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
김두성
영상43도, 사우나실온도인가? 아무리 덮다 해도 이렇게 더운 날씨가 있는 줄 몰랐다. 여기는 남태평양위에 큰 섬 호주남부에 위치한 애들레이드의 여름 평상기온이다. 적도에 가까운 호주의 북부 다윈지방은 얼마나 더 더운지 모른다. 우리나라도 펄펄 끓고 있다. 하늘도 끓고 땅도 끓고 있다. 나는 이곳에 방문 겸 피한(避寒) 차 온 것인데 이런 사치스런 계획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여기 아들집에 와서 가족들이 직장과 학교에 다들 가고 나면 온 집안에 고요가 저기압의 굴뚝 연기처럼 낮게 깔려 퍼진다. 시간을 쪼개서 쓰고도 모자라 하루를 25시로 늘려 쓰던 한국의 일상에 비하여. 그 적막하고 무료함은 내생의 귀중한 시간을 갉아 먹는 것 같아서 공허함과 불안감이 심장박동을 밀어 올린다. 인간은 누구나 오랫동안 길들여진 삶의 관성을 쉽게 멈출 수 없다. 나의 생체리듬도 이곳에 까지 따라와서 나를 늦잠자리에 묻어 두지 않는다. 새벽에 일찍 깨여서 정원에 물을 주거나 동네라도 한 바퀴 돌지 않으면 공허함과 허탈함을 달랠 수 없다.
이 동네에 중심에는 엔필드 메모리얼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한 바퀴 돌면 약1시간이 걸린다. 이 넓은 공동묘지 주위는 수많은 단독주택들로 둘러있다. 이 나라 국민들은 공원묘지에 바싹 붙어있는 주택을 오히려 선호하고 집의 방향도 하나 같이 공원 쪽을 향하고 있다. 묘지는 모두 평장이었으며 중간 중간 꽃밭을 조성하여 아름다운 공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메모리얼공원에는 이른 새벽부터 꽃을 들고 묘지를 찾는다. 가족들은 망자의 이름이 새겨진 표지석을 깨끗이 닦고 정성스럽게 꽃다발을 올려놓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두런두런 담소한다. 삶과 죽음을 갈라놓은 지도 꾀 오래지난 것 만 같은데 저들의 생각은 생사를 아직도 갈라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로맨틱한 모습에서 생사를 뛰어넘는 인간의 가치와사랑에 거룩함을 느낀다.
어느새 새벽어둠은 남극 쪽으로 감춰지고 아침햇살이 나뭇가지사이를 칼처럼 비집고 내려쬐기 시작한다. 오늘은 얼마나 더울 건가! 어제저녁은 너무 더워서 온 식구가 거실에 에어컨을 켜놓고 합숙을 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부모와 함께 효도의 밤을 아들가족이 계획한 것이다. 밤늦게 까지 서로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누며 소곤소곤 어릴 때 성장과정의 추억을 꺼내어 되새김질하니 가족 간의 정은 밤하늘의 별무리처럼 소복소복 쌓여만 갔다.
일상의 계획을 고국에 두고 온 나는 무료한 시간을 채워갈 일거리를 건저 내어야 했다. 아들이 일하는 직장으로 우선 점심도시락을 날라주는 일부터 나의일과로 자청했다. 나는 반바지에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썬불록으로 무장을 한 다음 오전 11시30분에 파란시장가방에 점심도시락을 들고 집을 나선다. 종아리와 양팔의 노출된 맨살에는 무자비하게 내려 꽂히는 태양 볕으로 뜨거운 정도를 넘어 따끔따끔 바늘로 찔리는 것 같다. 정말 대단한 더위다. 이런 환경에서도 가로수는 폭염과 해풍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꿋꿋하게 자라고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얼마나 깊이 뿌리는 물을 찾아 내려갔을까? 아무도 한낮에 후라이팬처럼 달궈진 길을 걷는 사람은 없다. 모두 차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용감한 건지 미련한 건지 보행을 택했다. 다행이 이 나라는 습기가 없어서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다. 가로수 그늘마다 쉬어 가기로 했다.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이 나무에서 다음나무까지 빨리 뛰어 건너간다. 도로양쪽의 집집마다 창문은 짙은 커튼이나 샷터로 굳게 내려져 있고 정원의 잔디는 뜨거운 열기로 인해 우리나라의 겨울처럼 누렇게 모두 죽은 듯이 엎드려있다. 그런데 집집마다 정원의 꽃나무의 꽃들은 활짝 피고 있다. 뿌리가 얕은 풀들은 죽어있으나 뿌리 깊은 나무들은 모두 더위를 극복하고 살고 있다. 참신기하고 대단했다. 이 열대성 꽃나무들은 선인장처럼 몸 차제가 물 저장고인 것 같았다. 얼마 전 담장 밑에서 한국의 비름 같은 들풀들이 너무 인도로 뻗어 나와서 낫으로 잘라서 한쪽 담장 밑에 마르도록 놓아두었는데 말라죽지 않고 오히려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대단한 생명력에 감탄했다. 사막식물들은 물이 귀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수세기를 통하여 생존을 위한 진화를 계속했을 것이다. 그래서 몸 자체의 줄기도 잎사귀도 굵고 투박하게 변하여 물 저장고처럼 몸을 만들었으리라. 환경에 적응하지 않고는 삶을 허용 받지 못하는 창조의 섭리는 다시 미련 한 인간을 깨우쳐주는 것 같았다.
한국과 완전히 계절이 반대인 이 남반부 뜨거운 섬나라 호주에서 내 아들가족들은 언어와 싸우고 문화와 싸우고 뜨거운 자연환경과 피나는 싸움을 거친 후에 뿌리를 내렸다. 모든 식물들은 홀로 독립적으로 생존한다. 기대고 돌보아 주는 것이 없다. 이 열대지방의 식물처럼 이곳에서 자란 손 자녀들도 일찍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신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서 독립을 배우고 있다. 과수원, 딸기 농장, 레스토랑 등의 온갖 일을 통하여 이국문화와 정서를 경험하고 터득함으로써 이국땅의 낯설음과 이(異)민족의 소외를 또한 극복할 수 있었다. 인간이나 자연의 생물들은 환경에 동화되지 않으면 독립적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 인간도 외로움과 고통, 역경, 번민, 굶주림과 위기를 통해서 지혜를 터득하고 독립의문이 열린다.
오늘 나는 내 삶에서 환경에 동화 되지 못하고 거부하면서 외톨이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다시금 돌아본다. 삶이 환경과 따로 노는 것만 같은 무기력한 기분이 들 때. <동화>되어야 산다는 의미의 깊음을 이국(異國) 호주 땅에서 다시 터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