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6·25 사변으로 아버님을 여의고 또 10대 초반에 조부모님 그리고 큰아버님을 여읜 다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이고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죽음에 대한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럴 즈음 바로 이곳이 이슬 같은 성신을 내려 구원을 주실 수 있는 주인공이 계시고 길(道)이 있다기에 이 역사의 첨병이 되고자 교역자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1967년 8월 교역자 지원을 하여 서울 제기동제단에 부관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그 후 1968년 8월 정관장으로서의 첫 발령지로 개척 교회인 서울 성동구 소재 금북 전도관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교역자에게나 첫 부임지에 대한 열의와 애정은 남다른 면이 있습니다. 2년 반 근무하는 동안 7명으로 시작한 교인이 100여 명까지 전도 부흥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열과 성의를 다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1968년 11월경 새벽예배에 처음보는 중년의 남자 한 분이 예배를 보러 나왔습니다. 예배 마친 후에 인사를 나누고 교회에 나온 동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최 선생)은 불신자였고 고등학교 교사로서 2남 1녀의 자녀가 있는데 여섯 살 된 큰아들이 백혈병(일명 혈액암이라고 함)에 걸려 절망적인 상황이라서 교회를 찾아가 하나님께구원의 손길을 호소하고자 이 교회 저 교회 찾아가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 문이 닫혀져 있고 새벽예배를 보지 않아 낙심하고 있던 중, 마주 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전도관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찬송 소리가 들려와 그 소리에 이끌리어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절실한 최 선생을 저는 진심으로 전도를 했고, 이 역사는 죄를 해결하여 구원을 주는 참 생명의 진리임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축복해 주신 생명의 능력과 기적을 소개하고 “그 은혜가 백혈병 정도는 얼마든지 완쾌시킬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전도를 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최 선생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온 가족이 새벽제단에 나오고 생명물을 받아다 마시며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불치병의 특징은, 합병증이 수반되면 면역성이 약해져 결국 그 병으로 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해 11월 하순 새벽 시간은 매우 쌀쌀했습니다. 그러나 11월, 12월 계속 새벽예배에 참여했지만 아들의 건강은 이상 없었고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들도 무척 신기해하고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더욱 열심으로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아들이 합병증으로 관절염을 앓아 걷지를 못하므로 부모들이 늘 업고 다니는 편이었는데, 하나님께 안수 한 번 받은 날부터는 걸어 다니게 되어 그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월 초 음식을 먹은 것이 잘못되어 소화 기능이 저하되더니 며칠 물도 먹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다가 1969년 1월 11일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가 보니 사망한 지 2시간 정도가 된 육신은 벌써 싸늘했고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제 심정은 형언할 수 없이 참담했습니다. 병고에 시달리다 숨져 간 어린 생명이 불쌍했고 슬퍼하는 부모에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무척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교역자로서 성의를 다해 장례 의식을 치르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에서 생명물로 씻어 곱게 피어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생명물을 바르니 생시의 병색이 사라지고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얼굴이 곱게 피어 잠자는 모습으로 화하게 되었습니다. 시신이 곱게 핀 것을 처음 본 부모나 이모들은 너무 신기하여 조금만 더 놔두면 잠에서 깨어나듯 살아날 것 같은데 왜 전도사님은 서둘러 장례를 치르려 하는지 모르겠다며 섭섭해했습니다.
7세의 어린 소년이라 당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영구차에 올라 장지인 망우리 고개를 향해 가며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어린 생명에 축복과, 슬픔에 잠긴 부모에게 하늘의 위로를 주시려고 찬송을 시작하자마자 코로 향취가 스쳐 지나간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은혜를 연결시켜 주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깊이들이마셔 보니 진한 향취가 마셔지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 기뻐 교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그들도 향취가 나는지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장지에 도착하도록 계속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드렸고 시간 내내 그 향취는 강하게 연결되었습니다. 부모는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픔도 잊었으며, 제 자신도 무거운 마음이 사라져 버리고 계속 감사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인 구원이 한낱 구호에 그치지 아니한 참 진리인 것을 깨우치시려고 성신이 역사한 것입니다.
망우리에 도착하니 1월 한겨울이라 눈이 발목까지 빠지도록 쌓여 있었으며 장지는 꽤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곳까지 운구하는 동안에도 향취는 계속해서 연결되었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길 적마다 최 선생께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확인시켰습니다. “지금도 향취가 나지요! 분명하지요! 세월이 흘러 먼 훗날이라도 '내 아들 장례식 때 향취로 축복하여 주셨다.'고 증거해야 합니다.” 다짐을 하며 장지로 올라갔습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성신으로 함께하시며 어린 영혼이 하나님 품에 안긴 것을 향취와 은혜로 증거하니 슬픔이 변하여 한없는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금북동교회로 돌아오는 길은 일반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그 버스 안에서도 향취는 계속 연결되었습니다. 최 선생 댁 마당에 들어서니 마당에도 집 안에도 여러 종류의 꽃향기 같은 향취가 가득 찼는데 그달고 오묘함은 세상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위로도 드릴 겸 그 가정을 방문했더니 그때도 향취가 그 가정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회의 많은 장례식에 조문을 가 보았습니다. 조문을 가게 되면 때때로 그중 대통령의 조화가 놓여 있는 가정을 보게 됩니다. 그 가정은 그것을 가문의 큰 영광과 위로로 여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생명이 세상을 떠나 그날로 장례를 치르는 서민 가정에 단지 감람나무 가지라는 이유 하나로 그토록 강하게 이슬성신과 향취로 역사해 주신 일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고 어느 종교 기록에도 찾아볼 수 없는 축복 중의 축복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이 가는 길이 참 생명의 도가 분명하다는 것을 은혜와 권능으로 해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 후 저는 가는 곳마다 무슨 일을 만나든 간에 자신감을 가지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이 역사를 알게 하시고 귀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신앙신보 105회 1996. 8. 4. 게재〉 이길원 (2)
첫댓글 잘 봤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하고 뚜렷한 증거를 꼭 가지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보고가요
잘보고가요
잘보고 갑니다~
따뜻한 내용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