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그 하나님을 오직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결국 앞서시겠다는 의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은총이 나보다 앞서가시는 축복으로 보여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비록 광야 길로 접어든다고 할지라도 염려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만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바라보는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믿음입니다. 그 길이 광야라 할지라도 이제 그들은 믿음만 갖고 있으면 됩니다.
어떤 믿음인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요셉]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애굽 땅을 떠나는 날 요셉의 믿음을 가지고 가자는 명령을 합니다. 상식에 벗어난 행동같아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의 뼈도 아니고 400년 전에 죽은 그들의 조상 요셉의 뼈를 무엇 때문에 다른 것들은 젖혀두고 들고 갔을까?
18절 하반절부터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가라 하였음이었더라"
항오를 지어서 숨가쁘게 애굽을 나오는 날 모세는 요셉의 해골을 취하여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요셉의 유언이기도 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공통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당대에 애굽의 바로라는 왕에게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아마도 모르긴 하지만 애굽에서는 그의 비석이나 공로로 인한 기념비가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요셉의 아버지를 애굽에서 미라로 만들기 위하여는 40일이 걸렸고 그를 위하여는 애굽에서는 명하기를 70일을 곡하라 하였다는 것입니다.(창501-3).
아마도 요셉은 창50:26절을 보면 그를 미라로 만들기 위하여 40일은 훨씬 지났을 테고 그 아버지 야곱보다는 70일을 넘게 온 애굽의 국민이 애곡을 하였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애굽에서 그만큼 성공한 요셉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언하기를 [애굽은 애굽]이다. 애굽은 [이방인의 땅이다.] 애굽은 영원한 우리의 살 땅이 아니다.
명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런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귀영화는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인 것 만큼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영원히 소유 할 수 없음을 요셉은 선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늘 중요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을 소유한다면 모든 것을 소유함을 요셉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가나안땅을 향하여 나갈 때에는 나의 해골을 메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여 봅니다.
오늘의 나의 자리는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주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요,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이 거친 인생이라는 광야를 걷고 있는가?
그리고 [그분을 마지막까지 신뢰하겠다는 믿음의 증거]를 메고 가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믿음은 돈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유산은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을 가지고 달음질하는 광야! 결국은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거두는 승리의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 기둥
(출애굽기 13장 17-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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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노예제도를 둔 나라들은 세계일류 초강대국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집트는 노예들과 평민들을 강제 동원해서 피라미드와 아부심벨 신전 같은 인류 역사에 남을 위대한 문화유산을 건설했습니다. 로마제국은 그야말로 노예제도로 번성한 나라였습니다. 광산, 농장, 시장, 가정 등지에서 엄청난 숫자의 노예가 있었는데, 로마제국 최대 번성기에는 제국 내 전체 인구의 1/5이 노예였습니다.
사람들을 매매의 수단으로 취급했던 당시에 자칭 문명 선진국이라는 사람들은 남미로, 아프리카로 다니면서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사냥을 다녔습니다. 원주민들을 개나 소와 같이 쇠사슬로 묶어서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배 밑바닥에 가두고는, 죽으면 바다에 버리고 살아남으면 노예시장에서 매매했습니다. 이들에게 죄의식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누가 더 많이 노예를 데려오는가 하고 경쟁을 했습니다. ‘흑인노예’들의 흑 역사도 있습니다. ‘쿤타킨테’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80년대 중반에,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흑인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소설이 영화화 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뿌리』의 주인공 이름이 ‘쿤타킨테’입니다. 이 영화 이후 ‘쿤타킨테’는 흑인 노예의 대명사처럼 불렸습니다.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은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중화사상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화인, 곧 중국인만이 우월하다는 의식을 일컫는 말인데, 중화사상에 의하면 중국인을 제외한 모든 주변 국가들은 다 오랑캐라고 불렀습니다. 동쪽에 있는 오랑캐를 동이(우리나라), 서쪽에 있는 이민족을 서융, 남쪽에 있는 야만족을 남만, 북쪽에 있는 도적떼들을 북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신들만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오만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카스트 제도가 남아있어서, 사람이 계급으로 나뉘어서 차별대우를 받습니다. 최하의 신분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아예 접촉하지 말아야 될 사람들이라고 해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이라고 불립니다. 이들은 인도 전체 인구의 15%나 되지만, 수천 년 동안이나 직업이나, 거주지역, 그리고 결혼 등에서 인간이하의 모욕과 차별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노예제도의 역사를 보면, “사람이 가장 무서운 동물이다”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성경에서도 인종차별은 매우 심했습니다. 강자의 논리로, 약자는 냄새나는 쓰레기 집단으로 취급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히브리 민족’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히브리’라는 말은 무시하고 경멸하는 말로, 오랑캐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당시 문명국가인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국가들이 잡족이나 떠돌이 민족들을 멸시해서 부르는 말이 ‘히브리’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안정된 사회를 이루지 못하는 평화 교란자들, 무법자, 범법자, 용병, 노예, 반란자 들을 통칭해서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모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천대를 받는 집단으로, 이른바 축에도 끼지 못하는 신세였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하신 가나안 땅에서 지내기는 하였지만, 안정된 정착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이리 저리로 이동하며 지냈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과 그의 자녀들, 70명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430년을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처음 잠간은 요셉 총리 덕분에 기름진 땅에서 거주하며 지낼 수 이었습니다. 좋은 시절도 잠깐, 애굽의 바로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구가 늘어나자 이를 두려워 한 나머지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 평민에서 노예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벽돌 굽기와 밭일 등을 매우 엄하게 시켰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매우 힘겹고 고달 펐습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성을 건축하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자 그들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크나큰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들 민족을 이끌어 가신다는 약속 하나만을 믿고,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으며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예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이 약속을 잊지 않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를 토하는 기도를 들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장 24-25절에,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명령하시면서 인도하는 장면입니다. 당시의 세 가지 명령과 상황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선포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직진하라면 직진하고, 유턴 하라면 뒤 돌아서 가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량도, 물도, 다 부족하고, 잠자리까지도 심하게 불편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에 최단 거리로 도착할 길을 찾아서 그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 정석입니다. 가나안 땅은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아주 빨리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호렙산(시내산)에서 세일산을 거쳐 가나안 땅의 국경인 가데스 바네아 까지 열 하룻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룻길은 8km이므로 열 하룻길은 352km입니다. 이 거리가 가장 단거리 코스였고, 만약 이 길로 갔다면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가축들이 이동하는 것을 감안한다고 하여도 넉넉잡고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이 한 달쯤 걸려서 가나안 땅에 도착 했을 것입니다. 해안도로는 광야의 길 보다는 비교적 사람이 이동하기 쉽고 단거리 코스였기 때문에, 만약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으셨으면, 모세도 아마 이 길로 갔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직선코스로 가지 말고 돌아서 가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육지가 아닌 바다 쪽으로 방향을 잡으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17절에서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오합지졸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턱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가 정예 군대인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을 하면 백전백패, 전멸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로 다시 노예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어설프게 행동해서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몰살당하게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섣불리 서둘러서 일을 그르치지 않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도록 끝까지 약속을 지켜 주시려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준비 되지 않은 노예근성에 사로 잡힌 사람들입니다. 독립심도 없고, 공동체 의식도 없고, 지도자의 말에 재빨리 반응 하여 눈치껏 행동할 줄도 모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정복하고 다스릴 여력이 없습니다. 어설픈 사람은 현실이 어려우면 자꾸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포기하는 것을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황당하게 들리는 명령은 우습게 생각하고 순종하지 않으려 합니다. 앞 뒤 안 가리고 직진만 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턴하여 돌아가라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기는 싸움을 하려고 장기전을 준비하게 합니다.
얼마 전에 세기의 대결이라는 복싱 시합이 있었습니다. 플로이드 메이웨더 라는 미국선수와 매니 파퀴아오 라는 필리핀 선수의 시합이었습니다. 두 선수의 대전료가 수 천 억 원이나 되었다고 해서 화제였습니다. 메이웨더는 전형적인 아웃복서로 무패 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파퀴아오는 동양인으로는 특이하게 전형적인 인파이터 선수로 무려 8체급을 석권한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결과는 메이웨더의 판정승으로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메이웨더가 피하기만 하다가 돈만 가져갔다고 비난했습니다. 메이웨더는 재미없는 시합을 했을지언정, 지는 경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어찌되었든 그는 이겼고, 무패 선수, 무패 챔피언으로 은퇴를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메이웨더 같은 스타일의 선수는 좋아 하지 않습니다. 화끈하게 경기하는 선수들이 좋습니다. 한국 복싱도 절정의 인기가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저의 기억으로는 아마 장정구 선수나, 유명우 선수 시절이 그 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갑자기 권투 이야기를 한 것은, 아웃복싱을 하는 사람은 카운터펀치를 날리려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12회, 아니면 15회가 진행 될 동안 점수로 이겨도 좋고, ko로 이겨도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인파이터 들은 한 방 만을 노리고 저돌적으로 직진만 합니다. 대개 보면 아웃복서들이 ko나 판정으로나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서고, 돌아 서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승률도 높습니다. 결론은 이기는 것이 강한자라는 상식적인 논리를 말씀 드리려 합니다. 성경도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사람이 강한자요 이긴자요 승리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설픈데 이기지도 못하는 유혹의 자리에 덜커덕 나아가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를 주시기 원하는데 10%만 얻고도 좋아라 하고 나머지 90%는 없는 것처럼 포기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막 권투 도장을 찾은 신인 권투선수가 챔피언과 시합을 붙여달라고 떼를 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시키는 일도 제대로 잘 해내지 못하는 신입 사원이 중요한 회사의 경리업무를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장사 경험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 비싸고 화려하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큰 사업에 투자하려고 준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경우들이라면 결과는 뻔합니다. 망신당하고 창피당하고, 크게 손해를 봅니다. 자신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가정과 공동체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힐 것입니다.
하나님의 걱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다 취하고, 다 누리고, 완벽한 승리의 자리에 올라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준비될 때 까지는 돌아가야 합니다. 준비하여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당장 결과를 취하여 판을 깨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로만 간다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하나님이 주시고자 약속하신 모든 풍요와 모든 평안과 모든 기쁨을 다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고백합니다. 제가 고집이 쎄 보입니까? 저 고집 셉니다. 한 고집합니다. 고집 부리다가 하나님 한 테 크게 혼나 보니, 이제는 빨리 고집 꺾는 것이 덜 맞는 길임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항복하십시오. 주님 앞에 우리가 꺾여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직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진해서 사고 나지 말고, 돌아가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길을 알려 주시십니다. “턴 하라, 돌아가라”고 말씀 하실 때, 얼른 듣고 그대로 따르십시오. 우리 모두가, 내 인생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으로, 땅이 아닌 바다로 향하여 나아가는 순종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명예보다는 약속을 지켜라!”말씀 하십니다.
19절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요셉은 생존 당시 최 강대국의 총리로서 부와 명예를 다 얻었습니다. 죽은 후에 그의 시신은 크고 화려한 무덤에 있었습니다. 애굽의 풍습대로 했다면, 요셉의 시체는 미이라로 만들어져서 영원히 보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애굽 역사에 흉년으로 인한 기근을 대처하고 나라를 구한 위대한 총리로 기록되었고,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명예를 다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자신의 형들이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렸던, 기억하기조차 싫어할 것 같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요셉은 120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맹세시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러분을 돌아보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제 뼈를 이곳에서 갖고 나가 주십시오.”(우리말성경)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살아서가 아니면, 죽은 후에 유골이라도 가기를 강력하게 바라면서, 유언을 남긴 것입니다.
왜 그렇게 요셉은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기를 갈망했을까요? 창세기 2장 23절에서 아담은 하나님이 여자(하와)를 만드시고 자기에게로 이끌어 오자,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이 살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뼈’ 라는 말은 자기 자체이며 바탕이 되는 ‘본질(Essence)’을 의미합니다. 요셉의 유언 중에 ‘뼈’라는 말이 창세기에서 아담이 말한 ‘뼈’와 동일한 말로 ‘본질(Essence)’을 말합니다. 요셉은 비록 애굽에서 신하로 생을 마감 하지만 자신의 몸과 영혼, 즉 자신의 본질, 본체는 영원히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 되는 것을 죽어서라도 목격하고 싶어 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명예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을 더 신뢰했습니다. 자신의 실리와 부요함과 권세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성취를 고대하고 또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살아있을 때 비록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의 성취는 목격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그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요셉의 굳건한 믿음은, 결국에는 그가 죽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취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조 있고, 아름다운 품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생들 끼리 다니다가 화려한 불빛이나 조명이 있는 동네를 지나면, “와! 애굽이다!, 애굽!” 이렇게 말합니다. 그만큼 화려하고 유혹적인 도시라는 말입니다. 요셉 당시 애굽의 도시들도 정말 화려하고 풍요로웠을 것입니다. 그런 초강대국의 총리로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아니하고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죽어서도 그 약속을 지켜 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잡혀 왔을 때도 낙심 하지 않았습니다. 모함에 빠져 감옥에 있을 때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팔았던 형들과 상봉 했을 때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었어도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에게 보복을 하지 않고 용서를 해 주었습니다.
요셉의 이러한 사랑과 용서의 마음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이겠습니까? 창세기 39장에는 노예로 팔려간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범사에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지켜주셨고, 요셉은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들고 있음으로 인해서, 그가 살아서는 범사에 형통함으로 큰 복을 받았고, 죽어서는 모든 명예를 다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지키고 따르는 강건한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요셉이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하나님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요셉의 그 충성심과 믿음을 잘 본받아서 주어진 사명들을 잘 감당했습니다.
요셉의 삶과 우리의 현실을 비교해 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배신하거나 모함하면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화를 주체하지 못해 화병이 나고 앓아 눕습니다. 내가 부요해지고, 하는 일 들이 술술 잘 풀리고, 건강하게 지내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해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감사함은 고사하고 예배 생활조차 제대로 해 나가지 못합니다. 나에게 불편함과 실망을 안겨다준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무시하고 상대하기 귀찮아합니다. 나에게 금전적인 손해나, 정신적인 손해를 준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든 두 배 세 배 보복하여 고통을 주려고 작정합니다.
용서하라는 말은 주님이나 하는 것이지, 나는 예수님이 아니야 하면서 화해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저주를 퍼붓습니다. 성경이 주는 풍성한 약속의 말씀들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지냅니다. 인생의 종착역이 점점 다가오는 데도 나는 더 이상 미련도 없고 큰 낙도 바라지 않고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도 눈앞의 당장의 이익이 눈에 보이면, 더 챙기려고, 더 얻으려고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요셉이 이 땅의 것을 추구 했다면, 아마도 가나안 땅을 돈으로 다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군대를 동원해서 힘으로라도 빼앗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 땅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살아서도 형통하고, 죽어서도 주님이 주시는 큰 명예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우리의 본질, 본체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해 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다 얻고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면 다 헛것이 됩니다.명예는 일순간이요 사라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과 죽은 후에도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죽은 후에야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그 약속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주신다는 확신 속에 살아 갑니다. 그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주는 시련과 아픔은 잠시 뿐이라고 생각하며, 이겨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미래가 불투명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실리를 다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면류관의 명예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요셉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고, 우리의 마음이 곧 요셉의 마음입니다. 요셉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겨준 유언,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고, 앞으로 살아갈 소망과 성취의 말씀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들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보다 가장 어려웠던 현실적인 문제가 목적지도 없고, 지리도 모르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상상하지 못하는 하나님만의 방법으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떠올라 방향을 인도했고, 밤에는 불기둥이 솟구쳐 올라 방향을 잡아 주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구약판 네비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정말 웅장한 장면일 것 같고, 실제로 그 광경을 본다면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낄 것 같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떨기나무에 붙은 불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 소명을 받았고, 빽빽한 구름 가운데로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애굽 군대를 막아섰고, 구름기둥이 회막(성막)에 내려오면 모세는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 하듯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를 하였습니다. 이렇듯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하셨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정말 우리와 계속 함께 하실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불안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고서야 비로서 안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현현하셔서 동행하고 계심을 두 눈으로 목도함으로 불안에서 벗어났습니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상징물이 눈앞에 있으니, 하나님이 분명하게 살아계시고, 백성들을 인도해 나가시는데 직접 앞장서고 계시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확신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에게는 평안을, 패배주의와 종속주의에 물들어 있는 자에게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해줍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보여 지고, 믿어지고, 승리의 결과로 나타나는 신앙 체험을 학습시키는 하나님만의 인도하심의 방법이었습니다. “주위를 둘러 면 아무도 없는 듯 믿음의 눈을 들면 보이는 분 계시네”라는 찬양 가사처럼,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시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모든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는 전쟁을 직접 선두에서 지휘하시며 나아가십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단지 믿음이 약하고 영의 눈이 열리지 않은 엘리사의 종 게하시와 같은 상태라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볼 수 가 없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우리의 영안을 열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그로 인해 믿음이 날마다 자라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믿음과 승리의 확신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떠오르는 것처럼 24시간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우리의 사생활이 완벽하게 노출 되는 것입니다. 옆에 분을 한 번 바라보세요. 한 3초 이상만 눈을 마주보고 있어도 서로에게 부담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밤낮으로 다 보고 계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담 백배 일 겁니다. 부담 가야 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시선 범위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예행연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의 체질이 되도록, 하나님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훈련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cctv 있는 곳에서는 주정차 하지 않고, 속도신호위반 카메라가 있는 교차로에서는 조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조심하는 것이 습관이 됩니다. 죄를 지을 순간에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을 속이려는 행동을 자제하게 됩니다.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험한 말을 삼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잘 지키려고 애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려는 흔적들을 남기고,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 위해 힘씁니다. 이러한 삶의 지표들은 하나님의 시선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밤낮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부담감, 바로 거룩한 부담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들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떠오르는 장소는 거룩한 영역입니다. 보호 받는 공간입니다. 그 안에 있으면 만사형통,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 그리고 신령으로 예배하는 사람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같이 영광으로 임하십니다. 오늘 여기 00교회 예배당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에도 거룩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음을 믿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앞에 나를 완전하게 노출 시키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시되,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 앞에 거룩한 부담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처럼,
①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 했던 것과 같이, 사탄에게 종노릇 하며 지냈던 노예의 모습에서 우리를 탈출시키고 해방 시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매일 매일, 평생토록 감사함으로 돌려야 합니다. ②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 하실 때, 직진하라면 직진하고, 돌아가라고 하면 불평하지 말고 즉시로 순종해야 합니다. ③ 그리고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의 실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부활에 성취할 하나님 나라에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명예를 얻는 것에 잊음을 잊지 말고 세상 소망 다 사라져 가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하나로 이기고 승리해야 합니다. ④ 그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같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가운데 거하시고, 거룩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시선 안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인정해 주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고 권세 있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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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늘 하나님께 감사로 돌리게 하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밤낮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의 명예를 누리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