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복 자식복이 많았다. 20년 동안 임신 상태였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많은 아이를 낳았다. 남편
프란츠 슈테판과 금슬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행사가 끝난 자리에선 평범한 가정처럼 소박하고 화목하게 지냈다. 프란츠 슈테판은 앞서 일화에서 보듯이 아내 비위를 잘 맞추어 주는등
데릴사위의 주제파악을 매우 잘해줬고, 여러대 근친혼으로 구성원들이 많이 줄어버린 합스부르크가문이 다시 번성하는
훌륭한 씨내리(?) 역할도 매우 잘해 주어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겐 최고의 남편감 이었다.
바람 핀건 빼고남
편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는 남편의 의견을 따랐다. 하지만 프란츠 슈테판 또한
자존심 강한 부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마누라에게 알아서 설설 기었다. 그러나 주체할 수 없는 프란츠 슈테판의 바람기 때문에
결혼생활 내내 마음고생이 심했다.
앞서 서술한 대로 유일한 동생인 마리아 안나의 경우 남편 프란츠 1세의 남동생 로렌(로틀링겐)의 샤를(카를)과 결혼해서
겹사돈 관계였다. 이쪽도 연애결혼인데, 아버지
카를 6세가
로렌 가문과 너무 단단하게 맺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바람에 이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카를 6세가 죽은 뒤에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서 합스부르크-로렌의 후손은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손만 남게 되었다. 프란츠의 동생 카를은 은근히 마리아 테레지아의 골칫거리 였는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과
7년전쟁때 계속해서 오스트리아 군을 지휘관이었다. 무능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때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계속 호구잡히며 허구헌날 맨날 깨졌고 7년 전쟁때는 좀 나아져서 한 두번씩 프로이센군을 격파 했다가도 결정적일때 또 호구잡히면서
결국 스스로 사임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선 남편의 시동생에다가 하나뿐인 동생의 남편이라 체면상(남편이 체면도) 짜르지도
못하고
또는 이길때까지 함 써보자는 고집으로 전쟁이 지는데 한몫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가 워낙에 먼치킨이라서 카를(샤를) 입장에선 억울할수도...
모
두 16명의 아이를 낳았고 이중 11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이들은 당대 유럽 궁정에서 놀라울 만한
생존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한게 아니었다. 매우 엄격하고 아이들을 거의 칭찬하지 않았다. 또한 아이들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커서 편애하는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다른 아이들을 항상 비교했다. 거기다 남편 사후에는 매사에 비관적인
어머니거기에 편애까지가 되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마리아 테레지아를 원망한 자식들도 있었다.
정
략결혼으로 희생시킨 딸들에게 항상 미안해하고 보상하고자 하였다지만 이미 먼 외국으로 보내버린 이상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고, 항상
편애의 대상이었던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결혼이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이처럼 통치자로서는 유능했으나 좋은
어머니는 못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명했으나 자기 자신부터가 그 말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았고, 딸들도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야심 또한 많았다. 마리아
아말리아와 마리아 카롤리나는 자신이 시집간 나라에서 남편을 제치고 권력을 휘둘렀다. 마리 앙투와네트 정도만 프랑스
대혁명이전까지는 어머니의 말을 잘 따른편이지만 어쩔 수 없이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 중 유아기를 넘겨 살아남은 자식들은,
- 마리아 안나 요제파 안토니아 요한나
1738~1789.
차녀지만 장녀가 3살 때 사망하는 바람에 사실상 첫째 아이 취급을 받았다. 아들을 기대했지만 딸로 태어나 마리아 테레지아를
실망시킨 불쌍한 딸. 뒤이어 동생 요제프가 태어나면서 거의 묻히다시피 했다. 19세 때 늑막염을 앓고 등도 굽어서 결혼 시장에
내놓을 수가 없자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했다. 병약하나 매우 총명하고 성실했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인 프란츠 슈테판만이 이를 알아주고 사랑해주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남동생인 요제프와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고 요제프의 아내인 이사벨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중엔 아버지마저도 등을 돌렸다. 훗날 아버지와는 화해했으나
요제프와는 끝까지 대립해 결국 요제프가 황위에 오르자 추방되다시피 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후 수녀가 되어 죽을 때까지
수녀원에 있었고 자선 활동에 대부분을 보냈다.
- 요제프 베네딕트 아우구스트 요한 안톤 미하엘 아담
1741~1790. 냉정하고 시니컬한 성격이었으나 가족들에게는 따뜻했다.차도남 마리아 테레지아의 첫 아들. 프란츠 1세 사망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 마리아 크리스티나 요한나 요제파 안토니아
4
녀. 1742~1798. 통칭 미미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딸, 덕분에 다른 형제들과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아름답고 총명한데다가 성격도 마리아 테레지아와 많이 닮았고 태어난 날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일이라 모녀가 늘 함께 축하를 받았다.
그림 실력도 뛰어나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는데 문제는 그걸 믿고 감시자 노릇을 자처하느라 어머니에게 형제들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잔소리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형제들은 크리스티나를 싫어했다. 더욱이 크리스티나는 형제 중에 유일하게 연애
결혼을 허락받았고, 결혼할 때 막대한 지참금을 가져갔으며 남편이 테셴의 공작으로 임명되었으며 락센부르크의 대저택까
지 하사받았기에 자매들이 특히 싫어했다. 덕분에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에는 형제들의 냉대와 경멸을 참아내야했다. 연애결혼하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프레스부르크에 있으면서 평생 마리아 테레지아의 곁을 지켰으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나중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녀를 가리켜 '어머니의 얼굴을 제일 많이 봤다'며 불평했을 정도.
- 마리아 엘리자베트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5
녀. 1743~1808.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중 제일 빼어난 미모. 애칭은 리슬.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부심으로 거만하고
경박했지만 크리스티나 못지않게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받았으며 크리스티나와 사이가 좋았던 거의 유일한 형제. 2녀 안나의 건강이
나빠진 게 엘리자베트의 탓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크리스티나와 짜고 큰언니 안나를 따돌리고 어머니와 안나 사이를 이간질했다.
덕분에 안나와 사이가 좋았던 아말리아와도 사이가 나빴으며 결혼과 수도원행으로 헤어진 뒤에도 계속되었다. 1767년 궁정에 천연두가
퍼지면서 아름다운 얼굴을 잃어버려 다른 왕실과의 혼담이 깨지고 말았다. 나중에 인스브루크 수녀원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 카를 요제프 대공
차
남.(1745–1761)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 프란츠가 가장 총애하던 자식 이었다. 형인 요제프는 조용하고 약간 내성적인
성격인것과 달리 외향적인 성격이었다고하고 다른 형제 자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지성을 잘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여 자식 중에서 편애해서 장남인 요제프와 라이벌 플래그가 성립했고 사이도 약간 불편했다고 한다. 형인 요제프가
당연히 그를 경계했고 자신도 야심을 숨기지 않을정도... 그러나 16세때 천연두로 사망한다.
- 마리아 아말리아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6
녀. 1746~1804. 예쁘고 재능도 있고 그림도 잘 그렸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기준에는 못 미쳤는지 차녀 안나와 함께 찬밥
취급 받던 공주. 크리스티나에 비해 애교가 없고 무뚝뚝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항상 아말리아를 크리스티나와 비교했기
때문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고, 이것이 점점 심해지면서 크리스티나를 매우 증오하게 되었다. 게다가 자신은 연인이 있었음에도
파르마의 페르디난트와의 정략 결혼으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해야했기 때문에 크리스티나와 어머니를 평생 미워하며, 어머니의 명령과
오스트리아에 이익이 되는 길과 반대를 걸었다.
- 페터 레오폴트 요제프
3남.(1747~1792) 그당시 장남은 후계자이고 전근대 이전은 사망률이 높기 때문에 차남 까지는 보험용으로 관심을 받지만, 3남인 탓에 성장기에는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둘째형이 일찍죽고 . 형 요제프 2세가 죽은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 레오폴트 2세가 된다.
- 마리아 요제파 가브리엘라 요한나 안토니아 안나
9녀. 예쁘고 유순한 성격으로 다른 형제들과 매우 사이가 좋았고 오빠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767년 빈에 천연두가 돌았고,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납골당에 기도를 하고 왔으나 아이러닉하게도 마리아 요제파는 그 직후 천연두에 걸렸고 결국 사망했다.
- 마리아 카롤리나 루이자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10녀. 1752~1814. 마리 앙투아네트 바로 위의 언니로 활달하고 강한 성격으로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사이가 좋았다. 마리 테레즈 샬로트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에서 땄고, 나중에 마리 테레즈가 '어머니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모를 가장 사랑하셨어요'라고 언급했을 정도. 그리고 원래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프랑스 왕세자와
혼담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사망한 뒤 요제파가 결혼했어야 할 나폴리 왕세자와 결혼하였다. 그러니까 바로 윗
언니가 죽어서 결혼 순서가 한줄씩 당겨진 것. 요제파 대신으로 나폴리로 시집간 이후에는 많은 자식들을 낳아 대가족을 거느렸다.
무능한 남편을 대신하여 나폴레옹에
의해 왕위를 잃을 때까지 나폴리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시에르즈리로 가기 직전까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당시 외교 표준언어이자 전 유럽 궁중의 언어는 프랑스어였는데,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소식을 접해들은 이후로
그녀는 평생 프랑스인들을 증오하여 프랑스어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에 의해 나폴리 왕국을 빼앗긴데다, 다름아닌 자신의
딸이 원수나 마찬가지인 사람의 아들 루이 필리프와 연애결혼하는 걸 봐야 하는 불행을 겪었다.
- 페르디난트 카를 안톤 요제프 요한 스타니슬라스
4남. 1754~1806. 모데나 공작.
-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11녀. 1755~1793.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다. 원래는 혼담이 없었으나,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죽은 이후 마리아 카롤리나 대신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했다. 야심만만하고 드센 언니들과 비교해서 유순하고 얌전한 성격이었으나 최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가장 안습한 인물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 막시밀리앙 프란츠 그자비에 요제프 요한 안톤.
5남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아이. 1756~1801. 후에 쾰른 선제후 겸 대주교가 된다. 머리가 나쁜데다가 무례하고, 자신의 지위를 지나치게 뽐내는 성격이어서 형제들을 항상 곤란하게 했다.
첫댓글 Good
잘배웟습니다
역시 신은 다주지않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