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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목적 (로마서 5:1-11)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학생이 학교에 가는 것은 공부하러 가겠지요. 공부를 해서 진학을 하고 졸업하면 좋은 직장도 얻고... 결혼도 하고... 행복을 얻기 위하여 학교에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병원에 갈 때도 병원에 가는 목적이 있습니다. 무슨 병인지, 내 몸 상태가 어떤지 검사를 받으러 가기도 하고, 수술을 받기 위하여 가기도 합니다. 병원에 문병을 가기도 하지요. 어떤 곳을 가면 가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목적에 맞지 않으면 좀 이상합니다.
우리 지방에서는 새해가 되면 신년하례회겸 교역자회의를 합니다. 사회하는 목사님이 다같이 찬송가 480장을 하시겠습니다. 그게,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 날 아침 거기서...’ 보통 장례식에 부르는 찬송입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싶었는데 그 찬송 부르고 나서 606장 하시겠습니다. ‘해보다 더밝은 저 천국..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신년 하레회를 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라는 것일까요?
왜 그 찬송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목적에 맞지 않으면 이상한 것입니다.
토끼의 집념이라는 웃기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끼가 약국에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당근 있어요? 약사가 없다고 하자 그냥 돌아온 토끼는 그 다음날 또 가서 물었습니다. 당근 있어요? 약사가 없어, 약국에서는 당근 안팔아 ~
다음날 토끼가 그 약국을 또 찾아가 물었습니다. 아저씨 당근 있어요?
약사가 없어! 한번만 더 귀찮게 하면 가위로 귀 잘라버린다.
다음날 또 토끼가 그 약국을 찾아갔습니다. 아저씨, 가위 있어요?
약사가 아니, 없어.. 그러자 토끼가 물었습니다. 아저씨 그럼 당근 있어요?
토끼가 왜 약국에 갔을까요? 예, 약사 놀려주려고 간 겁니다. 집념을 가지고 약국에 가고 있네요. 우리는 왜 교회에 왔을까요? 예, 목사를 놀려주려고 오지는 않았겠죠?
오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좀 더 깊어지고 신앙생활하는 목적을 조금 더 깨달았으면 합니다.
교회다니는, 신앙생활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다니지는 않겠지요. 이 시간에는 내가 신앙생활하는 목적이 제대로인지 점검하고 확인하여 신앙생활의 목적에 맞게 ...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사람이 신앙생활 하는 목적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16:31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구원이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저로 하여금 영생을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람은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다만 예수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심판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스스로를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고후 13:5에 ‘너희는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야 구원을 받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 어떻게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9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에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신 사람이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마음에 영접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둘째,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5: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이 은혜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은혜는 크게 두가진데, 구원의 은혜와 축복의 은혜입니다.
성도들이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다윗의 나라와 다윗의 집과 그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받은 다윗이 감격하여 “하나님이여 종이 무엇이관대 이토록 복을 주십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삼하7:29)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자신과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람들이 절에 가서 하는 일을 보면 불상에 절을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식 대학에 합격하게 해 달라고 절을 하고 남편 사업이 잘되게 해 달라고 절을 하고... 다 복 받게 해 달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말 못하는 불상이 복을 내려 줄 수 있습니까? 이사야서 44:14-17에 보면 사람이 산에 가서 백향목 나무를 잘라다가 나무 한 부분은 잘라서 화목, 아궁이에 불을 때고, 다른 나무 한 둥치는 정교하게 조각하여 신상, 곧 우상을 만들고 그것 앞에 절을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말 못하는 우상은 복을 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그 나무가 무슨 신령한 힘이 있을까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느니라.’(행 4:12)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외에 천하 인간에게 복 주시는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으면 다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적당히 믿을 수도 있고 잘 믿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이 적은자여’ 하면서 책망도 하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스라엘 중에 내가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감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믿음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가 바로 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받습니다. 축복이 덤으로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신명기 28:1-6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예, 지켜 행하면 이라고 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했습니다. 말씀을 삼가 듣고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십계명에 보면 제4계명과 제 5계명에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안식일 지키라... 하시면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온 세상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도 있고 지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나 나라가 복을 받고 삽니다. 제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말라기 3장 8절에서 12절에 약속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집에 가서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를 하나님의 창고에 들이라 그리하면..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깊이 깨달으면 복이 있습니다.
셋째, 신앙생활의 목적은 마음에 평화와 안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절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 11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운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마음에 평화와 안식을 누리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음에 평화가 사라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었을 때, 두렵고 불안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그 마음이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피해 망상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이 가득하고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누리고 살 수 있을까요?
먼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 생명 내것 아니고 예수님의 것입니다. 내 몸 내것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주인이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하셨습니다.
또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난이나 질병이나 전쟁, 죽음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병에 걸려 아프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를 줍니다.
아는 분 중에 한분이 머리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갔습니다. MRI 라는 것을 찍어보니 뇌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져서 거의 정상이 되었습니다만 ...
질병은 사람을 불안하고 두렵게 합니다. 치명적인 질병은 마음을 두려움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죽음 너머에 천국이 있다해도 잘 믿지를 않습니다.
전남 곡성의 107세 된 할아버지에게 뽀빠이 이상용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뭐야? 그냥 형이라고 불러!"
"아! 형 죄송합니다. 형! 이렇게 오래 산 비결이 무엇입니까?" "비결은 무슨...안 죽으니까 오래 살았지!" "형, 그동안 살면서 미운 사람도 많았을 텐데, 어떻게 그런 걸 다 참고 사셨어요?"
"응! 미운 사람들도 있었지. 하지만 그냥 내버려 뒀어, 그랬더니 지들이 알아서 죽더만...80~90살이 되더니 다 죽던데 뭘~!"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욕망, 욕심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더 가지고 싶은 욕심, 더 살고 싶은 욕심, 더 높아지려는 욕심, 세상에 있는 모든 욕심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것을 처리하면 마음이 평화롭고 안식을 얻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죄와 죽음 질병과 욕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가 받을 고통과 질병, 저주를 그 몸에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아파야 할 질병을 그 몸에 담당하셨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가시와 엉겅퀴의 저주를 그 몸에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머리에 탱자가시보다 더 크고 뾰족한 가시관을 쓰셨을 때 우리가 받을 저주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에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여 우리의 죽음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 때문에 죽으셨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깨닫고 믿으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욕심을 죽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내가 살아 있어서 문제입니다. 내 감정이 살아서 문제입니다. 내 혈기가 살아서 문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갈2:20)
내 육이 죽어야 내 영이 살고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삽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50)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높이 올라가면 거기에는 구름이 없습니다. 구름 위를 가는 것입니다. 거기는 천둥도 없고 번개도 없고 비도 내리지 않습니다. 구름위의 산책이라고나 할까요?
바다에 가면 파도가 치죠.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배를 뒤집어엎기도 합니다. 그러나 물밑으로 깊이 내려가면 파도가 없습니다. 수심 100m 아래에는 파도가 없습니다. 수심 천m 아래는 항상 평온합니다.
이와같이 신앙이 깊으면 마음은 늘 평화롭습니다. 이와같이 신앙이 높으면 항상 평화롭습니다. 신앙 인격이 깊어지면 세상의 일에 대하여 초연해집니다. 욕심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항상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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