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21:1~12
이스라엘은 미스바에서
‘딸을 베냐민에게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전쟁 후 베냐민 지파가 거의 사라진 것을 보고
슬퍼하며 그들을 살릴 방법을 찾는다.
미스바 집회에 불참한 성읍을 조사해
야베스 길르앗이 참석하지 않았음을 알고,
용사 1만 2천 명을 보내
남자와 남자를 알게 된 여자는 모두 죽이고,
남자를 알지 못한 젊은 여자 400명을 데려온다.
이들은 실로 진영으로 옮겨져
베냐민 생존자들의 아내로 준비된다.
본문 초반에 이스라엘의 ‘눈물’이 나온다.
겉으로는 긍휼과 회한이 묻어나는 듯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전쟁의 잔혹한 관성이 이어진다.
긍휼의 눈물과 무자비한 살육이
함께 나타나는 모습이 혼란스럽다.
그렇다면 그들의 눈물은 무엇이었을까?
결론적으로 ‘죄’라는 자기중심성은
감정 속에도 깊이 자리 잡는다.
그것이 ‘자기연민’이다.
눈물과 강한 감정은 사람을 무너뜨리고
설득하는 힘이 있다.
우리는 종종 눈물을 진심의 증거로 착각하지만,
자기연민은 그 힘을 이용해
스스로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눈물과 긍휼이 순전하려면,
그것이 나를 하나님께 더 순종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반대로, 나를 더 불쌍히 여기고
감정 속에 빠져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연민이다.
오늘 본문 속 이스라엘의 눈물은
사랑과 정의보다
지신들이 저지른 일 때문에 생긴
자기 손실, 자기 상처, 죄책감과
불편함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죄성은 감정까지도 오염시킨다.
이들이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이어진 야베스 길르앗 학살에서 드러난다.
베냐민 전쟁 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전혀 묻지 않고 스스로 살육을 시작했다.
두렵게도, 예배에서 내가 흘리는 눈물조차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힘들었다, 억울했다, 상처받았다.’에서
멈추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 있지만,
거기서 멈추면 결국 나만 바라보다
상처의 굴레 속에 갇히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고,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순종의 결단으로 이어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묵상마저도,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을 더 의식하고 있다면
그 또한 본문 속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오늘 이스라엘의 순전하지 못한 눈물을 보며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눈물이 곧 정당함은 아니며,
자기연민의 죄성이 감정을 지배할 수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감정적 호소가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는 통로가 되고,
순종의 결단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눈물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