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계몽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이다 - 아도르노와 퇴폐 미술전
나치의 ‘퇴폐 미술전’이 오히려 퇴폐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다
독일의 나치 정권은 1937년 7월 19일 뮌헨에서 ‘퇴폐 미술전’을 개최하였다. 퇴폐 미술전은 퇴폐 미술을 선전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당시 새로운 예술을 표방하고 나선 진보적인 예술들이 얼마나 타락하였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퇴폐 미술전에 전시된 작품은 나치 정권이 전국의 미술관에서 강제로 약탈한 것들로, 상당수가 초현실주의나 러시아 구성주의 혹은 오늘날 모더니즘의 거장으로 불릴 만한 화가들의 작품이었다.
칸딘스키, 〈소〉 The Cow, 1910
키르히너, 〈군인 차림의 자화상〉 Self-portrait as a soldier, 1915
클레, 〈피렌체 빌라〉 Villas florentines, 1926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혔던 작가들의 작품이다. 나치는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수많은 작품들을 퇴폐 미술로 선전하여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관객들은 오히려 퇴폐 미술전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은 퇴폐 미술전의 모순과 비슷하다. 합리적인 계몽주의가 어떻게 비합리적인 모습으로 변질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치 정권은 은근슬쩍 이러한 예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나 유대인들의 저급함을 폭로하고자 하는 의도도 지니고 있었다. 가령 구성주의는 러시아 사회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이며, 샤갈(Marc Chagall, 1887~1985)과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말레비치 등 적잖은 모더니즘 화가들이 유대인 출신이었다.
나치는 균형과 절제미를 상실한 채 퇴폐적이고 타락했으며 도덕적으로도 저급하기 짝이 없는 이 모던한 작품들이 사회적 반항아로서 사회의 혼란만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각인하고자 하였다. 이 전시를 통해서 나치는 진보를 가장하고 있는 반사회적인 예술가들의 선동에 대중이 현혹되지 않고 자신들이 내세우는 새로운 사회 건설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고자 한 것이다. 나치의 이러한 계몽적 의도는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먼저 나치는 뮌헨에 국한하지 않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13개 도시를 순회하며 이 전시를 열었다. 뮌헨에서만 200만 명의 관객이 이 전시를 관람하였으며, 나머지 도시 전시에서는 100만 명의 관객이 더 모여들었다. 흔히 블록버스터 전시로 일컬어지는 오늘날의 성공적인 전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성과였다.
두 번째로는 이 전시와 함께 전시된 또 다른 전시와의 관련성이 이 전시의 계몽적 의도를 잘 드러낸다. 퇴폐 미술전이 열리기 하루 전에 나치는 퇴폐 미술전이 열리는 곳 바로 건너편에 자신들이 모범적이라고 간주한 작품을 전시하였다. 여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그들이 퇴폐적이라고 폄하한 모더니즘 예술과 달리 전통적인 특징을 지닌 것들이었다. 이 전시의 목적은 게르만족의 우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처럼 보이고자 했다.
흥미롭게도 나치의 이 두 가지 계몽적 의도는 사실상 모두 실패로 끝났다. 우선 이 전시회가 3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계몽적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대다수의 관객은 이 전시물들이 얼마나 퇴폐적인가를 단순히 확인하기 위해서 왔다기보다는 전시 작품에 흥미를 느껴서 왔기 때문이다. 설혹 많은 관람객들이 나치의 계몽적 전략에 설득당해서 이 전시를 보러 왔다 하더라도 정작 전통과 단절된 이 이상한 작품들에 어느 정도 매혹을 느꼈던 것이다.
또한 퇴폐적인 미술과 대비하여 민족적 우수성을 선전하고자 했던 작품들의 효과 역시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가령 이른바 퇴폐 미술과 대비하여 건전한 독일 미술의 전형으로 내세운 작품인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 1900~1991)의 〈준비되어 있음〉(Be prepared, 1939)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나치의 군국주의를 표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실제로 이 작품의 분위기는 근대화 초기 시절 우리나라의 많은 동상들이나 현재 북한 곳곳에 설치된 위압적이고도 경직된 동상들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의 나치 정권은 자신들의 실패를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퇴폐 미술전의 실패가 주는 교훈은 아마도 다음과 같다. 계몽이란 비이성적인 주술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때로는 계몽 자체가 주술 못지않게 신화의 모습을 띠고 나타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계몽은 나치나 군부독재의 광기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나치는 예술을 효율적인 계몽의 선전 도구로 활용하였지만, 정작 예술은 단순한 선전의 역할에 종속되지 않는 그 이상의 힘을 지닌다. 나치가 계몽을 위해서 보여준 퇴폐 예술 속에서 정작 사람들은 어떤 예술적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예술작품만이 지닐 수 있는 힘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와 함께 독일의 ‘비판이론(die kritische Theorie)’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알려진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03~1969)의 가장 큰 문제의식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퇴폐 미술전의 모순과도 흡사하다. 이는 아도르노의 가장 큰 지적 관심이 서구의 가장 위대한 특성인 합리적인 계몽주의가 어떻게 나치와 같은 가장 비합리적인 모습으로 변질될 수 있는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것임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아도르노가 예술이야말로 변질된 계몽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상의 출구라고 생각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유대인이었던 아도르노는 나치의 위협을 피부로 느꼈으며 원하지 않았지만 미국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나치의 광기는 그에게 단순한 이론적 호기심 이상의 무엇이었다. 또한 어릴 적부터 음악가가 되기를 갈망하고 전문적인 음악 수업을 받은 아도르노에게 예술은 고난한 삶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치의 ‘퇴폐 미술전’이 오히려 퇴폐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