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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17
12월27일[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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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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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NAEvDU0D0OI
[서울대교구 구본석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행당동성당 부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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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 사랑의 사도, 사도 요한!>
열두 사도 중에 제일 오래 살았던 사람, 끝까지 남아 초기 교회 건설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그에게 있어 한평생에 걸친 화두는 오직 ‘사랑’, 특히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노년에 접어든 사도 요한, 나보다 더 사랑했던 그분, 내 몸보다 더 사랑했던 그분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온몸을 바친 그의 얼굴에는 비록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었는데, 바로 ‘사랑’이란 글자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저녁마다 제자들을 불러 모아 대화를 주고받곤 했습니다. 애제자 요한의 옆에는 사도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온화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이제 연세가 들어 어눌해진 사도 요한의 발음이었습니다. 귀를 쫑긋 새워 새겨들어야 겨우 알아들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제자가 사도 요한에게 참고 있던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요한 스승님, 스승님 대화의 주제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입만 여셨다 하면 사랑 타령이십니다. 스승님, 세상에는 사랑 외에도 중요한 문제가 많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이 없으시니, 대체 왜 그러십니까?”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언제나 예수님 근처에 머물러있길 원했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 옆자리에 앉길 원했고, 그분 사랑을 독차지하기를 원했던 그는 웅얼웅얼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했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사랑...사랑...사랑이 전부입니다. 사랑밖에 난 몰라요. 사랑 이외에는 배운 것도 없고 사랑 이외에는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 그는 참으로 사랑의 사람,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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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bbPr5v7a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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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은 일반인보다 더 외로울까?>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분명 예수님을 사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골고타 위에까지 예수님과 함께 머문 유일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무덤에 첫 번째로 도달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는 사람들을 자신과의 친교로 이끕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엔 하느님과 또 사람과의 친교가 안 돼 자기 자신과 지하 세계의 것들과 친교를 맺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은 매우 외롭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둠의 세력과 친구가 됩니다.
요한이 사람들을 자신과의 친교로 이끄는 무기는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평화’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그분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바로 마음의 평화를 주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바라는 게 바로 평화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이때 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만, 여전히 살아계신다는 사실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해주는 이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자신과의 친교로 남편과 나누는 친교에 자녀를 참여하게 합니다. 자녀는 그 덕분으로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친구를 얻는 법입니다.
AIA 생명에서 만든 동영상입니다. 뇌사 진단을 받은 10대 소년이 장기 기증으로 새 생명을 나누고 떠났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중 교사 대부분은 마지막까지 학생들을 구하다가 의로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우리 타니까 불러줄 것만 같아요. 제자도 하나 보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제 흔적도 없잖아요. 흔적도 없잖아요.”
“흔적도 신랑의 빈자리가 많이 느껴지죠. 이렇게 되어 신랑 생각하면 저는 그냥 아까운 생각 그게 제일 커요.”
그렇게 시작된 작은 응원. 한 단체에서는 남겨진 가족이 아픔을 극복하고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4주간의 심리 치료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그리고 이별한 가족에 남아 있는 사진과 영상을 수집하며 얼굴과 음성의 특징은 전문가들이 분석하고 사진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더해 갑작스럽게 떠난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죽은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다든지 듣고 싶은 말을 듣게 되는 일들이 만들어진다면 슬픔을 극복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40일의 상담이 끝나는 날 상담사는 말합니다.
“오늘 이제 편지 읽으실 거예요. 마음을 터트려 놓는 거예요.” 이분들은 자신들이 떠나보낸 이들에게 써 온 편지를 읽습니다.
“보고 싶은 내 신랑 여보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이제 곧 튼튼히도 태어날 텐데 당신 없이 내가 잘 낳고 키울 수 있을까?”
“그토록 사랑했던 들어가 생일날 영원한 수학여행을 떠나고 말았고 너의 생명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게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으니 우리야 대견해.”
그렇게 못다 한 이야기를 전하는 동안 한 통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받자 자신들이 읽어주고 있던 자녀와 남편이 화상으로 등장하여 그들의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아빠 나 잘했어요. 사랑하는 제자들이랑 진짜 잘했어요. 난 해야 할 일을 했고 그래야만 했어. 나를 이런 선생님으로 키운 게 우리 아빠잖아. 고마워요, 아빠.”
“비록 저는 엄마의 곁을 빨리 떠나게 됐지만 저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탄이도 언제나 엄마 곁에 있는 거예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튼튼히 만날 준비는 잘하고 있지? 튼튼히 태어나면 용감한 경찰이었다고. 그리고 우리 시누도 아빠가 항상 곁에서 지켜줄 거라고 이야기해줘 오래오래 살다가 예쁜 할머니 돼서 와.”
이분들은 그것이 컴퓨터로 생성된 영상이고 목소리인 것을 알지만 큰 감동을 하고 마음의 위로를 얻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나타났다는 생각이 반가움에 또 서러움에 말하는 거 같아서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을 알고 이렇게 하셨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좋았어요.”
이미 자신들 곁을 떠나 영원히 그리워해야 하는 대상의 목소리와 마음을 전해준 이 단체는 이제 그들에게 평화를 주어 희생자들 유가족에게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영원한 친구가 되려면 영원한 것을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제가 어떤 건장한 예전엔 알아주는 조폭이었다는 사람을 한 마디로 울린 적이 있습니다. 그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딸이었습니다. 저는 그 딸이 마치 아빠 보고 걱정하지 말고 잘 살다 나중에 하늘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울었습니다.
친구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줍니다. 그러나 나를 아주 짧은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친구를 만나면 안 되고 그런 친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탐욕과 술이나 쾌락, 명예와 인기처럼 순간 부풀었다가 꺼져버리는 것을 주려는 이들은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이들은 마치 선악과를 건네는 하와와 같습니다.
영원한 것을 주어야 영원한 친구가 됩니다. 하늘나라를 주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주어야 하고
평화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것을 받으면 영원히 감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불안을 없애주는 평화를 가져다줍시다. 만약 그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었다면 나는 그 사람과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를 전해주십시오. 영원한 친교를 이룰 친구들이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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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배 신부님과 포트워스에 다녀왔습니다. 포트워스에는 서울대교구 신부님이 한국순교자 성당에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있으면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신부님은 음식을 잘하였습니다. 청소도 잘 하였습니다. 덕분에 매일 즐거운 식사를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일주일에 두 번 대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5년 있으면서 일본말을 배웠듯이, 미국에서 5년 있으면서 영어도 배우겠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신부님의 성실함이 부러웠습니다. 신부님은 중남부 한인 성당 사제단의 대표를 맡았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입니다. 번거롭고, 부담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맡았습니다. 신부님의 집무실에는 본당 관할 지도가 있었습니다. 그 지도 위에 교우들이 살고 있는 ‘집’이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부임하면서 교우들의 집을 방문하여 기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에게서 최선을 다하려는 열정, 십자가를 지려는 헌신, 교우들을 향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제의 모습이고,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사도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일 저녁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신학교 때 배웠던 ‘원죄론과 구원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원죄론이 보편적이라면 구원론도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구원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익명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열려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이비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병들게 하기에 멀리해야 하지만 이단과는 공동선을 위해서 함께 대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일치를 향한 결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단과의 대화를 넘어서 이웃 종교와의 대화도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더 나가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모든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잘 지키고 보존하자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연대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년에 있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투명한 정치, 깨끗한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는 깨어있는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에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겨울밤이 깊어가도록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전승은 요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성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교회의 귀중한 보물인 요한복음,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의 저자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서 늘 가까이 데리고 다녔던 제자 중에 한 분이셨음을 알려줍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말씀이셨고,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분, 말씀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칫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머물 뻔했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적인 주제들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8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과 15장에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주는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요한 사도의 겸손함을 보았습니다. 그토록 사랑을 받았던 요한 사도는 베드로 사도보다 앞서서 빈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 사도는 그 중요한 일은 베드로 사도에게 양보하였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많은 일들이라도 생각만 바꾸면 다른 이들이 해도 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 때문에 실수하고 잘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리를 포기하고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실수와 잘못을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요한사도의 겸손함을 배운다면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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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2-8: 부활 날 아침 무덤에 간 제자들
오늘은 사도 요한의 축일이다. 본시 전례는 성탄 다음 날을 성 스테파노 축일로 정하였고 그다음 날을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게 하고 있다. 스테파노 성인은 교회사에서 첫 번 순교자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생명을 바쳐 증거하신 성인을 먼저 지내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 당신의 일생을 통해 그분이 사랑이심을 증거한 요한 사도를 오늘 기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도 증거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 항상 사랑의 삶으로써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빈 무덤 이야기가 나온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무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 사도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의 으뜸 수위권이 나타난다.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주님의 부활을 믿은 첫 사람이 된다. 무덤 안에는 수의가 흩어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고 한다. 이 수건은 얼굴에서 치워진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고, 하느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도 수건으로 가려야 했다.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얼굴은 인간으로서 관상할 수가 없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봄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므로 더는 수건이 필요 없게 되었다. 요한은 실제로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복음에서 말하고 있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과 나누었던 친교는 제자들만 누리는 특권은 아니었다. 요한은 이 친교를 전 교회 공동체가 나누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그분과 진정한 친교 안에 살고 있는가? 또 나의 형제자매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산다면 이것은 우리의 특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이 특권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여야 한다. 이 특권은 끝까지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특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 순간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나를 주님 앞에 낮출 수 있는 삶,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살고 실천하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신 그분을 닮을 수 있다. 우리도 성탄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그분과 나누고 있는 친교의 기쁨이 나의 것으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우리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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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우리는 요한 사도를 기억합니다. 공관 복음서에 따르면, 요한은 자신의 형인 야고보,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거룩한 변모 사건에서 드러났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겟세마니에서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제자였습니다. 넷째 복음서는 성인을 지칭할 때, 요한이라는 이름 대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를 달리 ‘애제자’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런 특별한 호칭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복음서는 요한 사도가 어떤 이유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지 자세히 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여 보입니다. 그도 예수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애제자의 사랑은 예수님 수난의 때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한나스에게 끌고 갔을 때, 그는 저택의 안뜰까지 들어가는 용기를 보이며 바깥뜰에서 스승과의 관계를 부인하던 베드로와 대조된 모습을 보입니다.(18,12-27 참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는 예수님 곁에 남아 있던 유일한 제자였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게 됩니다(19,25-27 참조). 특히 오늘 복음에서 그는 베드로와 함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가는데,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릅니다. 예수님을 향한 애틋한 사랑, 그리고 부활의 현장을 한시라도 빨리 목격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그토록 빨리 달려가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그만큼 누군가를 또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크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 사랑의 크기를 잘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렇다면 우리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께 얼마나 큰 용서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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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1요한 1,1-4)
이 말은, ‘예수님은 생명이신 분’이라고 증언하는 말이고, 예수님을 믿어서 생명을 얻으라고 권고하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예수님에 관한 ‘복음 선포’입니다. 사도들의 직무 가운데에서 첫 번째 직무는 복음 선포입니다. 요한 사도는 복음서와 편지들과 묵시록을 기록함으로써 ‘글’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한 사도입니다. 그의 글들 자체가 중요한 업적이지만,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라는 고백과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라는 고백은 특히 중요한 업적입니다. 그 고백은, 주님께서 내려 주신 계시에 그 자신의 깊은 묵상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한처음부터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존재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예수님의 삶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했음을 뜻하고,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라는 말과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라는 말은, “생명이신 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라는 말은, “예수님은 생명이신 분이라고 우리 사도들이 증언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증언합니다.”라는 말은, 자신의 목숨과 인생 전부를 걸고서 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라는 말은,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여러분을 초대합니다.”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는 함께 구원받자고 초대하는 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라는 말은, 요한복음 1장 2절의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고, 이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며,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복음을 선포하는 이유를 설명한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다음 기도에 연결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이 말씀에서 ‘알다.’라는 말은, ‘친교,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것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서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요한 사도의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여러분도 우리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복음을 선포하는 이유는 ‘모두가 함께 살기를 바라기 때문’인데, 그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당신과 함께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나도 바라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하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라는 말은, 편지를 쓰는 이유를 설명한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라는 기도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당신이 누리고 있는 기쁨에 동참하라는 초대이고, 우리가 하는 선교활동은 함께 그 기쁨에 동참하자는 초대인데, 여기서 ‘기쁨’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평화를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복음 선포는 ‘너’를 위한 일이고, 동시에 ‘나’를 위한 일입니다. ‘기쁨’이란 원래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서만 평화를 누리고, 혼자서만 행복하게 사는 것은, 평화도 아니고 행복도 아니고 기쁨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고독’일 뿐이고,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일에 그렇게 혼자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고 고립시키는 것은 당연히 범죄입니다. 우리는 외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관심을 두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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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첫 번째 부활 이야기입니다. 20장 1절에서 언급된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은 안식일 다음 날,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앞선 수난 이야기와 시간적 간격을 유지하면서 예수님 부활 이야기의 시작을 알려 줍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빈 무덤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합니다.(20,1-18 참조)
오늘 복음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하여 증언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베드로보다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하였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는 베드로가 도착하기를 기다렸고, 그에게 빈 무덤을 먼저 확인할 기회를 줍니다. 여기에는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베드로가 자리하는 ‘첫 번째’ 위치, 곧 그의 권위와 역할(6,68-69; 21,15-19 참조)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의 첫 번째 부활 이야기에서 무덤에 먼저 도착한 다른 제자의 위치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20장 8절에서 “보고 믿었다.”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가시적 현실을 넘어 부활의 초월적인 신비 현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사람’으로 밝힙니다.
교회의 전통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요한 사도와 같은 인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복음 속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의 모습을 통하여 요한 사도가 증언한 믿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에게 좋은 본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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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아마포와 수건 - 맏제자 베드로와 막내 제자 요한의 차이와 조화>
오늘은 성 요한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오늘 미사의 복음이 전해주는 요한의 모습은 베드로와 함께 빈 무덤을 발견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스승의 갑작스런 죽임을 당한 제자들이 커다란 충격을 받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다가, 빈 무덤을 발견한 막달레나의 외침을 듣고 함께 달려간 그 빈 무덤에서 먼저 도착한 요한이 과연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했고 뒤이어 도착한 베드로가 스승의 시신이 도난당한 것은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빈 무덤. 하지만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는 흔적은 그분 부활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이후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숨가쁘게 전개된 교회의 역사에서도 이 빈 무덤 이야기 속에 배치된 세 사람의 역할은 단순한 에피소드를 넘어 교회 내부의 갈등과 긴장과 조화의 교훈을 암시합니다.
즉, 무덤의 이상 징후를 제일 먼저 감지한 막달레나의 외침과 현장의 목소리에 발빠르게 반응하면서도 베드로를 기다려 준 요한의 카리스마 그리고 현장의 카리스마를 따라 뒤늦게 반응하지만 가장 중요한 징표를 식별해 내는 베드로의 권위가 그것입니다.
실제로 현장 교회가 대변하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는 늘 다급했고, 카리스마적인 요한 공동체는 이 현장에서 보내오는 시대의 징표에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그러면서도 교회의 중심을 잡고 있는 베드로의 제도적 권위를 기다려주는 인내와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면 권위에서 나오는 식별의 지혜는 으레껏 가장 중요한 핵심을 식별해 내어 교회 전체를 발전적인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곤 했습니다.
껄끄러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유럽 교회 안에서 벌어지던 전례 개혁 운동의 목소리를 수용하여 공의회를 전격적으로 개최했던 요한 23세의 발빠른 대응, 그를 도와 공의회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다음에 후임 교황이 되어 라틴 아메리카 교회에서 들려온 민중의 외침을 수용하되 유럽 교회도 함께 갈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 주었던 바오로 6세의 진중한 대처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현대판 메아리를 봅니다.
그런가 하면 공의회의 쇄신 노선에 따라 가면서도 교황청의 권위로 개혁 노선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베네딕도 16세는 자신의 노선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베르골리오 추기경을 후임자로 끌어 들여 개혁을 위한 질서가 가톨릭 교회의 주류가 되도록 함으로써 현재 가톨릭 교회는 프란치스코식 교회 쇄신의 길을 걷는 중입니다.
프랑스의 사제 샤를르 드 푸꼬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마리아께서 홀몸으로가 아니라 태중에 예수님을 모시고 갔던 바에 주목했다면, 바오로 6세는 나자렛 성가정의 30년 세월에 주목했습니다.
복음의 학교로서 나자렛 생활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 안에서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터득한 바탕 위에서 소년 예수님은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기를 배웠는가 하면 요셉과 마리아도 서로에게 순종하면서도 하느님 아들로서의 자의식을 키워 가시던 아들 예수님께 대해서도 순종하기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침묵과 순종 다음에는 노동의 교훈이 있습니다. 요셉은 목수 노동으로, 마리아는 가사 노동으로, 아들 예수님은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배우는 공부 노동으로 각자의 역할은 달랐지만, 하느님께 순종하면서 배운 권위와 각자의 역할에서 나온 카리스마가 긴장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는 모범이었습니다.
권위는 침묵 속에서 하느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나오는 힘입니다. 카리스마는 세상의 약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을 반영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힘입니다.
남편의 권위와 아내의 카리스마, 아내의 권위와 남편의 카리스마, 또 같은 이치로 부모의 권위와 자녀의 카리스마가 긴장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듯이 부모에게도 인생의 연륜에서 나오는 카리스마가 있고 자녀들에게도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에서 나오는 권위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살아가는 평신도들의 가정에서도, 장상과 회원들이 복음삼덕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수도 공동체에서도, 그리고 주교가 이끄는 교구와 신부들이 책임을 맡은 본당에서 이루어져야 할 성직자들의 사목적 교계질서에서도 권위와 카리스마는 긴장 속에서도 조화를 이룰 줄 아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교회 안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영적인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카리스마는 권위를 기다려주어야 하고, 권위는 카리스마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복음적으로 생동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맏제자 베드로가 보여준 신중한 처신에서 나오는 권위, 그분이 사랑하시던 막내 제자 요한이 막달레나의 전갈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베드로를 기다려줄 줄 알던 카리스마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포와 수건이 암시해 준 바와 같이, 카리스마를 대변하는 현장 교회와 복음의 권위를 대변하는 제도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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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20,4)
어제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이었고, 오늘은 복음사가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히 사랑받았던(요21,20) 제자입니다.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면서 어제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을 성탄 대축일 다음 날에 지낼까, 하는 의문의 연장선상에서 요한의 축일이 왜 성탄 팔일 축제 기간 내에 있을까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 요한과 관련된 복음이 많이 있는데 성탄 시기에 하필이면 부활 시기의 복음을 읽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그 까닭은 바로 사도 요한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사도이고,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요20,2)라고 표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집필한 사도가 바로 사도 요한이기에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 거룩한 축제일에 그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 사랑의 신비를 꿰뚫어 보고 믿었던(요20,8) 사랑의 사도 요한에 대해 가장 잘 드러내는 복음이 오늘의 복음이기에 교회는 기꺼이 이 복음을 선택한 것이라 봅니다. 우리 또한 요한처럼 아기 예수로 태어나신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보고 깨닫도록 사도 요한의 이름으로 그 사랑의 신비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도들 역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체험의 강도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제 형제들 역시 같은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조금씩 정도의 차이가 있고 기억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이렇듯이 모든 사도 가운데서 유독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신 분이셨고 그로인해 다른 사도들과 달리 사랑에 일찍 눈을 뜨고 귀가 열린, 사랑에 뛰어나신 분이셨나 봅니다. 자신이 쓴 복음에서 요한은 자기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특별히 강조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그는 분명히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이 자신을 자신이 되게 했다는 자기 확신의 고백이며, 이렇게 사랑을 많이 받은 분들의 일반적인 경향처럼 요한 사도는 분명 자존감이 강하고 자신감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만큼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이며,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이로써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음을 잘 드러내 주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하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보게 하였다.” (요13,23~24) 는 기록을 통해서도 제자들 모두가 다 인정할 만큼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분이었습니다.
무엇이 사도 요한이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며 요한 또한 자신을 사랑해 주는 예수님을 다른 사도들에 비해서 훨씬 더 사랑했었음에는 틀림없으리라 봅니다.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할 수 있는지 아니면 사랑했기에 사랑받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랑받기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좋은 예는 바로, 모든 제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그 여정에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도망을 쳤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십자가 곁에는 몇몇 여인들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그 곁에 사랑하시는 제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어머니와 그 사랑하는 제자를 영적 모자의 관계로 맺어 주셨으며(요19,25~27), 또한 오늘 복음(20,2~8)에서도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듣고 무덤을 달려갔는데 그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20,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베드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어서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복음이 굳이 이를 표현한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이란 이름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더 그리워하고 더 빨리 보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렇게 신속하게 달려갔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높은 산을 뛰어다니는 사슴처럼 그는 사랑하는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사랑에 의해 사랑을 위해 사랑하는 분이 계셨던 그곳으로 재빨리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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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부자가 지혜롭다며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고민을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돈을 안 쓰면 자린고비라고 흉보고, 돈을 좀 쓰면 잘난척한다고 흉을 봅니다. 도대체 어떻게 돈 관리를 해야 할까요?”
현자는 한동안 침묵 속에 있다가 주먹 쥔 손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제가 만약 주먹을 쥐고 펴지 못하면 이 손은 어찌 될까요?”
그리고 이번에는 손을 쫙 편 뒤에 부자 앞에 내밀면서 또 물었습니다.
“이렇게 편 손을 주먹 쥐지 못한다면 이 손은 뭐가 되는 거요?”
“돈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꼭 써야 할 때 손바닥을 쫙 펴서 흔쾌하게 쓰고, 돈을 아껴야 할 때는 주먹을 꽉 쥐어 철저하게 아껴야 불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분별력이 있어야 사람들도 함부로 입을 가볍게 놀리지 않을 것이고, 더러 입을 놀리는 사람이 있어도 자기 주관만 뚜렷하면 전혀 신경 쓸 것이 없습니다.”
주먹을 쥐고만 있어도 또 손을 펴고만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도 아껴야 할 것은 아끼고 나눠야 할 때는 나눌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돈만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도 그렇고, 나의 능력과 재능도 그렇고, 그 밖의 여러 부분에 있어서 이런 분별력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주먹 쥔 삶만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나누지 않고 혼자만 간직하는 마음은 큰 잘못입니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는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주요 사건에 늘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성모님을 맡길 정도로 믿고 사랑했던 제자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가 이렇게 예수님께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멈출 때와 앞으로 가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늘 살피셨고, 또 곧바로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무덤이 비었다는 말을 듣고서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아무래도 더 젊은 요한이 더 일찍 도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또 자신도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무덤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몫을 베드로에게 넘깁니다. 주님께 수위권을 받은 베드로를 배려한 것입니다.
이렇게 멈출 때와 앞으로 갈 때를 분별력있게 구별하셨던 요한 사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그 분별력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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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는 사랑 받는 사랑>
요한 20,2-8 (부활하시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주는 사랑 받는 사랑>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요한 20,2)
주는 사랑도
사랑이요
받는 사랑도
사랑이지요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갈림 없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사랑이지요
주는 사랑이
있으면
받는 사랑은
있을 수 있지요
주는 사랑이
없으면
받는 사랑도
있을 수 없지요
받는 사랑이
있으면
주는 사랑은
있을 수 있지요
받는 사랑이
없으면
주는 사랑도
있을 수 없지요
주는 사랑도
사랑이요
받는 사랑도
사랑이지요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갈림 없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사랑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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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또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디선가 그 속내를 드러내게 됩니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릅니다”(요한20,2)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제자는 무덤을 향해 함께 달렸습니다. 듣자마자, 그것도 달려갔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 줍니다.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있습니다. 역시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아닌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젊어서이든 주님을 더 사랑해서 빨리 달렸든, 이유는 모르겠으나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덤을 들여다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본 후에야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이지만 그를 받아들이고 베드로를 여전히 으뜸제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그는 주님의 제자이고, 죄를 범했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들의 맏형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그것을 알기에 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압니다. 먼저 온 제자는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신 것(요한13,23; 19,26; 20,2; 21,7.20)처럼 베드로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상대방의 어떤 과거를 알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는 낙인이 찍히고 미래가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옛말이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고 바뀌었다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마음! 마음을 키워 모두를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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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사랑하는 참맛>
-우리 모두가 주님의 애제자(愛弟子)이다-
“수사님, 여기 수도원에서 평생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간혹 들었던 질문입니다. 아마도 죽는 그날까지 여기 수도원에서 정주하다 때가 되면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歸家)할 것입니다. 살아온 날보다 점차 짧아지는 살 날입니다. 누가 다시 이렇게 묻는다면 저는 지체없이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맛에 삽니다!”
이번 성탄을 지내면서 저를 사로잡은 고백은 둘입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싶은 희망 때문에 오래 살고 싶다.”
“마지막 임종시 단 하나의 아쉬움이 있다면 더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일 것 같다는 예감이다.”
하루하루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을 살고 싶음은 참으로 믿는 이들의 궁극의 갈망일 것입니다. 이미 예전에 써놓고 애송했던 자작시 두편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집니다. 바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에 대한 갈망을 노래한 시입니다. 무려 26년전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보며 주님과 나의 사랑의 일치를 소망하며 고백한 “하늘과 산”이란 시입니다.
“하늘있어 산이 좋고
산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날로 깊어지는 상호보완의 사랑의 일치 관계를 노래한 시입니다. 아마 불암산 기슭 요셉수도원에 35년동안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본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본 하늘과 산이요 그때마다 자주 외웠던 자작 애송시입니다.
“밖으로는 山,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山
안으로는 江,
천년만년 임향해 흐르는 강
山속의 江”-1998.1.27.
일편단심 산처럼, 강처럼, 산속의 강처럼, 주님 향한 사랑을 고백한 “산과 강”이라는 참 짧은 자작 애송시이자 베네딕도회 수도영성을 상징하는 시이기도 합니다. 두편 모두가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일치를 소망하며 읽는 시입니다.
이런 사랑의 대가(大家)이자 사랑의 달인(達人)들이 우리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한결같은 사랑이야말로 성덕(聖德)의 잣대가 됩니다. 엊그제 주님 성탄 대축일 바로 다음날 어제는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의 천상탄일이었고, 오늘은 사랑의 사도, 주님의 애제자라 일컫는 성 요한 사도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애제자라 지칭하는 요한은 우리 모두의 소망을 반영하는 사도이기에 우리 역시 하나하나 모두가 주님의 애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애제자 답게 살아갑시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후 열두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요한은 6년경 태어나 100년경 선종했다하니 무려 94년동안 장수를 누렸던, 사도들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은 성인입니다.
요한의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 이름 뜻대로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은 사랑을 나누며 은혜로운 삶을 살았던 사도입니다. 예수님곁에서 늘 성모님과 함께 했던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께서 두분께 드린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딸)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애제자인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때부터 그 애제자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 합니다. 주님의 애제자인 우리 역시 주님의 당부에 평생 성모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자주 “어머니 은혜” 노래를 “성모님 은혜”로 바꿔 부르곤 합니다. 한번 불러보셔요, 자꾸 부르고 싶을만큼 좋습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높은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느나는 넓은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요한복음, 요한 서신, 요한 계시록을 쓰며 96세까지 장수했던 사도 요한은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의 부축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한이 매일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십시오.”반복하는 것에 대해 신도들이 불평을 하자 요한은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이것만 지키면 됩니다.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 대답하였다 합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사랑의 사도”불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살아갈수록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면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살아있는 동안 주님을,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미워하고 차별하고 화내고 큰 소리치고 싸우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함은 너무 억울하고 허망한 일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애제자 사도 요한의 뛰어난 사랑의 열정은 수제자 베드로를 능가합니다. 빈무덤을 향해 달릴 때도 베드로보다 앞섰고, 무덤에 도착해서도 겸손한 사랑의 사도 요한은 수제자 베드로 다음에 무덤에 들어섭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고, 이런 장면을 일별하는 순간, 애제자는 전광석화 “보고 믿었다.”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순간 체험한 것입니다.
구유와 십자가, 그리고 이어지는 빈무덤, 잘 개켜져 있는 수건과 아마포, 퍼즐이 순간 완성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감했음이 분명합니다. 모세가 주님을 뵙고 나올 때 너무 눈부신 얼굴빛에 너울을 썻듯이 평생 인성(人性)의 너울을 쓰고 지냈을 주님은 이제 너울(수건)을 벗으시고 신성(神性) 그대로 아버지를 뵙게 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로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들 하나하나의 얼굴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됩니다. 얼마나 심오하고 은혜로운 진리인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요한 사도가 구체적 주님 체험을 면면히 계승하고 있는 사도적 교회요, 우리는 평생 미사전례를 통해 사도 요한의 주님 체험에 참여합니다. 오늘 요한1서 말씀은 그대로 사도 요한의 강론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생생한 체험의 내용들입니다. 아마도 96세 노령에도 생생했을 다음 고백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심금을 울리는 강론입니다. 영지주의 이원론자들의 이단들을 침묵케 한 참 장쾌하고 통쾌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가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생명을 증언하고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이를 선포하는 것은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그 아드님이신 예수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과 나누는 친교의 사랑이, 충만한 기쁨이 우리를 더욱 주님의 애제자로 만들고, 주님을 사랑하는 참맛으로, 참기쁨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시편97,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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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은 결과적으로 상대적이다.>
어제 스테파노 축일에 이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도 주님을 바라봄 곧 관상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어제 스테파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성탄으로 주님께서 나타나심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성탄 축일 다음에 두 성인의 축일을 이어 지내고 있고 주님을 바라봄, 관상과 관련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상은 두 성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시력의 문제가 아니고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신학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관상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한은 진정 사랑꾼이고 관상가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자신에 대해 아무 주저함 없이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은 사랑하지 않고, 요한만 사랑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실 때나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나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실 때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요한만 데리고 가신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사랑을 요한이 사랑했다는 뜻일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 자기가 더 사랑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적절한 예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미 새가 먹이를 가지고 올 때 입을 더 크게 벌린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요.
그래서 새들은 어미가 왔을 때 더 크게 입을 벌리고 더 크게 소리를 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무시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마다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에 투정을 부리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조금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스펀지 빨아들이듯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 사랑에 달리 대응하기에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사랑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다 받아들이기에 결과적으로 흠뻑 사랑받고, 더 받아들이기에 안 받아들인 사람에 비해 더 많이 받은 셈이 되지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모두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는, 요한만 성모님과 여인들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더 사랑했다는 표시가 아닐까요? 주님 사랑을 더 사랑했기에 더 주님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많이 사랑하여 주님을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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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20,4)
<성탄과 사랑!>
오늘 복음(요한20,2-8)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증언자인 마리아 막달레나가 이 소식을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전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로 알려져 있는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요한 사도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첫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야고보 사도의 동생입니다. 요한 복음과 요한1.2.3서와 요한묵시록의 저자입니다.
오늘 독서(1요한1,1-4)에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가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1요한1,1-2)
요한 사도가 증언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가 '받은 사랑, 체험한 사랑의 증언'이며, 이는 곧 '성탄이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 사랑에 대해 또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랑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8.16)
예수님께서 먼저 요한을 사랑하셨습니다. 요한은 이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받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러니 주는 사랑을 잘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주는 사랑을 거역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은 사랑을 잘 나눌 줄 모릅니다.
주시는(주는) 사랑을 잘 받고, 잘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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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0V4OYKZEFbQ?si=RmESxo3xhlC4oW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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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 20, 4)
사랑은
물음표가 아닌
뜨거운
느낌표입니다.
낯설고
두려운 세계로
우리는
초대되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다시
걸어갑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사랑의 삶이
드디어
예수님의
복음으로
다시 뭉칩니다.
요한 복음의
이야기는
사랑의 진실한
이야기이기에
우리의
생각보다
더 빠릅니다.
생각보다
더 빠른 것이
복음의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랑하기에
깨닫게 되고
사랑하기에
보게 되는
사랑의
삶입니다.
서로의 의미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의미입니다.
서로 사랑할 때
서로는
우리가 되고
우리는 기도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성 요한 사도의
첫 마음을 만납니다.
사랑은 언제나
처음이고
마지막입니다.
집착은
소금기둥이
되지만
사랑은
부활이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은 뜨거운
심장이며
뜨거운 빛입니다.
성 요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이 옳았음이
드러납니다.
성탄과 부활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매일매일이
성탄과
부활입니다.
사랑의 복음이
생명의 복음이듯
생명은
하느님 사랑으로
환하게 빛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오늘입니다.
끝까지
사랑에 충실하였던
성 요한 사도
복음 사가의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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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보고 믿었다.'(요한 20장 8절)>
예수님께서 끔찍이 사랑한 성 요한 사도 축일이다. 성 요한 사도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 빛과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늘 함께했다.
관점을 바꾸면 새로운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다.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히 달라진 삶의 관점을 요한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 만나게 된다. 달라진 관점이란 마음을 만나는 새로움이다.
우리 마음에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믿음이다. 믿음이 죽으면 마음도 죽는다. 믿음이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우리 삶의 모든 여정이 뜨거운 신앙고백의 눈물 어린 여정이 된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은총과 영광을 우리는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한다. 새로운 공동체는 끝까지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공동체이다.
성 요한 사도를 통하여 그가 나눈 요한 복음에서 다시금 사랑의 본질이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다. 진심이 통하는 사랑은 서로를 더욱 사랑으로 자라게 한다.
사랑의 빛 속에 나와 너 우리가 있다. 이 놀라우신 사랑을 성 요한 사도는 사랑에 목마른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사랑은 예수님 같이 사랑하는 이들의 나라임을 믿는다. 사랑이 인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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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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