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右山) 윤현진 열사 (1892 ~ 1921)
우산 윤현진 열사는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158번지 내전부락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윤홍석(1843~1902)은 동래부사와 사천군수를 지냈고, 아버지 윤필은은 동래부사, 경상우도 관찰사, 동래부 감리서를 지낸 그야말로 구한말(대한제국말) 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윤현진 열사는 어려서부터 능력이 특별하여 만성재서숙(晩惺齋書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0세 때 경서에 능통하였다.
윤현진 열사는 1908년 숙부 윤상은이 세운 구포구명학교를 1회로 졸업하였고, 그후 중국 남경, 북경, 상해 등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외국의 여러 인물들을 접했으며, 1912년에 일본 명치대학교 법학과에 유학하여 조선유학생 학우회의 총무를 지냈다. 학우회는 1914년부터 학우회 소식과 각종 문학작품을 다루어 우리나라 학술계와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친 `學之光`을 발간하였는데, 윤현진 열사는 학지광 제5호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윤현진 열사는 1915년 경 일본에서 우리고장 양산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철수 선생과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1916년 초 김철수, 정노식, 장덕수 및 중국인들과 같이 신동아동맹을 결성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하는 한편, 1917년 고향인 양산에서 청소년들을 교육시키는 의춘학원(宜春學院)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일본 상인에 대항하기 위해 의춘상행(宜春商行)이란 소비조합을 설립, 운영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소비조합운동이었고, 1919년에는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3.1운동시에는 고향 양산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였고 한국유림의 파리장서운동(한국 유림대표
137인이 파리평화회의에 <한국 독립청원서>를 우송하여 조국광복의 열망을 전한 운동)에서 독립청원서의 영어 번역을 맡기도 했다.
이후 윤현진 열사는 3.1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인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고,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의 지방의원 선거에서 김창숙, 유경환, 김정묵, 백남규, 김갑 등과 함께 경상도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신익희 등과 함께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윤현진 열사는 상임위원회 구성에서도 재무위원장과 외무위원회 이사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정확보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백산무역의 설립에 관여했고 양산에서 `일금상회`와 `의춘양행`을 운영했던 윤현진 열사의 형인 윤현태 선생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도산 안창호 선생의 뒤가 윤현진 열사이다.)
또한 윤현진 열사는 김구, 김순애, 김철, 손정도 등과 함께 상해에서 의용단을 조직하여 국내조직과 연계하여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1921년 9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중 30세로 요절하였다.
윤현진 열사는 죽기 전에 조국이 독립하지 못하면 내 유골을 고향의 선산에 묻지 말며, 내 자녀를 결혼시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윤현진 열사의 죽음은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에 ‘형극 배일수완가 윤현진의 死(일본에 대항하는 수완가인 윤현진의 죽음)’라는 제목으로 실려 열사의 독립운동이 얼마나 지대하였는지를 가늠케 하였다.
윤현진 열사 장례식
윤현진 열사의 장례는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치러졌고, 임시정부의 안창호, 김구, 여운형 선생이 참석하여 애도했으며, 윤현진 열사의 형인 윤현태 선생은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한 동생을 기리며 상해 정안사 외인묘지에 안장된 윤현진 열사의 묘소에 ‘윤현진 묻음’이란 비를 세웠다.
양산시에서는 1959년 춘추공원에 기념비를 건립하여 윤현진 열사의 정신을 기렸고, 정부에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상해 외인묘지에 있던 유해는 1995년 대전국립묘지로 옮겨 안장했다.
춘추공원 내 장충단의 윤현진 열사 기념비 |
첫댓글 죄송합니다 컴퓨터 잘다루지 못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