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노래
('악의 꽃' 중에서)
샤를 보들레르
1.
머지않아 우리는
차가운 어둠 속에 잠기리.
잘 가거라, 너무나 짧았던 여름의 눈부신 빛이여!
벌써 마당 돌바닥에
장작 부리는 소리가
음산한 충격으로 내게 들려온다.
겨울의 모든 것들이
내 안으로 다시 돌아오겠지.
분노, 증오, 전율, 두려움, 피할 수 없는 고역.
내 마음은
북극의 지옥에 갇힌 태양처럼
붉게 얼어붙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귓전에 들리는
장작 던지는 소리 하나하나에
몸서리친다.
단두대를 세우는 소리도
이렇듯 음산하지 않으리.
내 정신은 육중한 망치를 얻어맞고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탑과 같구나.
저 단조로운 충격이 내 마음을 흔들어
어디선가 급하게 관에 못질하는 소리로 들린다.
누구를 위해서일까,
어제는 여름이었고 지금은가을인가!
떠날 때를 알리는 것처럼 들리는 야릇한 그 소리.
2.
나는 그대의 긴 눈동자에 어리는 푸르스름한 빛을 좋아해.
다정한 사람이여,
그러나 오늘은 모든 것이 씁쓸하네,
당신의 사랑, 아담한 방, 난로,
그 어느 것도
바다 위에 비치는 햇빛만은 못하지.
하지만 사랑해 다오.
다정한 그대여!
어머니로 있어 다오.
어머니가 되어 다오,
배은망덕한 자에게도,
건달에게도.
여인이든 누이든,
찬란한 가을이나 석양의
짧고 덧없는 순간의 행복이 되어 다오.
잠깐의 노고!
무덤이 기다리네, 게걸스레!
아! 그대의 무릎 위에
내 이마를 얹은 채,
정열의 하얀 여름을 그리워하며,
늦가을의 온화하고 노란 햇살을
맛보게 해 다오.
이 시는 '악의 꽃' 재판에 수록되어 있는데, '처녀와 같은 순진성'을 지닌 여배우 마리 부뤄노에게 바쳐진 작품이라고 한다. 초조하고 불안한 가을의 상념을 노래한 시이다. 1부는 닥쳐올 겨울의 음울함과 음향이 갖는 불길한 예감을 보여주고 2부에는 인생의 늦가을에 따뜻한 사랑의 정을 애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제 2부에서 "낙조의 한 순간, 그 따스한 정을 베풀어주오"라고 노래한 대목은 그의 실연을 암시한 듯하다.
보들레르 (Baudelaire, Charles-Pierre) [1821.4.9~1867.8.31]
파리 출생. 아버지는 62세의 원로원(元老院)사무국 고관이었고, 어머니는 후처로 28세였다. 이러한 부모의 연령 불균형이 이상신경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6세 때 아버지가 죽고, 이듬해에 어머니는 육군 소령 자크 오피크와 재혼하였다. 의붓아버지가 대령으로 승진하여 리옹에 부임하자, 11세 된 그는 리옹의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이어 리옹 왕립중학교의 기숙생이 되었다. 다음으로 군인 아버지의 파리 전근에 따라 루이 르 그랑 중학교로 전학했는데, 최고학년이 된 18세 때 품행관계로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러나 대학 입학 자격시험(리세)에는 단번에 합격하였다. 그 후 문학지망을 표명하여 양친을 실망시키고, 카르테 라탱을 방랑하며 방종한 생활을 하였다.
보다 못해 내려진 친족회의의 결의로 캘커타행 기선을 탔으나, 인도양의 모리스섬(모리셔스 本島)과 부르봉섬(프랑스령 레위니옹섬)에 체재하였을 뿐, 9개월 후에는 파리로 되돌아갔다. 이윽고 성년이 되어 의붓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상속하여, 센강(江)의 생 루이섬[島]에 거처를 두고 댄디슴의 이상을 추구, 호화판 탐미생활에 빠졌다. 흑백혼혈의 무명 여배우 잔 뒤발과 알게 되자, 관능적인 시흥(詩興)의 원천으로 삼았고, 평생의 악연(惡緣)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2년 동안에 유산을 거의다 낭비해 버리자 법정후견인이 딸린 준금치산자(準禁治産者)가 되었다. 24세 때 《1845년의 살롱》을 출판하여 미술평론가로서 데뷔하였으며, 문예비평 ·시 ·단편소설 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문단에서 활약하는 한편, 1848년 의붓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2월혁명의 폭동에도 가담하였다. 또 E.A.포의 작품을 번역 ·소개하였고 만년에 이르기까지 17년 간에 5권의 뛰어난 번역을 완성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배우 마리 도브륀과 연애관계를 가졌으며, 또 사바티에 부인의 살롱의 단골이 되어 그녀를 성모처럼 추키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 1857년, 청년시절부터 심혈을 기울여 다듬어 온 시를 정리하여 시집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출판하였으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벌금과 시 6편의 삭제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해 의붓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센강(江) 어귀의 옹푸루르 별장으로 옮겨 살았다. 1860년에 《인공낙원(人工樂園)》을 출판하고, 1861년에 《악의 꽃》의 재판을 간행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1864년, 벨기에의 브뤼셀에 가서 궁색한 생활을 면하기 위한 강연여행을 가졌으나 건강이 악화되었다.
1866년, 나뮈르시(市)의 생 루 교회를 구경하던 중 졸도하여, 뇌연화증(腦軟化症)의 징후로 브뤼셀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돌아와서 입원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여름, 실어증으로 46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는 오피크가(家)의 무덤에 묻혔다. 그의 사후,1868~1869년에 간행된 전집 속에는 고티에가 서문을 쓴 《악의 꽃》(제3판) 《소산문시 Petits po憙mes en prose》, 만년의 작품인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이 수록되었으며, 또 들라크루아 ·바그너 ·고티에 등을 논한 평론은 《심미섭렵(審美涉獵) Curiosit暴s esth暴tiques》(1869) 《낭만파 예술 L’art romantique》(1868)이라는 총제목하에 수록되었다. 또한 만년의 수기인 《화전(火箭)》 《벌거벗은 마음》은 《내심(內心)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보들레르의 서정시는 다음 세대인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그의 문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었다. 발레리는 “그보다 위대하고 재능이 풍부한 시인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시인은 없다”라고 절찬하였다. E.A.포의 지적 세계에 감동하여 낭만파 ·고답파의 구폐(舊弊)에서 벗어났으며 명석한 분석력과 논리와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간심리의 심층을 탐구하고, 고도의 비평정신을 추상적인 관능과 음악성이 넘치는 시에 결부한 점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첫댓글 좋은 글을 올려주셨네요!
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