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임진왜란사(戰史)
후세백작 2014.10.02 01:50 수정. 25, 8, 26
1. 일본의 조선 침략
조선 왕조의 입본에 대한 전통적인 외교정책은 교린정책(交隣政策)이었다. 이는 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한 정책이었다.
(왜구의 뜻으로 倭는 고대 일본을 말하며 口라함은 떼도둑이라는 뜻이다)
대마도주 종의조에게 세견미(歲遣米)를 주고 무역에 특혜를 주어 일본과의 관계를 교린정책으로 유지하여 왔는데 1555년 삼포왜란(부산포,제포, 염포)후 일본과의 일제 교역은 두절되고 조선은 일본의 국내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일본은 足利幕府가 망하고 봉건 영주들이 전쟁의 전국 시대였다.
일본은 선조 27년 (1590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일본이 통일되자 대륙에 대한 침략이 싹튼 것이다.명나라를 삼켜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인도까지 삼키겠다는 허망환 꿈에 젖었었다. 이에 대마도주 종씨에게 " 조선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수호를 청하도록 하라"고 명 하였다.
조선은 거듭되는 독촉에 양국의 충돌을 우려해 1590년에 정사로 황윤길과 부사로 김성일을 보내 일년만에 돌아와 답하길 황윤길은 일본은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필경 병화가 있으리라 했고 동인인 김성일은 '쥐눈이라 두려워할 바가 못되며 내침할 정세를 보지 못했다" 한다. 의견이 갈라지자 집권당인 동인은 김성일 보고에 손을 들어주었다.
김성일이 오판한것은 히데요시는 통신사들이 탑정하러 온것이라 보고 그들이 가는 길에는 약골의 군사를 세워두고, 군비도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듯 위장하였기 때문이다. 일년 후 일본은 "假道入明"라고 명나라를 점령할테니 길을 비켜달라고 통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전에 李耳는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고 근본적인 국방 태세확립에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자, 중신들의 반대에 유성룡은 "무사의 양병함은 화를 기르는것"이라고 반대하여 10만 양병설은 좌절되었다.
일본과 달리 한국과 중국은 중심이 되는 성을 함락한다고 전쟁이 끊나지 않는데 도요토미의 망상이었으며,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일본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591년 7월에 조선은 성절사로 김응남을 파견했지만 조선이 알려주기도 전에 복건성의 무역상 진신이 이미 장사차 오키나와에 들렀다가 전쟁 계획을 전해듣고는 즉시 복건성 순무 조참로에게 알렸고 그것은 바로 명 조정으로 들어갔다.
당시 오키나와에 왕세자 상령은 아예 명의 조정에 일본의 은밀히 계획을 알렸고, 오키나와에 끌려와 한약방을 하고있던 강서성 출신 허의후도 주균왕이라는 사람을 보내 알렸지요.(오키나와는 히데요시의 병력 모집에 응하지 않았음)
재미있는 것은 조선 조정은 일본이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를 치겠다는 것을 알려야 하느냐 마느냐의 논쟁으로 시간을 끌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치려하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짙게 하고 있었다.우리나라 대신들은 역으로 이런 생각도 못하는 주제들에 니라의 존폐의 위기에 별거로시간을 다 끄는 ...
뒤에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할 때도 명나라는 사실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조선은 조선초나 고려, 고구려처럼 강군을 가지고 있던걸로 기억하기 때문에 불과 며칠만에 한양이 넘어갔다는 이유로 원병 이전에 그 사실에 대한 진위여부를 밝히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 했답니다.
우리로선 사색 당파와 왕의 무능력이 주범이었다.
조선은 고려말 원 간섭기 이후 200년간 평화로운 시대에 국가재정은 미약하여 군사적으로는 무방비 상태의 무기력함을 보이지만 일본은 근 100년간 국내 파벌의 전란속에 무기의 발달 , 해군술과 축성술이 발달되고 훈련된 군사들이었다. 이들은 병선과 식량, 화약을 확보하고
1592년 4월 13일 제 1번대 병선 700척이 대마도를 출발하여 부산포에 내렸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2번대가 모리요시나리의 4번대는 김해에서 3번대를 따라 창녕- 김천을 지나 추풍령→영동→ 청주→ 한성 입성
1,592년 (임진년) 4월 14일 제 1번대는 700척의 선박은 쓰시마를 떠나 순풍에 오후에 부산포에 도착한다. 4월 14일 부산상륙후 10여일만에 상주에 다다라 순번사 이일의 부대 천명을 제압하고 문경새제를 넘어 충주에 다다르자 도 순번사 신립 장군의 5천명의 군사는 2만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앞에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5월 2일 한성을 함락당하고 말았다.
2.임진왜란 당시 강원도 사회, 군사제도
1) 호구통계조사
* 태종 4년 (1404) 전국 戶 153,404 호. 口 322,782 명
″ 강원도 15,879 호 29,238 명
* 세종실록 지리지 전 국 226,310 호 702,870 명
″ 강원도 11,084호 29,009 명
2) 강원도 지방 군제(兵營과 水營)
○ 鎭管체제(세조~을묘왜변시기)
* 조선시대 중앙군은 주로 왕실호위, 지방군은 평시에 국내 치안유지와 국토방위를 담당하였다.
*진관체제(鎭管體制)는 道대신 鎭이란 명칭으로 일원적 군사조직을 함. 따라서 지휘계통은 각 도에 관찰사는 육군은 병마절도사, 수군은 수군절도사를 겸한다(관찰사는 군사권도 장악하고 있기에 임기는 1년이다. 그러나 군수 등은 임기가 4년이다.
* 강원도의 軍翼道<세조실록>는 5도로 나누어지며, 원주도에 중익은 원주, 횡성이고 좌익은 영월, 평창, 정선이고, 우익은 춘천, 양구, 홍찬, 인제, 낭천이다.
* 원주 진관편성에 병사, 수사 겸임의 동첨절제사<춘천부사.영월군수, 평창군수, 정선군수) * 강원도의 군액 총수는 시위군이 2276명, 선군이 1834명, 수선군이 11명<세종실록> * 평창군의 동오군 120명, 감영군 34명. 원호 1365호 <1875년경 해동지도 주기표>
* 용어설명
동오군 (東伍軍)-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병사의 무예와 왜인(倭)의 검술을 아울러 배운 군인으로 군사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감영군 (監營軍) - 감영내 소속된 군대 시위군 (侍衛軍) - 양인도 부담하는 의무병력.
○ 제승방략기(制勝方略期)
을묘왜변~ 임진왜란 시기로 진관체제가 무너지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제기된 응급적 방위체제로 지방 군사직을 겸하는 지방 수령이 적의 출몰 예상지역에 동원 가능한 군사를 즉각 출동시키고 중앙에서 파견되는 도원수, 순변사, 조방장 등의 중앙군이 화약 등 가져와 지방군과 함께 적과 대적하는 개념이다. 기존의 진관체제에서 분근법의 방어체계가 발생한 것이다.
3. 제 4번대의 강원도 침략
⊙ 제4번대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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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4번대 병력 합 14,000명 제 4번대장; 요리 모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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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침입
1) 강원도를 처음 들어오 부대는 제 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였다.
처음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가 충주에서 신립장군의 군대를 격파하고 한성으로 진격할때 그중 일부가 여주를 지나 원주로 진격하려고 하였으나 원호가 거느린 군대에게 격퇴되고 그후 또다시 원주 지장면 구미포일때까지 처들어 왔으나 역시 원호의 군대에 격파되었다.
2) 두번째로 강원도를 쳐들어온 부대는 제 4번대중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부대로 왜군이 조선을 분할 점령하겠다는 分地之計에 의해 6월 1일 한성→ 가평→ 춘천→ 김화로 들어갔다.
3) 4번대중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의 부대는 한성에서 동두천 →철원→평강→김화→ 회양군→ 철령을 넘어 안변으로 올라가서 황해도로 들어가 안변으로 온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의 부대와 조우 후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는 함경북도 방면으로 올라가고, 모리 요시나리의 부대는 안변에서 유턴하여 통천→ 고성→간성→양양→강릉으로 내려오면서 일지대(一支隊)는 서향하여 양양에서 설악산 한계령을 넘어 인제, 양구, 춘천방향으로 침입하며(주력부대는 7월중에 삼척 두타산성을 함락시키고 본대는 삼척에 머무르며 일지대는 울진. 평해를 분탕질한후 다시 올라와 본대에 합류하여 백봉령을 넘어 정선 →평창→영월→주천→원주 강원 감영을 접수하였다.
위 도표로는 3번대는 14,000명으로 그중 양근에 머물다 춘천으로 간 시마즈 요시히로부대 10,000명과 김화로 간 400명과 양양에서 춘천으로간 6지대 400명을 철원으로 들어간 이토 스케다카의 600명을 뺀 제 4번대 본대는 1지대 2,000명, 2지대 600명 합 2,600명이 7월 강릉을 지나 두타산성을 함락시키고 일지대(一支隊)는 울진, 평해를 분탕질하고 다시 올라와 삼척에서 본대에 합류하여 백봉령을 넘어 정선.
평창, 영월을 지나 강원감영을 접수한다.
( 제4군 강원도 진출)
⊙ 4번대에 항전한 평창 임진왜란 전사
<임진왜란의 역사 기록>
1) 『호구록(虎口錄)』 ; 종 4품의 평창군수 권두문의 당시 평창 임진왜란사로 당시 날자별의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https://blog.naver.com/k2871h/223775661992
평창군수의 임진왜란 기록 <호구록>
평창군수의 임진왜란 기록 <호구록> 후세백작 2021. 5. 15. 03:54
2) 『응암록(鷹巖錄)』 ; 호구록의 필사본으로 작자미상.
3) 『平昌日記』 ; 권두문 군수의 子로 권군수의 소실부인 강소사를 데리고 영주서 평창으로 피난오는 기록을 하였다. 평창에서는 소실 부인과 함께 생활하며 권주도 부친아래 공부를 하며 지냇다고 알려진것은 서술자들의 주관적 추론의 글로 오류이다.
< 제4번대 본대의 평창 침입 루트>
4번대 주력부대는 철령에서 남병사 이혼의 방어부대를 쉽게 격파하고 안변에서 2번대 가토 기요마사 부대에 연락하여 왜군의 분지지계에 의하여 2번대는 안변에서 함경도로 올라가고, 약 4천명의 4번대는 유턴하여 강원도 흡곡으로 내려오며 통천전투를 하고 동해안으로 내려오며, 일지대는 서향하여 인제방면으로 진출하고 3천명의 본대는 남진하여 강릉에 내려오자 강릉 부사 이광준은 잠적하고 왜구는 5일간 분탕질하고, 삼척 두타산으로 가서 강릉에서 피난온 사람들과 의병장,
제 4번대는 양양에서 춘천으로 1지대가 분가하고 나머지 본대인 1지대와 2지대. 6지대 합 3,000명은 강릉, 삼척을 거처 백봉령을 넘어 정선을 지나 평창으로 처들어온다.
이들은 제4번대장 모리 요시나라의 본대로서 백봉령에서 월주 강원감영을 쳐들어가기 위해 정선, 평창, 영월을 거쳐 원주로 들어가서 치악산의 영원산성에서 방어하던 원주목사 김제감의 부자를 살해하고 영원산성을 접수한다.
4. 『호구일록虎口日錄』의 기록 발췌
권두문 평창군수가 겪은 평창의 난중일기 "호구일록"<虎口錄>에 기준하여 아래는 당시의 기록을 발췌하여 당시 평창의 전사를 이해 합니다.
왜구의 평창 침입은 1592년 8월 7일이고 8월 16일 권 군수 일행이 영월로 압송되며 평창전사는 끝을 맺는다.
=======(호구록 발췌)======
⊙ 8/7일 ; 영동의 왜적들이 모두 請聞 嶺東의 大嶺을 넘엇고. 이날밤을 타고 왜적의 선발대가 정선으로부터 들어왔다.
⊙ 8/9일; 항복을 권하는 倭書를 가지고 온 자의 목을 베고 평창은 항전의 기치를 높였다.
(원문위 조파(潮派: 지명)와 복병군집(伏兵軍執: 관직명)을 관직명으로 해석하는 오류에...
⊙ 8/10일 ; 연 나흘간 왜적은 평창에 모두 도착한듯, 본영은 평창관아로 장수들은 관아에 집결하였고, 부대는 약수와 천동에 진을 치고 첨병의 순찰 중에 정동굴에 피난을한 군,관민이 왜적에 적발되었다.
⊙ 8/11일 ; 응암굴은 왜적에 포위되어 군수는 체포되고, 강소사는 왜적에 체포시 응암굴 아래 천인절벽에 투신 자결하였다. 군수 일행은 평창관아에 투옥됨. 적의 괴수가 권 군수에게 하는 말로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에 들어와서 가는 곳마다 저항하는 자가 하나도 없 었다. 너희 나라(조선)는 지금 우리나라 일본(日本)이 되었다. 일본 천왕(天王)이 나로 하여금 강원(江原) 감사로 삼으니 일도(一 道)의 사람들이 나를 따르는데" 라는 말에서 이 괴수는 제 4번대장 모리요시나리임을 알 수있다.
⊙ 8/16일 ; 왜적이 영월로 이동하면서 군수일행도 영월로 압송되었다.
⊙ 8/19일 ; 17, 18일에 영월사람들이 투옥되며 19일엔 고씨굴에 피난한 고종원 형제도 체포되어 들어왔다.
이 장에서 권 군수와 영월의 고종원 두 형제의 대화의 기록이다. 이 이야기로 피리자는 영월 고씨동굴의 역사 내력을 빍혀 "고종경 임진왜란 창의비" 가 세워저 있습니다.
'''지난 고종경 어른이 영월서 의병을 일으켜고, 강원도백은 군사 500명을 보태주어 의병과 합 천여명의 군사로 감영의 나루인 흥원진을 방어하라 하였는데 군사들의 분란에 제기일까지 추포하하지 못하여 명에 미쳐 따르지 못한 죄명으로 영월로 압송되어 당 시 영월은 군수가 부재하여 평창군수의 대행체제로 권군수는 유영길 강원도백의 명에 의해 의병장 고종경 어른을 형횡하는 기록이 정확히 서술되어 있다.'(어른이라 표현한 점은 필자의 13대 선조이다)
⊙ 8/23일,,,자정쯤 부대는이동하여 북천(주천인듯)에 이르러 다른 진영과 합류하여 원주로 이동하였다.(이날의 호구록엔 아래와 같은 기 록이 있다) 제천과 주천의 갈림길에서 길가의 촌가에서 재물을 뒤지느라 뒤지느라 방방이 뒤지는것도 보았고 그리고 간혹 여자도 태 우고 가는자도 있었다. 또한 큰짐이나 작은짐을 지고 가는자는 반이상이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놈 모양을하고 있슬뿐이다.웃고 떠들 고 하는 말이 우리말이다. 깃발을 크게 벌리고 행군하는 걸 보면 마치 장수가 행군하는것 같다 . 그러나 허세다. 괴수는 보통 옷을 입 고 말만타고 대열 중간쯤에 섞여서 간다.
⊙ 8/24일 ; 신림을 지나 가리현에 들어가니 10명 정도의 머리를 잘라서 바위 위에다 올려 놓았다.( 이미 선발대는 미탄에서 영월, 주천으 로 먼저 가고 본대는 평창으로 들어온다)
⊙ 8/25일 ; (주;원주 감영에서) 통역 왜인이 와서 어린애의 목에 창을 들여대고 목사(주;원주목사 김제갑 옹)은 어디에 있냐고 다그치니 한 노인이 영원성(주;치악산 정상아래의 성)으로 갔다 말한다
⊙ 8/26일 ; 어제 왜병들이 영원으로 갔는데 오전에 왜병 한 사람이 영원에서 가져온 머리하나를 보이며 누구냐 묻는다. 어느 노파가 살며 시 말하길 원주목사 김제갑 옹의 아드님이란다.
(*주: 영원산성에서 김제갑목사와 그의 아들은 목이 베어지고 모리부대인 4번대1대의 3,000명의 왜적에 의해 원주 군, 관민 4,000 명은 참패를 당하고 원주도 왜의 손에 들어갔다.)
⊙ 9/2 ; 권군수 일행 3명은 깊은 밤 폭우속에 왜병의 감옥을 탈출을 한다
일행은 권두문 군수. 그의 아들 권주(軴). 고언영. 경진. 영월 고씨굴의 고종원, 고종길 형제가 새벽에 강원감영을 탈출한다. 그리고 고종원 형제와는 헤어졌다.
⊙ 9/3,4,5,6,7,8일에는 치악산을 넘어 주찬. 제천길에서 평창읍 입탄리까지 오게된다.
⊙ 9/9일 ; 이여림(李汝霖)의 집 길가 말머리에서 내려 살아서 평창 땅에 온 것을 감사하는 큰절을 하늘을 향해 했다.
이여림은 임란에 의병장으로 횡성전투에사 전사하자 애마는 수구(首軀)를 물고 주진으로 달려와 용연강(평팡강)의 깊은 용담에 뛰 어들어 죽었다 합니다. 이여림의 묘는 바로 이곳 장암산 아래에 있다.
⊙ 9/10 ; 입탄의 모래고개(노리재)를 넘어 평창으로 들어오며 이여림의 집 길가에서 말에서 내려 살아서 평창 땅에 돌아온것을 감사함을 의 큰 절을 하늘을 향해 했다. 저녁에 향교에서 잤다.
⊙ 9/11,12,13에 영주 본가에 당도하였다.
◆ 호구록은 일본군이 평칭을 처들어온 8월 7일부터 권 군수 일행이 포로로서 원주 강원감영에서 탈출하여 평창을 거쳐 영주 고향집으로 귀가하는 매일의 일기체 순으로 기록하였다.
===== 호구록 끝=====
5) 평창임란사의 문제 연구
◆ 왜군은 대관령을 넘어 북쪽에서 노산성을 공격하였다는 왜곡에 대한 이해
8/7일 ; 영동의 왜적들이 모두 請聞 嶺東의 大嶺을 넘었다라는 원문 번역에 대관령(대굴령)이라 함은 오류이며, 또한 일부가 대관령을 넘어왔단 점도 오류이다. 이런 왜곡에 의해서 대화에서 또는 노성산 북쪽에서 왜구가 공격하였다. 여만리 강변에 돌 누석단이 왜구의 진지다라는 점도 모두 왜곡이다. 그와 더블어 평창의 임진왜란에 회자되는 많은 이야기 중에 문제를 아래에서 하나 하나 논증합니다.
1) 왜군의 평창 진격 루트
4번대장의 주부대인 1,2, 6지대 3천명은 고성서 강릉으로 들어오자 이광준 강릉도호부사는 진영을 버리고 잠적하고 양민들과 의병은 강릉 시동을 지나 남쪽으로 두타산으로 피난을 갔다. 4번대는 강릉을 5일간 분탕질하고 삼척 두타산에서 강릉의 피난민들과 의병은 문간재를 넘어 사원터에서 3알건의 교전에 한명도 살아 남지 못했다. 이어서 북평지방민들은 두타산성의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여 재3 방어선까지 구축하여 왜구를 물리치자 4번대는 백봉령을 넘어 정선에서 평창으로 쳐들어 온다.
이때 4번대 본대는 왜군이 조선을 분할 점령하겠다는 分地之計에 의하여 강원도를 안 벗어나고 휘하의 重隆 부대가 울진, 평해를 다녀와 백봉령을 넘는다
2) 4번대 주력부대의 동해안 대회전의 상황
강릉으로 처들어간 왜군이 대관령을 넘지 않고 삼척으로 내려간 이유로 왜군에게는 미신같은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대관령은 범일국사와 김유신이 범접을 못하게 할 것이고 소나무 송(松)자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주의가 있기 때문이라 대관령을 금기 지역이라 한 것으로 추측한다는데, 이것은 후세에 학자들이 변명이고 웃기는 아저씨들,,, 고성에서 삼척까지 해안선을 따라 해송이 더 많은데 진 부분집합은 않되는 애기들을 늘어놓고 있다.
가령 제 4번대의 강원도 접수를 하기위해 강원감영 원주로 바로 쳐들어가면 원주의 지리 지형상 내륙에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로서 사방팔방에 군현의 군사들이 공격할 것이다. 따라서 강원도를 大회전하며 춘천, 철원. 고성, 양양, 강릉, 삼척 등의 각 지역을 하나씩 격파하고 감영으로 들어가는 작전과 또 하나의 이유는 3천명의 대 부대가 대관령 깊은 산간으로 이동시에 많은 시간을 소요함에 부식 추진이 어렵고 따라서 이상시 고립되면 난감하기에 지휘하는 대장으로서는 반가운 코스는 아니었으리라,
4번대 본대는 백봉령을 넘어 정선을 거쳐 원주 감영으로 가기에 미탄에서 선발대는 율치로 빠져 영월 주천을 거쳐서 원주입성을 하지만 본대는 평창을 거쳐서 정복하고 영월로 빠져 나간것은 강원도 대 회전을 하면서 변방의 적군(조선군)을 무력화 시키고 원주로 진격한다는 작전개념이다.
3) 임진란 당시 권두문 평창군수의 소실부인을 강소사라하는 무례함을,,
권 군수의 호구록 기록에서 강녀(康女)로 기록되며 소실부인이라 부연설명되어 있다.
절부(節婦)라고 기록되어 있지 강소사(康小使)라 하지 않았다. 또한 조선시대 모든 여성은 이름을 갖지 못했다. 매창등은 별명 (닉 네임)이지 자신에 본 이름은 아니다. 소사(小使)라 함은 잔 일을 하는 사람으로, 현재에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조선 중기때 사용한 기록은 없는 듯하다. 더 나가서 외지의 언 학자들은 지방신문에서 자신의 글을 재미있게 하려고 강녀를 애첩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10년전 작고하신 권태하 님(권두문 13대 직계 후손)후손 님은 메일에 강절부님은 집안의 어른으로서 엣날에 소실부인이라 한 것은 권군수의 양가 부모님이 연루하셔서 병 간호등에 본 부인이 임지에 대동하지 못하고, 소실 부인은 집안 일에 바쁘셨다 한다.
(광해군 4년에 경상감사의 상소로 절부(節婦)로 추승 정려되어 그의 8/7일자 기록에고향인 영주시 구성공원내에 정려각이 세워졌다.)
따라서 후대의 사람들은 강절부(康節婦)라는 높임말로 불러야 되는 것이다.
권 군수의 次子 주(車主)의 평창일기에서는 권 군수가 4월에 평창부임하고 왜란이 터지자 조정에서는 도 순변사( 참모총장격)에 신립, 순변사 이일에게 항전의 태세를 갖추라 하고 조령은 이일이 방비케 하고, 죽령은 성응길, 추풍령으 조경에게 방비케 하였는데 4월 24일 이일의 군대가 상주에서 가토 기요마사 군에게 패하고 충주로 밀리자 자연 요새인 조령(문경새재)를 넘어 탄금대에서 조정의 군대는 대패한다.
(이일은 보병이 아니고 기병출신이라 조령에서 막을 건을 뿌리치고 탄금대 벌판에서 일전의 최후를 맞는다. 당시 군사 지휘계통의 작전권의 연구부재가 화를 부른 것이다)
이때 죽령을 넘으려던 일군이 계획에 영주의 권 군수의 본집에선 31세의 강녀를 피난시키려 차남 권주가 데리고 고치령을 넘어 동면으로 하여 평창에 피난 온 것이다. 이는 권주의 평창일기가 기록된 『춘수당일고(春睡堂逸稿)』 권 1에 기록된바 현재 KISS의 서비스 중단으로 원문이 제공되지 않습니다.
4) 평창과 영주의 지리
8/7일자 기록에 영천(현 영주)와 인편도 잦고 하니, 또 9/9일 학지로 하여금 고향 영주에 소식을 알리게 하였다. 11일 이손, 개석이가 영천으로부터 왔다는 표현에 영주와 평창에 거리상 가능한가 하는 점에 호구록의 진위의 개연성에 의문을 할 수있다.
현재 평창에서 영주를 가기에는 주천-제천- 영춘-단양- 죽령-풍기- 영주를 가야하는 돌아가는 먼 길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영주에서 부석면 부석사 옆으로 소백산을 오르면 산길을 직선으로 올라가며 령이 세개로 마구령은 영춘으로 내려서고 고치령은 똑바로 내려오다 석항 앞에서 영월로 굽는다. 해발 700m의 고갯길 정상에는 영주에서 영월 정선으로 가는 상인이 많았다는 안내판이 있다. 경상도 물류는 소백산맥 고치령으로 정선, 영월로 들어가는 길로 현재는 터널로 되어 있다.
신동읍에서 영주로 가기엔 가장 첩경이다. 따라서 호구록에 고향집은 이 코스로 오간 것이다.
5) 평창 임진왜란사에서 문제 연구
① 왜군은 정선에서 성마령과 별패재를 넘었는가?
정선에서 성마령과 그 북쪽에 있는 별패재를 통하여 8월 7일밤 평창군으로 처들어와 여만리 쪽에서 노산성을 공격하여 일부 의병과 피난민은 성이 함락되니 피골에서 무수히 살해되었다, 가령 별패재로 내려 왔다면 "ㄷ"자 형으로 돌아오는 것이 되는 선택은 할 리가 없으며 또한 상안미 1리의 등용봉에서 난민과 의병이 모였다 하는 이야기는 모두 사실적 기록을 갖지 못한다. 특히 대화는 의병사에 13명이 총살 당했고 고환을 지졌다 하는 허무맹랑한 기록이 대화면지에 오르는데, 필자의 연구로 일제 폭도사까지 다 보니 대화에서 점심을 먹은 우체부를 죽였으며 주진에서 잡힌 것 밖에 당시 대화에는 우체부 외에 일본인은 없었다. 이러기에 대화의 기록은 믿을 수 없고 또한 원 기록도 찾을 수 없다.
또한 9월에 원주 감영으로 들어간 왜군들 중에는 횡성을 다녀가며 곡식이 불만족하자 일부는 다시 강릉으로 내려가는데 그간 잠적했던 강릉 도호부사 이광준은 진부에서 왜군을 막았다. 이 점은 대관령을 넘어 진부 대화 평창 코스로 오지는 않았다는 반증이다.
② 노산성 전투는 사실인가?
왜군은 대관령을 넘어서 북쪽에서 노산성 침략의 노산성 전투는 있었는가? 라는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이 점에 권두문 군수의 평창임란사 일지인 호구록을 인용하여 서술 합니다.
8/7일 ; 이날밤 왜적의 선발대가 정선으로부터 입군(入郡)하였다. 급기야 배를 불러 강녀, 권주, 와 4~5명의 노비를 태워 응암굴로에 들게게고 권 군수는 모든 장수와 수백명으 군민과 함께 굴로 들어갔다.
(※평창일기에서는 권주와 강녀 일행은 응암굴위의 혜정스님의 암자에서 밤을 새고 다음날 상굴로 들어가야 된다. 또한 권군수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의 일환으로 모든 군민을 데리고 정동굴로 가서 밤에는 천혜의 절벽이라 아마도 다음날 굴로 들어가게 된다.(『평창의 인문지리/ 정원대 저』에서는 정도(천동의 오자인듯)에서 응암굴로 배를 타고갔다 한다. 응암굴 절벽은 천동에서 강따라가며 한 부분이 (5m) 가 물이 무릎 위로 깊어 조심해야 된다. 필자는 군 입대전 응암에 수차례 야영으로 잘 알고 있슴) 또한 수백 명이 가기엔 날이 밝아 천동에서 중도마치에서 400m가서 이치골( 샘골인지?)의 게곡으로 암자를 지나 응암굴로 내려갔슬 것이다.
따라서 노산성 전투는 권 군수의 기록엔 없으며, 또한 호구록의 8/7일 시간대에서는 싸울 시간도 없이 정동굴로 갔으며 또 호구록의 기록외에 지시래골이나 전투에서 사망한 군사들의 이야기도 없다.
권 군수의 호구록을 근거로 보면, 8/7일 정선서 첨병 왜적들이 평창으로 들어오고 8/8일엔 주력부대들이 약수와 천동일대에 집결하여 군장을 푼후 주변에 먹거리나 부녀자 납치등을 목적으로 8/9일 천동인근 강건너 응암리에서 응암굴에 피신할때 풀숲에 감춘 깃발을 확인하고 주변을 검색하던 왜적들에게 피난 굴은 노출되고 다음날인 8/10일 피난굴은 초토화 되고 주민들과 군수일행은 체포되었다.
이러한 몇가지 사실로 미루어 볼때 노산성 북쪽에서 전투는 허위이다.
③ 여만리 강변의 뙤담의 역사를 제시한다
뙤담이라 전해지는 여만리 강물이 시루목에서 꺾어지는 50m 전쯤에 지금의 제방 안쪽선쯤에 호박돌 무더기 두개가 있었다. 이 돌 누석단(累石檀)을 임란때 왜적들이 노성산 요새에 대비한 성벽이란 설은 왜곡되는 것이다.
위 평창 임란사를 보면 노성산에서나 장기적 전투도 없었다. 또한 이 두 개의 누석단은 요새의 의미는 전혀없다. 왜담이 아닌 뙤담 즉 뙈놈이라면 오랑캐라 ,,, 고려때 70년간 이 땅을 밟은 몽고군에 항쟁때 몽고군이 쌓았다는추정도..
그러나 이 돌 누석단은 반대쪽에서도 노상산에 그대로 노출될 각도일텐데 은폐나 엄폐의 성을 쌓았다는 논리는 부정확한 뜻을 내포한다. 시루목 아래 여만리쪽 강변의 원뿔형 누석단 두기는 여만리 서낭당이라고 본인은 밝혔습니다.
이 누석단은 사진기록 한장없이 '82년도에 제방공사에 묻혔다. 이 서낭단은 밭터를 만들기에 호박돌을 강면쪽으로 정리한 약 50m*1m의 단위에 아래쪽은 높이 5~6m이고 위쪽은은 3m정도의 석서낭단의 요건인 두기외 큰쪽은 북쪽등의 요건을 정확히 맞춘 아마도 전국 최대의 서낭단이었슬 듯하다. 왜냐면 강변 호박돌로 평지보다 돌을 구하기가 쉽기때문이며 이 설명은 필자의 군 입대전의 기억입니다.
칠족령 위의 쌍으로 된 석조 서낭단이다. 아래 사진 오른편엔 오방색 띠가 서낭단임을 증명한다.
④ 8/9일 "조파"는 어디인가라는 문의에.
潮派의 潮는 밀물 조의 뜻이며, 派는 물결 파, 물따라갈 피, 방죽피이다. 따라서 이는 조파가 아니라 "조피'로 발음해야 된다.하지만 그곳일대에는 카르스트 지형이라 이곳의 작은 지류천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2km 아래의 송어 양식장의 굴물로 나오는 곳이기에 이 단어는 오류인듯 하다.
朝派로 써야 될듯 하다. 관아에서 해가뜨는 정 동쪽은 노산 선익골의 바로 이 방향이다. 따라서 조동이란 지명이 된다.이곳엔 멧둔제와 이곡으로 갈라지는 곳이기에 물결 파(波)자가 아닌 물 갈래 派를 써야 된다.
복병군집(伏兵軍執) 은 관직명으로 해석되어 있는데 복병군집은 적을 살피는 초소이다.
조파의 위치에 대한 문의가 있었는데 노산은 이곳의 초입으로 이곳에서 멧둔제와 이곳으로 갈라진다. 따라서 복병군집의 전망 초소는 이 아래에 위치해야 한다. 그곳은 반경 1km내의 병목지로 시계에 관찰이 잘 되는 곳이기에 이곳에 평창의 초소가 있었다.
⑤ 왕세자 잡으로 함경도에
평창의 임란사 이야기에 제4군은 왕세자를 잡으러 함경도를 가다가 철령에서 내려왔다 한다.
임란사에 기록은 제 4군은 가토 기요마사의 2군의 뒤를 따라 한양 목전에서 우회전하여 김화를 거쳐 함경도를 따라가기에 철령을 넘어 안변에서 유턴하여 동해안으로 내려오는 것은 앞에서 밝힌 왜군의 각자의 영역인 조선을 분할 점령하겠다는 分地之計에 의해 제 4군은 강원도로 약정되었기에 ( 이미 김화 춘천들은 먼저 들어갔다) 강원도로 내려온 것이다.
◆ 왕세자는 종묘 위패를 받들고 강원도로 피난한다.
왕세자 광해군은 선조와 같이 몽진길에 평양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으로 들어가려 할때 선조는 나는 중국에 내부(內附/중국 내지로 들어가 부속된다는 뜻으로 임금은 서인으로 된다 그러면 돌아와서는 왕아 안된다는 뜻으로 세자를 돌려 보낸다) 부자가 같이 압록강을 건너면 나라의 주인이 없게 된다. 세자는 종묘 위패를 받들고 강원, 경기등 사방의 군사를 불러 모으라 하였다. 왕세자는 영번 등으로 다니다가 이천(伊川/ 강원도 북부 군)에 머물렀다.<연려실기술내 기재잡기>
◆ 세자들의 근왕병 모집운동
탄금대에서 왜군에 패하여 많은 병사를 잃자 임금은 3도에 근왕병을 모집하라 지시하였기에 임해군과 순화군은 3도에 근왕병 모집을 한다. 근왕군이 모집아여 13만의 대군이 모 수원 독성에 오니 독성의 왜군은 용인왜군과 합하여 용인에서 아군은 대패하며 순화군은 강원도로를 거쳐 함경도로 도망갔는데 순화군은 싸이코로 40여명의 살인자로, 백범 김구는 97명중 테러는 윤봉길 외에는 생계형 살인이라는데(정기안 박사) 순화군은 함경도에서 자주 살인을 하여 문제가 되자 귀양온 국경인이 붙잡아서 포박하였다가 제 2군 가토 기요사마에게 인계하였다.<연려실기술, 지봉유설>
⑥ 응암리(鷹巖里)는 일명 매화미을이라 한다.
<8/10일자 호구록 기록에서는 지대성이 기르던 매를 들고 절벽위에 앉으니 왜구들이 달라하여 권 군수는 주라고 하여 대성이가 풀어주니 메는 하늘로 날아갔다 한다.>
이러한 기록에 상굴과 하굴에 연락을 하다가 왜군에 적발되어 매에 화를 입어 매화라 한다는 제미있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 지형은 풍수적으로 돌아가는 높은 산세에 쌓인 미을이기에 메화낙지형에서 유래하여 매화마을로 불리는 것이다.
응암리에서 대상리 까지의 높고 깊은 산세에 매가 많이 살고있다. 가끔 매는하늘 높이 한 바퀴 빙 돌다가 쏜살같이 내려와 먹이를 잡는다. 조선시대 매는 궁중에사 사냥의 도구로 조공에 특상품으로 말 열마리 값이다.
호구록에 지대성이가 기르던 매는 지대성이가 기른 매는 조육이 안되서 매를 잡을 수 없기에 길러서 팔면 상당한 돈이 된다.
( 동물은 인간이 아니기에 인지적 교육이 아니라 조교라하듯 도울 조자의 조육(助育)이라고 써야 하는데 사전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응암리와 매화마을 지명에서 어는 것이 먼저의 지명일까??
호구록에서는 즉 조선 중기에는 응암굴에서 보듯 응암(매 바위나 매가 사는 절벽)이라 불리며, 또한 임란 후에는 매에 화를 입어 매화라 하하지만, 지명은 대부분이 풍수도참설에 따라 지어지기에 매화낙지형의 지형에 따라 매화마을이라 불리는 것이다.
5. 평창임란사에 과제
정선서 평창을 넘어오며 평창을 그냥 그대로 별 노력없이 정복하였다. 그것이 유사점이 영원산성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영원성의 4천명의 병력은 25일 모리부대에 3천명에 전투 한번도 안하고 패하였다. 이렇게 삘리 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4번대장 모리 야스나라는 포로로 잡힌 권주에게 말하기길 위라가 너희나라 들어와서 가는 곳미다 저항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너희나라는 지금 일본이 되었다 일본 천왕의 나라로~ 하는 말을 한다.
물론 평창의 관군 70여명 중 절반이 조정의 명에 의해 문경새재를 막으라는 신립군대에 차출 당하였듯이 원주 도영에서도 문경새재에 차출 당하였다. 이런 이유보다 심각한 현상은 왜병에 대하여 심한 조력자들 때문이다.
아첨으로 편익을 맛보는 부역자들 때문에 수 없는 조선인이 더 피를 흘린점 들이다. 호구록 막바지에 강원감영 적장의 방에는 많은 조선 여인이 있었다는 글에 물론 관기들도 있겠지만 규수들도 없었슬까?? 똥이고 된장도 구분 못하는 여인들,, 장수의 방에 기거 한다는 우월감에 도취된 여인들.. 그들의 정조는 유린당하였다고 할 수만은 있겠는가?
그러기에 논개의 투혼의 행위가 빛나는 것이다.
평창임진란사에 항복하라는 倭書를 가져온 자의 목을 베고 항전하는 평창 군, 관민의 기상은 당시 임란에서도 진주성 전투, 행주산성전투에 버금가는 기상이다. 국가의 존폐의 위기에 목숨을 담보로 대항하는 용감성은 후대인으로 하여금 그 기상을 찬양해 마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 평창 역사에 이보다 더한 자랑은 없다.
여기에 강절부 부인의 투신 자결한이야기는 광해군 4년에 경상감사의 상소로 절부(節婦)로 추승 정려되어 그의 고향인 영주시 구성공원내에 정려각이 세워졌다. 평창 응암굴의 이 역사의 현장에는 강절부님의 시대를 넘어서는 성 모럴적 이야기도 지금 우리에게 들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응암굴에서 왜군의 포로가 되기전에 천인절벽에 뛰어내려 자결한 강녀(康女)는 평창역사를 넘어서서 이 시대에 도덕적 숭고한 性의 모랄로 다시금 조명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