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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년∼180년)
흔히 철인 황제(哲人皇帝)로 많이 불리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다섯 번째 황제이자 로마 제국 제16대 황제. 공동황제로는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 외아들 콤모두스가 있다.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이자 <명상록>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철인 황제이자 선정(善政)을 베푼 현제(賢帝)로서 동시대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세 사가들에게까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와 더불어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는 명군이다. 아들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단죄되었음에도 뒤를 이어 등장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예에서 드러나듯 후세 로마 황제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자신의 롤모델로 많이 언급했다.
121년 로마 제국에서도 부유하고 명망높기로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루킬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할아버지,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이며 그의 부모는 모두 히스파니아 조상을 둔 히스파니아계 로마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3번이나 집정관을 연임한 사람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측근이자 황제의 인척이기도 했다.
3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요절해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에게 입양되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하드리아누스를 알현하면서 황제로부터 그의 총명함과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명문가 귀족 자제다운 예의바름 등을 사랑받았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어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안니우스 베르시무스(진리를 좋아하는 안니우스)’라고 부르며 손자처럼 예뻐했다. 그가 6살이 되었을 당시, 하드리아누스는 훗날 양자로 삼게 되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 베루스에게 어린 마르쿠스를 양자로 삼으라고 강요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가 루키우스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 베루스(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자신의 양자이자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때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약혼했다. 따라서 어린 마르쿠스는 이때부터 로마 정계 전면에 차차기 황제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2년 뒤인 138년 예비 장인인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명망높은 갈리아계 원로원 의원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자신의 양아들로 맞아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하드리아누스의 새로운 후계자가 된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는 어린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고모부였는데, 그가 바로 로마 제국의 제15대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이다. 이때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안토니누스는 자신의 처조카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죽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린 아들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양아들로 입적시켰다. 따라서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는 오늘날 잘 알려진 이름인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개명했다.
하드리아누스가 사망하고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자 안토니누스의 결정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케이오니아 파비아의 약혼을 파기됐다. 이때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 생전부터 차차기황제로 확정된 양자이자 처조카 마르쿠스를 자신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약혼시켰으며, 두 사람은 어린 파우스티나가 결혼적령기에 접어든 직후 결혼했다.
신격화된 피우스가 죽은 뒤 원로원에 의해 국정을 떠맡게 된 마르쿠스는 동생에게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콤모두스라는 이름을 주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하여 제국의 공동 통치자로 했다. 그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제국을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통치하면서 로마 제국은 처음으로 두 명의 황제를 갖게 되었다.ㅡ 로마황제열전
유례없는 23년간의 평온한 통치기를 보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161년 3월 6일 로마 근교에서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 중 장남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이때 40살에 접어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황제 즉위를 요청한 원로원에게 본인과 함께 동생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의 즉위도 함께 요청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최초로 40살의 마르쿠스와 31세의 루키우스 형제에게 황제 취임을 요청했고, 두 형제는 관례대로 먼저 사양한 뒤 재요청을 받고 제위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공동 황제에 올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즉위 전까지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일찌감치 제왕교육을 받아왔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능한 행정가이자 준비된 황제였음에도 그는 앞으로 있을 시련을 생각하면 군무 경험이 확실히 부족했다. 이는 마르쿠스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원인은 전임황제이자 아버지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제왕교육 방법 때문이기도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과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의 재위 첫 2년간은 위기가 가득했다. 수도 로마를 가로질러 흐르는 테베레강에서는 대홍수가 났고, 시지쿠스 일대에서는 지진이, 갈라티아 일대에서는 가뭄이 발생했다. 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도 반란이 발생했고, 국경 밖에서는 게르만족이 라인강을 건너온 뒤 제국의 국경을 위협했다. 이런 골치아픈 상황 속에서 잠잠하던 파르티아까지 그를 괴롭혔는데 젊고 야심많은 파르티아의 왕 볼로가세스 3세가 아르메니아와 시리아를 침공했다. 따라서 마르쿠스는 내치를 사실상 전담하다시피하면서 파르티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생 루키우스를 동방으로 보낸 뒤, 자신은 더 골치아픈 서방 전선으로 직접 달려가야만 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르쿠스는 즉위 당시 황제의 무거운 책임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좀 더 효과적으로 넒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동생이자 하드리아누스의 첫 번째 후계자 케이오니우스의 친아들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황제로 삼았다. 두 사람은 친형제가 아니었지만 우애가 두터웠고,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지만 처음으로 시도된 이 발상은 효과적이었다. 이 발상은 두 사람에게 얼마 안 가 불어닥친 자연재해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게끔 해줬고,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기 시작한 도나우 전선의 국방문제를 슬기롭게 대처하게끔 해줬다.
또한 원로원의 걱정과 달리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는 공동황제로서 나름 내치와 외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공동황제였음에도 즉위 직후부터 격무에 시달리는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짐을 크게 덜어주지는 못했다. 여기에 더해 본인보다 건강했던 루키우스가 일찍 요절해버리면서 오히려 재위기간동안 마르쿠스는 건강치 못한 몸상태로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본인이 득본 건 크게 없던 공동황제 발상은 선례를 남겼다. 따라서 후기 로마 제국은 황제를 여럿 두는 공동황제 제도를 통해 산적한 난제에 유기적으로 대처하게 된다.
∎ 루키우스 베루스와 파르티아 전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인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는 이 당시 미혼인데다 금발머리와 파란눈을 가진 잘생긴 남성이어서 로마 여성들에게 인기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원로원은 루키우스 베루스를 예의바르고 착한 사람으로 평가하면서도 즉위 전부터 낙천적이고 쾌활한 성격 탓에 지나치게 자기 탐닉이 강하고 싱글 생활을 즐기는 경박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형 마르쿠스를 대신해 동방으로 향한 이후, 연회를 즐기고 유람 여행에 치중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런 느긋하고 화려한 동방행에도 불구하고 루키우스 베루스는 현명하게도 자신에게 부여된 책무는 수행했다. 그는 자신을 보좌하는 장군들에게 시리아와 카파도키아에 주둔 중인 로마 군단이 훈련도 안 되어 있고, 기강도 해이해진 것을 지적하면서 기강을 잡고 철저한 훈련으로 군을 재편했도록 했다. 이때 마르쿠스는 동생 루키우스의 파견과 동시에 지시내린 강공책과 신속한 승리를 위한 전략을 수립했는데, 공동황제 신분인 루키우스는 형의 전략을 내팽겨치지 않고 잘 따랐다. 따라서 루키우스의 부관으로 임명된 스타티우스 프리스쿠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수도 아르탁사타를 함락한 뒤 불태웠으며, 냉혈한이자 엄격한 훈련교관으로도 유명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황제의 명으로 기강이 해이해진 동방속주 군단병들을 혹독한 훈련으로 조련시킨 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해 순식간에 에데사, 셀레우키아 등을 연이어 함락시켜 로마군의 승리를 가져왔다.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는 나란히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파르티아 전쟁에서 돌아온 군사들은 파르티아의 전리품과 함께 셀레우키아에서 시작된 전염병을 가져왔는데 이 전염병은 유행처럼 번져 167년에는 주요 거주지인 로마가 특히 전염병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로마군은 애써 점령한 셀레우키아를 포기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이러한 종류의 전염병은 몇 세기 만에 처음 발발한 것이었고, 콤모두스의 치세 중에도 빈번히 발생했으며, 10년 후까지도 창궐했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가 그 병으로 죽었다고 해서 안토니누스의 역병이라고 불렸는데, 이 병의 정체는 천연두 혹은 홍역으로 추정되며, 총 사망자 수는 400만 명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부터 로마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국방력이 약화된 주요 이유 중 하나로 이 ‘안토니누스의 역병’을 꼽는 사람들도 있다.
∎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침공과 동생의 요절
셀레우키아에서 시작된 전염병은 로마군의 셀레우키아 철수 당시, 소아시아를 시작으로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까지 유행을 타더니 제국의 중요한 방어선인 게르마니아 일대의 라인강과 도나우 강 방어선까지 번졌다. 여기에다 도나우 전선의 경우, 파르티아 전쟁 당시 대규모 병력이 동방 전선으로 차출되면서 방어인원이 줄어든 상태에서 전염병까지 번져 군단병들의 컨디션을 떨어뜨리고 사망자까지 발생시켰다. 이런 로마의 위기 상황은 당연히 도나우강 일대의 게르만족들인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등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따라서 이들은 풍요롭고 날씨도 살기 좋은 로마 제국를 대규모로 침공했다.
로마 제국을 침공한 게르만 군대들은 헐거워진 도나우 방어선을 뚫은 이후, 도나우 방어선의 보호를 받던 라에티아, 노리쿰, 판노니아 속주를 휩쓸면서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고 알프스 지방을 넘어가더니 본국 이탈리아 북부 지방까지 쳐들어와 아드리아해의 머리 부분에 자리 잡은 항구도시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 이 사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로마인 모두에게 충격이었는데, 이런 국가적 위기는 마리우스 시대 때 킴브리아인과 테우토네스인들의 이탈리아 침공 이후 처음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로마에서 기근이 발생해 이 문제로도 골치를 썩고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급히 원로원을 소집해 자신과 동생 루키우스를 이탈리아 북부 국경 지역으로 보내달라고 선언해야만 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갓 끝난 파르티아 전쟁과 연이은 자연재해로 국고가 바닥나고 있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원로원에게 이 문제를 불평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는 가장 쉬운 방법인 세금 인상을 배제한 뒤, 자신이 솔선수범해 황궁 내 황금 식기들과 값비싼 고급 예술품, 값나가는 물품들을 내다 팔아 텅 비어버린 국고를 채웠다. 그리고 그 어떤 황제도 시도하지 않았던 대규모의 노예해방을 지시해 해방된 노예, 이탈리아 일대의 화적떼들을 로마군에 합류시킨 뒤 검투사들까지 징집해 본국 방어를 위한 병력으로 충원했다. 동시에 마르쿠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에 전령을 보내 각 도시들을 요새화시켰으며, 알프스 산맥을 지나가는 통로들을 봉쇄시키고 도나우 일대에서 건너온 침략자들의 후방을 교란시키기 위해 로마에 우호적인 게르만족들과 저 멀리 있던 스키타이족까지 용병으로 고용해 서둘러 아퀼레이아로 향했다.
직접 군을 이끌고 아퀼레이아로 올라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위기에 처한 아퀼레이아를 탈환한 뒤, 계속 진격해 노리쿰과 판노니아까지 완벽하게 되찾았다. 이런 로마군의 반격에 당황한 적군은 급히 휴전을 요청했는데, 완벽히 침공자들을 박살내려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 요청을 마지못해 수락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파르티아 전쟁 후 지속적으로 로마군을 괴롭히던 전염병 탓에 아퀼레이아를 지키도록 편성된 수비대가 거의 전멸 직전에 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쿠스는 개운치 못한 휴전 요청을 받아들이고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로마로 돌아갔다. 하지만 169년 로마 회군 도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이자 장녀 루실라의 남편인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가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동생의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유일한 황제로서 산적한 국내외 문제를 홀로 책임져야만 했다.
∎ 도나우 전선에서의 게르만 족과의 전쟁
루키우스 베루스 요절 직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홀로 모든 현안을 떠안은 채 도나우 일대를 위협하던 마르코만니, 콰디, 이아지게스 족 뿐만 아니라 라인강을 침공하기 시작한 카티족, 벨기에 일대를 침공해 약탈하기 시작한 카우치족을 모두 상대해야만 했다. 북아프리카에서도 모로코 토착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평화롭던 히스파니아 속주까지 침공했다. 여기에 더해 황제령이던 이집트에서도 그 일대 유목민들이 나일강 삼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인 건 마르쿠스의 명을 받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신속히 이집트 반란을 진압해줬다는 점이지만, 이 무렵 마르쿠스는 최대 걱정거리였던 도나우강 일대의 게르만족들이 또 다시 위협을 가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금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170년 갈리키아 지방 동부에 살던 코스토보키족이 사르마티아족을 설득해 동맹을 맺고 도나우강 하류를 건너더니 모이시아 일대를 약탈하고 발칸반도로 남하해 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뒤 그리스 반도까지 쳐들어왔다. 이들은 부유한 그리스 일대를 휩쓸면서 남쪽의 아티카까지 짓밞고, 쫓기듯 도망치기 전까지 엘레우시스의 신비의 신전까지 약탈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격무에 시달리면서 쉬지도 못하고 이 사태의 원인이기도 한 도나우 전선으로 직접 향해야 했다. 169년 가을 로마를 떠나 추운 도나우 전선에 도착한 황제는 오랜 방어에 지친 군단병들을 위로한 뒤, 도나우 국경지대에 남아 가장 큰 위협인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이아지게스족들과 전투를 치뤘다. 이때 로마군은 마르쿠스와 그를 보좌하는 장군들의 계획에 따라 도나우강 도강 후 먼저 콰디족을 치고 마르코만니족을 공격한 뒤 마지막으로 아이지게스족을 박살냈다. 이때 황제는 이들의 본거지까지 공격해 이들에게 그들이 잡아간 로마군 포로들과 로마인 포로들을 되돌려 받았다. 동시에 전쟁 중에도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속주들을 복구했으며 16km나 되는 도나우 북쪽 제방을 새로 보수하고 그 일대의 주민들을 소개시켜 도나우 일대를 안정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는 전임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절에 태평성대가 지속됨에 따라 약해진 로마군의 체질도 다시 개선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본래의 인품과 성격답게 워낙 위기가 많았던 상황에서 내치에만 신경쓰지 않고, 로마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앞장서 직접 도나우 전선으로 향했던 황제였다. 격무에 시달리던 황제가 최전선으로 많이 달려 나갔고 직접 이민족들과 전쟁을 치루면서 체질 개선이 이루어졌는데, 마르쿠스의 이런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실전 경험과 헌신으로 이뤄진 로마군 개혁은 그가 죽고 난 뒤, 부적격자로 판정난 아들 콤모두스가 즉위해서 나라를 개판 5분 전으로 만들어도 국경선을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로마제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던 외적의 침입도 거의 없게끔 했다. 아울러 마르쿠스가 국경선 방어를 위해 배치한 장군들은 콤모두스가 나라를 내팽겨친 상황 속에서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다 제자리를 지켰다. 실제로 중앙정부와 황제를 인정하지 않고 대규모 내란이 일어난 것이 콤모두스가 측근에게 암살당한 뒤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나름대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한 황제이기도 했다.
∎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모든 것을 바쳐 동분서주했다. 이때 황제는 제국의 동방 방어와 안정화를 위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해 파르티아의 또 다른 도발과 동방 속주 내 소요를 통제하도록 했다. 시리아 출신인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냉혈한이었고 상당히 거친 사람이었지만 유능한 장군이었다, 따라서 마르쿠스의 이 인사 조치는 동방속주를 안정화시켰으며, 일대에 주둔 중인 로마군의 기강 유지에도 큰 효과를 이끌어냈다.
175년 황제가 가장 믿었던 장군인 시리아 속주 총독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도나우 전선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갑작스레 서거했다는 거짓 보고를 그대로 믿고 반기를 든 것이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정복 직전이던 콰디족, 이아지게스족과 서둘러 평화조약을 체결한 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황후 파우스티나와 어린 아들 콤모두스를 발칸반도에 위치한 시르미움(오늘날의 미트로비카)으로 부른 다음 동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황제 가족이 동방으로 출발하기 전에 동방 속주에 있던 군단 소속 병사가 반란을 일으킨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머리를 가지고 찾아왔다. 이를 전달받은 마르쿠스는 침통해하면서 거짓보고에 속아 반란을 일으킨 카시우스의 수급을 정중히 장례를 치뤄준 뒤 묻어주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계획대로 동방 속주로 행차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동방속주로 향하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동방속주들에게 다시 한 번 충성을 받았으며, 불충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색출했다. 이때 황제 가족과 수행원들은 황제와 함께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에서 모두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소아시아로 가는 동안 그가 30년 동안 유일하게 사랑한 여성인 아내 파우스티나를 잃었다.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애처가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동방 속주에서 백성들과 군단병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환호와 충성을 몸소 경험했음에도 가장 믿었던 장군과 가장 사랑했던 아내의 죽음으로 크게 울적해했고 고독에 빠져있었다. 따라서 176년 황제는 슬픔에 빠진 채 로마로 귀환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로 돌아온 직후, 두 가지를 결정 내렸다. 하나는 속주 총독을 임명할 때 출생지인 속주는 절대 맡기지 않겠다는 결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이때까지는 어떤 결점도 없던 외아들 콤모두스를 상속자 겸 공식후계자로 선정하는 결정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해에 게르마니아와 사르마니아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치뤘다, 이때 밑에서 언급되는 청동기마상 제막식도 거행했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였는데, 황제는 또 다시 쉬지 못하고 178년 도나우 전선으로 향해야 했다. 왜냐하면 제3차 마르코만니 전쟁으로 잘 알려진 콰디족, 마르코만니족 연합의 대규모 저항으로 시작된 충돌 때문이었다.
∎ 제3차 마르코만니 전쟁과 사망
178년 다시 도나우 전선으로 달려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건강은 이미 심각할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마르쿠스의 도나우 전선 복귀에 이어 아들 콤모두스도 뒤를 따라 도나우 전선으로 왔지만, 평소 책임감 강한 그는 젊은 아들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을 괴롭히던 지병들을 참으면서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고 충성을 맹세하던 로마군을 이끌고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들의 거센 저항을 막아냈다. 황제는 이때 아픈 몸을 이끌고 바바리아(바이에른) 지방의 레겐스부르크 일대를 시찰한 뒤 새로운 병영 기지 카스트라 레기나를 건설했고, 훗날 벌어질 침공을 대비해 방어선을 정비하며 항구적인 방어를 위해 점령한 지역을 두 개로 나눠 각각 마르코만니아, 사르마티아 속주로 이름을 지어 신설했다.
아울러 그동안 전쟁으로 피폐해진 다키아, 모이시아, 라이티아, 판노니아, 달마티아, 갈리아 속주에 정복한 게르만인들과 포로들을 이주시켜 로마 주민으로 정착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 조치는 본국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이뤄졌다. 포로로 잡힌 게르만 부족들은 이전까지는 노예로 팔리거나 광산 노예로 10년간 강제 노역에 시달렸는데 마르쿠스 시대 동안 벌어진 이런 시혜책들은 그들 입장에서도 이례적이었다. 자유를 얻는 조건으로 대규모로 로마 영내로 향한 게르만인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정책에 따라 항구적으로 제국 방어선 내 속주들과 이탈리아에 이주해 로마주민으로 동화되고 로마시민으로 완전히 편입됐다. 따라서 마르쿠스의 게르만족 대규모 영구정착 정책은 성공을 거뒀다. 이런 까닭에 그가 죽은 뒤 로마제국은 그가 정착시킨 게르만계 로마인들을 지속적으로 로마군으로 충원시킬 수 있었고, 그 일대의 사회와 경제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런 결정들을 도맡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80년 3월 17일 전염병에 걸려 자신이 설치한 병영기지 빈도보나(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서거했다.
떠오르는 태양한테 가라. 내 태양은 지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동시대에도, 현재까지도 역대 로마 황제 중에서 가장 탁월하고 가장 고결한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는 스토아 철학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당대 사람들도 인정했듯이 그는 위기 속에서 묵묵히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면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명군으로 추앙받았다.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보낸 전임자와 달리 그는 재위기 동안 군사령관이자 황제로서 힘든 삶을 보내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철학을 논하고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재위기간 내내 이민족과의 전쟁에 시달렸고 황제가 된 이후 계속해서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유행병이 퍼져서 제국은 혼돈으로 빠지고 있었다. 따라서 마르쿠스는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던 도나우 강 방어선에 로마군 최고사령관으로서 고된 국방 문제까지 앞장서 해결했다. 이런 격무들은 본래부터 건강치 않았던 그의 건강을 악화시켰으며, 끝내 로마 황제 최초로 전장터에서 황제로서 임무를 수행하다 오늘날 오스트리아에 위치한 도나우 전선의 빈도보나 병영에서 삶을 마감하게 만들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헌신과 노력은 위기에 빠진 제국의 상황을 최악으로 떨어지지 않게끔 만들어줬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색을 좋아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학자 타입이었음에도 오현제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추위에 덜덜 떨며 쿨럭거리면서도 최전선에 항상 나갔으며, 틈틈이 로마로 돌아와서 국정을 돌보고, 전장에서도 사무 처리를 하는 등 성실하면서도 근면한 태도를 유지한 황제였다. 따라서 젊은 시절부터 격무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된 황제가 힘든 전선 활동과 숙영지 생활을 군소리없이 견뎌낸 사람임을 모를 리 없는 그의 장군들과 직업군인들, 군단병들은 전력을 다해 그와 그의 가문에게 진심으로 헌신했다. 여기에 더해 마르쿠스는 젊은 시절부터 군무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술지휘능력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몸소 헌신해 메꿨으며 의외로 전략적 식견으로는 군사 분야에서조차 유능했다. 그래서 그가 죽기 직전의 로마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서 보헤미아 지역을 평정하고 있을 정도였고, 뒤를 이은 아들 콤모두스가 부적격자로 판정받았음에도 제국을 뒤흔든 내전이 벌어지지 않게끔 해줬다. 또한 전쟁 중 그가 취한 서방 속주 일대의 재건 사업과 게르만 포로들과 그들 가족들에 대한 시혜책들은 이후 로마 제국이 위기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줬다.
자질 있는 자를 양자로 삼아 자리를 물려준 선대 오현제들과는 달리 아우렐리우스는 무능력하고 불초한 친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이 자주 비판받고 있다. 그리하여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결과론적으로 아우렐리우스 시대를 끝으로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의 아들인 콤모두스 시대부터 로마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로 그의 잘못된 후계자 결정을 거론한다.
하지만 다른 황제들은 친아들이 없었기에 양자에게 물려준 것이지 일부러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다 잘했는데 그것만 못했다’는 식으로 씹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도 결국 제위는 친아들들인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물려줬다. 사실 후세 사람들에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런 이유로 비난 받는 건 뒤를 이은 콤모두스가 대단히 책임감이 박약하고 무능했던 황제여서이고, 이러한 문제는 세습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제정(帝政), 그리고 전제군주제라는 시스템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제위 세습 자체를 가지고 그를 비판하는 학자는 적어도 오늘날에는 없다. 다만, 자식의 부족함을 꿰뚫어보지 못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아우렐리우스가 알면서도 아버지로서의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는 변호도 있다.
하지만 콤모두스에 대한 평가의 실수라는 비판도 따지고 보면 결과론적인 관점이다. 마르쿠스 생전에 공동황제에 오른 콤모두스는 아버지 생전 당시 결격 사유가 없던 10대 소년이었다. 그는 정통성상 법적, 혈연적으로 문제가 없었고, 이 당시 성격적인 결함이나 무절제한 사치 행각, 잔인성과 폭력성, 무책임감을 드러낸 적이 없다. 콤모두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을 당시 불과 만 19세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큰 말썽은 피우지 않고 단지 또래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청년에 불과했던 콤모두스가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렇게까지 막장을 달릴 거라고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실제로 콤모두스가 본격적으로 일탈하기 시작한 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단독황제가 된 지 2년 후인 182년에 친누나의 주도로 시작된 암살 위협을 두 차례나 겪고 나서부터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극소수의 인물(알렉산더 대왕 등)을 제외하면 어떤 인물의 19세까지의 시절만 보고 이 인물이 위대해질지, 형편 없어지는 걸 감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어린 시절에는 막장이었다가 뒤늦게 정신 차려서 재능을 꽃피운 인물도 역사속에서 흔해 빠질 정도이다. 따라서 콤모두스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고 아버지를 탓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한 기준이다. 게다가 걸핏하면 전선에서 골골대던 아버지와 달리, 콤모두스는 체격이 건장하고 건강했으며 활동적인 소년이었다. 여가에 더해 아버지 생전까지는 사생활적으로 절제할 줄도 알았고, 검술, 창술 등 무기술 또한 뛰어났기 때문에 어쩌면 아버지보다 더 군무에 적합한 인물로 보였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암살 위협을 겪고 난 이후부터 모든 정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가지고 있던 재능으로 검투사 짓이나 했다는 거지만, 그것까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파악하리라고 기대하는 건 지나치다.
게다가 백번 양보해서 ‘자식의 부족함을 꿰뚫어봤다’고 쳐도, 이미 친자식이 있다는 점에서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멀쩡한 자식을 놔두고 다른 사람에게 제위를 양보한다? 그날부터 그 자식은 다른 야심가들의 유용한 쿠데타 도구와 명분이 될 것이다. 거기다 설령 다른 유능한 인재를 고른다고 해도 정통성에서 훨씬 앞서는 친자식이 있는 마당에 과연 제대로 황제 노릇을 할 수 있을까? 군주제 국가에서 친자식이 있는데, 그를 제치고 다른 사람을 제위에 앉히려면, 그리고 그것을 만인에게 인정받으려면 딱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 양자 입적 당시 그랬듯이 유능하지만 어린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적합한 대체자를 징검다리 역할로 선포해버리는 것, 둘째는 아우구스투스처럼 생전에 부적합한 후계자로 인식된 자식를 죽여 없애는 것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당시 그런 선택을 할 상황도 아니었고, 콤모두스는 태생적으로 그 정도로 결함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극약처방을 택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다시 말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생전의 당시 정세를 봤을 때 정국안정을 위한 친자세습은 불가피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영화 글래디에이터처럼 유능하고 충성심 강한 장군에게 승계하는 형태는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정복전쟁은 해야 하는데 명목상 최고 사령관인 황제가 전장에 직접 못 나가면 결국 전술지휘를 대행하는 장군들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신망있는 장군일수록 당시 유권자 즉 로마시민이기도 했던 휘하 군단병들의 지지도 모이고, 당시 로마군에 이런 장군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만큼 장군들 중 누구 하나가 후계자로 지목된다고 해서 나머지 장군들과 군단병들이 그대로 승복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내전사, 특히 삼황제시대만 봐도 증명이 된다. 실제로 콤모두스가 아무리 폭군이고 무능했다 해도 그 훌륭하고 존경받아 마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친아들이 제위에 오른 것만으로도 장군들의 준동을 억제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콤모두스 자체는 무능하고 나쁜 인물이었다 해도 그에게 제위를 세습시킨 자체는 제국의 평화를 어느 정도 연장하는 효과는 있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상술했다시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려서부터 그리스, 특히 학문 분야에 빠져있었다. 그는 유모의 보살핌을 받는 나이가 지나자마자 뛰어난 교사들에게 보내져 그리스 철학을 터득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의 저작이자 훌륭한 철학서라고 인정받는 《명상록》은 사실 전쟁터에서 그리스어로 쓴 것으로, 현대에 와서 이 명상록은 자기 개발서적인 명언집으로 잘 팔려나간다.
그리스에 가서, 이왕이면 아테네나 로도스 섬에서 서늘한 지중해 여름밤바람을 쐬며 동무들과 철학적 담론을 나누거나 그리스 비극을 감상하기만 바라는 사람이, 현실에선 맨날 비가 주룩주룩 오는 게르마니아 야만족 깡촌의 최전선에서 전쟁하느라 추위와 감기에 시달리며 칼 맞아 죽어 진창 위에서 썩어가는 야만족 시체 냄새나 맡고 살아야 했으니 짜증이 안 날 턱이 없다. 명상록에 “당신은 잘려 나간 사람의 팔과 다리를 본 적이 있는가?”라는 식으로 암시되어 있는 내용이 있다.
차라리 역시 열렬한 그리스 추종자였던 네로처럼 시원하게 한판 했으면 또 모르겠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단 그런 건 모조리 뒤로 제쳐두고 황제로서 해야 하는 일부터 모두 철저하게 했다. 국가 재정이 부족하면 황실 창고를 열어서 재정을 보강했고 몸이 건강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필요하다면 게르마니아까지 가서 전쟁을 진두지휘했으며 심지어 전장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 특히나 그 바쁜 와중에도 최고 재판장으로서 제국 시민들의 민사/형사 최종 재판도 심리하여 이런저런 현명한 판결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더군다나 스토아 철학에서는 ‘공동체의 선’(스토아 철학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므로 공공에 대한 개인의 헌신을 강조하지는 않았다.)을 중시하였으며 이는 로마의 지도층을 이끌어가며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지탱해온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록》의 주된 내용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에서오는 짜증,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극복과 같은 개인적인 내용도 있지만 공공에 대한 헌신 또한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상적인 황제로 여겨지고 후세에도 유명하며 당대에도 많은 황제들이 그의 정치를 이어 받겠다고 한 것도 그가 로마 제국을 지탱해온 ‘스토아 철학’의 완벽한 구현자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신은 철학적인 두뇌에 허약한 육체를 타고났음에도 자신에게 맡겨진 황제라는 직책에 맞게 공공을 위해 허약한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수많은 전투를 지휘했으니까.
이런건 누군가가 말하는 “단순한 이미지 관리”가 아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당대에도 덕(德)으로 유명했고, 심지어 그에게 반란을 선포한 자도 그가 덕이 있는 황제라는 것은 부인하지 못했으며, 고작 내세운 명분이 그가 눈이 어두워 간신을 써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라고 할 정도였다. 일반 백성들의 이미지도 산사태처럼 쏟아진 위기를 연약한 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다 해결하고 하얗게 다 타서 쓰러진 황제일 정도였으니... 후대의 군인 황제들이 즉위할 때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본받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이상적인 황제상으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