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가 차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아들(갈라디아서4:1-5)
서론 :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이 필요했든 일과 때가 차서 여자에게서 아들을 보내시어 그 아들로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언급해 준다.
1. 후견인으로서의 율법
바울은 1절에서 약속을 받을 자들의 어렸을 때의 위치를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후견인이란 어린아이를 책임지는 자를 말하고 청지기란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를 말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모든 일을 어렸을 때의 일이라고 말하고 어렸을 때에 후견인과 청지기의 관리 아래 있었던 것처럼 율법 아래 있었다고 했다.
로마 시대의 관습법상 미성년자는 14세에 이르기까지 그의 아버지가 의뢰한 후견인 아래 있었으며 재산권은 25세가 될 때까지 청지기가 대신 관리했다.
유업을 이을 자들이 모든 일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성년이 되기까지는 이처럼 후견인과 청지기의 돌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종과 다름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율법은 인류에게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구실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종의 기간은 무작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성년이 되기까지 즉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에 한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정한 때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실 그 때를 의미한다.
그러면 바울은 왜 율법을 후견인이나 청지기로 비유한 것일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모든 인류는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유대인들도 실인즉 후견인과 청지기에게 매인 자로 자유를 누리거나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는 비유가 된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라고 말한다. 세상 초등 학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약속에서가 아닌 다른 모든 인간적인 의의 방법을 의미하는데 율법도 이 초등 학문 중에 하나요, 선행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거나,
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종류, 인간의 철학이나 이방 종교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이전까지 바로 이 같은 초둥학문에 얽매어 그 종노릇을 해 왔던 것이다.
2.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내심
4절에서 “때가 찼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범사에는 때가 있으며 하나님은 그 때를 따라 역사 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실 시기가 된 것이다.
이처럼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자손으로 보내시는 메시야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남이 아니라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셨다.는 뜻이다. 여자란 동정녀 마리아를 의미하며 이 여인은 요셉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잉태한 것이다. 이 같은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 율법 아래 나셨다는 말씀은 율법이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왜 율법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인가?
그 이유에 대하여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해석해 준다.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셔야 한다. 그래야 그 율법에서 해방할 수 있고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속량이란 말은 우리가 갚아야 할 대가를 대신 갚아 주므로 우리를 율법의 종의 자리에서 자유케 하는 일을 말한다.
결론 :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받으사 우리로 그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들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으며 함께 하나님의 유업의 후사가 되게 하신 것이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아버지의 영 (갈라디아서4:6-7)
서론 :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원래가 그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창세 전에 이미 택정 하셨을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때가 이르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인 율법 아래서 지내게 하시고 때가 이르매 아들의 명분을 주시고 아들로서의 유업을 이을 자로 결정하셨다.
1. 아들의 영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받은 그의 백성들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시어 그의 신분에 알맞은 호칭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약속을 받은 백성들로 자신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말씀해 준다.
“아바 아버지”에 있어서 아바란 말은 구약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생소한 말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처음 사용하신 말이다(막 14 : 36).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아바’란 말은 ‘압바’라고 읽는 아람 말인데 아버지와 아들과의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처럼 부자 지간의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아바 아버지’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아바 아버지’란 감격스러운 말로 부르는 일은 전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내 속에 아들의 영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 인고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보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아들의 영이란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은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신 데 이 성령이 아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향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다. 우리에게 영적인 깨달음을 주시고 영적인 지식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알게 하신다.
2. 종이 아니라 아들된 우리
7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해 준다.
‘이 후’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아들이 된 후를 말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법적인 언약 관계로 성립되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다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뿐이신 아들로 이를 독생자로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신분으로 이 법적 신분을 양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양자도 법적으로 유업을 이을 상속권의 자격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날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고 있었다. 율법의 종, 양심의 종, 세상 풍습과 세상 지식의 종노릇을 해 왔었다. 이 종의 멍에는 인생의 무거운 짐이 되었고 그 결과는 오직 사망뿐이었지만 그 짐을 벗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 그 짐을 벗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 11 :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이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종의 멍에의 짐을 벗은 우리는 또 그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 후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말씀해 준다. 우리가 종의 멍에를 벗었으니 이제는 율법에 메어 살 자들이 아니다. 율법의 정죄 아래서 율법의 종노릇이나 하여 율법에 끌려 다닐 자들이 아닌 것이다.
율법도 주관하시고 양심도 주관하시고 인생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씀해 준다
왜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려느냐
(갈라디아서4:8-11)
서론 : 우리는 본문에서 유대교에 열심인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나 순박한 믿음의 갈라디아 교인들로 유혹을 받게 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10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란 말씀에서 율법적인 절기를 지키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을 알았을 때와 몰랐을 때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 때’란 시기는 우리가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지 못했을 때를 말한다. 그 때에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을 해 왔었다. ‘하나님이 아닌 자들’이란 양심이나 율법이나 인간 사회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지식이나 철학이나 습성을 가리킨 말이다. 우리는 모두 그 아래서 종노릇하는 생애를 보내 온 것이다. 율법이나 양심이나 어떤 종교적 경전에 끌려 다녔다.
그러나 바울은 9절에서 “이제는”이란 말로 이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게 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제는 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새로운 우리의 위치를 의미한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그 같은 인간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었는데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으로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들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말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로 삼으시려고 그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를 대속시키신 그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자랑하지만 그들은 아들이 없는 하나님을 알 뿐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가?
요일 2 : 23절에서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며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고 말씀해 준다.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치심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2. 왜 초등 학문에 얽매어 종노릇하려느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상과 같은 바울의 복음적인 논증으로 그들의 위치가 분명해 졌는데도 그들은 아직도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거짓 선생들의 꾐에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책망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에 얽매어 그들의 종노릇이나 하고 있을 그런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왜 다시 율법을 지키려는 생활을 통해서 다시 율법의 지배 아래 들어가 죄의 종노릇을 하려는 것이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따랐다고 하는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10절에서 밝혀 준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는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에서 지키는 구약적인 율법적 의식을 지키는 생활을 시도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날이란 금식일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금식일과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장로의 유전과 같은 율법적인 조항들을 가미한 것으로 보인다. 달이란 달마다 반복되는 여러 가지 율법적 행사를 의미하고 절기란 율법에서 지키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을 말한다.
해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 50년 만에 돌아오는 희년 등을 말하며 이 같은 행사에는 자세한 율법적 규례가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일에 대한 그림자로 이미 모두 성취되어 사문화뒨 것들이다.
결론 : 이 같은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한 것을 받았으며 그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얻은 그들이 그런 율법적 규례를 따르는 일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복음에는 율법이나 양심보다 우월한 생명의 길이 있고 하나님의 의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복음만을 믿는 믿음에서 한치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갈라디아서4:12-16)
서론 : 바울은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에게 대접해 준 후의를 상기시키면서 복음으로 맺어진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과의 끈끈한 사랑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이곳에서 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것을 액면대로 받아 드림으로 그들에게 감사가 있었으며 바울에 대하여 마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한 사실을 생각해 보라는 뜻에서이다.
1.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요 율법을 숭상하는 바리새인이며 학식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지냈으며 그들의 생활에 함께 어울려 형제로서의 교제를 가졌던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특권 의식도 아무 것도 아니며 율법도 의로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것들을 모두 버리고 갈라디아 교인들과 더불어 믿음의 생활을 해 온 것이다.
바울이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한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바울이 유대인이었음에도 그가 율법에서 자유를 얻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처럼 세상의 초등 학문인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고 자기처럼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라는 권면이다.
유대인들조차 질 수 없는 힘겨운 율법을 지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참 이스라엘이 되라는 권고인 것이다.
2.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대한 태도
지난날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 최상의 예우로 대접했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었기 때문이며 복음의 사자를 대접하는 예우에서였다. 바울이 12절 하반절에서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했는데 그것 그런데도 그들이 지금은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자기를 해롭게 하는 이유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했을 당시, 그의 몸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었다”고 했다. 이 말은 바울을 오랫동안 괴롭힌 바울의 지병을 말하는데 바울은 이 병을 사탄의 사자로 표현하고 있으며 고후 12 : 7절 이하에서 이 병을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세 번씩이나 간절히 간구했지만 그가 받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이었다. 바울은 이 응답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뻐했노라고 했는데 갈라디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이 같은 사탄의 사자가 바울의 몸에 있었든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이 같은 연약함을 업신여기지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했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는 사실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주의 종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는지 할 수만 있었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주었으리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것이 그들의 복이라고 말하고 그 때 베풀었던 그들의 그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16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처럼 지난날 바울에 대하여 선히 대접한 사실을 잊고 지금은 어리석게도 마치 복음의 원수인 것처럼 거리를 두고 있으니 이런 일이 어찌 된 일이냐고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종과의 관계가 사랑 가운데 원만하다. 그들이 바울의 말에 순종하고 바울의 허물을 감싸주고 눈이라도 빼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된 교리에 미혹되고 시험이 들었을 때는 그 사랑이 사라지고 오히려 원수처럼 여겨 싫어하고 떠나며 경원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결론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은혜 생활을 할 때에는 이처럼 목자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 주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대접한 사실을 돌아보면서 이 같은 일은 그들에게 복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가라라디아 교인들처럼 어리석은 길을 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자.
두 가지 열심 (갈라디아서4:17-18)
서론 : 열심을 낸다고 모두 좋은 일이 아니다.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이단자들의 열심은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집어넣는 열심이기 때문에 잘못된 열심에 미혹 받지 말아야 한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갈라디아 교인들을 꾀어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가게 한 거짓 선생들의 열심은 대단한 듯 하다. 그들의 열심에 마음이 끌려 그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에 미혹 받아 결국 바울의 수고에 큰 손상을 주었고 바울의 분노를 사기에 이르렀다.
1. 나쁜 일의 열심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쁜 일에 열심 있는 자들의 그 열심을 경계할 것을 말해 준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열심 있는 행동에 대하여 “저회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른 열심만을 보면 안 된다. 사탄의 일꾼들은 양의 너울을 썼을 뿐 아니라 열심도 대단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도의 열심을 보라, 기성 교회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열심이 득심하다. 그들의 그 열심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나는 엊그제 발행한 들소리 신문이라고 하는 교계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통합측 교회의 김경선 장로란 분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책을 썼는데
그와의 대담에서 안식교는 이단이 아니라 우리들보다 더 열심 있고 경건한 교리를 가진 교단으로 그들을 이단 시 하지 말고 한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을 쓰기도 했다는 것이다.
안식 교회에서는 율법에 있는 토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주장으로 기성 교회의 주일 안식일을 매도하며 토요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종말에 우상 앞에 경배하는 것이나 짐승의 표를 받는 일이 모두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협박하면서 기성 교회에 파고 들어와 많은 성도들을 현혹시켜 안식교로 유인하고 있다.
그들의 열심은 바울이 말한 대로 좋은 뜻의 열심이 아니며 진정한 복음, 구원의 성경적 도리를 흐리게 하려는 미혹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경계해야 하며 제칠일 안식일에 미혹 받아서는 안 된다. 이단자들의 열심이나 경건은 위장된 것으로 겉으로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분별해야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율법주의 신봉자들의 다른 복음은 두 가지의 숨겨진 뜻이 있었다. 하나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이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함이라”고 한 것이다.
이단자들의 침투는 하나님의 교회로 이간시키는 일을 하므로 분열을 조장한다. 그리고 이 같은 이간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바울과의 사이에도 선을 그어 놓았다.
그리고 이처럼 갈라디아 교인에게 열심을 내게 한 그 열심을 이제는 자신들에게 내게 하려는 것이다. 이단에 빠져 들어간 사람들을 보면 결국은 열심을 내어 그들의 충실한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성도의 열심
바울은 18절에서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언제든지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을 품어야 한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성경적 진리를 말한다.
㉠ 고린도 교인들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고 말해 준다(고후 9 : 2).
㉡ 딛 2 : 14절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은 우리들로 “선한 일에 열심 있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열심을 다하여 과실을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 딤후 4 : 2절에서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항상 힘쓰라고 하셨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볼 수 있어야 전도에 힘 쓸 수 있다.
결론 : 성도들의 이 같은 열심은 좋은 열심으로 권장할 만하다. 좋다는 뜻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는 것.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 성령의 열매라는 의미다.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성도가 되자
계집종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 (갈라디아서4:19-31)
서론 :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온 정성을 쏟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경우를 계집종에게서 난 아들의 경우와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의 경우를 대조시켜 비유적으로 해석해 준다.
1.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할 바울
바울은 19절에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너희를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해산하는 수고란 그들의 중생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그들의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그들을 양육하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일로 구원의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면 안 된다.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 그들은 거짓 선생들에 의해 유혹을 받아 잠시 동안 진리에서 떠나 있게 되었으며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종들에 의해 끊임없이 양육 받아야 하며 자기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신앙과 은혜의 자리에서 잠시 동안 떨어진 상태에 있었다. 바울은 그들을 다시 신앙적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런 일에는 하나님의 종의 해산의 수고가 따르는 것이다. “해산의 수고”란 복음으로 양무리들을 양육하는 일에 대한 어려움을 표현한 말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을 위해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수고해야 하는데 기도로 수고하고 올바로 인도하기 위하여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바울은 20절에서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바울은 아직도 갈라디아 교인들의 중심을 잘 모르고 있는 형편이며 또 그들이 바울의 권고와 책망의 말을 어떻게 받아 드릴는지 모르기 때문에 지극히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마땅히 책망할 일을 책망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받을지 모를 상처를 인하여 책망하고 싶으나 참고 권면 할 때도 조심성 있게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교인들은 주의 종으로 목소리를 변케 해서는 안 된다. 주의 종이 무슨 말을 해도 믿음으로 받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주의 종이 무슨 말을 할 때, 받아 드리기를 싫어한다면 나에 대하여 그의 목소리를 변하려 할 것이다.
2. 비유로 설명하는 두 언약
바울은 21절에서 이제 복음을 멀리하고 율법을 따르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는 서두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경우를 비유로 들어 해석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있는 두 아들이란 이삭과 이스마엘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들 외에도 더 많은 아들이 있었지만 이들만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이들의 출생이 하나님의 언약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의 경우는 계집종인 하갈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육체를 따라 태어났다고 말씀해 준다. 육체를 따라 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택된 아들이 아니란 뜻이다. 이 아들은 바로 시내 산에 속한 아들로 율법 아래 속한 자란 뜻이다. 이들은 율법의 종으로 평생을 지내야 하기 때문에 소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삭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사라나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에 따라 세상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스마엘과 같은 시내산에 속한 아들인 것이 아니라,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 약속의 아들로 하늘의 약속의 유업을 이을 자인 것이다.
결론 : 바울은 결론적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말해 준다. 그러므로 너희는 율법에 속한 이스마엘처럼 종의 자녀가 되지 말고 약속의 아들 이삭처럼 유업을 이을 자임을 알라는 것이다.
또한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들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니 그런 자들의 핍박을 진리의 말씀으로 이겨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