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연중 제22주일, 피조물 보호를 위해 기도하는 날) 영원한 법 나자렛 예수님 소문이 예루살렘 중앙정부까지 났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기다리던 메시아인지 알아보러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들은 놀라고 의아해하고 또 실망했을 거다. 그들은 시장처럼 부정한 곳에 다녀오면 요즘 말로 혹시라도 부정 탔을까 봐 손이나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 등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잔 그릇 침상들도 철저히 씻었다. 이는 전해 내려오는 조상들의 전통이었다. 물을 마실 때 혹시 보이지 않는 부정한 작은 벌레라도 물에 들어갈까 봐 채로 걸러 마시기도 했다(마태 23,24). 유난스러워 보이기는 해도 하느님 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마음만은 높이 사줘야겠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위선자, 눈먼 인도자라고 대놓고 비난하셨다. 겉으로만 지켰지, 속마음은 하느님 법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들이 거룩하다고 말해주기를 바라서 그랬다. 결국 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마태 6,2.5.16.) 바리사이란 ‘분리된 자’라는 뜻인데, 부정하고 불결해서 거룩하지 못한 것들에서 분리됐다는 뜻이겠다. 분리만 했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걸 거기서 더 나아가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함부로 단죄했다. 성전에 간 바리사이와 세리에 대한 예수님 비유 말씀에서 그 바리사이는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 율법을 지킬 때 씻는 거나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건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였는데, 그들은 그것은 실행하지 않았다(마태 23,23). 바리사이들은 거룩해지기 위해 분리했고, 거룩하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셨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거처럼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더 잘 알아 이웃을 함부로 단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간음죄를 저지른 그 여인을 사람들이 단죄하려고 했을 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는 예수님 말씀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돌을 놓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하느님 앞에서 꼿꼿이 서서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할 사람은 한 분뿐이다. 그분조차도 모든 심판을 아버지 하느님께 맡기셨다.
어렸을 때 성당에 들어가면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고 한쪽 무릎을 꿇어 십자가를 향해 인사했다. 서양식이다. 서양 교우들은 아직 그렇게 인사한다. 지금 우리는 공손하게 머리 숙여 인사한다. 바뀌었다. 예전에는 입으로 성체를 영했고 지금은 손으로 받아 모신다. 바뀌었다. 하지만 극히 일부 특별한 신심을 가진 교우는 아직 입으로 직접 성체를 모신다. 성체 신심이 순수하다면 그것이 잘못은 아니다. 서양 사제들은 미사 때 제대에 입을 맞춘다. 한국인 사제들은 공손히 인사한다. 서로 문화와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주일미사 참례 의무가 가장 큰 계명인 줄 알았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계명인 줄 알았고 그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지라고 여겼던 거 같다. 학교 결석은 해도 주일미사 궐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이 큰 잘못이라고 큰 벌을 받는 죄라고 은연중에 그렇게 배웠던 거 같다. 그런데 몇 년 전 코로나로 인해 거의 1년 동안 성당 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그건 영원한 하느님 법이 아니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주일미사 궐한 건 성체를 모시지 못할 정도로 큰 죄라고 고백하면서 이웃을 비난 험담하고 함부로 단죄했던 것들은 잊어버린다. 작은 벌레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켜버리는 바리사이들과 다를 게 없다(마태 23,24).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다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예수님은 수백 가지 율법을 요약하셨다. 그리고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고 가르치신 그대로 목숨을 당신 친구들인 죄인들을 위해 내놓으셨다. 오늘 듣는 야고보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주 잘 말해주는 거 같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1-22.27).” 이웃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돕는 거다. 사랑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완전한 모델이고, 그분이 우리의 법이다. 그분과 친할수록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영원한 법을 잘 구별할 수 있다.
예수님, 주님은 저희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저희에게 주신 영원한 법으로서 거기에 무엇을 보태서도 빼서도 안 됩니다(신명 4,2). 그 법이 저희가 하느님 백성이고 자녀이고 주님의 형제자매로서 위대한 백성임을 온 세상이 알게 해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희가 아드님과 더 친해지게 해주셔서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법인지 잘 분별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