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로 만들어진 검끼리 부딪힌 소리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소리였다.
흑의인의 검은 찌그러져있었고, 흑의인의 허리에는 무혼검이 반쯤 들어가 있었다.
"어 어떻게.......크억!"
내가 허리에 박혀있는 검을 뽑아내자 흑의인은 몸이 꺾으며 죽었다.
"쳇, 시시해라. 이런것들은 다 죽으라고보내는건가? 쯧쯧"
검에 묻은 피는 검을 한번 휘두르자 물 위의 기름처럼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검을 깨끗이 하려고 일부러 만들 때에 피가 묻지 않게 만든 것이다.
비밀천혈맹(秘密天血盟)의 부문주실.
"흐아아아 이 많은 서류들은 뭐야?"
"다 유현부문주께 밀어놓고 가신 서류들입니다. 부문주께서 마음이 아무리 넓다 하되
이렇게 많은 양은 처리 못합니다. 그리고 부문주님에 관련된 개인적인 서류들도 있는
것 같구요. 예를 들어 비무첩이라던지..."
사신(死信)직의 백영...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 신분이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다.
"으이그.. 머리가 지끈거린다... 우리 문파 근처의 산적을 처리하고 왔더니말야.. 문파로
돌아와서는 엄청난 서류더미에 깔려 죽어야 한다니.."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백영이 반격을 가했다.
"아니, 산적 하나 처리하는데에 1주일정도 걸리고 가져가신 은자 40냥은 뭐에 쓰신 겁니까? 산적이 물러가는 대가로 돈을 바라진 않았을테구요. 부문주님 성격에 다 죽이셧을 터이지요?"
"읔.. 그리 날카롭게 물어보다니.. 자자! 빨리 회의하러 가자 서류는 가면서 보고!"
내가 말을 돌려버렸다. 그러자 백영이 어쩔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효.....저두 가볼게요 그럼."
회의실에는 사신직의 4명이 모두 앉아있었고-백영은 방금 도착-, 장로들과 다른 간부들도 많이 있었다. 부문주 유현도 머리를 끙끙대며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후아~늦은건가?"
나는 서류더미를 책상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열심히 살폈다.
'끄응.. 흑월문(黑月門)의 문제가 거의 대부분이군..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는 문파중 이렇게 말썽인 문파는 처음이다. 조공날짜가 늦어지질 않나 여기저기서 사소한 일로 싸움을 내질않나... 에효...'
덜컥!
모두의 시선이 문쪽을 향했다.
문주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았다.
"에... 이번 회의의 주제는 흑월문에 관한 것과 우리 문파의 명칭에 관한 것입니다."
문주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회의의 분위기를 한층 엄숙하게 바꿨다.
"아 그 건이라면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부문주 , 이야기해 보시지요."
"제가 산적을 처리하러 갔을 때에 남궁세가의 자제를 한명 죽인 흑의인이 있었습니다.
그 흑의인의 품속을 뒤져 보니 흑월패가 나왔습니다. 즉 흑월문의 문원이란 이야기이지요. 흑월문은 정파측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 분명히 흑월문의 문원일 것입니다. 흑월문측에서는 남궁세가의 자제를 죽이고 그 것을 저와 남궁세가의 자제가 같이 산속으로 들어간 것을 본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우리 비밀천혈맹(秘密天血盟)측의 책임으로 떠넘길 생각인것 같습니다."
"부문주께서라면 멸문시키고도 남죠. 우리는 그동안 조공을 꼬박꼬박 거둘려고 흑월문을 놔두지 않았습니까? 지금이라도 멸문시킨다면 그쪽에있는 재물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위가 잠시 웅성거려댔다.
"조용히 하시죠. 그리고 우리 문파의 명칭에 대하여 논하겠습니다. 우리 문파는 비밀천혈맹(秘密天血盟) 이지만 문주나 부문주를 맹주 혹은 부맹주 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前)의 정파와 사파간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다가 정천맹, 흑천맹과는 따로 분리되어 남는 문파기리의 질긴 결합으로 인하여 생긴 엄연한 맹(盟)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비밀천혈문이라는 오명까지 생겼습니다. 우리는 정천맹,흑천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음을 밝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정천맹, 흑천맹 뿐만 아니라 비밀천혈맹까지도 같이 불려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증거로 지금부터 우리는 완전한 하나의 '맹'임을 증명하며 호칭도 바뀔겁니다. 정천맹과 흑천맹은 여러 문파들의 모임이지만 우리는 옛날에 정천맹 흑천맹보다 더 많은 문파가 모여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문파가 '맹'이라고 불릴 격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회의 마칩니다."
문주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지 않고 정해버렸다. 꽤나 입아픈 모양이다.
"아.. 여부맹주께서는 잠시 맹주실로 와주시죠?"
나는 맹주가 무엇을 물으려 하는지 알고있다. 크윽...
"네.. 후엥..."
맹주실로 들어서자 엄중한 분위기가 나를 압박했다.
맹주실에는 맹주 혼자 앉아있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흑월문을 멸문시킬 때에 입막음을 잘 시켜야 한다. 잘못하여 소문이라도 퍼져나가면 이상한 이야기가 나돌수 있다. 그리고.. "
"말씀하세요!"
문파 외로 나가고 서류를 밀려놓은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내가 다급히 말했다.
" 맹주가 되면 그런 식으로 서류를 밀려놓고 나가면 안됩니다. 내 말은 여기까집니다."
"맹주가 되다니요?"
"그건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것입니다. 서류는 재때 재때 처리하구요."
나는 밀려나다시피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채 맹주실을 빠져나왔다.
"히잉.... 뭐야.. 내가 알고싶은 것은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잖아..."
오늘밤은 흑월문을 멸문시키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크아아아악!!!!"
푸슛!
"크억!"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했고 바닥에는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었다.
그 처참한 싸움터 한가운데는 백발의 여인이 검을 든 채 감정이 서려있지 않은 얼굴로 달려오는 사람들을 베어나가고 있었다. 그 여인은 왼쪽 눈이 앞머리로 가려져 있었다. 때마침 달이 없는 초하루이기에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아~"
부맹주실의 문을 열자마자 피를 뒤집어쓴채 소리쳤다.
"헉! 유현.. 있었네?!"
삐질삐질... 아무도 없는줄 알고 소리쳤는데 유현이 귀를 틀어막고 미간을 찌푸린채 앉아있었다.
"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괜찮습니다 하핫..."
부문주실은 2명의 부문주가 공용하는 일종의 자료실이다. 잠을 자는 곳은 따로 방이 있었다.
"그 피는 뭡니까?"
" 아 이 피는 흑월문의 마지막 흔적이랄까?"
"흑월문이라면.... 설마 오늘 당장?"
"맞아요 ! 수수께끼를 잘 알아맞추시는군요! 대회에 나가도 되겠어!!"
"흐음...."
내 농담을 유현은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유현의 얼굴이 꽤 심각해졌다.
"음.. 그것도 좋겠네요.. 수수께끼라...."
"에엥? 무슨생각하는거야?"
"아 새로운 문원은 제 수수께끼를 맞추면 뽑는 것으로 할까 생각중인데..."
그랬다..... 유현은 진심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저런 융통성없는 으이그...'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 에효... 하나하나씩 수수께끼 낼 시간에 차라리 단체로 덤비게 해서 무(懋)로 판단하는 편이 나아"
"아니.. 문무를 같이 판단한다면 더 좋을 겁니다. 너무 무공에만 치우치면 그것도 좋지 못해요."
"그건 알아요 그래서 필기시험이 있는 거구."
유현이 그게 아니라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그 시험이 여지껏 옛날에 관한 것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그 문제들중에 즉석 문제도 몇개 첨가하는거죠."
"예예 알아서 하시구 난 먼저 자러 갑니다아!"
"에엑? 이렇게 서류처리할것이 많은데도요? 이미 기한이 지난 것들도 파다하다구요!"
"피곤하니까 대신 좀 해줘~ 흐아아아암~"
내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길게 하품을 해댔다.
"에효.. "
유현이 한숨을 쉬며 방금 한 명의 사람이 나가버린 문을 원망스런 눈길로 처다보았다.
"이걸......언제끝내.. 후아아아아~"
"목숨, 거셔야합니다 할아버지 "
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한번 적으로 인식하게 되면 죽여야 했다.
"헐헐헐.. 걱정 말고 덤비거라, 나만 목숨거는 것은 불공평하니 내가 이기면 그 검을 다오."
"차라리 제가 목숨을 걸죠 할아버지, 그리고 이제 갑니다."
맨 마지막 음성이 무혼심법으로 인해 낮게 깔렸다.
"무혼검법(無魂劍法)
오의
소흡혼(小翕魂)"
조용히 뇌까리며 검을 놀렸다.
검으로 베는 동시에 검의 능력으로 혼을 흡수하는 기술이다. 소(小)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그리 큰 타격을 주지는 않지만 상대의 정신상태를 흐트러지게 하고 머리를 띵하게 하는, 순간 다른 기술로 큰 상처를 입힐수 있는 기술이다.
할아버지의 검이 내 검과 겹치며 죽을 사(死)자 모양으로 그어졌다. 검기의 충돌 덕분에 멧돼지고기가 저 멀리로 날아가버렸다. 할아버지의 몸에는 내 검기로 인해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정신의 흐트러짐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헐헐헐, 아깝구나 "
"죽어!"
무혼심법이 일단 펼쳐지면 상대의 죽음을 볼 때까지 적군과 아군으로만 분류된다.
할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싸움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계속 기술을 써나가자 기술이 두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만큼 할아버지는 많만치 않은 상대였다. 내가 지친 만큼 할아버지도 숨을 헉헉대고 있었다. 역시 나이는 나이인가보다.
"무혼도법
살수(殺壽)의 장-
비전오의
천혈면수라검(天血面修羅劍)"
콰콰콰쾅-!
2가지를 보았다.
내 검에서 나온 백색의 검기와 할아버지의 검에서 나온 흑색의 검기... 그 두 검기가 서로 충돌했다.
그리고 난 밀렸다. 내가 ... 사부와 아버지 이외에 , 처음으로 밀렸다. 물론 내가 이세상에서 재일 실력이 좋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나와 겨루어본 사람 중에... 사부와 아버지 이외에.. 처음으로..... 어디론가 떨어진 것 같다. 위쪽에 헉헉대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상처로 가득한 할아버지가 보였다. 그 다음은..... 암흑(暗黑)...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 것인가?
'아냐! 질 리가 없어! 맹세했다구! 아버지와 사부 이외에는 날 이기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 두사람마저 뛰어넘겠다고!'
-아냐 넌 진거야.. 겨우 그런 할아버지한테!
'아니라구! 아니야! '
한참의 실랑이 끝에 빛이 보였다. 어둠속의 대화가 끝나고.. 빛이 보였다.
"얘! 정신차려봐! 어머어머! 이런 상처를 입고도 눈을 떳어요! 아빠, 빨리 와봐요 이 여자애 눈떴어요!"
머리를 두개로 묶은 여자애가 보였다.
그 여자애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빠를 열심히 불러대고 있었다.
어떻게 된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끙끙대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처음 보는것 투성이었다.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목검이었다! 목검... 여긴 어디길래 목검이 저렇게 즐비하게 늘어서있는거지?
"호오~ 역시 내가 먹인 약이 효과가 있었나보군!"
아버지인듯한 중년의 사내가 달려와서 자랑스레 말했다.
그 사내도 목검을 쥐고 있었다.
"여긴 도대체 어디에요?! 내가 있던 곳은 분명 산속이었는데!"
"산이라니? 이 주위에는 산은커녕 공원도 없어!"
여자애가 말했다.
여긴....아무래도 내가 살던 곳이 아닌것 같았다.
문을 열고 나와보니 넓다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얼굴에 무언가를 쓴 채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좀더 주위를 둘러보니 한 구석에 검이 보였다. 내 무혼검이었다. 너무 반가웠다.
"무혼검!"
"아, 저건 니가 가지고 있던 거야. 그런데 저거 엄청 무겁더라! 저거 들고다니려면 힘이.. 허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