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협약에서의 한국은 개도국
-한국의 환경외교 대변혁이 필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국제환경에 따른 미래시대로의 전환에 대한 대응력에서는 취약하다. 정권마다 관련분야의 인물들이 미세먼지처럼 날아가 버리기에 연속성과 지속성이 결여되어 국제정세를 파악하는데 시간을 소비하다 뒤통수 맞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한 사례 중에 하나가 요소수 사건이다. ‘요소수 대란’이 발생되기 1개월 전인 2021년 10월 15일 중국은 자국 내 석탄, 전력난으로 요소 물량이 부족해지자 ‘요소 수출 검사’를 의무화하고 수출을 중단하게 된다. 한국정부(외교, 산업통상부, 환경부)는 중국의 의무검사예고 10일 후에서야 요소 수출중단에 따른 위험성을 인지했지만 수출중단 4일 후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주재로 열린 ‘1차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에서조차 요소수는 안건에 상정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화물차와 물류현장에서는 요소수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려졌고 품귀현상과 가격급등현상이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당시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의장에서 “관련 정보를 더 빨리 받아들여 예측하고 준비했어야했는데 뼈아프게 생각 한다”며 국가 정보시스템의 불통을 자인했다.
우리나라 환경외교의 첫 발은 198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합의된 <오존층 보호를 위한 비엔나협약>이다. 100여개의 인공 화학물질의 생산과 소비를 규제하는 획기적인 다자간 환경협약으로 1987년 9월 15일 채택되고 1989년 1월 발효되어 198개국이 비준한 국제협약이다. 의정서의 핵심은 선진국은 프레온가스사용의 단계적 감축, 개도국은 1인당 사용량을 0.3kg으로 제한, 비가입국에 대해서는 통상제재(교역금지)였다. 한국의 당시 산업사회에서는 역동적인 산업발전을 통해 프레온가스의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이다. 선진국은 프레온가스사용을 억제하자고 국제적 협약을 하고 있는 와중에 우리나라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국내 기술로 개발한 프레온가스 사용을 오히려 확산하고 있었다. 국제정세에 대해서 기업도 감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일부 대기업은 알고 있었지만 한국정부의 눈치만 보며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우리나라는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치루면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었지만 환경외교에서는 최빈 개도국 평가를 받아야했다. 선진국들은 대체물질을 개발해놓은 상태이고 개도국들은 프레온가스 사용이 지극히 미미한 상태여서 가장 직격탄을 받은 나라는 전 세계에서 오로지 한국뿐이었다. 미국, 일본, 유럽 등은 프레온가스 대체물질을 이미 개발해 놓은 상태이고 우리나라만 프레온가스를 사용하는 자동차, 냉장고, 에어컨 등이 하루아침에 수출길이 막혀버리는 상황에 직면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수년간 국제 환경 전문가 회의의 초청장이 날아왔지만 어느 부처도 외교테이블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의정서를 최종적으로 조인하는 마지막 협상회의에 한국 측에서는 유일하게 환경부 故 김형철 차관(당시 대기국장)이 참석했을 뿐이다. 여기서 감히 미국과 도전적 협상을 한 인물이 외교부의 서기관급 공무원(정내권)이었다. 국제법과 협상에 관련된 각종 문안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선진국들이 프레온가스 대체물질 특허권을 남용하여 한국 등 개발도상국들에게서 20배 이상 비싼 가격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사례를 발표하면서 지구적 환경문제와 같은 세계 공통의 과제에서는 특허권을 공유하여야한다는 것을 <의제21>에 삽입시키는데 성공했다. 한국이 외교력에서 미국을 케이오(KO)시킨 최초의 환경외교이다. 그 이후 미국 상원위원회에서는 부랴부랴 법을 수정하여 ‘공공예산의 지원에 의해 개발된 기술은 미국의 국내 기업들에만 이전되어야한다’라는 제한규정을 두었다.(베이-돌 법)
정내권 당시 과장은 출세 길이 막히는 외교부의 한직인 과학환경과장을 지원했다.(외교부는 누구나 과학환경과를 외면했고 외교부의 핵심인 대미외교, 4강 외교, 안보외교, 통상외교의 주요 보직을 고수했다)
지구정상회의에서 <특허의 강제실시>는 미국 CNN에서도 방영되었고 한국의 언론사도 비로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국제회의에 기자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한국 언론들이 국제무대에서는 빈약한 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한국은 다자외교무대에서 항상 뒷전이었다. 냉전기간 중에는 미국의 입장을 따르기 바빴고, 유엔 가입 이후에도 남북한문제에 발목 잡혀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중략> <어젠다 21> 환경보호 기술이전문제를 논의한 제 4실무그룹 회의장에서는 ‘지적소유권의 남용방지를 위해 환경관리 기술은 수요자가 강제로 사용한 후 보상할 수 있다’는 문구가 최종 확정되었다. 앞으로 협상과정에서 민간기업의 기술이전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서 한국의 다자외교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라고 기사화했다.
1990년대 초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각 부서에서는 환경을 담당하는 부서가 새롭게 조직되기 시작했다.(환경부는 국 형태의 국제협력담당관〈1995,초대 담당관 안영재 부이사관〉, 외교부 과학환경과〈1991,초대과장 정내권〉, 대검찰청 환경수사과〈초대과장 박주선〉, 국방부 보건복지관실 산하에 환경보건과)
당시 대검 박주선 과장은 초대과장으로 부임 후 환경전문기자로 활동하던 필자를 초대하여(대검찰청을 출입한 첫 사례이다)환경에 관련하여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수차례에 걸쳐 논의하였다.(국회에서는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한 초선인 홍준표 의원이 관심을 보였다)
한‧미간의 군사 환경외교의 현장은 국방부에서도 진행되었다. 철저한 미군의 감시 하에 있는 우리나라는 미군이 한국에 반환을 결정한 부산 하야리아 캠프에 학계 등 토양 전문가들과 환경 전문기자가 직업을 속이고 동행하게 되었다. 수십 년간 지배했던 미군기지의 땅 속을 살펴 본 첫 사례였지만 기사화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토양복원 사업비를 미군 측에서 부담하게하려는 국방부 환경과장의 숨은 전략이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방부환경과장은 한‧미 군사외교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독일이 미군에게 기지반환 시 토양복원사업비를 지불하게 한 성공사례를 본 받아 부산 하야리아 캠프 복원사업비도 미군이 지불하게 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미군 측과 협상하기 위해 사전에 기지 내 토양과 수질 등을 비밀리에 조사 분석하여 그 자료를 협상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독일은 미군에게 오염도가 높은 수질과 토양성분을 펼치면서 ‘이 자료가 공개되면 미군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좋지 않으며 유럽국가에게도 그 영향이 미칠 수 있다. 이 자료는 공개하지 않을 터이니 조용히 처리하도록 미군이 협조해 달라’며 미군에게 처리비용을 받아냈다. 그러나 부산 하야리아 기지(부산 서면에 위치, 시민공원과 아파트단지 조성)는 우리나라 군 최고위층에 의해 그 전략이 무산되고 결국 부산시에 이관된 이후에도 오염물 처리 문제는 사회문제로 확산되면서 마무리되었다.(2010년 1월 반환 협상 타결)
하야리아 기지 수송대대가 있던 연병장 땅 속에는 2 미터만 파도 기름과,기름장갑,각종 군용차량 부속품등이 부지기수로 나왔었다.
한국은 국제 외교에서는 결코 선진국도 아니고 최빈국을 탈피한 개도국도 아니다.
세계는 자국우선주의를 택하고 있는 가운데 선진국들은 미래의 예측 가능한 상황들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면서 대처 방향이 확립되는 시점에서야 다자간 협의등 공론화 하기 마련이다.
한국은 1996년 선진국 그룹인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했으며 1997년 개도국 협상 그룹인 <77그룹>에는 탈퇴했지만 기후변화협약상 지금도 선진국이 아니라 개도국 그룹에 속해있다.
선진국들은 기후협상 과정에서 OECD회원국인 한국과 멕시코는 선진국으로서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담하라고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일본은 미국을 대신하여 ’선진국의 감축의무를 수락하라‘고 선동하고 있다.
온전한 선진국, 개도국도 아닌 대표적인 신흥 공업국으로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국제외교에서의 전략과 전문성이 더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하지만 환경부도 순환보직으로 인해 국제외교의 전문성을 지닌 인사들이 없는 실정이다.
김영삼정권시절 외교력을 강화하기 위해 영어에 능통한 인사들을 대거 영입한바 있지만 그들도 자천,타천 모두 환경부를 떠나고 전문성과 지속성을 지닌 인사는 찾기 어렵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예민하게 충돌하는 외교 현장에서 현명하고 명확한 지식을 통한 전략적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미래의 외교는 환경외교가 될 것이다‘라고 독일 헬무트 콜 총리 내각 시절의 클라우스 퇴퍼 환경부장관의 말은 매우 의미가 큰 미래의 국제관계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환경국제전략연구소소장,환경경영학박사,시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