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다사에서 매운탕집 운영...대구 매운탕 역사 산증인
[달성을 지킨 사람들] ⑥ 낙동식당 윤 대표
물고기나 생선을 고추장, 고춧가루와 여러 가지 채소로 끓여낸 매운탕은 한국인의 입맛에 가장 맞는 음식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한국에 고추가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때이니 그 전엔 담백한 생선국을 먹었고, 16세기 이후 본격 매운탕이 등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의전서(是議全書)나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에 고추장을 이용한 찌개요리법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얼큰한 탕(湯)요리나 조림이 우리 식탁에 오르기 시작한 건 대략 400년 쯤 된 것으로 보인다.
이강일천(二江一川:낙동강, 금호강, 신천) 고장인 대구에서도 풍부한 강변(江邊) 입지를 바탕으로 매운탕 요리가 발달했다.
매운탕은 국밥, 선지국, 어탕국수 등 매콤한 요리를 좋아하는 대구의 풍토, 입맛과도 맞아떨어져 지역민의 입맛에 쉽게 녹아들었다.
그 중 1990년대 대구에서 출발한 ‘논메기 매운탕’은 우리 요리사에서 한 장르를 구축하며 전국적인 음식으로 부상했다.
이번에 소개할 낙동식당 윤팔현 대표는 40년 가까이 문산에서 매운탕집을 운영하며 대구, 특히 다사 지역의 매운탕집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윤 대표의 ‘매콤한’ 40년 매운탕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 대구 매운탕 거리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 금호강, 낙동강변의 동촌, 강창, 강정, 화원, 옥포 등지에서 매운탕집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 지역에 ‘매운탕 집단거리’가 형성된 것은 1978년 화원유원지 매운탕촌이 들어서면서부터. 당시 화원유원지에는 화성, 오복, 국일, 버들, 명성식당 등이 맛집으로 이름을 올렸다.
낙동강 본류를 낀 화원유원지가 대구 매운탕거리의 본산이었다면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강창, 강정지역 매운탕촌은 아류로 불릴 만 했다. 강창의 ‘대구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두 번이나 찾아 회식을 했을 정도로 맛과 전통, 지명도를 자랑했다.
한때 상당한 규모의 집단촌을 형성했던 강창매운탕촌은 현재 흔적조차 남아있지않다. 이 일대가 상습 침수 지역으로 정주(定住)여건이 불안했고, 1971년 강창교가 들어서며 그 일대 도시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다사 일대 매운탕촌의 중심축이 강창에서 강정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당시 금호, 경산, 다사식당 등이 강정에서 이름을 날리던 식당들이다.
1970년대 화원, 강창, 동촌, 청천, 하양을 지역 5대 매운탕촌으로 불렀다. 이들 지역의 공통점은 모두 옛 나루터 지역이라는 점.
전통시대 나루터는 지역 유통, 상업의 중심지였다. 반세기 전 주막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식당, 주류업의 전통이 매운탕 식당가로 이어진 건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다.
#. 낙동식당 윤팔현 대표가 문산리에 매운탕집을 연건 1980년 무렵. 화원유원지, 강정유원지에서 매운탕촌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였다.
윤 대표는 “화원, 강정의 매운탕집 붐이 워낙 강해 당시 낙동강 상류인 부곡, 문산, 매곡 등에도 매운탕집이 하나둘씩 들어섰다”고 말한다.
강변에서 태어나 강가에서 자란 윤 대표가 매운탕집을 연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당시 매운탕 집에 대한 뚜렷한 비전이나 경영철학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저 물가에서 태어나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물고기를 잡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일’이 생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 양식장에서 물고기를 들여오지만 초창기에는 업소들이 직접 강에 나가 어로 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윤 대표는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나룻배 어로(漁撈)가 제법 성행했다”며 “식당에 따라 자기 배로 직접 물고기를 조달하거나 전문 업자에게 고기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던 윤 대표에게 매운탕집은 그저 생활이요, 생계지책이었다. 재력이 조금만 뒷받침 됐더라면 당연히 그도 강정, 화원 쪽에서 문을 열었겠지만 그렇지 못했던 윤 대표에게 지금 문산리 자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교통이 불편한 외진 자리에서 윤 대표가 할 수 있는 일은 최고의 맛을 내는 일과 최대한 성심으로 손님을 맞는 일이었다. 다행히 부인의 손맛이 손님들 사이에 알려지며 조금씩 매출이 늘기 시작했다.
#. 문산의 구석자리에서 출발한 낙동식당에 1990년대 들어 햇빛이 들기 시작했다. 1988년 올림픽 이후 경제 호황에 힘입어 마이카 붐이 불면서 드라이브족이 몰려들었다.
윤 대표는 “다사는 자체로는 외진 곳이지만 동쪽으로 240만 대구 도심을 끼고, 서쪽으로는 고령·성주가 맞닿아 있다”며 “이런 근접성 덕에 근교에서 자가용들이 몰려들었다”고 말했다.
최고의 강변 뷰(view) 환경도 식당 대박에 크게 일조했다. 낙동강변의 식당들이 대부분 조망이 좋을 것 같지만 식당에서 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그렇게 많지 않다. 낙동식당은 부곡과 문산을 연결하는 제방 끝 고지대에 위치해 조망이 뛰어나다. 특히 봄철 강변의 벚꽃과 어우러진 강 풍경은 왜 낙동식당이 일대 최고의 명소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다.
돈이 없어 허름한 장소에 열었던 식당이 마이카 붐과 리버(river) 뷰라는 로맨틱 코드와 만나 대박집으로 거듭난 것이다.
차분하게 성장세를 이어 가던 낙동식당은 1990년대 들어 또 하나의 호재를 맞게 된다. 현재 다사읍 매운탕을 제2의 부흥기로 이끈 ‘손중헌 논메기매운탕’이 들어선 것이다. 손중헌 씨는 자신이 운영하던 논메기매운탕을 ‘부곡리 신화’로 이끌며 이 일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죽곡, 문산 지역에 매운탕집이 30군데 이상 들어서며 ‘논메기탕 벨트’가 형성됐다.
이런 인기를 업고 다사의 논메기매운탕은 ‘대구 10미(味)’ ‘지역특화 음식’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 매운탕 조리법은 집집마다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육수에 고춧가루, 양념을 풀고 감자, 깻잎, 토란대, 배추, 대파 등 채소를 물고기와 함께 끓여 낸다. 또 당면을 함께 넣어 매운탕의 짠맛과 거친 맛을 중화시킨다.
낙동식당에서는 재료를 차별화해 천년초를 먹여 키운 메기를 쓰고 있다. 천년초는 철분, 칼슘,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어 독소, 노폐물 배출 기능이 뛰어나다.
윤 대표는 “천년초 메기는 약리(藥理) 기능도 뛰어나지만 맛이 담백하고 비린내가 적어 여성, 아이들도 부담 없이 잘 먹는다”고 말한다.
매운탕과 함께 한 40년의 세월. 그간 윤 대표는 점포도 3층으로 올리며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었다. 돈이 없어 강가 외진 곳에 잡은 터는 리버뷰 입소문을 타고 대박집이 되었고, 다사 일대에 ‘매운탕 벨트’가 형성되며 전국적인 맛집 거리로 성장했다.
지역 매운탕집 중 이제 40년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마 낙동식당이 유일할 것이다. 매운탕과 함께 인생의 반(半)을 함께한 셈인데 윤 대표는 그 지난(至難)의 세월을 이렇게 소회했다.
“제게 매운탕 집은 생계요, 호구지책이며 생활 자체였습니다. 전통이니, 대를 잇는 자부심이니 그런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죠. 제가 얼마나 이 가게를 더 꾸려 갈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오시는 손님 정성껏 맞고, 맛있는 음식 만들어 내며 남은 생을 보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