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봄꽃은 승전가다.
혹독한 추위와
칠흑의 어둠을 이겨낸
그들 생명만이 부를 수 있는
승리의 찬가다.
(김필연·시인)
+ 無言으로 오는 봄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天地神明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혀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말이 가장 많을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 보게나.
(박재삼·시인, 1933-1997)
+ 봄이 오는 모습
봄은 나 봄입네 하고 오지 않는다
속으론 봄이면서
겉으론 겨울인 양 온다
그러다가 들통이 나면
그때야 비로소
꽃망울을 터트린다
경제도 그렇고
불황에서 호황이나 좋은 일은
그렇게 오는지 모르게 온다
(차영섭·시인)
* 봄꽃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함민복·시인, 1962-)
+ 봄
봄은 그 이름만으로도 달뜬다
예서 제서 쭈뼛거리는 것들
쭈뼛거리다 돌아보면 터지고
터지다 못해
무덤덤한 심장까지 쫓아와 흔들어대는
연초록 생명에 오색 꽃들에...,
하늘마저 파래 주면 꽃잎 날리듯
심장도 풋가슴으로 춤을 춘다
애먼 걸 둘러대어도 이유가 되고
용서가 될 것만 같은 봄, 봄.
(김필연·시인)
+ 난생처음 봄
풀 먹인 홑청 같은 봄날
베란다 볕 고른 편에
아이의 신발을 말리면
새로 돋은 연둣빛 햇살들
자박자박 걸어 들어와
송사리 떼처럼 출렁거린다
간지러웠을까
통유리 이편에서 꽃잠을 자던 아이가
기지개를 켜자
내 엄지발가락 하나가 채 들어갈까 말까 한
아이의 보행기 신발에
봄물이 진다
한때 내 죄가 저리 가벼운 때가 있었다.
(김병호·시인, 1971-)
+ 사람들
봄은
얼음장 아래에도 있고
보도블록 밑에도 있고
가슴속에도 있다
봄을 찾아
얼음장 밑을 들여다보고
보도블록 아래를 들추어보고
내 가슴속을 뒤지어 보아도
봄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버스,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는
봄을 보았다
봄은 사람들이었다.
(강민숙·시인, 1962-)
+ 그해 봄
그해 봄은 더디게 왔다
나는 지쳐 쓰러져 있었고
병든 몸을 끌고 내다보는 창 밖으로
개나리꽃이 느릿느릿 피었다
생각해보면
꽃 피는 걸 바라보며 십 년 이십 년
그렇게 흐른 세월만 같다
봄비가 내리다 그치고 춘분이 지나고
들불에 그을린 논둑 위로
건조한 바람이 며칠씩 머물다 가고
삼월이 가고 사월이 와도
봄은 쉬이 오지 않았다
돌아갈 길은 점점 아득하고
꽃 피는 걸 기다리며 나는 지쳐 있었다
나이 사십의 그해 봄
(도종환·시인, 1954-)
+ 내 마음에도 봄이 오면
내 마음에도 봄이 오면
노랗고 빨간 꽃들이 지천으로 필까.
파아란 하늘 아래
연한 바람이 불고
연녹색 환희로 가슴 벅찰까.
오순도순 웃음소리가 들리고
포근한 정이 보드랍게 쌓일까.
내가 순수했던 어릴 적엔 몰랐네
마음에도 오솔길이 있었고
마음에도 꽃길이 있었고
내가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네
마음에도 겨울이 길어 찬바람 불고
마음에도 슬픔이 많아 꽃이 진다는 걸..
아무래도 내일은
태양을 하나 따서 불지펴야겠다.
언 땅을 녹이고 언 마음을 녹이고
차가운 겨울 단숨에 떨쳐내고
꽃잎 같은 봄 하나 만들어야겠다.
마음에 푸른 숲 만들며 살아야겠다.
꿈결같은 그 숲길 나란히 걸으며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어야겠다.
(김용화·시인, 1971-)
+ 햇빛이 말을 걸다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권대웅·시인, 1962-)
+ 봄날의 산책
어떤 길은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낯설지 않은 길,
길을
음미하며 찬찬히 걷다보면
나는 어느새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흔들흔들 걸음을 옮기면
그 사람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닮은 물푸레나무 아래 앉아
이야기하듯 잠깐 졸기도 하는 것이다.
맨몸을 드러내며 그 사람 앞에서 춤추다
무거운 햇살에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
(박순희·시인)
+ 나는 봄이었는가
봄이 오고야 나는 나의 봄을 생각한다
나는 봄이었는가
바람 부는 날에도
눈보라 머리 풀어헤치던 날에도
나는 봄이었는가
봄은 봄이라 말하지 않는다
조용히 수줍게 올 뿐
나는 친구를 사랑하였는가
따듯한 마음을 꺼내어 주고 싶을 때
아픔 많은 친구를 위해 나눠줬는가
마땅히 줄 것 없어도
따듯한 마음을 내어주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다
나는 봄이었는가
봄이 오고야 나는 나의 봄을 생각한다
따듯하자고
만나는 사람을 흐뭇하게 하고
시냇물 졸졸 흐르게 하자고
꽃이 피면 새들은 천리 밖에서 온다
꽃이 피면 나는 봄이 되고야 만다.
(윤광석·목사 시인)
+ 봄을 먹다
봄은 먹는 것이란다
제철을 맞아
살이 통통하게 올랐으니
어떻게 먹어도 맛있는 것이란다
얼었던 땅을 쑤욱 뚫고 올라온
푸르고 향긋한 쑥에
깊은 바다 출렁거리는
멸치 한 그릇 받아
쌈 싸서 먹어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