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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들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CHAPTER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이다.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다.
고된 노력과 정당한 가격
- 1990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상으로, 갈수록 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덕이며 자신이 기울인 노력에 따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2012년 중국 샤먼대에서 ‘시장경제에 대한 도덕적 제한’이라는 주제로 강연-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사느라 자기 신장을 판 중국 10대 학생에 관한 최근 신문 기사에 대해 많은 학생들은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를 나타냈다. 강압이나 협박에 의하지 않고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신장을 팔기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부를 이룩한 사람은 그만한 능력을 입증한 것이며, 따라서 생명을 연장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 우리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에는 저항하는 한편, 우리는 스스로 성공했고 따라서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재능에 대해 사회체제가 부여하는 보상이 아무리 크든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에는 환호하는 일은 놀랍지 않다.
시장과 능력
- 시장 메커니즘이 공적 선을 이루는 기본 수단이라는 레이건-대처식 사고. 그러나 그들은 시장이 공정하게 작동해야 함을 분명하게 하려고 했다. 노동시장에서 개인이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게 해줄 교육, 보건, 보육 등 여러 서비스 역시 동등해질 필요가 있었다. 이로써 다시 중도좌파적이면서 시장친화적 자유주의인 담론이 1990년대에서 2016년까지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 지난 40년간 이런 능력주의로의 전환이 갖는 일부 부정적이 측면- 첫째, 책임을 특히 강조함으로써 복지국가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관련 리스크 부담을 정부와 기업에서 개인으로 옮기려는 태도/ 둘째, 열심히 일하고 규칙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
개인적 책임의 담론과 사회적 상승의 담론은 지난 수십 년간 정치적 논쟁에 불을 붙였고, 결국에는 능력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을 초래했다.
자기 책임의 담론
- 복지국가에 대한 레이건-대처식 비판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복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따라서 공동체는 단지 자기 책임이라 할 수 없는 불운에 대해서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레이건/ “우리는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힘겨워하는 사람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반드시 우리의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
- 캘빈 쿨리지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루스벨트,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버락 오마바/ 누군가가 가난하거나 병 들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며, 정부 도움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
-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가난한 사람과 그런 자격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구분하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맞서 싸우는 사람은 정부 보조를 받을 만하지만, 불우해서 가난해진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 주장.
- 클린턴 대통령/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를 끝내겠다” -1992년 대통령 공약 당시
“모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모두에게 그에 따른 더 많은 책임을 지도록 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정부나 서로에게 아무 근거 없이 뭔가를 요구하는 나쁜 버릇을 없앨 때입니다.”
- 토니 블레어 총리/ “새로운 노동당은 능력주의를 당의 노선으로 삼아야 한다. 사람은 태생이나 특권에 따른 특혜가 아닌 스스로의 재능에 의해 사회적 상승을 이룰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 게르하르트 슈레더 독일 수상/ 복지 제도 개혁을 지지
- 복지국가는 이제 책임을 면해줄 방파제로서 충분하지 않으며, 전보다 더욱 개인에게 책임을 물리고 있다. 잘못된 행동이 아닌, 운이 나쁜 탓에 곤경에 놓인 사람에게만 복지 수혜 자격을 제한하는 조치가 대표적인 ‘각자 능력대로 대접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 사회적 상승 담론 : 평등한 기회와 사회적 상향 이동 보장이라는 이상은 오래 전부터 아메리칸 드림의 일부였다.
- 로널드 레이건/ “모든 미국인은 개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평가받을 권리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꿈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뻗어 갈 수 있어야 마땅하다.”
- 빌 클린턴/ “우리 모두가 사회적 상승의 기회를 갖는다는 아메리칸 드림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이상이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지키며 행동한다면 신이 주신 능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뻗어갈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오바마/ 대학 교육을 사회적 상승의 기본 수단으로 여겼다. 오바마의 사회적 상승 담론은 레이건과 클린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능력주의를 지향했다. 비차별을 강조하고, 열심히 노력할 것을 주장하고, 개인이 각자 책임을 지라고 시민들에게 훈계했다. 따라서 여기서 사회적 상승 담론과 능력주의 윤리가 한 데 엮인다.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출세할 수 있다. 그들의 성공은 그들 자신이 일궈낸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
“자격이 있다”라는 말
- 1960~1970 케네디 전혀 사용 안함,
- 레이건 이후 “자격이 있다”는 말은 당파를 불문하고 대통령들의 상투적인 문구가 되었다. 1970~2008년 사이 세 배, 2018년 네 배 많이 사용, 오바마, 클린턴, 힐러리 클린턴, 토니 블레어, 테레사 메이
- 힐러리 클린턴/ 2016년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사회적 상승과 자격에 관한 담론을 끊임없이 거론했다. 자신이 당선되면 “여러분이 얻을 자격이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하겠다고 공약했다. “저는 참된 능력주의가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저는 불평등에 진절머리가 납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한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고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퓰리즘의 반격
- 사회적 상승에 관한 담론은 2016년 그 추진력을 잃어버렸다.
- 도널드 트럼프/ 사회적 상승,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노라”- 그가 말한 위대함의 비전은 지난 40년 간 미국에서 활발하게 공적 담론을 일으켰던 능력주의적 기획과 아무 상관이 없다.
- 트럼프와 브렉시트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포퓰리스트 정당들에 표를 던진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은 사회적 상승에 대한 약속보다는 국민 주권 원칙의 재확인, 국가 정체성과 국가적 자존심 등의 강조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장주도적 세계화를 환영하면서 그 이익 대부분을 챙기고 노동자들을 외국 노동자들과의 경쟁에 내몬 장본인들, 동료 시민들보다는 세계 각지의 엘리트들과 더 가까워 보이는 능력주의 엘리트, 전문가, 전문직업인 계층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전체 인구의 50퍼센트 보다 더 많이 벌고, 중위 소득이 40년 동안 줄곧 제자리 걸음.
- 국제 공공여론 조사에 따르면, 77%의 미국인은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고 믿는 반면, 독일인은 그 절반, 프랑스와 일본인은 대부분의 보장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질문을 좀 바꿔보면….
√ 질문1 “앞서가는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 미국인 73%는 열심히 일하는 것, 독일인은 그 절반, 프랑스인은 네 명 중 한 명
√ 질문2 “왜 어떤 사람은 부유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가?
- 미국인은 일과 성공에 대해 포괄적인 질문 때보다는 노력의 중요성에 덜 확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 질문3 “부자가 부자인 까닭은 남보다 열심히 일해서 일까, 살다 보니 운이 좋아서 일까?”
- 미국인의 의견이 반반으로 갈렸다
√ 질문4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할까?”
- 다수의 미국인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 탓, 겨우 열 명 중 세명이 노력 부족으로 답했다.
- 미국인은 다른 대부분의 국가 국민들보다 인간의 자수성가 능력을 더 많이 믿는다. 57%의 미국인은 인생 성공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말에 반대하는 반면, 유럽국가들 등 타 국가 국민들 과반수는 성공이 자신의 통제 범위 밖의 변수에 따라 주로 결정된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굳건한 미국은 사회민주주의의 유럽보다 덜 관대한 복지국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사회적 상승에 대한 흔한 믿음에 반해, 미국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상류층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사실 대부분이 중산층조차 되지 못한다. 다른 많은 나라들보다 미국에서 사회적 이동성이 떨어지고 있다. 부나 가난의 대물림 현상은 독일, 스페인,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캐나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보다 미국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중국의 소득 불평등 수준이 미국과 엇비슷하다고 한다. 중국은 이제 미국보다 세대간 이동성 정도가 높다.
- 연구자들이 미국과 유럽의 시민들에게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가능성이 각자의 나라에서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미국과 유럽의 응답자들은 대체로 현실과 다른 대답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정반대로 틀렸다는 점이다. 미국인들은 자국의 사회적 상승 가능성을 과대평가했고, 유럽인들은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보는 것과 믿는 것
- 미국보다 더 평등하고 사회적 이동성이 높은 나라에 사는 유럽인은 사회적 상승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며, 미국인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왜 그럴까? 모두 믿음과 신념이 인식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 장벽을 없애고 운동장의 기울기를 바로잡고 교육 기회를 더 넓혀 일부 특권층이 아닌 모두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게 하겠다는 데 누가 반대한단 말인가?
그런데 2016년 노동자들에 대한 세계화의 가혹한 부작용이 가시화되자, 진보 엘리트들의 사회적 상승 담론은 불평등이 증대하는 상황에서도 “우리 운명의 책임자는 우리 자신이며 따라서 성공과 실패는 우리 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 능력주의가 나아갈 이상에 대한 야심을 나타내면, 패배자는 시스템을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주어진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패배자는 스스로를 비난하도록 요구 받게 된다. 최근 이러한 요구는 ‘뭐 하다가 대학 학위도 못 받았느냐’의 형태를 가장 많이 띈다. 능력주의적 오만의 가장 고약한 측면은 학력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CHAPTER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무기가 된 대학 간판
- 트럼프/ 대선 유세 기간과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트럼프는 자신의 학업 성적이 뛰어났다고 여러 차례 자랑.그가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어휘를 구사하며, 세계정세 인식 수준이 초등학교 5~6학년생 정도라는 연구와 국방장관의 말에도, 그는 자신의 IQ는 높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낮다고 거듭 이야기 했다.
“나를 믿어주세요. 나는 꽤나 스마트한 사람입니다.”
- 조 바이든/ 1987년 첫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어느 유권자가 그에게 “어떤 로스쿨을 다녔고 어느 정도의 성적을 받았느냐”고 캐묻자 버럭 성을 냈다. 바이든의 대답은 과장으로 범벅되어 있다. 실은 그는 불우 학생에게 주는 등록금 부분 면제 장학금을 받았을 뿐이고, 그의 최종 성적은 동급생들 중 바닥에 가까웠다. 그리고 (복수전공을 시도하긴 했지만) 3개는 커녕 1개 학사 학위만 겨우 받았다. 그 밖에도 과장이 한둘이 아니다. .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 1990~2000년대의 주류 정당들은 불평등, 임금 정체, 제조업 일자리 감소 등에 대한 해답으로 일단 교육을 내세우게 되었다.
- 1991년 조지 H. W. 부시/ “해답은 교육입니다.”
-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제게 물어보십시오. 정부가 제일 먼저 추구해야 할 세가지… 교육입니다. 교육이지요, 교육이라고요.”
- 빌 클린턴/ “우리가 뭘 얻을 수 있느냐, 그것은 우리가 뭘 배울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프랭크는 과연 교육 실패가 불평등의 주원인일까?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불평등과 수십년 동안의 세계화로 노동자가 떠안게 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직 교육에만 집중하는 일은 심각한 역효과를 낳는다.
- 학력주의 편견은 능력주의적 오만의 한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에 더욱 물들게 되면서, 엘리트들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버릇마저 들었다. 대학에 가서 자신의 조건을 향상시키라고 노동자들에게 골백번 되풀이하는 말은 아무리 의도가 좋을지라도 결국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학력 떨어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명망을 훼손한다.
최고의 인재들
- 오바마 대통령/ 그의 내각 구성원 중 2/3는 아이비리그 출신, 21명 중 13명은 하버드 또는 예일 졸업자였으며, 대학원 학위가 없는 사람은 세 명뿐이었다.
- 알터는 케네디 내각과 오바마 내각의 비슷함에 주목한다. “두 대통령 모두 아이비리그를 나왔으며, 미국인들 대부분의 일상생활에 어느 정도 경멸 섞인 무관심을 갖고 있었다. 결국 오바마의 경제고문들도 늪을 자초했다. 금융위기를 맞이해 월스트리트의 편을 들어주도록 함으로써 그들은 은행들이 담보도 없이 거액의 구제금융을 받도록 했다. 덕분에 민주당은 많은 노동자들의 눈 밖에 났다. 그리고 트럼프는 백악관에 갈 꽃길을 얻었다. 이런 정치적 판단 착오는 능력주의적 오만과 무관하지 않다.
- 월스트리트 간부들이 오바마 선거운동에 거액의 기부를 했음은 사실이지만, 그의 행정부가 금융업계에 관대한 것은 단지 정치적 보은 때문만은 아니다.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학력이 뛰어나고 전문성이 돋보이는 투자은행가들은 그들이 실제로 받는 엄청난 보수가 아깝지 않은 인재들이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것이었다.
- 최근까지 ‘스마트한’이라는 형용사는 주로 사람을 묘사할 때 쓰였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스마트’는 물건에 붙게 되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능력주의 시대와 손을 맞잡게 되자 ‘스마트하다’는 표현을 통치 방식에도 사용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스마트해지기 위한 일
- 1980년 이전까지 미국 대통령들은 ‘스마트’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
- 조지 H. W. 부시 / 스마트카, 스마트 웨폰, 스마트 스쿨 등을 종종 언급하기 시작.
-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450번, 오바마 900회.
- <뉴욕타임스> ‘스마트’ 사용 빈도가 1980년에서 2000년 사이에 4배, 2018년에 다시 그 두배가 되었다.
- 능력주의적 기준이 대중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서 ‘스마트’는 점점 더 많이 쓰이고, 그 진짜 의미는 알게 모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분법적 가치 비교평가의 ‘스마트하냐 둔하냐’, ‘정의냐 불의냐’, ‘옳으냐 그르냐’ 등의 윤리적, 이념적 비교평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능력주의가 판을 치는 요즘 이러한 언어 사용 관행은 ‘윤리적 옳음 보다 스마트한 게 백배 낫다’는 인식을 심을 수 있다.
- 클린턴/ “전 세계적인 AIDS와의 싸움, 그것은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스마트한 일이라 해야 하는 거죠.”
- 오바마/ “여성의 권리 신장은 단지 옳은 일일 뿐이 아닙니다. 스마트해지기 위해 해야 할 일입니다.”
- “스마트해지기 위해 할 일”이라는 말은 언제나 신중한, 또는 손익계산적인 합리성과 관련되며 도덕적 고려와는 무관하다. 놀라운 건, 이제 현실적 신중성이 “스마트하냐”의 문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정책이 우둔하지 않고 스마트하다며 변명하는 일은 자신의 학력이 출중하다며 변명하는 일과 매우 닮았다.
-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의회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저는 스마트 파워의 활용에 대해 말했습니다. 스마트 파워의 핵심은 스마트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유능한 분들은 제가 아는 가장 스마트한 분들 중에 속해 있습니다.”
- 오바마/ “저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이 전쟁에 반대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둔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 엘리트는 입이 닳도록 “스마트하다”, “우둔하다”를 말함으로써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도 까맣게 모르는 것 같다. 2016년 많은 노동자들은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내려다본다는 느낌에 분을 품었다.
-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에서 조사에 따르면 전형적인 차별 대상 집단(무슬림, 터키 출신 유럽 거주민, 빈곤층, 비만인, 시각장애인, 흑인, 빈곤층, 노동계급, 저학력자 등) 중에서 저학력자가 가장 기피됨을 알 수 있었다.
- 연구들자들은 결론 중 하나로 능력주의 사회에서 대학 진학이 계속 강조됨으로써 비대졸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화된다고 본다. “교육이야말로 사회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의 권고는,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의 집단이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되면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될 위험성을 키운다.”
학위가 있어야 통치도 한다
- 2000년대 미국과 서유럽에서 비대졸자 시민은 단지 업신여겨질 뿐이 아니다. 선출 공직에 전혀 참여할 수가 없다. 미 의회에서는 하원의원 95퍼센트와 상원의원 100퍼센트가 대졸자다.
- 미국 성인의 1/3이 비대졸자이지만, 그 중 연방의회에 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다.
- 1960년대만 해도 상원의원 1/4과 하원의원 1/4이 비대졸자였다. 지난 50년 동안 의회는 인종, 민족, 성별에 있어서는 더 다원화되었다. 그러나 학력과 출신계층에서는 훨씬 일원화되었다.
- 영국 전체를 통틀어 70퍼센트는 비대졸자다. 국회의원의 경우 12퍼센트만 그렇다. 하원의원은 열 중 아홉이 대졸자이며 네 명 중 하나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왔다. 지난 40년 동안 영국 노동당은 하원의원들의 교육과 출신계층에서 크나큰 변화를 겪었다. 1979년에는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의 41퍼센트가 비대졸자였다. 2017년에는 16퍼센트만이 그렀다.
노동당의 계급 구성은 가장 급격히 바뀌었다. 1959년에는 노동당 하원의원의 37퍼센트가 육체노동자 출신이었다. 2015년에는 7퍼센트만이 그랬다. 영국 정치학자 올리버 히스의 말 처럼, “하원의원 출신 구성의 그러한 변화는 의회가 영국 국민을 대표하는 범위를 좁혔다. 노동당은 전통적인 노동계급 대변 역할을 훨씬 덜 하게 되었다.”
- 독일 연방의회는 83퍼센트가 대졸자다. 2퍼센트도 안되는 의원들만이 직업계 중학교(하우프트 슐레)가 최고학력이다.
-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에서는 82~94퍼센트의 국회의원이 대졸자다.
- 오늘날 유럽 의회의 높은 고학력자 비율은, 19세기 말 재산 기준으로 투표권을 제한했던 때와 비슷하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19세기 중반과 후반의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대졸자였다.
-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 오늘날 영국인의 겨우 7퍼센트만이 사립학교에 다니며, 1퍼센트 이하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입학한다.
보리스 존슨의 2019년도 내각의 거의 1/3이 사립학교 출신이며, 거의 절반이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를 볼 때 대부분의 보수당 내각 장관들과 노동당 내각 장관의 1/3 정도가 사립학교를 나왔다. 그러나 그 시기 가장 성공적인 영국 정권 중 하나는 학력이 가장 낮고 출신 계층 분포가 가장 넓은 정권이었다.
- 의회를 고학력자 계층의 전유물로 만들면 대표성만 더 낮아질 뿐이다. 이로써 노동계급은 주류 정당에서 배제되며 특히 중도좌파 정당에서 그렇게 된다. 정치판은 학력에 따라 양극화된다. 오늘날 정치판을 가르는 가장 깊은 균열 중 하나가 바로 대졸자와 비대졸자 사이의 균열이다.
학력 간 균열
- 2016년 미국의 비대졸자 백인의 2/3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고학력자 표의 70퍼센트를 쓸었다. 선거학자들은 소득보다 학력이 트럼프 지지 여부에 더 확실한 변수가 되었다고 본다.
학력 간 균열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대졸자 비중이 높은 50개 카운티 가운데 48개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4년 전 버락 오바마가 얻은 표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대졸자 비중이 가장 낮은 50개 카운티 가운데 47개에서는 클린턴의 득표가 오바마 때보다 훨씬 나빴다. 프라이머리 초기에 거둔 그의 승리를 자축하며 트럼프가 이렇게 외친 것도 무리가 아니다 “ 난 덜 배운 사람들을 사랑한다!”
-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좌파 정당은 저학력자의 지지를 얻고 우파 정당들은 고학력자의 지지를 얻어왔다. 능력주의 시대에 이 패턴은 뒤집혔다. 오늘날 고학력자들은 중도좌파 정당에 투표하며, 저학력자들은 우파 정당에 투표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같은 패턴 역전이 보인다.
흑인, 라틴 계열, 아시아 계열 미국 유권자들은 학력 수준에 상관없이 계속 민주당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2010년대가 되자 학력이 가장 결정적인 정치 균열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한때 노동자를 대변했던 정당들은 갈수록 능력주의 엘리트의 정당이 되고 있다. 2018년 총선에서, 비대졸자 백인 유권자의 61퍼센트가 공화당에 투표했으며 민주당에는 37퍼센트만이 표를 던졌다.
- 영국에서는 노동당의 지지기반이 비슷하게 이동 중이다. 1980년 대 초 노동당 하원의원 1/3 정도가 노동계급 출신이었다. 2010년 그 비중은 열 중 하나가 채 안된다.
저소득 유권자들은 고속득자들에 비해 브렉시트에 대체로 찬성하는 편이었다. 비대졸자 70퍼센트 이상이 브렉시트에 찬성했으며, 대학원 학위자의 70퍼센트 이상은 반대했다.
대졸자 비중이 제일 낮은 20개 지자체 중 15개에서 브렉시트 찬성표가 많았다. 고학력자 비중이 제일 높은 20개 지자체에서는 모두 반대표가 많았다.
- 프랑스에서는 1980년대부터 비대졸자는 사회당과 그 밖의 좌파 정당에 등을 돌렸으며 대신 고학력 엘리트가 그런 정당의 주 지지자들이 되었다. 1950~1960년대 좌파 정당이란 노동계급의 정당이었다. 대졸자가 좌파 정당 지지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비대졸자보다 10퍼센트 높았다. 30퍼센트의 수치가 역전된 것이다.
- 피케티는 좌파 정당들이 노동자 정당에서 지식 계급, 전문직업인 정당으로 탈바꿈한 것이 왜 그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불평등 증가에 대응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 준다고 본다. 한편 높은 학력을 못 가진 사람들은 엘리트가 밀어붙이는 세계화에 반발하고 포퓰리스트, 국수주의자 후보들에게 표를 던졌다. 미국의 트럼프나 프랑스의 민족주의-반이민 정당을 이끄는 마린 르펜 같은 사람들에게 말이다.
- 오늘날 59퍼센트의 공화당원들이 대학이 이 나라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며, 33퍼센트만이 고학력을 좋게 보고 있다. 대조적으로 민주당원들은 대학이 긍정적 효과를 준다는 의견에 압도적으로 동의한다(67퍼센트가 동의, 반대 의견은 18퍼센트다)
- 한때 기회의 문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대학 학위는 이제 학력주의자의 특권과 능력주의 오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오로지 교육만이 불평등의 해답이라 하는 사회적 상승 담론은 부분적으로 비난받는다. 대학 학위가 품격 있는 직업과 사회적 명망의 조건이라는 생각을 근거로 정치를 하니 민주주의는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은 비대졸자의 사회적 기여를 폄하하며 사회의 저학력 구성원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긴다. 그리고 노동 계급 전체를 대의 정부에서 효과적으로 배제한다. 그 결과 정치적 반격을 겪는다.
기술관료적 담론
- 오바마 구글에서 연설/ “저는 사실에 근거한 판단 능력을 백악관에서 재구축하고 싶습니다.” - 그가 염두에 둔 문제는 더 나은,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 오바마는 전임 대통령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대학의 경제학자들이나 기업 임원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많이 썼다. ‘비용 곡선을 꺾을’ 필요성, ‘인센티브제화하다’, ‘스마타트하다’ – 기술관료적 개념
기술관료적 접근을 정책에 쓸 때의 문제점 중 하나는 정책결정권이 소수 엘리트에게 돌아가고 그만큼 일반 시민은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치적 설득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테크노크라시냐 데모크라시냐
- 두 쪽 모두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경쟁적 개념들을 갖고 합리적으로 토론하려는 태도를 외면한다. 2016년 포퓰리즘의 갑작스러운 상승(영국의 브렉시트 결정과 미국의 트럼프 승리)은 능력주의 엘리트와 신자유주의적, 기술관료적 정치 관행에 경종을 울린 것이었다.
- 사실 “나는 과학을 믿는다”는 민주당의 선거 구호가 되었던 바 있다./힐러리 클린턴, 오바마는 대통령
- 모이니한 상원의원/ “무엇보다 팩트가 먼저”
- 정치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 지에 대해 벌어진다.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다. 모이니한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의견이란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
기후변화 논란
-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과학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기후변화에 대한 입장이 양극화된다.
“지구온난화는 자연적인 환경 변화 때문이다”라는 말에 대부분의 공화당원은 “그렇다”라고, 대부분의 민주당원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두 당의 고학력자들 간 의견차는 53퍼센트였는데, 저학력자끼리는 단지 19퍼센트의 차이를 보였다.
- 기후변화를 놓고 정당 간 나뉜 입장은 사실과 정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관이 달라서 생긴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과학을 알게 되면 기후변화에 대한 옥신각신이 사라질 거라는 가정은 오류다. 오바마는 우리 모두가 이런 허심탄회한 토론을 해야 한다고 하며, 기후변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한탄했다.
지난 40년을 군림해온, 좋은 학력을 자랑하는 능력주의 엘리트의 실수 중 하나는 그러한 질문들을 정치 논쟁의 핵심에 제대로 집어넣지 못한 것이다. 민주주의 규범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지 걱정하고 있는 이 시점에, 능력주의 엘리트의 오만과 기술관료적 비전의 협소함에 대한 불만이 별 것 아닌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불만이 지금 이 지경까지 정치를 끌고 온 것이다. 그런 불만을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들이 잘도 써먹은 것이다. 능력주의와 기술관료 정치의 실패를 바로 바라보는 일, 그것은 그런 불만을 제대로 접수하고 공동선의 정치를 다시이미지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단계다.