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98
4월17일 [주님 부활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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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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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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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의 아침, 설레는 마음>
'초보신부' 시절,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소규모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기억해 보니 요즘 같은 봄날이었습니다. 여러 꼬맹이들이 집단으로 가출해서 며칠째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보고, '검거'를 위한 안테나를 높이 올려보았지만 도무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정말 당혹스럽더군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찰 중이던 한 경사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이들을 붙잡아놓았으니 데려가라고. 무사하다는 말 한마디에 그간의 모든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충만한 기쁨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전화를 내려놓기 무섭게 상상을 초월하는 '초스피드'로 달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뛰어다닌 적이 있으십니까? 뛴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 또는 그만큼 대처해야할 사안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족들 가운데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합니까? 생명을 구하려 바람처럼 달려갈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사랑하던 사람이 귀국해서 공항에 마중 나가는 길인데, 길이 막혀 공항에 늦게 도착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부활의 흔적을 목격한 예수님 제자들 역시 뛰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빈 무덤'을 확인한 마리아 막달레나를 보십시오. 그녀는 이 놀라운 사건을 전하려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갑니다. 너무나 중대한 일이기에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두 제자들 역시 엄청난 속도로 달립니다.
이윽고 그들 눈 앞에는 장엄한 예수님 부활 현장이 펼쳐집니다. 의혹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 얼굴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충만한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제자들은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이 기쁜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예수님 죽음 이후, 삶이 온통 회색빛으로 변한 사람들, 눈물과 한숨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이 꿈같은 소식을 전하려 있는 힘을 다해 달립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손이라도 한번 잡아볼 수 있을까? 혹시라도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예수님을 살려낼 수 있을까? 안간힘을 다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고 나서 가장 슬피 통곡했던 여인이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였을 것입니다. 한동안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 정신이 아니었겠지요.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해주시던 예수님, 자신에게 새 삶을 부여해 주셨던 예수님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시다고 생각하니 사는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녘에 습관처럼 일어나 예수님 무덤으로 달려가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은 정녕 무조건적인 사랑, 막무가내의 사랑, 앞뒤 따지지 않는 용감한 사랑, 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한 사랑, 순수한 사랑, 일편단심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그녀 사랑에 예수님께서도 기쁘게 응답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최초로 당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 부활의 흔적 앞에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달려가는 제자들 모습을 바라보며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예수님 부활은 오늘 내게 과연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의 파스카 축제가 반복되는 매일미사는 내게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내 발걸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부활의 최초 목격자인 마리아 막달레나가 남겨준 모범을 묵상하며 제 부끄러운 신앙을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끌려가셔서 갖은 모욕을 다 당하실 때,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위해 골고타 산을 오르실 때,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리실 때, 한때 죽고 못 살겠다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은 어땠습니까?
혹시라도 자신에게 미칠 후환이 두려워서 멀찌감치 피해 서있었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일단 살고 보자'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겁도 없었습니다. 병사들이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고 위협적으로 만류를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열렬한 사랑, 주님을 찾는 간절한 심정, 주님으로 설레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본받고 싶은 부활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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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EHy09T3a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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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코린 15,16)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으로서 부활하실 수 있으셨다면 같은 하느님 자녀인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라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현세적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이 우리를 악인으로 만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모기와 예수로 나뉜다고 할 때, 모기가 되는 이유는 현세적 집착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생존하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영화를 보면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만 살려고 기를 씁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2차 대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치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권력에 대한 복종 실험을 시행한 바 있습니다. 지원자들은 교사와 학생군으로 분류됐고, 교사가 낸 문제를 학생이 틀릴 때마다 전기충격기의 전압을 15볼트씩 올리도록 했습니다. 물론 충격기는 가짜였고, 지원자들은 이를 몰랐습니다. 또한 학습자(학생)는 밀그램이 섭외한 배우였습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밀그램의 불합리한 지시와 통제 속에 실험자의 65%가 최고수치인 450V까지 전기충격기를 올린 것입니다. 학습자(배우)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면 즉각 실험을 포기할 것이란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살려달라는 학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밀그램의 말에 피험자들은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전기를 흘려보냈습니다.
밀그램은 자신의 저서 『권위에 대한 복종』에서 ‘복종 실험’에 대해 이같이 말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피험자들이) 실험자의 지시에 너무나 기꺼이 따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실험의 결과는 놀랍고도 당혹스럽다. 많은 피험자가 스트레스를 느끼고 실험자에게 항의하지만, 상당수의 피험자가 전기충격기의 마지막 단계까지 계속한다.”
마찬가지로 1971년에 행해진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교수는 ‘교도소 실험’을 통해 강압적인 특수 환경에서 인간의 심리와 행동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관찰했습니다. 모의 감옥에서 피험자들은 교도관과 죄수로 나뉘었고, 각각의 역할을 수행토록 했습니다. 어색하던 분위기와 달리 교도관들은 죄수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점점 고압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관의 행위는 악랄해졌고, 통제 불능 상태가 돼버렸습니다. 실험 5일째에는 성적 고문까지 이어졌습니다. 강하게 저항하던 죄수들은 저항력을 상실했고, 간수들의 권위에 굴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은 6일 만에 중단됐습니다.
인간이 동물적 본성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 충격적 결말입니다. 또 이 실험은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 자란 독일인들이 어떻게 유대인들을 500만 명이나 비인간적으로 학살할 수 있었는지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유대인들을 언젠가는 부활하여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렇게 학살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실험이 끝난 뒤에 교도관을 했던 사람들과 죄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함께 며칠 동안 소풍 가는 프로그램이 계획되어 있었다면 교도관들이 그렇게 악랄하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다시 만나야 함을 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기충격 실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전기충격을 준 그 사람을 나중에 문을 열고 만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면 그렇게 끝까지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것이 그것으로 끝난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이 세상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서 죽음 앞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화 ‘리스타트’(2019)는 죽으면 매일 아침 7시에 똑같은 삶을 시작한다는 전제의 영화입니다. 아침 7시가 되자마자 킬러들이 들이닥칩니다. 이렇게 수십 번 죽고 나니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알게 됩니다. 본인도 왜 이런 삶이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전의 기억들이 축적되어 킬러들을 소탕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집과 차와 생명까지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주인공은 이혼한 아내가 있고 아들이 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마음은 점점 커집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그들에게 도달하는 시간을 단축하지 않으면 아내와 아이는 죽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200번 가까이 죽으며 그들이 죽기 전에 도달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지 않게 합니다. 죽었다 깨어남을 반복할 때 유일하게 가치 있게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가진 모든 것을 잃어도 어차피 죽고 부활하면 아무 상관 없지만 사랑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란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인간은 원죄의 영향으로 자신의 악한 본성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이 자신들이 찌른 상처를 그대로 지니신 채 자신들 앞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나타나실 것을 믿었다면 그분을 그렇게 찌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착해지지 못한 이유는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입니다. 나의 선택입니다. 착해지고 싶은지,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는지에 달렸습니다. 다만 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면 내 죽음엔 무관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을 믿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착해지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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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1절), 오늘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당신의 탄생으로 인간의 탄생을 거룩하게 하신 분이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날, 부활하신 분과 함께 낙원이 열린다. 그 낙원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 그곳에 분명히 주님께서 묻히셨는데,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마리아는 시신이 없자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한다. 마리아는 무덤에 왔을 때, 아직 어둠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셨지만, 예수님께 대한 존경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있음을 보인다. 살아계실 때처럼 똑같이 ‘주님’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을 살핀다.
그들이 무덤으로 달려가 본 때는 환할 때였다. 그들은 어둔 밤에 와서 그분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수석 사제들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아무도 믿지 않게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밤이나 아직 어두울 때가 아니라 환할 때 왔다. 유대인들이 무서워 한 집에 모여 문을 걸어 닫고 있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용감하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부리나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 그것이 부활의 표지이었다. 누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과 함께 아마포까지 다 들고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몰약을 바르면 아마포가 납처럼 시신에 달라붙지 않는다.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이 아마포와 따로 잘 개켜져 놓여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분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갔다고 하는 사람들 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blépein,1절), 베드로의 경우처럼(theoréin, 6절)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즉 피상적인 차원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oràn)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감화되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동화시킴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 등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으로 하여금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심은 후에 나타난다(20,19-29)-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보고’ ‘믿게’ 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D. Mollat, La foi pascale selon le chapitre 20 de l'Evangile de Jean, in Resurrexit, Libreria Ed., Vaticana, Roma 1972, pp. 316-332).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씀, 구체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지, 빈 무덤이나 잘 개켜진 수건과 같은 어떤 구실이나 단서를 찾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9절)
제2독서: 콜로 3,1-4: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부활의 은총으로 새로이 창조된 그리스도인은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을 갈망하면서 부활을 숨 쉬며 살아야 한다. 부활을 숨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삶이 매 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 체험 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1-2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저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우리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형제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었던 한없는 사랑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 사랑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삶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상의 삶을 이미 이 땅에 끌어내려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삶은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부활한 후의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연습, 아니 죽어야 한다.
죽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한 말과 같이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선포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도 항상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전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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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몹시 바쁘게 돌아다니신 것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에게 잠깐 나타나셨다가 금방 사라지시는 일을 반복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나가신 뒤에, 무슨 일로,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다니셨을까? 당시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분,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은,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녀서 발견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어딘가를 바쁘게 돌아다니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줄곧 제자들과 함께 계셨는데, 제자들 쪽에서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그 두 제자는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루카 24,16)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루카 24,31) 그때 그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는데도 놀라지 않았고, 아쉬워하거나 서운해 하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고, 곧바로 사도들에게 가서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루카 24,35)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 현존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바라시는 ‘부활 신앙’은 바로 그 두 제자들이 갖게 된 것과 같은 믿음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해서, 또 인간의 감각을 초월해서,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2)
여기서 ‘아직도 어두울 때’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 때문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심리 상태를 상징하기도 하고, 마리아가 아직은 부활 신앙이 없었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지금 마리아가 찾고 있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입니다. 마리아는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볼 수 없게 되자 ‘더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됩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박해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훼손하거나 모독하려고 옮겨 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큰 슬픔에 빠져서 울고 있었던 것으로(요한 20,11) 생각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진 것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서 더 큰 슬픔에 빠진 것을 탓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사도들과 신자들 모두에게 대단히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부활 신앙’이 없었던 것을 탓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부활 신앙’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별의 슬픔’은 믿음에 관한 일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부활과 내세를 안 믿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부활과 내세를 믿는 사람은 이별을 슬퍼하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바로 그 희망과 절망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희망’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3-9)
베드로 사도는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쳤는데, ‘다른 제자’의 경우에는 ‘보고 믿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고 믿었다.’ 라는 말은,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 사도와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 무덤’을 보고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루카 24,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다른 제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간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아직 ‘확신’의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의 제자들의 분위기는 뒤숭숭하고 어수선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대감과 믿어지지 않는 마음과 믿고 싶은 마음 등이 섞여 있는 혼란스러운 분위기. 그것은 의심, 또는 기대가 믿음으로, 믿음이 확신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겪는 일입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 것은, ‘빈 무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 순서가 바뀌어서,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예수님 현존 체험’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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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의 자동차에는 대부분 있는데 미국의 자동차에는 대부분 없는 것이 있습니다. ‘Black Box'입니다. 한국에서는 블랙박스가 있으면 자동차 보험료를 할인받습니다. 저도 블랙박스를 설치하였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험사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3년간 미국에서 살면서 블랙박스가 있는 차를 거의 보지 못하였습니다. 블랙박스가 있으면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서로 언성을 높일 일이 거의 없습니다. 블랙박스에 사고의 영상이 녹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험사나 경찰이 와서 운전자와 이야기할 것도 거의 없습니다. 영상을 보고 확인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사고가 나면 경찰이 오고, 경찰에게 사고 경위를 설명해야 합니다.
한국의 길거리에는 대부분 있는데 미국의 길거리에는 대부분 없는 것이 있습니다. ‘CCTV'입니다. 한국의 길거리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범인을 찾기에 용의하고, 실종된 사람의 이동경로를 찾기도 수월합니다. 미국은 카메라가 거의 없기 때문에 범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고, 실종된 사람의 이동경로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미국과 한국 사회의 차이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문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자유보다는 ’사회의 안전‘을 우선하는 문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주님 부활대축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주님의 부활을 증거나 증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음과 변화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신앙의 신비’가 되었습니다. 믿지 않으면 주님의 부활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주님의 부활은 그저 지나간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빈 무덤’을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빈 무덤은 텅 빈 무덤으로 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부활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빈 무덤은 텅 빈 무덤으로 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부활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 기고한 이호자 수녀님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약함 안에서 드러나는 힘, 그리스도의 희생의 힘, 살아있는 실재인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십자가가 종착점인 양, 그리스도의 삶과 희생이 더 이상 아무 영감도 줄 수 없는 절망적인 낭패이고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패배인 양 살아가는 것입니다.(토마스 할리크의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음의 문을 꼭꼭 잠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이 어두웠고 아직도 비몽사몽 비참한 죽음의 골짜기만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감옥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자네, 내가 감옥에 갇혀서 마음이 부서졌을 거라고 걱정했지? 마음은 부서지게 되어있는 거라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을 부서지게 하는 과정이지. 내가 이 감옥에서 괴로워하는 이유는 부서진 마음이 아니라 절대로 부서지지 않겠다고 감옥 담보다 더 지독한 콘크리트 담을 마음에 쌓은 이곳 사람들의 부서지기를 거부하는 마음 때문이라네. 우리의 마음이 절대로 부서질 수 없게 무장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네.” 세상에는 부서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스스로 부서져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무덤으로 향해 달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봅니다. 실망하여 낙담하며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함께 머물고 가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벅찬 감격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간 두 제자는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근심과 걱정이라는 담을 높이 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아’라는 무덤 속에서 나와야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근심, 걱정, 두려움, 욕심, 교만함이 가득한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아도 믿지 못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믿으면 봄에 피는 꽃을 보듯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사제답게, 수도자가 수도자답게, 신자가 신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곧 그분의 부활을 믿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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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진심으로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자비의 특별희년” 기간 중 맞이하는 이번 부활은 어느 해보다 풍성한 은총이 함께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 죄를 뉘우치는 사순시기를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하느님은 징벌하시고 죄 값대로 갚으시며 우리도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교회가 자비하신 하느님을 선포하며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부활은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을 온전히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총과 축하의 인사가 불편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암울하고 참담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개성과 건전한 자아정체성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공부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어린 학생들과 미래를 향한 꿈을 제대로 품어 보지 못하는 많은 청년들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줄어드는 고용의 기회와 노년의 불안감이 모두에게 밀려옵니다.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은 단순히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평화를 위협하며 심각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큰 문제입니다. 이런 긴박한 현실에서 점차 증가하는 갈등과 폭력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인간에 대한 불신을 증폭하며 물질적 성공이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인사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희망 없이 두려움으로 가득찬 우리 삶에 예수님의 부활이 과연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어디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죄와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하느님, 자비로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이제 죄의 뿌리를 차분히 살펴봅시다. 거기에는 현대인의 깊은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물질로 허기를 채우려는 영적 배고픔이 있습니다. 사랑을 확인하려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영적 허기를 권력과 물질이라는 옷으로, 외적 아름다움과 쾌락이라는 잠깐의 뜨거운 손난로로 넘겨본들 추위는 더 강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눈앞에 있는 이웃과 형제도 경쟁자로 받아들이며 그들의 고통에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는 우리는 대양을 떠다니는 난파선과 같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현대적 위기에 대응하여, ‘복음의 기쁨’, ‘찬미받으소서’와 ‘자비의 얼굴’ 등을 반포하는 것도 시대가 보여주는 공멸의 위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잘못된 가치관으로부터 기인하는 개인과 사회의 고통, 더 나아가 전 세계의 비극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지성, 감각과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느님을 신비적이고 강렬한 체험 안에서만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구체적인 일상의 순간에 우리를 신비로 초대하시며 그 사랑으로 우리의 불안과 외로움을 치유하려는 손을 내미십니다. 이 신비가 우리로 하여금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담겨진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삶의 의미를 묻고 하느님을 찾도록 이끕니다. 신비이신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는 최고 절정의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가장 근원적인 죽음의 두려움과 허망함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죽음의 고통도 견디어 내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한없이 용서하시며 자비로이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죄는 하느님의 사랑에 무관심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에 나타난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과 아마포가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요한 20,9)
시몬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하고 대답하며,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그런 그조차도 빈 무덤에서 부활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활이 세상사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까지 막아주는 방패이며, 존재의 의미를 정초하는 기반이며, 내게 상처를 준 사람까지 용서하는 자비의 샘물입니까? 세상의 모든 일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보지 않고 부활 체험의 지평에서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직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세상을 본다면, 우리는 또다시 예수님을 못 박는 유다인의 우를 범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믿는 구세주의 도래를 위해 열성을 다해 싸웠던 그들은 사랑과 용서를 강조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악은 악으로 갚는 것을 정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임을 알려주며, 우리가 몸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모든 순간이 은총임을 알려주고 있기에 부활을 믿는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맞서 세상에서 참된 가치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기주의에 맞서 타인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의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소비주의에 맞서 검소함을, 지배와 소유의 문화에 맞서 섬김과 나눔의 삶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순교’입니다. 순교는 ‘증거하다’는 어원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증거하는 이러한 모습 안에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 비칠 것입니다. 세상의 긴장과 적대감이 사그라들고 불감증의 세계화는 나눔과 섬김의 바람에 녹아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과 활동은 한번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활동과 사목 안에 녹아들어 지속적으로 증거함으로써 구원의 방주로서 교회의 모습을 다시 살려내야 합니다. 이번 시노드를 통해, 어두운 시대에 “어떻게 대전교구가 순교 정신을 본받아 하느님 사랑이 현존하심을 증거하는 사목체제를 갖출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 실천합시다.
성령의 활동 안에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시는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며 우리의 아름다운 몸짓이 교회의 등불이 되기를 함께 기도하며 걸어갑시다.
아울러 다가오는 선거일에 우리 국민이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자비로운 정치인을 알아보고 투표하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입시다. 참된 민주주의는 성숙한 국민의 책임의식에서 맺어지는 열매이며, 신앙인의 정치생활에 대한 참여는 도덕적 의무입니다.(「복음의 기쁨」 220항 참조)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좌우되기보다는 봉사의 정신으로 공동선에 이바지할 수 있는 덕목을 갖춘 정직한 일꾼을 선출합시다.
사랑의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주시는 성령께서 세계무대로부터 점차 고립되며 긴장과 위기를 고조시키는 지도자들과 함께하시어,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가 하루 빨리 정착되기를 순교 선열들과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함께 전구합시다.
한반도가 평화의 표징이 될 수 있도록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교류하며 협력하길 바랍니다. 특히 인도주의적 차원의 교류와 협력은 재개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통일은 평화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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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사도요한 신부님]
<십자가와 부활>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에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성경의 예언에 따라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도 의미 없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만을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에게 부활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초세기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의아해했고, 어떤 유다인들은 제자들이 몰래 시체를 숨겨 두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며 거짓 소문을 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 겉옷까지 내팽개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돌변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럽고 강렬한 체험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성경은 여러 방식으로 제자들이 예수 부활을 체험했다고 증언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이 모든 것이 제자들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였다면, 그들이 감히 순교까지 할 수 있었을까요? 부활 이야기가 꾸며진 이야기라면 그리스도교는 분명 시작과 더불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기반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이렇게 보면 부활은 책상에 앉아서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성령이 임할 때 체험되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성령의 영감을 받아 증언할 뿐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증언한 부활 체험은 오늘날까지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부활의 실재를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활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아서겠지요.
진정 부활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는 십자가를 얼마나 기꺼이 지느냐에서 확인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이는 십자가를 결코 지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활을 더욱 깊이 체험하려면 일부러 더 큰 십자가를 찾아서 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자의 능력에 맞는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리고 져야 하는 십자가의 크기만큼의 부활 체험도 주어지겠지요.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그 누구도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믿음의 눈이 열린 이들만이 부활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꾸게 됩니다. 이번 부활절을 지내면서 다시 한 번 성령께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부활의 실재를 더욱 깊이 받아들여,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사고 청합시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지고 있는 그 십자가와 함께 부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부활을 진정 깊이 있게 체험할 때 비로소 마음으로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다시 한 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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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 다시 부활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한겨울 살을 에는 칼바람보다 매정한 사람들의 찬 기운이 서럽게 시린 날에도 봄은 오듯이, 모든 빛 게걸스럽게 삼켜버린 세상의 막장 참혹한 십자가 딛고 따스한 생기 돋우는 부활이 옵니다.
분노, 시기, 증오, 탐욕, 불의, 폭력, 온갖 추잡한 인간의 광기, 어우러지던 십자가 피의 향연은 이제 끝입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어 영원할 것 같았던 악과 어둠과 죽음 함께 뒹구는 권력 놀음은단 사흘 만에 고개를 떨굽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과 두려움에 몸서리치던 기만과 억압과 포악의 시간이 지납니다. 빛 자체이신 향기로운 생명은 썩는 내 진동하는 어둠 가득한 무덤에 더 이상 머물지 않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께서 오늘 부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부활하라 하십니다. 오늘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일지라도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오늘 다시 우리는 부활을 살고자 합니다.
의심의 눈초리 거두고 믿음의 손 내밉니다. 미움의 덫을 걷고 사랑의 그물을 던집니다. 절망의 늪이 아니라 희망의 땅을 걷습니다. 경쟁의 사슬 끊고 기꺼이 어깨동무 합니다. 차가운 무관심 떨치고 더불어 함께를 이룹니다. 악의 달콤함 대신에 선의 힘겨움을 기쁘게 삼킵니다.
부활은 입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결코 머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다만 온 몸과 마음으로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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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자유로운 삶>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우리도 거듭나는 부활의 삶을 충직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가로막는 장애에서 매 순간 다시 살아나길 희망하며 부활의 삶을 자유라는 측면에서 묵상하는 가운데 깨우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이 자유의지를 사용함으로써 사람의 사람됨을 확인받게 됩니다. 창세기 말씀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 는 것은 ‘피조물’로써의 존재조건을 깨뜨렸다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곧 물고기가 뭍으로 뛰어나온 격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유를 왜곡, 남용하여 피조물의 존재성을 거부하고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한 인간은 죄의 노예로 살게 되었고 오히려 부자유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거짓이나 악을 선택하면 일시적으로 자유로울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고 후회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선택하면 자유가 아닌 속박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 당장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영원히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삶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진리 안에 머물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매번 강론을 길게 하시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강론을 시작하면 아예 눈을 감고 쉬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신부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믿습니까?” 하고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깜박 졸고 있던 신자분이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신부님 말씀은 정말 질립니다. 질리고 말고요!” 진리의 말씀은 질릴 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5,42-44) 하고 말하였습니다.
부활한 몸과 육적인 몸의 차이는 바로 자유에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몸은 제한에 묶여있지만, 영적인 몸은 경계, 한계, 속박에 더이상 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야말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로마7,19-23) 하고 말합니다. 이만큼 자유를 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유를 선택해야 하고 또 누려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의 자유야말로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고 금실이 좋다고 소문난 부부가 이스라엘로 성지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아내가 그곳에서 병이 나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은총이 많은 성지에 묻기를 적극적으로 권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은 꼭 고향으로 옮겨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장의사에게 귓속말로 살짝 물었습니다. ‘이곳은 죽은 사람이 살아난 적이 있다던데요. 맞나요?”
사람의 속은 알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좋아보여도 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인 것 같은데 속은 누구보다도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해봐야 그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변함없는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여야 합니다. 삶의 부활은 바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인들의 기쁨은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충만성은 사랑으로 죽는 것입니다. 애덕과 사랑을 거느리는 곳, 그런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되어야 그분과 함께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증오가 그대를 얽어매는가?
용서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기심이 그대를 속박하는가?
사랑하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죄가 그대를 괴롭히는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재물이 그대를 집착하게 하는가?
나눠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죽음이 그대를 두려움에 가두는가?
부활을 믿어라.
자유로워질 것이다 (차동엽).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부활의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은 이 세상에 살던 개인의 고유성과 인격 전체의 부활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인간성에 대한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부활을 희망하는 만큼 삶의 부활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하느님의 뜻대로 쓸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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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파스카 성야 미사는 죄의 노예 살이 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어둠이 덮인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시어,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뻐하는 미사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 미사는 빛의 예식, 말씀 전례, 세례 전례, 성찬 전례로 구성됩니다.
빛의 예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그 밤을 기억하며,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다짐을 표현하고자 사제가 축복한 파스카 초에서 불을 댕겨 교우들의 초에 옮깁니다.
말씀 전례에서는 어떻게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구약의 백성을 선택하셨으며, 마침내 어떻게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신약의 백성과 인류에게 보편적 구원을 완성하셨는지 들려줍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일곱, 창세기 2개, 탈출기 1개, 이사야서 2개, 바룩서 1개, 에제키엘서 1개의 독서를,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둘, 곧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파스카 성야에 이처럼 길게 성경 말씀을 듣는 이유는 이 미사의 기본이 하느님 말씀의 봉독이며 경청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전례는 강론 뒤 이어지는데, 세례 받을 예비 신자가 있으면 이때 세례성사를 거행합니다. 그리고 성야 미사에 참석한 모든 교우는 세례 서약을 갱신합니다. 끝으로, 성찬 전례를 거행합니다.
모든 이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에 다시한번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성주간 전례 가운데 성삼일 전례, 그 가운데에서도 파스카 성야 미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이며 본질이고 정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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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김한수 토마스 신부님]
<어제와 다른 오늘>
소풍을 나서는 가벼운 발걸음은 아니었습니다. 죽은 이를 마주 대해야 하는 무덤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마주 대해야 하는 현실에는 상실과 허탈, 절망과 슬픔이 끝없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절망의 길을 나섰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합니다. 무덤이 비었습니다. 당혹스러워 건넨 말이 주님 부활을 암시하는 첫 말이 되었습니다. "누 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어제까지 일로 힘겹고 슬픔이 가득한 마음으로 나선 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빈 무덤, 예수님의 장례를 지내고 안식일 다음 날 찾아 간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복음서의 증언은 여러 사실과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유다이즘의 주간 첫날이 주님의 날이 되어 교회와 세상 역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유다 사회에서 증언의 유효성은 남성에게만 있었음에도 초기 교회는 부활의 첫 증인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부활에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측면에서 당혹스럽지만, 교회는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 마태 28,11-15 참조: 정원지기가 그분을 다른 무덤으로 옮겼다. 요한 20.15 참조)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맞이한 예수님의 무 덤이 비었다는 증언은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사건입니다. 빈 무덤의 상황은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고 이해 가능한 역사입니다. 수난에서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이어진 빈 무덤의 상황, 아니 그 이전에 말씀 선포자와 스승으로의 삶, 더 나아가 초라한 탄생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예수님 삶에서 신비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더라도 역사적 영역은 남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역사적 영역입니다. 예수님 생애에서 설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영역은 여기까지입니다.
빈 무덤부터는 다릅니다. 여기부터는 믿음의 영역입니다. 빈 무덤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는 신앙의 영역으로 들어섭니다. 빈 무덤을 대하는 당혹스러움은 모두가 한결같지만, 그 반응은 각자 다르게 이어집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 무덤에 서 희망을 엿보았습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곳에서 믿음과 희망이 시작되었습니다. 빈 무덤을 마주 대한 순간 절망 가득한 어제까지의 현실이 기쁨과 희망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빈 무덤에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작이며 핵심인 주님 부활 신앙이 피어납니다.
오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오늘부터 기쁨과 희망으로 새로운 길을 나섭니다. 슬픔과 절망이 가득했던 어제의 발걸음이 오늘은 새로운 기쁨의 소식으로 가볍습니 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빈 무덤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무덤이 비었을 뿐'이라는 냉소를 넘어 오늘 마주하는 빈 무덤에서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희망이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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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가 주님을 무덤에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20,2)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빈 무덤!>
마리아 막달레나가 첫 목격한 예수님의 빈 무덤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빈 무덤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여자들에게 천사는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24,5-6)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도 부활하라고, 그렇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조건을 내세우지 말고,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함께 기뻐하면서 부활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우리도 함께 부활합시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바탕이며 본질이고 정점입니다. 믿어야 할 교리의 핵심이며, 우리 신앙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기 위함이고,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부활의 삶을 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조차도 여자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헛소리로 여기며 믿지 않았으니...
왜, 그럴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부활은 나의 죽음으로부터 온다는 진리를 온 마음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기는 너무 싫고, 내가 조금도 지고 싶지 않고, 불편한 말 한마디 앞에서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나의 것을 조건 없이 내려놓지 않고서는 나의 부활은 오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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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주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40일간의 사순시기를 모두 지내고 우리는 예수님의 기쁜 부활을 맞이했습니다. 정말로 기쁘신가요? 혹시 반복되는 또 하나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시겠죠?
매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활’은 우리가 기쁘게 신앙생활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과연 기쁘게 부활을 맞이합니까? 매년 맞이하는 것이니 힘들지 않겠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생일을 기억해보세요. 매년 맞이하는 생일인데 왜 의미 있는 시간으로 생각하십니까?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은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갖게 된 기념일은 또 어떻습니까? 매년 똑같이 맞이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년 맞이하는 연중행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오직 신앙 안에서, 또 사랑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마치 주님께서 세 번이나 말씀하셨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아직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갑니다. 여기에 그녀는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향유를 바르려면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을 치워야 하는데,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다른 복음에서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갔다고 되어 있지만, 그래도 여자들의 힘으로 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덤에 향유를 들고 찾아갑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들고 무덤을 찾았지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요한과 함께 뛰어갑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서 보니 예수님의 얼굴에 쌌던 수건이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시신을 도둑맞지 않았다는 표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사랑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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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예수 그리스도님>
-“사랑하라, 선포하라, 추구하라”-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최대의 축제입니다. 때마침 온누리에 만개한 파스카의 봄꽃들 역시 우리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달빛 은은한 밤에 농장 배밭 활짝 핀 배꽃들이 환상적이라 날짜를 보니 엊그제가 보름이었고 문득 고려시대 이조년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난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말 충신 이조년이 유배시 일편단심(一片丹心) 왕을 그리며 쓴 시가 흡사 사랑하는 주님의 부활을 그리는 마음과 일맥상통합니다. 마침내 우리가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파스카의 봄꽃들이 늘 새롭듯이 주님 부활 축일도 늘 새롭습니다. 방금 강론전 화답송 후렴 시편과 부속가와 알렐루야는 얼마나 흥겨웠는지요! 일부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날이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부활 축일입니다. 얼마나 흥겨운지요! 오늘만이 아니라 날마다 이 시편 성구 짧은 노래 기도로 바치시면 좋겠습니다. 이어지는 샘솟는 기쁨에 힘을 주는 부속가 끝부분입니다.
“그리스도 죽은이들 가운데서 정녕 부활하심을 우리는 아노니 승리자 임금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그리스도 우리의 파스카로 희생되셨도다.”
어제는 4.16 세월호 참사 8주기 였고, 오늘 4월17일 대축일에 희생된 312명 모든 분이 주님의 자비로 주님과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습니다. 당시 사건일은 성주간 수요일이었고 당해 부활 대축일은 얼마나 착잡한 느낌이었던지요! 아직도 미진한 부분은 언젠가 반드시 해명되리라 믿습니다.
주님 부활하심이 우리에게 희망의 원천이 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주님이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사실 이런 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이 어둡고 험한 광야세상 무슨 기쁨, 무슨 재미, 무슨 맛으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저절로 나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그러니 참 좋은 주님 부활 대축일,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요,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신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과 만남의 은총이고 나머지 이웃에 대한 아가페 이타적 순수한 사랑은 저절로 뒤따라 옵니다. 참으로 자유롭게 하고 생명을 주는, 집착없는 초연한 아가페 순수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제자들이 빈무덤을 찾았고 사랑의 으뜸 애제자는 수제자 베드로에 앞서 달렸고, 겸손한 사랑의 애제자는 수제자 베드로에 이어 빈무덤으로 들어섰고, 전광석화, 빈무덤을 보는 순간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 부활을 직감적으로 믿었습니다. 짦은 말마디가 인상적입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다음 이어지는 말마디도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은 기억입니다. 언젠가 갑자가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의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부단히 읽고 묵상하고 믿으며 기억할 때 믿음의 은총으로 눈이 열려 주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다음 대목이 이를 함축합니다.
‘사실 그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빈무덤을 보는 순간 주님 부활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애제자는 평소 주님 사랑과 더불어 성서공부의 내공도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선포하라!”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주님을 만났다면, 체험했다면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저절로 활짝 개방하여 나누고 싶은 것이, 선포하고 증언하고 싶은 것이 영적 본능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예전의 비겁했고 겁많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저리도 용감하고 적극적인 주님 부활 선포의 증인이 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새삼 가장 좋은 복음 선포는 주님 부활을 체험한 직제자들처럼 내 자신이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되어 사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베드로의 힘찬 증언입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그분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1.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2.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 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자들의 우선적 책무는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증인으로 증언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새삼 관상과 활동의 선포는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주님의 관상가는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선포하는 증인의 삶에 충실한 활동가임을 깨닫습니다. 안으로는 관상의 마리아, 밖으로는 활동의 마르타로 주님 부활을 선포하며 증언하는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 “추구하라!”입니다.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하늘 나라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천상 비전이자 꿈이자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관상과 활동에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됩니다.
제2독서 콜로새서에서 바오로의 확신에 넘치는 우렁한 말씀이 우리에게는 샘솟는 힘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아, 바로 여기가 우리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천상 비전이요 돌아가야 할 궁극의 거처 본향집입니다. 그러니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깨달아야 참으로 사는 진짜 삶입니다. 땅에 있는 것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집착하지 말고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천상의 것들에 마음을 둘 때 저절로 집착없는 초연한 삶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이런 천상적 이탈의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천상맛을 체험해야 저절로 세상맛으로부터의 이탈이기 때문입니다. 참 좋아하는 시편 성구가 생각납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복되다. 그 님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시편34,9)
주님 맛을, 진리 맛을, 천상 맛을 맛들일 때 저절로 세상맛으로의 이탈이요, 비로소 무지로 부터의 해방에 자유로운 삶입니다. 다음 말씀이 참 신선한 충격입니다. 우리에게 무궁한 영감과 내적힘의 원천이 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아,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니요! 놀라운 말씀이요 구원의 말씀이요 참으로 오묘한 영적 진리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될수록 참나의 실현이자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는 주님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예닮의 여정”에 우리 모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바로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선포하십시오.
천상의 주님을 추구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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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axUVCuJI0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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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 1)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길이
펼쳐집니다.
무덤은 더 이상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둠같은 무덤도
사랑으로 열리면
빛나는 빛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무덤도 지나가는
하나의 여정이
되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결코 이룰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을
열려있는 무덤에서
다시 보게 됩니다.
삶의 이 순간이
기쁨으로
바뀌게됩니다.
돌아올 수 없다
여겼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다시 기쁨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사랑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주님께로 가는
모든 길이
열렸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쏟아지는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진심으로
기뻐합시다.
부활의 빛은
기쁨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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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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