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판아이농’
도코의 하숙집에 있을 때 우리는 대체로 일어나자 마자 신문을 보았다. 학생들이 보는 것은 ‘아사히 신문’이나 ‘요미우리 신문’이었다. 사회의 에피소드만 즐겨 보는 자들은 ‘니로쿠 신문’을 보았다. 어느 날 아침 신문 첫머리에 중국에서 보내 온 전보가 첫눈에 띄었다ㅣ. 대체적인 내용은 이랬다.
“안후이 성 순무 언망이 Jo Shike Rin 에게 피살됨, 자객은 현장에서 체포”
사람들은 순간 놀랐지만 곧 활기를 띠고 그 소식을 서로 전했다. 또 그 자객이 누구이고, 그의 이름 세 글자를 한문으로 어떻게 쓰는지를 궁리했다. 하지만 사오싱 사람으로 교과서만 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쉬시린이었다. 그는 유학을 하고 귀국한 뒤 안후이성 후보도로서 순경 사무를 보고 있었다. 그는 순무를 찔러 죽일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가 극형을 당할 것이고 가족들도 연루되었으리고 예상했다. 오래지 않아 츄진 여사가 시오싱에서 피살되고, 언밍의 친위병들이 쉬시린의 심장을 도려내어 볶아 먹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전례에 따라 동향에서는 열사를 추도학로 만청 정부를 규탄했다. 그 뒤 어떤 사람이 베이징에 전보를 보내 만청 정부의 잔인무도함을 규탄을 주장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전보를 보내자는 파와 보내지 말자는 파로 나뉘었다. 나는 전보를 보내자고 주장했다. 내 말이 끝나자 마자 바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죽일 것을 죽여 버렸고, 죽을 것이 죽어버렸는데 무슨 빌어먹을 전보 따위를 보낸다는 거야.”
그는 큰 키에 장발을 하고 있었다. 눈에 흰자위가 많고 검은 동자가 작어 사람을 볼 때 멸시하는 듯이 보였다. 그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내가 하는 말에 대부분 반대했다. 나는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주목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이고, 왜 그렇게 쌀쌀맞은지 물어보았다. 그를 아는 사람이 ‘판아이농’이고, 쉬시린의 제자라고 했다.
나는 몹시 격분했고 그가 사람도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선생이 피살되었는데 전보 하나 보내는 것조차 겁을 내다니, 그래서 나는 전보를 보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면서 그와 싸웠다.
------ 그 뒤부터 나는 판파이농이 희안하고 아주 가증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나중에 점점 옅어지다가 결국 잊고 말았다. 그 일 이후 우리는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 나는 고향에서 교사가 되었다. 아마도 늦은 봄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지인과 함께 한 자리에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서로 이 삼 초 정도 낯이 익은 듯이 바라보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 자네 판아이농익루먼.”
“자네, 루쉰이구먼,”
웬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웃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조소와 비애였다. 그의 눈은 여전히 그대로 였으나 희안하게도 요 몇 년 사이에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생겼다. 원래부터 있던 것인데 예전에는 내가 눈여겨 보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는 낡아빠진 무명 마고자에 혜진 헝겊신을 신고 있어서 아주 추례해 보였다. 그는 자기의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나중에 학비가 떨어져 더 이상 유학할 수 없었다. 짐을 싸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행에서도 경멸과 박해를 당해 자신을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시골에 처박혀 소학교 학생을 몇몇을 가르치며 입에 풀칠을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면 배를 타고 현성에 나온다고 했다.
그는 또 지금은 자기도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함께 술을 마셨다. 그 뒤 그는 현성에 오면 나를 찾아와 우리는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취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해댔다. 어머니께서도 어쩌다 들으시고 웃었다. 하루는 문득 도코에ㅓ 동향회를 열었을 때가 생각나 그에게 물었다.
“그날 자네 전적으로 나를 반대했지. 그것도 고의로 말이야. 도대체 왜 그랬나?”
“자네 모르고 있었나? 나는 줄곧 자네을 싫어했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그럼 자네는 그전부터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나?”
“어째서 모르겠나. 우리가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맞이 한 쓰잉과 자네가 아니었나. 자네는 우리를 깔보면 머리를 내저었지. 자네 아직 기억하나?”
잠깐 생각해보니 7, 8년 전의 일이기는 하나 기억이 났다. 그때 쯔잉이 나를 찾아와서 새로 유학오는 동향 사람들을 맞이 하러 요코하마에 가자고 했다. 기선이 부두에 닿자 한 무리의, 대략 10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부두에 올라 짐을 세관에 놓고 검사를 기다렸다. 세관 관리는 옷가방을 뒤적이더니 갑자기 한 쌍의 전족 신발을 끄집어 냈다. 그러더니 공무는 내버려두고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나는 몹시 불만스러웠다. 이 멍청한 놈들 뭣 땜문에 저 따위 물건을 가져온거야. 그리고는 조심하지 못하고, 그때 고개를 내저었다.
------초겨울이 되자 우리의 형편은 더 옹색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술을 마시며 우스겟 소리를 했다. 그러다 갑자기 우창 봉기가 일어나고 곧이어 사오싱이 광복되었다. 그 다음 날 판아이농은 현성에 들어왔다. 농부들이 쓰는 털모자를 썼는데, 그렇게 웃는 얼굴은 이제껏 본 일이 없었다.
“루쉰, 오늘은 우리 술을 마시지 마세. 나는 광복이 된 사오싱을 구경하러 가겠네. 우리 같이 가세나.”
우리는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눈이 닿는 곳마다 흰 깃발이었다. 하지만 겉 모습은 그랬지만 속내는 예전 그대로 였다. 왜냐하면 여전히 옛 향신들이 군정부를 조직해 무슨 철도회사 대주주가 행정 책임자가 되고, 전장(돈놀이) 주인이 병기 대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군정부도 결국 오래 가지 못했다. 몇 몇 소년들이 소란을 일으키자 왕진파가 군대를 거느리고 항저우로부터 진격해 왔다. 하긴 소란이 없어서도 들어왔을 것이다. 왕진파는 들어 온 뒤에 수많은 건달들과 새로 들어온 혁명당에 둘러싸여 왕 도독이 되었다. 관청 안의 인간들도 무명옷을 입고 왔다. 열흘도 안 되어서 대부분이 모피 두르마기로 바꾸어 입었다. 날씨는 아직 그렇게 춥지 않았다.
나에게는 사범학교 교장이라는 직책이 주어졌다. 왕도독은 나에게 학교 경비로 이백위안을 주었다.
이틀 후 신문을 발간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발기인은 세 사람이었다. 닷새 후에 신문을 보니 첫머리에 군정부가 그곳 사람들을 욕하고, 그 다음에는 도독이 친척, 동향 사람, 첩 등을 욕했다.
------이렇게 열흘 정도 욕을 하자 우리집에 한 가지 소식이 전해왔다. 도독이 너희가 자신의 돈을 사취하고 오히려 자기를 욕을 하고 있으니 사람을 보내 권총으로 쏴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어머니는 조바심을 냈다.
------그런데 아이농이 입수한 새로운 정보가 나를 난처하게 했다. 원래 이른바 ‘사취’했다는 것은 학교 경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문사에 보내준 돈을 돈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신문에서 며칠 욕을 해대니 왕진파가 사람을 시켜 5백위안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년들이 회의를 열었다. 첫 번 째 문제는 받을지 여부였다. 결론은 받자는 것이었다. 이유는 돈을 받고 나면 그가 주주가 되는 셈인데 주주의 잘못을 당연히 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 신문사에 가서 그 일의 진위를 물었다. 그래서 그 돈은 받아서 안 된다고 말했더니 회계를 맡아보는 치가 기분이 나빴는지 나에게 질문했다.
“왜 주식 자금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건 주식 자금이 아니라 ------.”
“주식 자금이 아니면 뭇입니까?”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런 세상물정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우리도 연루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당장 한 푼 어치도 안 되는 목숨이 아까워 사회를 위해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고 통박할 것이다. 아니면 다음 날 신문에 내가 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하며, 떨었는가를 기사로 실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지푸가 편지를 보내 나더러 난징으로 와 달라고 했다. 아이농도 대찬성이었으나 자못 처량했다.
“여기는 또 그 모양이니 있을 곳이 못 되네. 어서 떠나게------.”
나는 그의 무언의 말을 알아 듣고 난징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먼저 도독부를 찾아가 사직서를 제출하니 당연히 비준이 되어서 코흘리게 접수원을 보내왔다. 나는 장부와 남은 돈 1각가 동전 2위안을 내 주고 교장 자리를 내 놓았다. 후임은 공교회 회장인 푸리천이었다.
------내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을 무렵 아이농도 공교회 회장인 교장에게 학감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는 다시 혁명 전의 아이농으로 되돌아 갔다. 나는 베이징에 조그만 일자리라도 마련해주고 싶었다. 이것은 그가 몹시 바라는 것이였지만 그런 기회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한 지인의 집에서 지내면서 가끔식 편지를 보냈다.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편지의 구절도 점점 더 처량해졌다. 끝내는 그 지인의 집에서도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얼마 전에 고향사람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그가 익사했다고 했다.
나는 그가 자살한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는 헤엄을 잘 쳤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물에 빠져 죽지 않는다.
밤에 홀로 회관에 나와 앉아 있으려니 몹시 서글펐다. 그 소식이 확실치 않을 거라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무슨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그게 아주 믿을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고향에 돌아가서 상세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아이농은 사람이 싫어해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몹시 어려웠지만 지구들 덕에 여전히 술을 마셨다. 그는 이미 다른 사람들과 왕래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자주 보는 사람들이래야 나중에 알게 된 비교적 젊은 친구들이었다. 그들도 아이농의 불평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차라이 우스겟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내일 전보가 올거야. 열어보면 루쉰이 나를 부르는 것일 게야.”
그는 가끔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어느 날 새로 사귄 친구들 몇 명이 그에게 배를 타고 연극을 보러 가자고 했다. 돌아올 때는 이미 한 밤중이 지났다. 비바람도 거셌다. 그는 취했는데도 굳이 뱃전에 서서 소변을 보겠다고 했다. 모두 말렸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자기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그는 떨어졌다. 헤엄을 칠 줄 알았는데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날 그의 시신을 건져 올렸다. 무성한 마름 사이에서 찾았는데 뻣뻣이 서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가 실족사를 한 것인지 자살을 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1924.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