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국문학 결산(다음 뉴스 담음)
2018년 한국문학은 페미니즘 깃발 아래 생산된 작품들이 장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원로 중진 신예들은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빛깔을 담아 묵묵히 정진한 도정이었다. 거죽에서 이는 바람이 한국문학의 전부처럼 보이는 것은 착시현상일 따름이다. 한국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문인들이 연이어 작고한 애석한 해이기도 하다.
한국사회 여성 현실에 대해 많은 논점을 제공하면서 페미니즘 필독서로 화제를 만들어 온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11월 말 누적 판매 부수 100만부를 돌파했다. 2000년대 들어 김훈 ‘칼의 노래’,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이후 세 번째 밀리언셀러로 연초 미투 바람과 함께 불어닥친 페미니즘 열풍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젊은 여성작가들이 독자들에게 각광받는 현상도 눈에 띄었다. 김금희의 첫 장편 ‘경애의 마음’을 비롯해 정세랑 첫 단편집 ‘옥상에서 만나요’가 대표적이다.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를 필두로 기준영 박상영 등이 집필한 퀴어문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점도 기록해둘 만하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중진과 원로급 작가들의 출간은 꾸준히 이어졌다. ‘완장’ ‘장마’의 소설가 윤흥길이 등단 50주년을 맞아 20여년째 집필에 매달려온 장편 ‘문신’을 선보였다. 개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들과 작가 특유의 풍성한 전라도 사투리 입말이 시종 질펀하게 판소리 사설처럼 깔려 있는 소설이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 한국문학의 ‘경박단소’(輕薄短小) 경향을 걱정했다. 대하소설도 단편도 장편도, 다양한 모양이나 분량으로 공존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데 이즈음은 현재 독자들이 가볍고 짧은 쪽을 선호하는 흐름을 보이니까 출판사들도 작가들에게 그 취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작금 한국문학 출판에 대한 날카롭고 적확한 지적이다. 소설가 김성동은 격변하는 조선조 말기의 이야기를 담은 대하 장편 ‘국수’ 전 6권을 27년 만에 완간했다. 소설가 한승원은 올해도 장편소설과 산문집을 내며 ‘살아 있는 한 쓰겠다’는 다짐을 실천했다.
한국문학의 허리 세대로 진입한 김종광 박형서 이기호가 동시에 신작 소설을 펴냈다. 이들은 모두 40대 후반이고 비슷한 시기에 등단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소설은 저마다 다른 빛깔이다. 윤영수 정찬 한창훈 고은주 윤성희 김숨 공지영 전경린 조경란 김별아 편혜영 정용준 안보윤 등도 소설을 펴냈다. 시 쪽으로 넘어가면 특별한 변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꾸준히 일정한 간격으로 시집을 펴내는 이들이 많았다. 김수영 50주기를 맞아 그를 새롭게 조명하는 전집이 출간되고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정록 유용주 시인이 나란히 시집과 산문집을 펴냈고, 나희덕 이대흠 최승호 허만하 김해자 조은 박라연 등도 시집을 펴냈다.
한국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문인들이 잇달아 작고했다. 한국 문단의 기념비적 작품인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이 7월 23일 별세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은 ‘시대를 기록하는 서기’라고 자임했다. 한국문학사 정리와 비평에 큰 족적을 남긴 평론가 김윤식은 10월 25일 타계했다. 그가 남긴 저서는 학술서, 비평서, 산문집, 번역서 등 200여 권이 넘는다. ‘밤이 선생이다’는 칼럼집으로 뒤늦게 인지도를 높인 평론가 황현산도 담도암과 싸우다 8월 8일 작고했다.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시인 허수경은 독일로 간 지 26년 만에 10월 3일 뮌스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49재가 동명스님(고인과 동인이었던 차창룡 시인) 주재로 북한산 중흥사에서 열렸다.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소설가 최옥정은 뒤늦게 빛을 보기 시작한 작품들을 뒤에 두고 일찍 떠났다.
국립문학관은 2016년 8월 제정된 문학진흥법에 따라 서울 은평구 기자촌공원으로 부지가 확정됐다. 활발한 문학 교류도 눈에 띈 한 해였다. 대산문화재단과 문화예술위가 주관하는 한·중·일 동아시아문학포럼과 한국문학번역원이 격년으로 진행해온 서울국제작가축제가 나란히 서울에서 열렸다. 광주에서는 제2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 경주에서는 한국·베트남 문학심포지엄, 청송에서는 제1회 한중 대표작가포럼이 각각 개최됐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떠난 지 50년, 여전히 뜨거운 이름 ‘김수영’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한국 문학에서 김수영은 여전히 뜨거운 이름이다. 1968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수영이 올해로 50주기를 맞았다. 48세의 나이에 작고했으니, 죽음 이후 그가 우리 곁에 머문 시간이 그의 생보다 길다. ‘김수영’이란 큰 이름과 달리 그가 생전에 남긴 시집은 <달나라의 장난> 한 권과 합동 시집 한 권이 유일하다. 오히려 그의 사후에 여러 권의 전집과 선집이 출간됐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그는 생전보다 사후에 더 문제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 50주기를 기념해 김수영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두 권의 책이 출간됐다. <시는 나의 닻이다>(창비)는 문학평론가 백낙청, 염무웅, 이어령, 황석영, 나희덕, 심보선, 송경동 등 21명의 작가와 학자들이 김수영에 대해 쓴 글들을 묶었다. 백낙청·염무웅은 대담에서 김수영이 활동했던 당시를 회고했다. 어디서나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내던 김수영의 생전 모습부터 한국문학사에서 김수영이 차지하는 위상을 짚으며 제대로 된 ‘김수영 읽기’의 방법론까지 모색한다. 당대 김수영과 ‘순수/참여 논쟁’을 벌였던 이어령은 ‘맨발의 시학’이라는 이름으로 김수영 시론을 재정립하며 “오랜만에 향을 피우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며 “서로 누운 자리는 달랐어도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희덕 시인은 “제대로 보려는 부단한 노력 없이는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김수영을 통해서 배웠다. 낭만적 미화마저 거부하고 구질구질한 생활의 발견과 반성적 의식을 견지하는 태도야말로 김수영을 ‘끝까지 바로 보려는 자’로 남게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권여선은 “세상에 두 종류의 감수성이 있다면, 한편엔 십대에 김수영을 읽은 쪽이, 다른 편엔 그렇지 못한 쪽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고 말한다. 소설가 황석영은 “김수영의 시는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낡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현대성을 유지하고 있다”며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도래한 가슴 벅찬 오늘의 현실에서 김수영의 시정신은 여전히 왕성한 현대적 핏줄을 가지고 살아 꿈틀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이영준, 고봉준 등 ‘김수영연구회’ 회원 14명이 집필한 김수영 시 해설집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민음사)도 출간됐다. 김수영의 대표시 116편을 선정, 김수영의 시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썼다. 제목은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쓴 전후의 첫 작품 ‘달나라의 장난’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너도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다음 뉴스 담음)
눈/ 김수영(1921~1968)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눈 / 신경림(1936~)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 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 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 한낱 눈물 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었다 해도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1947~)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첫눈/신성수
그해 첫눈이 내렸던 날
아내의 전화는 급하였다.
넘어졌어요.
그날 119는 왜 떠오르지 않았을까
차 시트에 남은
혈흔을 닦아내면서
정말 많이 울었던 날
내 사랑은 겨우 낱말이었다.
후우 불면 쉽게 흩어져 버리고 말
그런 드러냄이었다.
언제나 뒤늦은 회한(悔恨)이었다.
삼십년 세월
기꺼이 내가 되어 준 사람
허물이 되고 아픔이 되어 준 사람
겨울이 되면서부터
아내는 양말과 손톱 깎기를 내밀었다.
힘들어요.
나는 무릎을 굽히고 안경을 벗고
아내의 발가락을 쥐었다.
올해 첫눈도 무섭게 내렸다.
첫댓글 2018년 12월 29일(토) 백영수미술관 탐방 및 한국문학 결산과 타계 50주년을 맞은 김수영시인 기사를 다음뉴스에서 인용하였고 '눈'을 주제로 한 시 몇 편도 인용하였으며 부족한 제 시 '첫눈'을 운문분과 모임 자료로 준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