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8일 미국에서 타계... 광복 이후 새로운 대중가요의 주역이었던 가수 송민도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에서는 지난 2012년부터 대중음악 관련 인물들의 사진과 생몰 정보를 담은 탁상달력을 제작해 왔다. '광복 이전 명가수'로 시작한 달력 주제는 2021년에 '광복 이후 명가수'로까지 이어졌는데, 2021년 달력의 첫 머리를 장식한 여성 가수가 바로 2월 28일 미국에서 100세로 타계한 송민도였다.
▲ 1957년 잡지 <명랑>에 실린 송민도 사진
1923년에 목사의 첫딸로 태어난 송민도는 1936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동기 중 하나가 1922년생인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였고, 2008년에 간행된 이희호 자서전에는 동기생 송민도에 관한 간단한 기술이 있다. 재학 당시 송민도는 학교 육상부 선수로 활약했으며, 뚜렷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노래로도 학내에서 꽤 유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40년 졸업 당시 상급학교 진학을 예정하고 있었다고 하므로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버지가 만주로 옮겨 목회 활동을 하게 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만주에서 결혼까지 하고 해방을 맞아 귀국한 송민도는 평범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로 살 수도 있었으나, 1948년에 중요한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48년 1월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전속 가수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들은 대부분 전속 가수 모집이 1947년에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분명한 오류이다.
▲ 서울중앙방송국 전속 가수 모집 소식을 전한 1948년 1월 <동아일보> 기사
새로 가수가 되기엔 다소 늦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집에 응한 송민도는 두 차례 시험을 무난히 통과하고 또 다른 인생, 가수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1948년에 실제 방송 출연을 한 기록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상반기에 첫 음반을 녹음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방송(문화)협회에서 제작한 <추억의 황성>이란 대중가요 음반을 보면, 함께 노래를 부른 가수들로 장정애·송숙방·옥두옥·김옥엽·이계운 등의 이름이 확인된다. 장정애·옥두옥·이계운 등은 당시 방송국 전속 가수였음이 다른 자료에서도 보이며, 송숙방이 아마도 송민도의 예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방송(문화)협회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방송협회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에 <추억의 황성> 음반은 그 전에 제작되었음이 분명하고, 송숙방이라는 가수 이름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방송 운영 주체에서 제작하고 방송국 전속 가수들이 녹음한 음반에만 보이는 송씨 가수라면, 송민도 말고는 다른 인물을 생각하기 힘들다.
▲ 1948년 상반기에 발매된 <추억의 황성> 음반 딱지
여러 동료들과 합창으로 녹음한 것이라 <추억의 황성>을 송민도의 데뷔곡으로 보기는 좀 애매한데, 1948년 하반기에는 확실한 송민도의 음반이 드디어 발매되었다. 정확한 발매 시점은 아직 알 수 없지만, 5월부터 음반을 내기 시작한 오케레코드에서 제작한 <고향초>가 실질적인 송민도의 첫 작품이다.
다만 <고향초> 음반에도 본명 아닌 송민숙으로 표기가 되어 있으므로, 본명 송민도가 여성 가수의 이름으로는 적당하지 않다는 의견이 당시 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초>
1949년이 되면 방송과 음반뿐만 아니라 공연에서도 송민도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례로 7월 국도극장에서 열린 극단 성군의 연극 <계승자> 공연에 방송국 전속 가수들이 합동으로 출연했는데, 그 명단에 송민도의 이름이 보인다. 공연에 함께 참여한 서울스윙킹밴드 멤버 송민영은 송민도의 동생으로, 이후 연주와 작곡은 물론 쇼 기획에서도 많은 활약을 했다.
▲ 송민도, 송민영, 손석우 등의 이름이 보이는 1949년 7월 극단 성군 공연 광고 일부
1948년에 가수 활동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송민도가 확실하게 인기 가수 반열에 오른 때는 시간이 좀 더 지난 1955년쯤이었다. 1949년 7월 공연에서 같은 무대에 서기도 했던 손석우의 작품 <나 하나의 사랑> 음반이 송민도의 노래로 발표되면서, 완연히 송민도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이후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 <청실홍실>을 비롯한 히트의 연속은 다른 글에서도 모두 언급하고 있는 바이다.
<나 하나의 사랑>
2021년 유정천리 달력에서 첫 번째 남성 가수로서 송민도와 나란히 등장한 현인이 사실 해방 전 이미 무대 데뷔를 했던 것과 달리, 1948년에 데뷔한 송민도는 명실 공히 해방 이후 한국 대중가요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인물이었다. 그저 데뷔 시기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창 스타일 확립이라는 점에서도 송민도의 의미는 중요하다.
▲ 현인, 송민도 등이 수록된 유정천리 제작 2021년 탁상달력
1940년대 후반에 데뷔한 신진 가수들 대부분이 종래의 가창 스타일, 이른바 '트로트' 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송민도는 데뷔곡 <고향초>에서부터 그와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상대적으로 낮은 음역에 잔가락 구사가 과하지 않은 송민도의 노래는 '세미클래식'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고, 당대 유명 성악가 한규동은 1957년 신문 기고문을 통해 송민도의 노래 <나 하나만이(나 하나의 사랑)>, <청실홍실> 등을 그 무렵 대중가요 중 '괜찮은 노래'라고 실제 평하기도 했다.
▲ <나 하나의 사랑>, <청실홍실> 등을 호평한 성악가 한규동의 기고문 일부
노래를 잘 부른다고, 또는 다른 분야 음악가의 호평을 받는다고 성공적인 대중가요 가수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중가요 소비 주체인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부침이 무상한 연예계에서 꾸준히 활동을 이어 가기는 매우 어렵다. 195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 송민도의 위상은 그런 점에서도 역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잡지 <삼천리>에서 1957년에 실시한 가수 인기투표 결과를 보면 송민도가 전체 5위, 여성 가수 중에서는 백설희에 이어 2위로 선정되어 있다. 또 이듬해에 잡지 <아리랑>에서 실시한 조사에서는 백설희를 꺾고 전체 2위, 여성 가수 1위로 선정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송민도의 시대를 연 대표작 <나 하나의 사랑>은 1959년 일간지 기사에서 2만 장 정도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정확한 통계에 근거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송민도의 대중적 인기를 살피는 데에는 충분한 자료가 된다.
한 시절을 풍미한 가수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화려한 성공담이 우선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열흘 붉은 꽃이 없듯 송민도의 활약과 인기도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뚜렷한 하강세에 접어들게 된다. 1970년대 초에 그가 생활 터전을 미국으로 옮긴 것도 그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허다한 대중가요 명곡을 남긴 가수 송민도에 대한 대중의 기억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유효할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중가요 역사상 처음으로 백수를 누렸다는 점은 노래에서 느끼는 감동에 비하면 그저 소소한 덤일 뿐이다.
[이준희 기자]
1995년 KBS 빅쇼
첫댓글 송민도 라면
나하나의 사랑 이죠
나혼자 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긍정적인 사람들은 먼 곳을 내다볼줄 안다. 그래서 삶에 대한 자세를 바로잡는데 마음쓸 겨를이 없다.
울 엄마가 생각나네요,
옛날에 옛날에 그러하듯이
어렴푸시 떠오르는 부모님 세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